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 초상화에 대한 정의를 내리자면 : 표정이란 22개의 얼굴 근육 가운데 한 가지 근육 이상을 사용한 결과'다. 그렇다면 초상화는 얼굴 근육을 사용하지 않은 얼굴을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웃거나 우는 표정은 캐리캐처가 될 수는 있으나 초상화가 될 수는 없으니깐 말이다. 그렇다면 초상화 속 인물들은 대부분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무표정'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력 있는 화가가 그린 초상화에는 성격이 보인다. 좋은 초상화는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그린다. 이 초상화는 얼굴 근육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무표정하지만 그 어느 표정보다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은 수많은 표정을 만들 수 있으나 역설적으로 유일하게 만들어내지 못하는 표정이 바로 무표정이다. 무표정은 신의 영역이다.
구효서'가 < 깡통 따개가 없는 마을 > 에서 이런 소리를 한 적이 있다. " 소설 쓰기'란 하찮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이거나, 진지한 것을 하찮게 생각하기'이거나.... "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무릎 탁, 치며 아, 하며 하, 하하하. 구효서의 생각'이 맞다면 소설가는 승려요, 소설 쓰기'는 수행修行'이다. 왜냐하면 승려의 수행은 쓸모없는 것을 쓸모 있다고 하고, 쓸모 있는 것은 쓸모없다는 하기 때문이다. 둘 다 사물에 대한 자세가 비슷하다는 말이다. 무소유'란 속세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쓸모없게 여기는 반면에 하찮은 것은 귀하게 여긴다. 법정 스님이 보기에는 귀한 난초 화분은 근심을 낳는 애물단지에 불과하다. 속세에서는 그 난초가 귀하지만 스님에게는 쓸모없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철 스님이 다 버리고 버려서 남긴 거적 장삼 하나'는 속세'에서 보면 헌옷이지만 승려 입장에서 보면 황금으로 만든 옷보다 화려하다. 마찬가지로 승려들이 부엌 하수구에 물을 버릴 때 식혀서 버리는 이유는 하수구에 사는 벌레들이 뜨거운 물에 화를 입지 말라는 근심에서 비롯된 마음가짐인데,
그것은 쓸모없는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자세'다. 하찮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소설 쓰기라면, 구효서의 말이 맞다면, 글쓰기'란 결국 자기 치유, 즉 구도의 길'이다. 오, 오오 ! 하지만 감탄사는 여기까지. (됐고!) 현실은 시궁창이어서 그러한 진지한 자세로 펜을 쥐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궁금하다. 등단이라는 제도를 이용해서 끼리끼리 다 해먹는다. 대학에서는 문예창작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문예지나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동시에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여기에 시인'으로도 발을 살짝 들이밀면 혼자서 다해 먹는 꼴이다.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 권력이 한 놈에게 쏠리면 줄과 갈래가 생긴다. 줄서기와 파벌이 조성된다는 말이다. 가끔 그들이 시인이랍시고, 문학평론가랍시고 꼴사납게 설치는 꼴을 보면 헛구역질이 난다. 그래, 세상을 다 가져라 ! 그들은 글쓰기를 통해서 권력을 나눌 뿐이다. 사랑을 나누면 성인이 되지만 권력을 나누면 이익 집단'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 결핍 > 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동안 우리는 "결핍"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식했다.구루병은 비타민 D 결핍이 원인이며, 철면피는 애정 결핍이 원인이다. 이처럼 모든 병은 ○○의 결핍에 따른 결과'다. 하지만 결핍'을 다른 식으로 접근하면 꽤 근사한 놈이다. 부처와 예수는 결핍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발견한 성인이다. 생선 한 마리가 한 사람의 허기를 채울 수는 없지만 그것을 열 사람에게 나누는 순간 풍요가 된다. " 오병이어의 기적 " 은 결핍이 어떻게 풍요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결핍은 욕망을 낳는다. 그리고 이 욕망은 다양한 표현과 표정을 낳는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욕망을 재현하는 장치이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서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결국 예술이란 결핍이 낳은 자식'이다. 표정도 마찬가지'다. 욕망은 다양한 얼굴 표정을 만든다.
아, 하거나 어, 하거나 오, 하거나 우, 하거나 오, 할 때마다 얼굴은 아, 어, 오, 우 하는 표정을 짓고, 표정이 보다 풍부하거나 과장이 심한 사람은 아아, 어어, 오오, 우우 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다양한 표정을 만들 수 있다. 신체 기관 중 가장 많은 종류의 근육이 몰려 있는 곳이 바로 얼굴이다. 근육 종류가 22개나 된다. 눈썹을 올리는 근육이 있는가 하면, 눈썹을 내리는 데에만 사용되는 근육도 있다. 우리가 흔히 " 무표정 " 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무표정은 인간이 유일하게 흉내 낼 수 없는 표정'이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얼굴에 담는다. 예를 들어 어떤 소설에서 주인공이 " 개를 살해하는 장면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 라고 했을 때, 그 주인공의 무표정은 그가 가지고 있는 속내가 얼마나 끔찍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무표정하기 때문에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관상은 얼굴을 본다기보다는 성질을 읽는다. 영화 < 관상 > 에서 송강호는 표정 없는 타인의 얼굴에서 성질을 끄집어내어 마음을 읽는다. 마음이란 욕망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낳은 아버지가 바로 결핍이다. 송강호는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읽는 능력이 탁월한 관상가'다. 그가 수양대군의 얼굴에서 읽은 것은 탐욕이 아니라 사랑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과잉이 아니라 결핍을 읽었다는 점이다. 탐욕은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을 뜻하니 과잉'이다. 그래서 그는 수양대군의 얼굴에서 탐욕을 읽지는 못한다. 다만 사랑의 결핍을 본다. 인간은 얼굴에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왜냐하면 결핍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표정한 척 연기를 하지만 그것 또한 " 무표정한 척하기 위한 " 정교한 표정일 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인간은 다양한 감정을 표정으로 연출할 수 있지만 무표정을 연기할 수 없다. 무표정은 오직 신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조선시대 관상쟁이'였던 송강호가 이명박의 얼굴을 보았다면 어떤 평을 내렸을까 ?
이런 촌평을 내리지 않았을까 싶다 : " 얼굴을 딱, 보니 그 사람 참... 부지런한 사람이오. 범의 눈에 뱀의 혀를 가지고 있으니, 거참... 조합이 오묘하구려. 욕심이 많아 재물이 모일 상'이고, 머리도 좋고 꾀도 많아 사업에 손을 대면 성공할 팔자요, 가만 보자.... 물 장사 하면 높은 관직을 얻을 상이로다. 허허. 그런데 말이우 ! 가장 중요한 게 하나 없구려. 사랑이오, 사랑 ! 사랑이 없다는 건 목적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다는 소리요. 다 좋소만 이런 양반은 장사를 해야지 정치를 하면 크게 엿먹일 놈이오. 그 옛날, 이와 비슷한 이가 있었지. 피도 눈물도 없던.... 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다, 옛일이오. 하여튼 이 사람이 정치판에 뛰어든다고 하면 말리시구려. 장사꾼이 정치를 하면 나라를 망하는 법. 그나저나 이 나라 대통령은 누구요 ? 내 먼 과거에서 와서 눈이 어둡다오. 뭐?! 이 여자란 말이오 ? 아이구야, 첩첩산중이구려. 똥 피하려다가 번개 맞는 꼴이니.....
본문과는 전혀 상관 없는 말 : 한국어 교육, 이대로 좋은가 !
자기 새끼는 남들과 다른 법이다. 집에서 키우는 개(레드리버, 3살)에게 말을 가르치기로 다짐을 한 이유는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집이 인왕산과 가까워서 곤충들이 자주 집에 들어오는데 어느 날 벽에 거대한 거미가 붙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거미가 아니었다. 다리가 굵은 것으로 보아 타란큘라 같았는데 누가 애완용으로 키웠는데 도망친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런저런 생각할 여유도 없이 벽에 거대한 거미를 보며 오금이 저려서 낮게 소리쳤다. " 버, 버버버벌레'다 ! " 이때 쩍쩍이'가 아무 생각없이 벽에 붙어 있던 거미를 덥썩 물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말릴 틈도 없었다. 결과는 뻔했다. 개는 독에 쏘였는지 화들짝 놀라서 물던 입을 벌리고는 뒤로 발랑 넘어졌다. 거미는 살아 있었다. 복수라도 하려는 것일까 ?
쩍쩍이 목덜미를 잡고 있는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시바, 집에서 키우는 개 때문에 주인이 죽게 생겼구나 ! 바로 그때 개는 주인 손을 뿌리치고는 냅다 달려들어서 거미를 입에 물고 난동을 부리다가 삼켰다. 주인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기특한가. 온갖 설레발로 칭찬을 했으니 개는 그날을 잊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때 이후로 개는 < 벌레 > 라는 단어를 알아듣기 시작했다. 잠을 자다가도 내가 " 벌레 어디있어 ? " 라고 말하면 벌떡 일어나 벽쪽으로 다가가 훑는다. 털이 곤두선 채 말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 자두 어디있어 ? " 라는 말도 했지만 오직 " 벌레 " 라는 단어에만 반응한다. 두 번째 단어는 < 쥐 > 였다. 개가 현관문을 기가 막히게 여는데 어느날 열린 현관문 틈으로 쥐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새벽에 커피를 마시기 위해 거실 불을 켜는 순간 쥐가 냉장고 뒤로 숨는 바람에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 쥐, 쥐쥐쥐다 ! " 라고 외쳤더니 개가 난입해서 쥐를 잡겠다고 설치고 다녔다. 그때부터 개는 < 벌레 >와 < 개 > 라는 단어를 알아들었다. 벌레'라고 외치면 고개를 쳐들어 벽을 쳐다보고, 쥐라고 외치면 고개를 숙이고는 냉장고 뒤, 화장실, 침대 아래를 샅샅이 뒤진다. 이런 식이라면 쩍쩍이'는 사람 말을 알아듣는, 말귀가 트인 개'로 성장해서 조만간 " 동물농장 " 에 출연할 날도 오리라. 요즘은 < 지네 > 라는 말을 알아듣는다. 마당에서 커다란 지네를 발견해서 놀라서 소리쳤더니 개는 홍반장처럼 홀연히 나타나서는 지네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그때에도 나는 개에게 과도한 칭찬을 쏟아부었다. 문제는 며칠 후'였다. 동네 후배가 책을 빌리려 집에 왔길래 내가 " 자네, 왔는가 ! 어서 오게... " 했더니,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개는 " 자네 " 라고 불리는 사내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개가 < 지네 > 와 < 자네 > 를 혼동한 까닭이다. 생각해 보니 작년 여름에 발에 쥐가 나서 쥐, 쥐 했더니 내 발을 보며 으르렁거렸던 일이 불현듯 생각났다. 시바, 오늘 병문안 갔다 오는 길이다. 개는 개답게 키우기로 했다. 개에게 무슨 한국어 학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