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사소한 편린(片鱗) 때문에 전체가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 " 내 생애 구슬 같은 겨울 " 이라는 문장 하나 때문에 < 그 남자네 집 > 이라는 소설을 좋아했다. 박완서 작가가 " 구슬 " 대신 " 주옥 " 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면 이 문장이 그토록 아름답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 남자네 집 > 이라는 제목도 큰 울림'이었다. " 그 남자의 집 " 이라고 하지 않고 " 그 남자네 집 " 이라고 했을 때, 박완서 작가는 격 조사 < ~의 > 와 접미사 < ~네 > 가 가지고 있는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귀에는 격 조사 < ~ 의 > 는 가부장적이며 이기적인 남성 어투'처럼 들린다. < 그 남자의 집 > 에서 남자는 집을 소유한 주체가 된다. 주종의 관계가 명확하다. 반면 < ~ 네 > 는 같은 처지인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로 소유와 서열에 의한 남성 어투에서 벗어나 이타적 연대'를 풍긴다.
< 그 남자네 집 > 에서 남자는 집을 소유한 주체이기보다는 그 집에 사는 무리 중 한 명'이다. < ~의 > 가 수직적 관계를 직시하는 남성 언어라면 < ~네 > 는 아픔을 공유할 수 있다는 공감 능력에서 비롯된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여성 연대의 느낌이다. 문장도 좋고 제목도 좋은 소설이다. 그리고 코맥 매카시의 < 모두 다 예쁜 말들 >도 제목도 좋고 문장도 좋아서 나를 환장하게 만든 소설이다. 모두 다 예쁜 말들이라니, 아... 모두 다 예쁜 말들이라니 ! 이 소설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 나온다. " 흉터는 신기한 힘이 있지. 과거가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거든. " 이 문장을 읽었을 때 가볍게 떨렸다. 상처와 흉터의 관계는 원인과 그 원인에 대한 결과'여서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뭇 다르다. 상처는 < ~ 앓이 > 에 가깝고 흉터는 살에 새겨진 문신과 유사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처는 두 가지'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상처'이고 또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상처이다. 상처는 보이는 상처보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더 아프고 오래 간다. 그리고 더 아플수록 더 많이 감추려고 한다. 상처는 심장에 새긴 문신과 같다. 반면 흉터는 숨길 수 없다. 한여름에도 두꺼운 시계를 오른손에 차고 다니는 여자가 있었다. 패션 코디'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생뚱맞아서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오른손에서 주저흔'을 읽었다. 그녀는 자살을 시도했던, 그 흔적의 결과인 주저흔을 감추기 위해서 시계를 항상 차고 다닌다고 나는 추측했다. 내가 물었다. " 혹시.... 왼손잡이세요 ? " 뜬금없는 질문에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렇다고 대답했다. 쓸쓸했다. 면도칼로 손목을 그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자주 사용하던 손으로 칼을 쥐게 되어 있으니깐 말이다.
이명원의 독서 에세이 < 마음은 소금밭인데 도서관에 갔다 > 에서는 김병철 문학 비평가가 쓴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다음과 같다. " 내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그 순간까지, 기를 쓰고 글써야지. 피를 토하다 쓰러지는 그 찰나까지. 기를 쓰고 글써야지. 글은 내가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의 핏자국 " 이 문장을 읽다가 문득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글(씨체)은 종이에 새겨진 흉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흉터가 몸에 새겨진 문신이라면 글(씨체)은 종이에 새겨진 문신'이었다. 이명원의 독서 에세이 < 마음은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 는 2004년도에 나왔다가 오랫동안 절판된 상태였는데 이번에 개정판으로 다시 발행되었다. 이명원 사태'가 궁금해서 도서관에서 잠시 훑은 기억이 있는데 내가 기억과는 사뭇 달랐다. 김애란의 < 두근두근 내 인생 > 에 대한 글도 있는 것으로 보아 몇몇 글은 새롭게 단장을 한 것 같았다.
이명원은 마음이 소금밭인데도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고 고백했지만, 당시 나는 달달한 연애를 하고 있어서 마음이 설탕밭이어서 오랜만에 정독 도서관에 가서 이 책을 구경한 적이 있다. 그 차이 때문이었을까 ? 개정판에 쓴 글들은 모두 새롭게 보인다. 내가 비평서를 읽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문학 비평서 제목이 하나같이 비문학적'이다. < 한국 문학의 유령들 > , < 전위의 기원과 행로 > , < 환상과 실재 > 따위는 제목부터 학술적 냄새가 풀풀 풍겨서 읽고 싶은 맛이 안난다. 그런데 < 마음은 소금밭인데 도서관에 갔다 > 는 꽤나 제목이 근사하다. (물론 이 책이 비평서가 아닌 문학 에세이여서 이들과 같은 잣대로 비교평가하는 것은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제목만큼이나 읽기 편하다. 장정일의 독서 에세이가 톡 쏘는 맛이 있다면 이명원은 달달한 맛이 있다.
문장이 달달해서 읽기 좋은 부분은 신형철과 겹치지만 결정적 차이는 어떤 대목을 비판할 때는 매섭고 정확하다는 점이다. 신형철이 정실비평에 함몰되어서 능청스럽게 좋은 게 좋다, 라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글을 쓴다면 이명원은 신형철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장정일 같은 독함이 있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비평가로써 가져야 할 미덕이다. 이명원에게는 바로 그 미덕이 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공감하는 부분은 < 두근두근 내 인생 > 에 대한 날선 비판이다.
" 내 판단에 이는 유머의 과잉이다.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웃으라고 권유하는 작가의 서사 장치는 어떤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왜 한아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인들, 심지어는 고통을 참고 있는 그의 부모들마저 이 소설 속에서는 그저 실없이 웃고 떠들면서, 상황의 비극성을 회피하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쏭달쏭하다. ( 196쪽 ) "
비평가들이 김애란의 < 두근두근 내 인생 > 에 대해 쏟아낸 " 묻지 마 칭찬 " 에 질려버린 나는 이명원의 지적이 무척 반갑다. 이 장편소설은 3분짜리 노래를 부르던 여가수가 느닷없이 3시간이 넘는 춘향가 완창에 도전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백미터 단거리 선수가 마라톤 선수가 되어서 뛰는 모습처럼 보였다. 단거리에 최적화된 호흡법은 왕십리를 지나면서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무악재를 지나면서 뒤죽박죽이 되었다. 끝에 가서야 정신을 차리고 뜀박질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니었던가 ? 내가 정말 궁금했던 점은 모든 비평가들이 쏟아낸 성찬'이었다. 왜 비평을 업으로 한다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작품을 칭찬했을까 ? 정실과 정파가 빚은 비극이다. 그런 점에서 이명원의 지적은 반갑다. 무엇보다 반가운 점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분리해내는 이명원의 냉정한 자세'다.
김윤식이라는 평론가의 표절을 지적해서 대학에서 파문당한 이명원'에게 " 김윤식 " 은 상처이자 흉터일 터인데, 그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한다. 그는 " 내가 선호하는 문체는 김현이 아닌 김윤식의 것 (279쪽) " 이라고 고백한다. 사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서 눈을 흐리지 않겠다는 태도다. 어쩌면 그는 김윤식 표절'을 지적했던 글이 이 정도의 파문을 몰고 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쓴 글에 대해서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김병철 비평가가 쓴 " 글은 내가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의 핏자국 " 이라는 문장 앞에서 전율감'이 들었다고 고백했을 때, 그는 그때 벌어졌던 일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 글을 다시 읽는다면 이명원은 그 글씨'가 흉터였다는 사실을 절감할 것이다. 그리고 그 흉터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렇다, 흉터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 과거가 진짜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니깐 말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 모든 글은 세월이 지나면 흉터로 남는다. 코맥 매카시의 저 문장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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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냄새 + 먼지 없는 방 세트 > 이벤트 결과
1. 텍스트걸
2. 眞我
3. 수다맨
4. 밤하늘의별소리
5. 달사르
기프트북 보내기, 라는 게 있더군요. 주소 물어볼려고 끄적이다가 기프트북'이 있길래 뭔가 하고 봤더니, 맙소사 ! 이렇게 편리한 기능이 있었다니. 책이 내일이면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됐고 !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