정성일과 캔 로치

영화 잡지 << 키노 >> 편집장'이었던 정성일은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 내용 > 보다는 < 형식과 스타일 > 이라고 생각하기에, 그가 쓴 평론은 내용 분석'보다는 쇼트 분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정성일 입장에서 보면 내용 중심 영화는 형식 중심 영화에 비해 글감을 뽑기 어렵다. 일반 관객은 홍상수, 봉준호, 데이빗 크로넨버그 그리고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기)가 어렵지만 평론가에게는 오히려 이런 영화가 글 쓰기 쉽다. 평론가는 내용이 형식이나 스타일을 압도하는 영화에 대한 비평을 쓸 때가 더 난처하다. < 디워 > 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겨 ? 생각해 보니, < 디워 > 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링크를 걸어둔다.( http://blog.aladin.co.kr/749915104/6349114 )
당신이 시네필'인가, 아닌가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라는 이름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냐에 달렸다. 아피타퐁, 아파퐁찻, 아치타퐁'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시네필 자격이 없다. 설령 아슬아슬하게 아피찻퐁 단계를 무사 통과했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 다음 단계인 위세라타쿤, 위세라쿤타, 위라타세쿤, 위쿤라세타 덫이 기다리고 있다. 내게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라는 이름이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라는 풀네임을 가진 멘델스존 이름보다 외우기 어렵다. 차라리 " 경찰청 쇠창살 외철창살, 검찰청 쇠창살 쌍철창살 " 이라고 말하는 게 더 쉽다. 왤케, 어려운겨 !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화장실에서 옛날 잡지'를 읽다가 우연히 정성일이 캔 로치 감독에 대해 짧게 언급한 부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잡지 씨네21'에게는 미안한 소리이지만 씨네21은 화장실에서 읽기 좋은 잡지'다. 좋은 의미로 말이다.
정성일: 이건 개인적인 느낌인데 나는 켄 로치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한 번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그냥 정치를 다룬다. 나는 영화가 정치를 다룰 때 촌스러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를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 때는 행복하다. 정치적인 영화는 힘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오즈가 <오차즈케의 맛>의 마지막 장면을 찍었을 때, 그것은 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롱테이크로 찍었을 두 부부의 식사 장면을 샷을 나눠서 한 명씩 잡았음) 전후 일본사회에서는 오즈에게 있어 숏을 쪼개는 그 결단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다. 전후 일본이 패전을 딛고 경제성장을 향해 나아갈 때 가족이 어떻게 쪼개지느냐, 개인화, 파편화 하느냐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다루진 않지만 샷을 쪼개는 것 그 자체가 오즈를 정치적으로 만든다.
정윤철: 영화가 정치를 다룰 때와 영화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은 다르다는 말인가.
정성일: 나는 후자를 지지하고 싶고, 후자가 항상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도 학생들에게 영화를 진행하며 해서는 안되는 결정적인 일이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함부로 죽이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영화는 쓰레기야, 네가 창조한 인물이라고 해서 함부로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면 너는 파산한 거야, 그런다. 그것이 아무리 미학적인 것이더라도. 나는 미학적인 결정보다 상위에 있는 결정은 윤리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윤리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은 도덕과는 다르다. 나는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면 미학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학은 별로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학에 매달릴수록 영화는 빈곤해지고 퇴폐적이 될뿐만 아니라 몰락한다. 미학의 절정에 도달한 순간 모든 예술은 타락을 경험했지 않았나.
이 글을 읽다가 " 개 꼬리 삼 년 두어도 황모黃毛 못 된다 " 는 속담이 생각났다. 여기서 황모는 붓을 만드는 데 쓰이는 족제비 털을 말한다. 쉽게 말해 천성은 고치기 힘들다는 소리'다. 정성일은 < 영화가 정치를 다루는 것 > 과 < 영화를 정치적인 것(으로 만드는...)> 은 다르다고 말한다. 전자는 촌스럽고 후자는 세련된 장치'다. 그에게 캔 로치 영화는 " 촌스러운 것 " 이다. 정윤철이 묻는다. " 영화가 정치를 다룰 때와 영화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은 다른다는 말인가요 ? " 그도 나와 같이 이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성일은 < 영화가 정치를 다루는 것 > 과 < 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 > 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넘어간다. 왜 ? 그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캔 로치는 정치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 영화라는 장르를 자유발언대'처럼 활용했다. 그는 노동 계급 사람들에게도 발언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성일은 " 미학은 별로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학에 매달릴수록 영화는 빈곤해지고 퇴폐적이 될뿐만 아니라 몰락한다. 미학의 절정에 도달한 순간 모든 예술은 타락 " 한다고 말했지만 이 표현은 완벽한 모순이다. 미학은 형식에서 나온다. 정성일은 내용보다는 형식(미학)에 높은 점수를 줬으면서 지금 와서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한다. 자기가 말하고도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른다. 캔 로치는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나는 내용이 스타일에 관한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본다. 그리고 내용이야말로 영화에 관련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은 반드시 핵심적인 경험 속에서 나온 핵심적인 생각을 중심으로 다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혀 중요치 않다..... 내가 위험하다고 느낀 것은 스타일이 카메라 앞에 있는 대상보다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 있는 대상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
캔 로치는 현대 영화가 형식과 스타일을 중시한 나머지 정작 카메라 앞에 있는 대상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움직이고 쇼트와 쇼트를 나눈다. 그 사이 " 대상 " 은 실종된다. 캔 로치야말로 미학은 별로 대단한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학에 매달릴수록 영화는 빈곤해지고 퇴폐적이 될뿐만 아니라 몰락한다(고 캔 로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캔 로치는 카메라를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영화가 촌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기교를 최대한 배제했기 때문이다. 형식을 보지 말고 노동자 얼굴을 보라는 메시지'다. 정성일이 켄 로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할 말이 없고 글감을 뽑아내기가 힘들다. 이럴 땐 모른 척하는 게 최선이다.
그런데 그는 캔 로치가 정치 영화를 만든다고 비판한다. 사실 그는 정치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들었는 데 말이다. 정성일 식 글빨과 말빨을 보면서 늘 느낀다. 쉬운 내용을 어렵게 만드는 건 쉽지만, 어려운 내용을 쉬운 문장으로 쓰는 건 어렵다. " 죄송합니다. 짧게 쓸 시간이 없어 길게 씁니다 ! " 파스칼이 지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란다. 정성일에게 필요한 것은 간단 명료'다.
덧대기
1. 고다르는 영화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감독이다. 그는 영화 소재로 " 정치 " 를 다루는 게 아니라, 카메라를 무기처럼 활용한 감독이다. 캔 로치도 마찬가지'다. 그는 카메라를 칼처럼 사용한다. 캔 로치와 장 뤽 고다르는 동일하면서 동시에 차이'가 난다. 그는 고다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내 생각에 1960년대에는 모두가 프랑스 누벨 바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그들로부터 영향받지 않고 어떤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화의 문법에 그토록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진정한 영향이기보다는 유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우리들은 아주 젊었고, 영화를 이용하는 방법에 있어 성숙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 영향이 미성숙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종류의 영향은 곧 서서히 사라져갔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관해서보다는 스타일에 대해 더 많이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스트들이 길게 보아 더욱 더 영향을 가질 것이라고 본다. 나는 비토리오 데 시카, 체코의 밀로스 포먼, 이리 멘첼 등을 더욱 좋아한다. 나는 결국 그들에게서 더욱 많은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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