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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문장 ㅣ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평점 :
무쇠도 갈닦으면 바늘이 된다 !
글쓰기 관련 책은 내용이 모두 고만고만하다. 일단, 저자는 글을 잘 쓰고 싶은 독자에게 용기를 주면서 말문을 연다. " 독자 여러분, 좋은 글은 재능이 아닌 훈련에 달렸답니다. 뿌잉뿌잉 ~ " 다음은 글쓰기 책에 대한 독자 반응 패턴이다. ① 독자는 괄약근 꽉 조이며 두 주먹 불끈 쥔다. ② 밑줄 그으며 읽는다. ③ 책을 덮는다. 우우, 이상한 일이다. ④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우심방 좌심실에서 잡초처럼 자란다 ! ⑤ 이런 기분이라면 메이저리그 도루왕 리키 핸더슨처럼 김훈과 장 그르니에의 미문을 훔치는 일은 시간 문제이리라. ⑥ 시험 삼아 서평 하나 작성해 볼까 ? 목줄을 풀자마자 사나운 손은 득달같이 모니터 앞으로 뛰어간다. " 하나, 둘, 셋.... 아,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아아. " 덕담을 곁들여 넉넉하게 별 다섯 개 넣어주리라 ! ⑦ 그런데 모니터 속 커서(cursor)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동력 없는 땟목처럼 전진할 줄 모른다. 여기까지가 낙담 - 용기 - 좌절'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어떻게 아냐고 ?! 묻지 마라, 눈물이 앞을 가린다.......
고종석 문장은 절밥 상차림'처럼 간소하다. 오신채( 번역투 문장 구조, 쓸데없는 겹말, 부적절한 조사 사용, 형용사, 부사, 접속사 과잉 )를 경계해 솎아내다 보니 문장이 독하지 않고 짜지 않다. 그런데 지나치게 자기 절제를 해서 개성이 약하다는 느낌도 든다. 기자 생활을 오래 하면서 글 속에 자기 색깔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한 탓이리라. 결국 개성 강한 문체'란 변칙의 결과'다. 문장 구조를 강조하면 화려한 수사가 죽고, 수사를 강조하면 구조가 허약해진다. 적절한 분배가 필요하다. 한국어를 정확하게 사용한다는 평을 듣는 고종석이 작년에 숭실대학교 진리관에서 한 글쓰기 강연'을 책으로 묶어서 내놓았다. < 고종석의 문장 > 은 정확한 문장을 쓰기 위한 길라잡이 책'이다. 절대 고수가 입말로 전해주니 귀에 착착 붙는다.
고종석도 글을 잘 쓰고 싶은 독자에게 용기를 심어 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 독자 여러분, 좋은 글은 재능이 아닌 훈련에 달렸답니다. 뿌잉뿌잉 ~ " 시작은 고만고만한 글쓰기 실용서와 다르지 않다.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이 책에서 말하는 문장 강화 훈련은 다른 글쓰기 교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종석이 말하는 정확한 문장 쓰기 요령은 다음과 같다. 출판사에서 요약한 내용을 옮긴다.
○ 접속부사를 빼면 문장에 힘이 생긴다.
○ ‘-적的’과 ‘의’는 뺄 수 있으면 빼는 게 좋다.
○ 복수 표현 ‘들’을 남용하지 마라.
○ ‘~ㅁ/음으로써’는 ‘~아/어’로 고치는 것이 좋다.
○ ‘~하는 이유는 ~ 때문이다’는 명백한 오문이다.
○ 단위를 나타내는 불완전명사는 뒤로 빼라.
○ 주어/목적어와 서술어 사이의 거리는 가까울수록 좋다.
이 책에서 정작 흥미로운 부분은 문장론'보다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언급이다. 전작인 < 말들의 풍경 > 과 < 감염된 언어 > 에서 자주 언급했던 내용이지만 다시 한 번 새겨들으니 통쾌한 맛이 있다. 고유어'만이 한글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언어 민족주의자'를 보고 있으면 까닭모를 거부감이 든다. 그들은 한자가 배제된 토박이말만으로 된 문장을 쓰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억지를 부린다. 고종석은 " 한자어는 명백한 한국어 " 라고 말한 후, ' 나는 한자어를 절대 안 쓰겠다 ' 라고 말하는 건 아주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한다. 단어를 고를 때 얌전한 결 무늬 단어'를 주로 사용하는 고종석 입에서 " 아주 바보 같은 짓 " 이라는 표현은 수위가 꽤 놓은 비난'이다. 내가 고종석이었다면 저잣거리 입말로 " 똥 싸고 자빠졌네 ! " 라고 큰소리쳤을 것이다.
한글 순혈주의'는 자칫 잘못하면 에고'에 빠질 위험이 있다. 한글은 한자어(중국제 한자어, 일본제 한자어)와 섞여서 오염되었다기보다는 한국어 어휘는 한자어와 섞여서 풍부해졌다. 언어는 순혈보다는 혼혈 과정에서 어휘가 풍부해지는 경향이 있다. 좋은 예가 영어'다.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글 순혈주의자가 보기에 영어는 오염된 언어'에 가깝다. 뿌리말에는 프랑스-라틴계 에서 비롯된 말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고종석은 " 게르만계 단어들에 대응하는 프랑스-라틴 계통의 유의어들이 영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 듯, 고유어에 대응하는 한자어 유의어들은 한국어를 풍부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솎아내야 할 찌꺼기가 아니라 품어 안아야 할 자산 (164쪽) " 이라고 말한다. < 섞다 > 와 < 썩다 > 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인간들은 새겨들어야 한다.
독일 역사에서 위험한 민족주의가 대두될 때마다 기승을 부린 것은 < 결실의 모임 > , < 성실한 잣나무 협회 > , < 독일 애호협회 > , < 페그네시아 꽃 모임 > , < 엘베강 백조 교단 > 같은 결속체'였는데, 이들은 모두 언어협회였다. 언어협회는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가 스며든 독일어를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어마저도 게르만 순수 혈통을 강조한 것이다. 북한이 언어 순화에 엄격한 이유도 민족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한글 순혈주의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자면 : 인간/人間 이라는 한자어 낱말 대신 사람'이라는 고유어로 대체해야 보기 좋은 문장이 된다. 그런데 < 사람 > 과 < 인간 > 은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동일한 늬앙스는 아니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문장을 그대로 끌어들이자면 < A문장 : 섞다와 썩다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인간들은 새겨들어야 한다 >와
< B문장 : 섞다와 썩다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새겨들어야 한다 > 는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약간 다르다. < 인간 > 이라는 낱말은 < 사람 > 이라는 낱말에 비해 보다 공격적이다. < 인간 > 과 < 인간들 > 도 뉘앙스가 각각 다르다. 인간은 집단성에 초점을 둔 반면 인간들은 개개인을 강조한 말이다. 그렇기에 지적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 그런 인간은 새겨들어야 한다 " 는 말보다는 " 그런 인간들은 새겨들어야 한다 " 가 보다 강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 값 > 과 < 가격 / 價格 > 은 비슷한 말이지만 똑같은 말은 아니다. 덩치값을 덩치가격'이라고 대체할 수는 없다. 언어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감염되는 운명을 가졌다. 유통되지 않는 언어는 사라진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 이링공 뎌링공 하야 나즈란 디내와손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또 엇디 호리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 라고 말할 수는 없다.
때가 되면 번성하다가 때가 되면 사라지는 것이 종(種)의 운명이듯, 옛말도 때 되면 번성하다가 때 되면 사라진다. 그게 순리'다. 절필을 선언했던 고종석이 이 책에서 자주 했던 말은 " 간결하게 써라 " 이다. 맞는 말이다. 군더더기는 솎아야 한다. 무쇠를 갈닦으면 바늘이 된다. 그 옛날 선인장 가시'는 잎이었다. 펜이 칼보다 강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