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목과 톱밥'이 서로 싸운다.

http://blog.aladin.co.kr/749915104/6669177 ㅣ 나이테 없는 나무를 위한 위로
내 방에는 책장이 여섯 개 있다. 뭐, 근사한 서재를 떠올리는 사람을 있을 테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어서 창고에 가깝다. 시장에서 흔히 파는 오만 원짜리 5단 책장'이 5개'이고, 나머지 하나는 보르네오산 원목으로 만든 책장이 하나 있다. 원목으로 만든 책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버린 책장을 주워 사용하고 있다. 한 녀석은 광명에서 버려졌고, 나머지는 군산이나 안양 혹은 대구 달서구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각기 다른 배에서 태어났으니 색깔도 모두 다르다. 한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 보면 가구를 들인다는 것이 매우 무모한 짓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잠시 머물다 떠날 자리이기에 떠날 때 짐이 늘어나면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다. 내가 광명이나 군산, 안양에 정착할 때는 여행용 가방 하나가 짐의 전부였다. 필요한 가전 제품은 그 동네 재활용센터에서 샀다.
그리고 떠날 때는 미련 없이 버릴 생각이었다. 가진 것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불필요한 가구는 필요 없었다. 하지만 책이 늘어나다 보면 책을 정리하고픈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책장을 산다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었다. 이곳에서 그리 오래 살 것도 아니지 않은가 ? 하지만 이러한 유혹은 쉽게 무너지고는 했다. 왜냐하면 아파트 단지나 길거리에 버리진 가구 가운데 가장 흔한 게 바로 PB재질로 만들어진 싸구려 5단 책장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버려진 책장을 주워다 내 책을 꽂아 넣었다. 문제는 떠날 때였다. 떠날 때는 모든 가전 제품을 다 버렸지만 공교롭게도 책장을 버린다는 게 찝찝해서 함께 서울행을 택했다. 그렇게 모인 입양아가 총 4개였다. 모두 배 다른 형제요, 자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잠을 자고 있는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당시 나는 몹시 피곤했던 터라 몸은 움직이지 않은 채 실눈을 떠 방 안을 살폈다. 놀랍게도 책장들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100% 진실이다. 거짓말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비싼 돈을 주고 산 보르네오 원목으로 만든 책장이 말했다. " 에효, 그지같은 새끼들 ! 저기, 저어기, 저, 저, 저, 어두컴컴한 촌구석에서 온 놈들 ! 늙은 여자 젖가슴처럼 축 늘어져서 볼썽사납구나. 나무는 이 자식들아 ! 부러질지언정 늘어나지는 않는다. " 무슨 말인가 하고 상황을 파악하니 군산에서 데려온 살구색 책장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책 무게 때문에 세 번째 칸막이 밑칸이 U자 형태로 늘어나 있었다. 군산에서 데려온 책장이 발끈했다. " 음마, 으따 ! 시부럴. 군산이 어두컴컴한 촌구석이면 보르네오 섬에서 온 니는 마치 뉴오커 같다잉 ? 입 보소. 입 보소 ! 배떼기를 확 째서 창자로 줄넘기를 해부러 ? 입 조심 해라잉? "
보르네오가 말했다. " 아이고, 무서워서 눈물이 앞을 가리네. 5만 원짜리 인생아 ! 내 몸값은 이것들아. 40만 원이다. " 이에 군산 살구색 책장이 받아쳤다. " 니는 달달한 민음사나 황금가지 소설책만 있지 내 봐라. 나가 말이시, 프로이트 전집과 니체 전집을 모시는 몸이다. 한길 그레이트북 알제 ? 권 당 최소 2~3만 원이다잉 ? 보아 하니 오십 프로 세일할 때 주인이 존나 긁어서 사더만. 등신아, 니가 모시는 책들은 전부 절반 세일할 때 사둔 소설이랑께. 책값 다 합치면 나가 더 비싸다잉. 알긋냐 ? 니와는 레베루가 다른 차원이랑께. 한길 그레이트북 성님들은 절대 존심을 버려가면서까지 절반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지 않는다. 어따대고 삿대질이다냐. 니는 스티븐 킹 나부랭이나 들쳐업고... 꼴 좋다. 곰곰발 보니깐, 카잔차키스 전집은 사놓고는 달랑 한 권 읽었더라. 가벼운 책보다는 무게감 있는 책이 으뜸이다. 책장이 무슨 캐비넷이다냐 ? "
보르네오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 빙딱 ! 책이 무거워서 휘어지는 게 아니라 빙신아, 니 몸 자체가 저질이다. 넌 나무도 아니다 ! 어디서 공사판에서 뒹구는 나무조각 죄다 모아가지고 톱밥 분쇄기로 갈아서 본드와 섞어서 벽돌 찍어내듯 만든 게 너희들이다. 이 그지새끼들아 ! " 그때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안양에서 데려온 베이지색 책장이었다. " 그럴 리 없어 ! 보, 보보보보라고 ! 우리도 이렇게 나, 나나나나나무무늬가 있잖아 ! " 보르네오는 비웃으며 말했다. " 빙신들, 그거 나무무늬가 아니라 나무무늬 도배지로 붙인거다. ㅋㅋㅋㅋㅋ " 이 모습을 묵묵이 지켜보던 대구 달성에서 온 검은 책장이 말했다. " 그만들 해라. 보르네오, 니는 바다 건너 왔다 그거 아이가 ? 책장이 책만 담으모 된 기제. 뭔 놈의 출신 성분이고. 갱상도 전라도 편 가르는 거도 모자라 이제 원목과 톱밥으로 나눌기가 ? 이게 뭐하는 짓이고. 우리 그냥 사이 좋게 지내자. 니캉 내캉 가족처럼 말이다. 이리다가 주인 깨면 으짜노 ? "
아, 든든한 검은 책장 ! 나는 그동안 책장 별로 책을 분류했는데 대구 달성에서 데려온 책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만 따로 담았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여러분에게 소개할 날이 오리라. 모르 척하고 있을까 생각도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책장의 대화'에 나도 끼어들었다. " 놀라지 말게 ! 다 엿듣고 있었어. 책장이 말을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보르네오, 너 애들에게 사과해라 ! 그리고 군산에서 온 너도 너무 지나쳤어. 고운 말을 사용해야지. 하긴 너에게는 무거운 철학책만 꽂아서 네 등이 그리 휠 줄은 몰랐다. 달성에서 온 친구 말마따나 우리 니캉 내캉 알콩달콩 살자. 나무무늬가 진짜면 어떻고, 코팅이면 어떠니 ! " 내 중재로 인하여 그들은 서로 화해를 했지만 여전히 출신과 성분에 따른 질투는 공존한다. 보르네오는 왕따가 되었고, 안양에서 온 책장과 대구 달성에서 온 책장은 서로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책이나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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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에세이 [ 나무야 나무야 ] 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려다가 엉뚱한 길로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신영복의 [ 나무야 나무야 ] 에 대한 리뷰'이다. 꽃보다는 나무가 좋다. 꽃은 가끔 무서울 때가 있다. 장미가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낼 때나 동백꽃이 꽃잎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로 낙화를 할 때 종종 두려웠다. 꽃은 상처였다. 반면 나무는 거대한 흉터'였다. 세월에 의해 흉터가 덧대고, 덧대고, 덧대어서 둘레가 된다. 나무는 흉터의 총합이다. 그래서 나무가 좋다. 나는 흉터를 사랑하니깐. 나무가 좋다 보니 나무를 다루는 목수가 참 근사해 보였다. 나무를 다루는 사람이 제일 먼저 보는 것은 < 결 > 이다. 이 결에 따라 대패질의 방향이 결정된다. 좋은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날이 망가졌다는 사실은 재질이 나쁜 목재에 대패질을 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목수는 좋은 목재를 사용한다.
사실과 풍문
▦ 군산 출신 책장이 폭로한 < 카잔차키스 전집 30권 > 가운데 한 권만 읽은 채 방치하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엄밀히 말하면 " 그리스인 조르바 " 는 이미 오래 전에 읽었으니 사놓고 한 권도 읽지 않은 전집'이다. ▦ 한길 그레이트북 책값을 좀 낮춰으면 싶다. 아니면 문화진흥원에서 이런 학술서는 재정 지원을 해서 책값을 좀 낮추던가 말이다. 개새끼들, 쓸데없이 아프리카 박물관 따위에 재정 지원하지 말고 말이다. ▦ 군산 출신 책장이 보르네오를 공격하면서 " 스티븐 킹 나부랭이... " 운운한 것은 본인과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공지하는 바이다. 나는 군산 출신 책장의 발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킹은 킹'이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 보르네오 원목 책장이 비싼 것은 사실'이다. 20년 전에 20만 원 주고 샀는데 현 시세로 환산하면 40만 원은 족히 넘을 것이다. ▦ 이 자리를 빌려 4년 전 책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체리 색 인천 출신 책장에 대해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다음 생은 또다시 PB 재질 싸구려 책장으로 태어나지 말고 종이로 태어나 편안하게 살아라.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