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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
제임스 길리건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체면은 사람을 죽인다.
강신주는 < 노숙자는 수치심이 없다 > 고 말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전체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부분적 발췌만 놓고 비난한다며 그를 옹호한 이도 있었지만 내가 보기엔 전체적 맥락을 고려한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수치심이 없다는 말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소리이고, 이 말은 곧 뻔뻔하다는 말이다. 뻔뻔하다는 말은 무슨 소리인가 ? 낯짝이 두껍다는 소리 아닌가. 낯짝이 두껍고, 체면도 모르고, 염치없이 굴고, 염통머리없는 마음이 바로 수치심을 모를 때 발생하게 되는 현상이다. 이처럼 수치심과 관련된 말들을 종합하면 신체 부위 가운데 얼굴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심장이 아니라 얼굴이다 ! 인간에게는 고개 뻣뻣이 들고 다닐 < 쪽 > 이 필요하다고 강신주는 말한다. 강신주는 자본주의를 공격하면서 좌파 코스프레를 하지만 사실 그는 우파'에 충실한 사람이다.
실반 톰킨스'는 < 수치심 > 은 " 우파 정치의 가치관과 이념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정서이며 죄의식은 좌파 정치응 움직이는 핵심 정서 " 라고 말했다. 결국 강신주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때깔은 진보당보다는 새누리당에 가깝다. 그런 그가 반자본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웃긴 일이다. 그는 자신이 생산하는 " 문화상품권 " 을 팔기 위해 자본주의를 " 미끼 상품 " 으로 내놓는다. " 자본 " 을 가지지 못한 대중(비-자본)은 강신주가 한 말(반-자본) 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는 장사 수완이 좋은 사람이다. 강신주는 자본주의 문화 상품권을 반자본 상품처럼 판다. 능력 있는 새일즈맨이 알래스카에 가서 냉장고를 파는 꼴이다. 강신주가 냉장고를 버려라, 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실천하는 이도 아무도 없다. 냉장고는 단순한 인문학적 제스츄어'이며 전체적 맥락을 설명하기 위한 상징적 오브제에 불과하니깐 말이다.
공감은 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대중을 편안하게 만든다. 피로도'를 줄여준다는 말이다. 그는 냉장고를 버려라, 라고 농담처럼 말을 하지만 정작 이웃 구멍가게는 외면한 채 기업형 대형마트 가서 물건을 대량 구매하는 짓은 뻔뻔한 짓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군'말은 사람을 웃게 만들지만 참말'은 늘 고객을 불편하게 만드니깐 말이다. 제임스 길리건의 <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은 강신주의 수치심'이 왜 우파 이데올로기인가를 설명한다. 미국인인 저자는 공화당과 민주당을 설명하면서 공화당은 살인율과 자살률을 높이고 민주당은 살인율과 자살률을 낮춘다고 설명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100년 간의 통계'다. < 통계 데이터 > 가 자신이 주장하는 입장에 유리한 쪽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이 책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살인율과 자살률을 높이는 주요 요인은 실직에 따른 수치심이라고 주장한다. 쉽게 가자 ! 굳이 미국 사회를 예로 들 필요도 없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고스란히 새누리당과 민주당으로 오버랩된다. 놀랄 만큼 닮았다. 한국 사회를 보자. 우파는 보편적 복지 혜택을 선심성 포퓰리즘'이라며 반대한다. 무상 급식 논란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듯이 복지를 주장하는 것을 쪽팔린 짓으로 격하한다. 그 당시 신문 사설 논조는 하나같이 내 자식 점심만큼은 내 돈으로 먹이겠다는 메시지였다. 돌려서 말하면 복지를 주장하는 좌파를 거지 근성으로 설정한 후 부끄러운 줄 알라고 조롱한 말이다. 우파 언론이 쏟아낸 메시지는 아버지로써의 자존심(명예)를 지키라는 말이다. 그들이 보기에 좌파 진영은 수치심을 모르는 족속'이다. 이러한 태도는 강신주가 노숙자를 수치심도 모르는 부류라고 생각하는 것과 맥락이 같다.
노숙자는 수치심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영토가 없는 존재'다. 집도 없고 곁을 지킬 사람도 없다는 측면에서 노숙자는 기댈 수 있는 곁을 상실한 존재'이다. 강신주는 잃어버린 수치심을 찾아주는 것이야말로 갱생을 돕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말은 뻔뻔하다. 처음부터 그들은 수치심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다만 영토와 곁을 잃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수치가 아니라 곁'이다. " 체면이 사람 죽인다 " 라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맞는 말이다. 사람은 수치심을 느낄 때 폭력적으로 변한다. 실직이 오래 지속되면 사람의 얼굴을 갉아먹는다. 노숙자는 염통을 갉아먹어 얌통머리가 없거나 염치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얼굴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사람이다. 어떤 이는 노숙자가 수치심을 모르기 때문에 자살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자면 정말 그럴까 ?
노숙자는 수치심을 몰라서(뻔뻔해서) 자살을 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죽음에 대해 사회가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다. 그들의 죽음은 대부분 행불 처리된다. 당신은 죽으면 인식표에 이름이 적히지만 노숙자는 죽으면 번호로 남는다. 철저한 외면이다. 그렇기에 자살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체면은 사람을 죽인다.
덧대기
수치심이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소양'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수치심이 지나치면 위험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살인과 자살 중 상당 부분은 과도한 수치심 때문에 벌어진다. 가문의 수치'라는 이유로 간통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이슬람 형법 또한 수치심이 원인이며, 결투를 신청해서 칼싸움을 하는 햄릿도 수치심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을 모욕했다고 해서 우발적으로 혹은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살인도 지나친 수치심이 원인이다. 수치심이 지나치면 명예에 집착하게 되고, 사소한 수치심'에도 폭력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