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時에 벨이 울릴 때.....
3시'에 대하여
스티븐 킹 소설 < 셀, cell >은 내용이 좀 황당하다. 스티븐 킹 소설 대부분이 황당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좀 더, 좀 더, 좀 더 황당하다는 말이다. 때는 바야흐로 " 동부 표준시로 10월 1일 오후 3시 3분 " 을 지나던 한가한 오후가 배경이다. 나는 스티븐 킹이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난 시점을 " 오후 3시 3분 " 으로 설정한 의도 앞에서 무릎을 탁, 치며 아, 했다. 물론 아, 하며 무릎 탁, 칠 수도 있었지만 무릎 탁, 치며 아, 하는 것이 킹에 대한 예찬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절묘한 한 수라는 생각을 하자 < 아 > 라는 감탄사는 점점 길어져서 아,아아아아 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 3시 > 는 매우 독특한 위치에 놓여 있다. 사르트르는 소설 [ 구토 ] 에서 주인공 로캉탱의 생각을 빌려 오후 3시를 " 무엇을 하기에는 이르거나 혹은 늦은 시간 " 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3시에 밥을 먹는다면 그것은 늦은 점심일까, 아니면 이른 저녁일까 ? 먹는 일 대신 누군가와 약속을 정한다고 해도 애매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점심 약속인가, 저녁 약속인가 ? 혹은 늦은 점심 약속인가, 이른 저녁 약속인가 ? 이처럼 < 3시 > 는 즐겁게 춤을 추다가 " 그대로 멈춰 " 야 하는 시간'이다. 일시 정지'다. 그래서 나른한 오후 3시다. 영화 [ 아비정전 ] 에서도 오후 3시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아비(장국영)는 매점 아가씨(장만옥)에게 무작정 자기와 함께 1분 간만 시간을 들여다보자고 제안한다. 매점에는 손님이라고는 아비 말고는 아무도 없어서 조용하고 한가하다.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함께 시계를 들여다본다. 초침은 오후 2시59분에서 시작해 3시 정각을 향해 돈다. 장국영과 장만옥이 함께 한 1분'이다.
킹은 곧 벌어질 아수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나른한 오후 3시에 타이머를 맞춘다. 마치 그 사실을 강조라도 하듯이 " 오후 3시 3분 " 에 맞추고는, 이 한가하고 조용했던 오후가 어떻게 무시무시한 아비규환이 되어가는가를 보여준다. 마치 액션 영화에서 자동차가 폭발하기 바로 전에 사운드가 묵음으로 처리된 슬로우모션을 선보이는 효과처럼 말이다. " 킹 선생, 알고 보면 꽤 꼼꼼한 양반이다. " 소설은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갑자기 좀비로 변해버린 보스턴 거리 풍경을 보여준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오후 3시 3분에 핸드폰 통화를 한 사람들은 악성 전파 바이러스에 의해 갑자기 좀비'로 변했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이번에는 아, 하며 무릎을 탁, 쳤다. 왜냐하면 무릎을 탁, 치고 아, 하면 반복이 되니깐 말이다. 스티븐 킹이 이 소설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 이 징그러운 휴대폰 새끼들아 ! > 가 아닐까 ?
누군가는 cell(휴대폰)에 의해 좀비 바이러스 전파가 퍼진다는 내용이 너무 현실성이 없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현대인은 이미 셀이 없으면 죽고 못 사는 좀비 같은 노예'가 되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아침 출근길 전철 속 풍경은 기묘할 정도로 획일적이다. 그들은 모두 졸린 눈으로 셀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나는 킹이 내뱉은 조롱에 동의한다. 내가 보기엔 셀'은 인간에게서 예술적 감각을 분리한 후 삭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셀에 장착된 카메라'는 인간의 예술적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주범'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제대로 재현하고픈 욕망을 가진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맛있게 먹은 음식에 대해 전달하고 싶을 때 표현하는 수단은 언어'다.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 말 > 이다. " 내가 그 식당에서 냉면 국물을 마셨는데, 맛이... 끝내줘요 ! " 여기에 표정을 섞으면 금상첨화'이고 몸짓까지 더해진다면 완벽해진다. 사람들은 의사 전달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 말 > 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 표정 > 과 < 몸짓 > 이 생략된 말은 그닥 와닿지 않는다(송강호는 " 표현의 쓰리 콤보 " 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준 배우다. 영화 [ 변호인 ] 에서 그가 " 대한민국은 국민입니다 !!! " 라고 말했을 때, 관객이 격하게 끌렸던 이유는 대사가 아니라 송강호의 얼굴과 몸짓이 만들어낸 예술적 아우라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 말 > 대신 < 글 > 로 냉면 국물 맛을 표현하기도 한다. " 한여름에 먹는 평양냉면 국물 맛은 그 옛날 한겨울에 먹던, 살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 맛처럼 깊고 풍부하다 ! "
그런데 셀'에 저장된 500만 화소 카메라'는 이 모든 재현의 감각과 욕망을 지운다. 방법은 간단하다. " 먹기 전에 찍는다 ! " 그리고는 " 찍은 후에 (sns에) 올린다 ! " 물론 < 글 > 과 < 표정 > 도 첨가한다. " 맛있었다 ! " 라는 문장과 " ^^ " 이라는 표정과 함께 말이다. 느낌을 공유하려는 노력은 이처럼 단순하게 처리된다. 사진 전송과 이모티콘으로 재현된 감각은 expression이 아니라 단순히 input과 output' 기능이다. 이처럼 셀에 장착된 카메라'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감각에 대한 재현의 욕망을 거세'한다. 복장 도착자에 가까웠던 플로베르 식 시각적 쾌락은 개나 줘야 한다. 왜냐하면 플로베르가 복식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서 3,4페이지에 걸쳐 옷 주름을 설명하던 방식은 이제 간단하게 < 셔터-질 > 한 방이면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청바지 리바이스 501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말과 글이 아닌 한 방'이 필요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현대인들은 점점 예술적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달달한 연예 소설보다는 포르노를 보고, 시를 읽지 못한다. 재현의 감각'을 잃어버렸기에 소설가나 시인이 재현한 감각을 해석하는 능력도 떨어지게 된다. 킹이 < 셀 > 을 진절머리나는 주범으로 묘사한 까닭이다. 이 소설은 지구 종말을 다루면서 동시에 예술적 아우라의 종말을 걱정하는 근심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근사한 곳이다 싶으면 무조건 셔터를 누른다. 카페에서 한 컷 !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나와도 무조건 셔터를 누른다. 감각은 무디어지고 감성만 난무한다. 아름다운 것은 지천에 깔렸으나 실제로 아름다운 것은 전무하다. 당신이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찍은 기표는 스테이크'이지만 기의는 여유로운 행복'일 것이다.
쉽게 말해서 당신이 스테이크 사진을 올리며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스테이크가 아니라 < 지금 나는 행복하다 > 는 증명'이다. 중요한 것은 증명이 아니다. 당신은 죄인이 아니므로 알리바이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당신이 빕스 가서 스테이크를 썰었다는 것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이 한 말에 대해 의심하지도 않는다. 스테이크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표라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당신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기의'를 내포하게 된다. 당신의 행복을 증명하기 위해서 전송한 그 수많은 " 블로그용 해피 증명사진들 " 이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신의 행복은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드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