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마을 : 볼거리와 볼 권리.

- 안양에 살 때, 담벼락 대신 내 방에다 그림을 그렸다
봄이 오면 짙은 베이지색 바바리코트를 하나 장만할 생각이다. 좋은 구두도 하나 구매할 생각이다. 그리고 질 좋은 검은색 양말도 함께. 나머지는 필요 없다. 몸을 달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다이어트를 해야 겠다. 당신에게 내 뒷모습 말고, < 앞 > 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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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동네는 벽화 마을'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사는 집은 벽화 마을 초입에 있다. 그래서 날씨 좋은 주말이면 카메라를 가진 방문객들로 제법 분주하다. 정확한 기억은 알 수 없으나 내가 전국을 떠돌며 찰스 부코스키 흉내를 내며 술을 퍼마시고 있을 때, 윗동네는 어느새 꽃동네가 되어 있었다. 이곳저곳 떠돌다가 돌아온 나는 깜짝 놀랐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마을 담벼락이 온통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구멍가게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생활 미술 운동 차원에서 몇몇 단체가 와서 며칠 동안 담벼락에 후다닥 그림을 그리고 갔단다. 가파른 기슭에 위치한 달동네는 그 흔한 벽화마을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서히 입소문을 타고 주말이면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마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이 " 색깔있는 마을의 색다른 풍경 " 이 주민세를 내는 이웃 마을 주민의 한 사람으로써 모욕을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의도는 충분히 이해한다 : ' 변두리 캄캄한 마을에 희망을 주고자 생활 미술 차원에서 예쁜 그림을 선물로 주신 것, 혹은 그런 착각 ! ' 벽화마을'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 미화 " 와 " 정화 " 의 경계선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공공 미술 프로젝트'는 < 마을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미화 사업인가 > 아니면 <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청소하기 위한 정화 산업인가 > 에 대한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소리이다. 보기 좋게 만들 목적'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비슷하지만 보는 관점은 전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 정화 > 는 깨끗한 환경을 꾸미는 것에 가깝고 < 미화 > 는 지지분한 것을 감추는 속내에 가깝다.

- 뱅크시는 주변 환경을 고려한다. 벽 모퉁이에 그려진 종이학은 수로에 담긴 물에 투영되면서 예술적 아우라를 획득한다. 주변 환경과 따로 노는 벽화마을 그림과는 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사회 봉사 활동 차원에서 떼거지처럼 우르르 몰려와서 며칠 간 쓱쓱 담벼락에 낙서를 하고 가는 공공 프로젝트는 아무래도 후자 쪽에 가깝지 싶다. 주변 환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바라기 그림 달랑 하나 그리고 나서 그것을 두고 미적 가치'라고 한다면, 차라리 내 뜨거운 오줌발로 거리 눈을 녹여서 만든 코끼리 비슷한 것'이 추상적 측면에서 보다 미학적'이라고 설레발을 치고 싶다. 그건 그림이 아니라 똥칠이다. 그들이 내 마을에 분탕질한 결과물을 볼 때마다 울화'가 치밀고는 한다. 도대체, 그들은 마을 사람들의 동의도 없이, 무슨 권한으로 담벼락에 그림을 그렸을까 ? (물론 그림을 그릴 담벼락 주인에게는 허락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을 전체를 벽화 마을이라는 컨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마을 사람들 전체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닝기미, 결국 그들은 내가 사는 마을을 < 깨진 유리창 이론 > 에 적합한 을씨년스러운 마을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 깨친 창문 이론 > 이란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창궐한다는 " 사회무질서에 관한 이론 " 이다. 쉽게 말해서 빈집이 생기면 불량 청소년들이 모여서 우범 지역이 된다는 이론'이다. 그래서 깨진 창문을 치우고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파스텔톤 색으로 마을을 리모델링해서 가난한 이웃에게 꿈과 희망을 주겠다는 야심찬 민중 미술 운동'이다(혹은 그런 의도에서 출발하였다). 어느 순간 마을 주민들은 모두 꾀죄죄한 빈민이 되었다. 설령 그 의도'가 좋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내가 보기엔 알록달록한 벽화마을은 아름답기는커녕 더 누추해졌다. 마치 비루 오른 강아지에게 색동저고리 입힌 꼴이었다.
그들은 붓으로 꼴사나운 짓을 했다. 연말이면 초코파이 상자 박스 던져주고는 인증샷만 찍고 가는 관료들과 다를 바 없었다. 며칠 동안 우르르 몰려와서 담벼락에 색을 칠하는 행위는 전형적인 전시 행정처럼 보였을 뿐만 아니라 色을 동원한다는 측면에서 색다른 전시 행정'으로 보였다. 담벼락에 피카츄 캐릭터 하나 달랑 그린다고 해서 뽄드 불던 아이들이 동심을 찾을 리는 없다. 동네 주민들이 오랜 시간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벽화 마을과 전시 행정을 위해 동원된 벽화 마을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쓰고 남은 조각 짜투리로 퀼트를 만드는 것과 퀼트를 만들기 위해서 멀쩡한 천을 가위질해서 조각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 우르르 몰려와서 마을 사람들 동의도 없이 그린 벽화는 마치 멀쩡한 천을 잘라서 만든 엉성한 퀼트 작품 같았다.
그리고 그 인위적인 페인트 칠'이 뭐 그리 아름답다고 카메라 셔터를 남발하는 방문객을 볼 때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적 감각에 대해 의문점이 든다. 당신의 볼 권리를 위해서 볼거리로 전락한 초라한 내 마을 주민이 안쓰러워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 눈물에 웃으면서 코 파지 마라. 그들은 담벼락에 그린 < 그림 > 을 찍고 싶은 것이 아니라 < 가난 > 을 찍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 담벼락이 알록달록하다고 해서 마을이 아름다워지지는 않는다. 좋은 퀄트 가방은 얼마나 많은 천 조각을 누비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각 천끼리의 조화와 균형에 달려 있다. 아름다운 마을은 담벼락이 아니라 골목길에 있다. 골목은 집과 집을 누빈다는 측면에서 조각 천과 조각 천을 누비는 퀼트의 누빔과 비슷하다. 조화를 이루어야 마을이 아름다워진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사는 달동네가 벽화 마을로 개과천선한 후 달라진 것이라고는 희망 대신 구경거리로 전락한 초라함과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구경꾼이 전부였다. 대문을 나서면 마주쳐야 하는 방문객들의 시선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뒤돌아서는 순간 셔터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아름다운 뒷통수과 국화 무늬라고 거짓말을 한 얼갈이배추 무늬를 숨긴 엉덩이는 블로그에 유통될 것이다. 친절한 사진 설명과 함께 말이다 : '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사람들 ' 이 정도면 볼 권리를 위해 희생당해야 하는 볼거리에 대한 문제 제기를 떠나서 인권에 대해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내 뒤통수를 보고 "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풍경 이미지 "를 떠올렸다면 할 말은 없다만 당신의 싸구려 블로그에 인용되기에는 내 뒤통수는 지나치게 아름답다는 사실은 알아주었으면 싶다.
구경하는 것까지 뭐라 할 수 없지만 제말 지나친 " 셔터-질 " 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성질나면 당신이 원하는 볼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제공할 의사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베이지색 바바리코트 하나를 사기로 결심했다. 좋아, 기대된다. 올봄, 당신들에게 근사한 하드 바디가 무엇인지 바바리코트를 열어서 내 딱딱한 크래커를 당신들에게 보여주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