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튼소리 3.
7. 아침에는 황해에서 놀고 저녁에는 서해에서 논다 : 물고기에게는 국경이 없다
나는 평소 해양 생태계'에 관심이 많다. 어릴 때 또래 친구들이 장래 희망으로 " 대통령 " 이나 " 선생님 " 이라고 할 때, 이미 박정희나 전두환이 저지른 똥냄새 나는 패악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존경하는 위인은 < 원효대사 > 라고 쓰고, 장래 희망 빈 칸에는 < 어부 > 라고 썼다. 호기심이 발동한 선생이 그 이유를 묻길래 대답을 했지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대답에 대한 선생의 코멘트는 아직도 기억한다. " 좀더 큰 꿈을 가져라잉 ? "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말은 굉장히 비교육적'이었다. 고기 잡는 어부라는 직업을 희망하면 꾀죄죄죄죄한 것이 되고, 학생 가르치는 선생을 희망하면 원대한 포부인가 ? 사실 인간만큼 꾀죄죄한 집단도 없다. 한국인은 애국심, 애사심, 애향심 따위를 개인에게 강요하는데 이 " 愛 - " 로 시작해서 - 心 으로 끝나는 단어는 폭력적일 때가 많다. < 愛 > 와 < 心 > 이 지나치게 國, 社, 鄕, 君, 師, 父에 몰려 있다.
<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 에서 피터 빅셀은 " 애국주의에는 적이 필요하다. " 고 말한다. " 타인의 애국심은 언제나 국수주의 " 인 까닭이다. 한국인이 보기에는 아베 총리의 말은 망언이지만 일본 극우파가 보기에는 충언'이다. 이처럼 애국심은 타자에게는 국수주의'다. 반면 물고기는 국경이 없다. 그들은 여권 없이도 전세계를 돌아다닌다. 물고기에게 출신 성분을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식탁에서 벌어지고는 한다. 생선이 맛있으면 국내산이고 맛이 없으면 중국산'이다. 다 고만고만한 근해에서 잡히는 놈들이니 다 고만고만한 놈들이어서 고놈이 그놈이지만 한국인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 근해에서 잡히는 놈은 맛이 좋은 것이고, 중국 근행에서 잡히는 놈은 맛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맛을 좌우하는 것은 어디서 잡혔느냐("국적이 어디냐 ?")가 아니라
얼마나 신선도를 유지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아침에는 황해에서 놀다가 저녁에는 서해에서 노는 물고기는 토종인가 아니면 아닌가 ? 그 물고기가 아침에 잡히면 중국산이 되고 저녁에 잡히면 국내산이 되는 것 아닌가 ? 남과 북도 모자라서 강남과 강북으로 갈라야 속이 시원한 민족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국경도 없는 바다에 사는 물고기에게 출신 성분으로 품평회를 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자세일지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인은 식탁에 올라온 물고기마저 혈통을 거들먹거리며 족보를 따지는 시작했다. 대단한 애국심'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물고기에게는 국경이 없다.
8. 낙지가 검은 먹물 대신 붉은 피를 흘렸다면 : 볼거리와 볼 권리
낙지는 인간의 볼거리'를 위해 잔인하게 죽는다. " 인간의 시각적 쾌락 " 을 위해 해물탕 속에 빠져 죽는 것이다. 주인은 손님이 보는 앞에서 살아서 꿈틀거리는 낙지를 펄펄 끓는 냄비 속에 넣는다. 말을 하지 못하는 낙지는 비명 대신 조용한 발짓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발악을 한다. 이 침묵에 가까운 고요한 몸짓은 고요하기에 더욱 잔인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손님들은 연민 대신 침이 고인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죽음 앞에서는 " 아, 아아아아아... " 라는 한숨과 함께 심장에 피가 쏠려야 정상인데 오히려 " 아, 아아아아아밀라아제 " 가 침샘에서 분비된다. 이 전시효과'는 야만스럽다. 옛부터 식재료를 다듬는 일은 모두 부엌에서 이루어졌다. 엘리아스의 < 문명화 과정 > 은 서구의 식문화가 어떻게 발달되었는지를 밝혀낸다. 중세 때만 해도 식탁에서 동물의 사체를 해체하는 일이 이루어졌지만 문명화 과정을 통해서 동물 해부는 부엌에서 이루어지고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은 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미학적 기준에 의해 스타일化했다.
http://blog.aladin.co.kr/749915104/6370810 ( 낙지 사회 )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 해물탕집 낙지'는 식탁 앞에서 처절하게 죽는다. 식탁에서 죽음을 은폐하기는커녕 죽음이 볼거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박수치고 난리도 아니다. 식문화가 퇴화했다는 증거'이다. 주인 입장에서는 살아 있는 낙지를 손님들 앞에 내놓아서 식재료가 싱싱한 것이라는 < 볼거리 > 를 제공하고 싶은 속내가 있었을 것이고, 손님 입장에서는 해물 재료가 싱싱한지 아닌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 < 볼 권리 > 가 있다고 생각했으니, 서로의 이해타산이 맞아서 생긴 풍경일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야만적이다. 볼거리도 필요 없고, 볼 권리를 주장할 필요도 없다. 낙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 지점에서 노래 한 곡 듣고 가자.
9. 신속 배달'이 생명입니까 ? : 냉면과 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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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한식이 슬로우 푸드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패스트 푸드'가 되었다. 한국인이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시간은 10분이 한계'이다. 9분 56초, 9분 57초, 9분 58초, 9분 59초, 10 분 and 10분 01초'에 퐝, 터진다. 그래서 모든 한식은 10분 안에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한식은 패스트푸드'다. 냉면도 패스트 푸드'이다. 주문하자마자 나온다. 다른 한식 메뉴들이 10분을 목표로 설계되었다면 냉면은 3분을 지향한다. " 짜장면보다 빠르게 ! " 가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보니 시간 단축을 위해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 가위 > 이다. 냉면을 파는 식당 테이블에 도착하는 냉면은 사실 완성품이 아니다. 왜냐하면 식당 부엌에서 해야 할 마지막 과정을 테이블 앞에서 완성하기 때문이다. 직원은 음식이 다 만들어지지 않은 냉면을 들고 와서 손님 앞에서 가위로 냉면을 자르면서 완성시킨다. 일종의 테이프 커팅식'이다.
문제는 왜 부엌에서 끝내야 할 일을 손님이 보는 테이블 앞에서 마무리를 짓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미술 대전'에 응시한 작품에 대한 점수를 매기는 데 느닷없이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붓을 들고 나타나서는 눈깔을 마저 그리지 못했다며 붓으로 " 화룡점정 " 하는 꼴과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 단축이다. 3분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안한 아이디어인 것이다. 그래서 부엌에서나 쓰이는 도구 ( 재단가위가 부엌 도구라니 맙소사 ! ) 를 가지고 다니며 테이블 앞에서 면발을 자르는 것이다. < 해물탕집 낙지 > 와 마찬가지로< 냉면집 가위 > 는 부엌에서 이루어져야 할 해체 작업을 식탁으로까지 연장한다는 측면에서 퇴행적 증후이다. 빨리빨리 문화가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발달된 식문화를 야만스럽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