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정치적이다 !
우리는 일상 속에서 알게 모르게 정치적 행위에 동참하게 된다.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에 작성된 글에 대하여 " 좋아요 " 나 " 공감 " 을 클릭하는 행위도 정치적이며, 해경이 세월 호 승객 구조 현황을 설명하면서 지상 최대의 작전 운운할 때 " 개똥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 라고 소리치는 것도 정치적 행위'다. 그리고 육식을 버리고 채식을 선언하는 순간도 정치적 행위'에 포함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런데 " 공간'은 정치적이다 " 라는 말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이 정치적이라는 말에는 쉽게 동의할 수 있으나 무생물인 공간을 두고 정치적 결과'라는 말에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 공간은 정치적이다 " 라는 말은 르페브르'가 한 말이다. 르페브르 선생이 한 말을 들어보자.
공간은 정치적이다. 공간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와 무관한 과학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정치적이며 전략적이었다... ( 중략 ) 우리가 보기에 공간은 동질하게 보이고, 순수한 형태로 완전히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회적 산물이다. 공간의 생산은 특정 상품의 생산과 유사하다.
- 르페브르, 공간의 생산
르페브르가 보기에 < 공간 > 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공간이란 이윤 창출과 노동 착취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목 좋은 곳(중심부)에 집중적으로 자본을 투자하여 지대와 임대료를 높인 후 원래 그곳에서 살던 원주민을 가차없이 주변부로 내쫓는다. 전망 좋은 곳은 모두 자본가가 차지하게 된다. " 강남 " 과 " 강북 " 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원주민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 피난길에 오르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현대 대도시가 성장하면서 일부 지역, 특히 도심 지역에는 인위적 가치가 부여된다. 이 가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높아진다. 도심 지역에 들어선 건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토지의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떨어뜨린다. 주변환경이 변하면 어울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건물은 철거 되고 다른 건물이 세워진다. 도심 지역에 위치한 노동자 주택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아무리 인구가 과밀한 지역의 노동자 주택이라 해도 임대료는 일정한 최고한도를 넘어서 상승하지 못한다. 설령 상승한다 해도 그 속도는 매우 완만하다. 이제 이런 노동자 주택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점포, 상품창고, 공공건물이 들어산다.
놀랍게도 위 단락( 파란색 문장)은 엥겔스가 1872년에 쓴 < 주택 문제에 대하여 > 에서 지적한 내용'이다. 1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문제는 자본의 공간 약탈뿐만 아니라 정치 행정'에서도 중심에서 벗어난 변방은 차별 대우를 받는다는 데 있다. 강남구 국회의원 김종훈 의원 나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 저기, 저어기 어두컴컴한 " 비-강남은 개차판 대우를 받는다. 좋은 예가 cctv 설치'다. 5세 훈이'는 강남의 자랑스러운 아들답게 cctv를 부자 동네인 강남에 우선적으로 집중 설치했다. 표를 몰아준 강남 3구에 대한 보은 차원이었으리라. " 도둑놈이 부잣집 털지, 가난한 흥부집 터는 거 봤냐 ? " 라는 자세'라고 할까 ? 그런데 치안 사각지대는 부자 동네'보다는 가난한 동네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흥부가 사는 동네에 cctv를 집중 배치해야 되는 게 순리 아닐까 ?
방범 장치가 강남에 집중되다 보니 강도들은 상대적으로 cctv가 설치되지 않은 강북으로 이동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유영철이었다. 유영철은 강남에 비해 치안과 방범이 부실한 강북을 작업실로 선정한 것이다. 공간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후, 서울시에서 부랴부랴 강북에 cctv를 대대적으로 설치하자 쥐새끼 같은 범죄자들은 다시 cctv가 없는 곳으로 옮겼다. 어디로 갔을까 ? 서울 외각 지역'이다. 강호순은 이곳에 터를 잡고서 더러운 욕망을 채웠다. 결국은 자본이 집중적으로 투입된 공간의 치안 때문에 변두리는 점점 치안의 사각지대가 되어 버렸다. 이들에 의한 희생자는 대부분 가난한 이들이었다. 이 얼마나 정치적인가 !
데이비드 하비는 < 반란의 도시 >에서 " 르페브르의 구상(도시권) " 을 확장하고자 한다. " 나는 르페브르의 결론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그의 결론을 한층 더 선명하게 부각하고자 한다. ( 16쪽 )) " 하비는 모든 도시 구성원들은 계급과 상관없이 도시에 대한 권리, 즉 " 도시권 " 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노동권이 노동자의 권리라면 도시권은 도시 노동자의 권리로써 " 도시인의 행복추구권 " 이다. 이 책에서 하비는 자본이 원주민을 내쫓고 공간을 약탈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파리 코뮨, 1942년 뉴욕에서 시작된 미국 대도시 재편성 프로젝트,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통해 자본의 도시화'를 폭로한다. 이 목록에는 악명 높은 서울의 재개발도 포함된다.
하비는 말한다 : " 1980~90년대 서울에서도 건설회사와 토지개발업자가 험상궂은 용역깡패를 동원해 달동네 주택을 대형 해머로 때려 부수고 주민을 몰아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50년대부터 가난한 사람이 거주하던 고지대 토지가 1990년대에 이르로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 51쪽 ) " 하비는 이러한 도시화에 대해 회의적이다. " 극적인 도시화는 인간의 행복에 기여했는가 ? ( 27쪽 ) " 그는 도시화가 " 도시노동자를 아노미와 소외, 분노와 좌절이 만연한 세상 " 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태도는 < 도시권 > 이 기본적으로 < 행복추구권 > 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란 사실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10년 전 행동 과학자, 신경학자, 심리학자(프린스턴대학의 한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하여)이 모여 행복의 지수를 측정하고 행복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실험을 진행했다. ( 중략 ) 그렇다면 이 실험 결과는 어땠을까 ?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모든 사람이 섹스를 통해 더 큰 행복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다음으로는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동료나 친구와 한잔 걸치는 것이 큰 점수를 얻었다. ( 중략 )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정적인 일터에서 즐겁게 일하고 동료들과 한잔 걸친 후 집에 가서 섹스를 하는 것 ! 행복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
-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리처드 스코시
<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 라는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 행복의 조건 > 중 "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 이라는 단서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험대상자 인터뷰에 의하면 출퇴근 왕복 2시간 이상이 걸리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단다. 자동차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서도 이 지경이라면 지옥철이라는 대중 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한국인은 어떨까 ? 부동산 개발과 약탈의 경제에 의해 도시에서 변두리로 쫓겨난 도시 노동자가 느끼는 행복 지수는 얼마나 될까 ? 재개발 사업은 필연적으로 도심과 함께 inner city ( 황폐화한 도심 빈곤 지대 ) 를 양산한다. 한국에서는 가난한 사람일수록 출퇴근 시간이 오래 걸린다. 치솟는 집값 때문에 가난한 도시 노동자는 점점 도심 외각 변두리'로 옮긴다. 그만큼 출퇴근 시간은 길어진다. 전설적인 노동 시간에 더해져서 전설적인 출퇴근 시간을 더하면 가난한 도시 노동자에게 대한민국은 지옥이나 다름 없다.
< 반란의 도시 > 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미했다는 점이다. 이 책 마지막 장인 7장 제목이 "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 인데, 이 장은 다른 장에서와는 달리 어조가 사뭇 격정적이다. 월가 시위에 " 필 " 받아서 선동적으로 쓴 글 같다. 르페르브의 구상'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려는 시도가 느닷없이 삼일 독립 선언문 낭독 같은 비장한 느낌을 준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공장 노동자 중심인 투쟁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도시 노동자로 그 범위를 확대해서 자본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 라는 데 그 누가 돌을 던질까마는, 급히 매조지해서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됐고 ! 하여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자 ! 그 길밖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