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A무비'를 버리고 B무비'를 사랑하게 되었나 !
- 외계로부터의 9호 계획 풀 영상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에 < 기차의 도착 > 이란 영화를 한 카페에서 상영했을 때 사람들은 기차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줄 알고 놀라서 도망쳤다고 한다. 그 후, 영화는 가장 훌륭한 오락거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4,50년대에 텔레비전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컬러 티븨'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자 영화 산업은 큰 위기에 빠진다. 이 불황을 벗어날 묘책은 딱히 없다. 박리다매 ! 예나 지금이나 안 팔린다 싶으면 " 1 + 1 행사 " 가 최고'다. 헐리우드는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는 티켓 가격으로 개봉작 두 편을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니깐 한 편은 서비스 차원에서 영화사가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A급 영화와 B급 영화'다. A급 영화는 말 그대로 영화사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화였다. 최고의 감독과 배우 그리고 스탭이 참여해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들었다. 반면 B급 영화'는 쪽수만 채우면 되었다. 제작비는 터무니없이 적었고,
촬영 기간은 평균 한두 달'을 넘지 않았으며 감독, 배우, 스탭 모두 3류를 기용했다. 메이저급 영화 제작 기간이 보통 1,2년이 소요되었다면 B급 영화는 1,2달 안에 완성해야 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제대로 된 영화가 나올 턱이 없었다. 그리고 영화사 또한 B급 영화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흥행을 좌우하는 것은 A급 영화이지 B급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B 무비는 일종의 서자'였다. 홍길동이었다. 옛날 티븨 광고 중 " 공부는 못해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 " 라는 카피'가 있었듯이, 영화사 사장은 B무비에 대해 " 영화는 후져도 좋다. 제발... 물량만 대다오 ! " 라는 자세를 시종일관 유지했다. A급 영화가 제작비 100으로 1년에 한 편을 뽑아냈다면 B급 영화는 제작비 1로 1달에 한 편을 뽑아냈으니 관심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었다. 망해도 상관 없어 !
그런데 이 무관심이 창작의 자유를 선사했다. 제작부가 촬영 현장을 쫒아다니며 간섭을 하지 않다 보니 B무비 감독 입장에서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었다. 개성은 곧 창조'였다 ! 한때 나는 A급 영화만 찾아서 보았다. 소위 먹물들이 좋아하는 아트 무비'에 빠져서 살았다. 처음에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탄 영화만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칸느,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가 건드린 작품만 보게 되었다. 그리고 정성일의 평론을 열심히 읽었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자면 저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몰랐고, 정성일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언제나 엄지손가락 두 개를 치켜세우며 브라보를 외쳤다. 테오 앙겔로플로스여, 가는 길에 영광 있으라 ! 정성일이여, 당신도 가는 길에 영광 있으라 ! 그런데 그것은 일종의 기만이었다. A급 취향을 공유함으로써 A 계급에 묻어가려는 허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A급 영화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서 의심을 하기 시작한 계기는 코폴라 감독의 < 지옥의 묵시록 > 때문이었다. 영화는 A급 감독이 만들었기에 잘빠진 A급이었다. 당시에는 최고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였다. 감독은 약속했던 제작비'를 2배 이상 초과했고 촬영 마감은 약속 기한을 넘겨서 기약없이 늘어졌다. 제작에 참여했던 제작사 몇몇이 파산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 지옥의 묵시록 > 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가 과연 제작사가 돈을 천문학적으로 쏟아부을 만큼 훌륭한 영화인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운운하는 것은 코폴라 감독에게는 영광스러운 말이지만 그 사람 때문에 파산한 영화사는 속에서 열불이 나지 않을까 ? 당초 제작비를 가볍게 뛰어넘고 촬영 기한을 무한정 연장시킨 것은 감독의 열정이 아니라 뻔뻔한 욕망은 아닐까 ?
그런 생각이 뒤죽박죽 섞이면서 내가 이 영화에 대해 내린 결론은 " 엿먹어라 ! " 였다. ( 오,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에게는 못할 소리이지만 말이다. 이해해 주시길... ) 말론 브란도가 어둠 속에서 호러 ! 호러 ! 라고 외칠 땐 웃겼다. 죽도 밥도 아닌, 어정쩡한 관념'은 기만처럼 느껴졌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영화가 바로 B무비'였다. 에드우드가 촬영 프로세스 막 위로 시계 부품 나사 같은 우주선을 실로 매달아 둥실둥실 띄울 때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리고 공동 묘지에서 배우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마다 바지단에 쓸려서 묘비와 십자가가 휘어질 때에도 진심으로 감동했다.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서 금강으로 묘비를 세우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왜 저 묘지의 주인은 라면 박스로 십자가와 묘비를 세웠을까 ? 그리고 배우가 문을 쾅 하고 닫을 때 세트 전체가 흔들리면 B무비이고, 흔들리지 않으면 A무비라는 사실도 배우게 되었다. B무비에 사용된 세트와 소품은 말 그대로 진짜 같은 게 하나도 없었다. < 외계에서 온 9호 계획 > 에서는 백악관이 등장하는데 소품이라고는 철제 책상 하나에 전화기 두 대가 전부였다.
배우가 여기는 백악관이라고 다급하게 말하니 그냥 백악관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심장인 백악관이 이 정도이니 우주선 내부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그래도 백악관보다는 미장센'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을까, 라는 나름대로의 추측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어찌된 영문인지 지구보다 문명이 10000000000000000000배는 발달한 우주선은 백악관보다 더 후졌다. 우주선 안에서 우주인과 지구인이 싸우는데 탁자 하나가 발라당 발랄하게 뒤집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뒤집어진 탁자 다리는 놀랍게도 공사판 현장에서 볼 수 있는 각목으로 만들어졌다 ! 지구인보다 문명이 1000000000000000000배는 더 발달한 우주선 안에 놓인 탁자가 각목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관객은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했다. ( 런닝 타임 1:14: 00) 저 빈곤함 앞에서 어찌 웃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조악함'은 오히려 좋은 쪽으로 빛을 발한다. B무비 속 세트장이 온통 가짜이다 보니 진짜인 배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배우들은 빈곤한 리얼리티'를 어떻게 해서라도 회복시키기 위해서 몸 동작을 보다 과장할 수밖에 없다. 유일한 리얼리티를 확보한 몸은 그렇게 조악'함을 극복하기 위해 위악의 제스츄어'를 갖는다. 벨라 루고시와 뱀피라 그리고 토르 존슨'은 그렇게 애를 쓴다. 바로 이 애잔한 서정'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비루해서 초라하지만 적어도 위선적이지는 않았다. 이 B급 서정은 통속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통하지 않는 구석도 있다. 뒤돌아보면 내 아버지가 이룩한 가난한 살림살이는 우주선 안에 놓여 있던, 공사판 각목으로 만들어진 세간'과 다르지 않았고, 내 방에 놓인 책장과도 다르지 않았다. 공사판 각목으로 만들어진 탁자가 금칠로 위장을 했듯이,
내 책장은 폐자재로 버려진 나무토막을 간 톱밥을 압축해서 만든, 나무 무늬가 없으면서도 나무 무늬가 그려진 포장지로 덧입힌 것이다. 그것은 모두 낯익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 B딱한 서정'에 끌린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리얼리티 / reality'가 아니라 진실 / truth'다. 진실을 위해서는 리얼리티'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리얼리티가 부족하다고 해서 진실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영화 역사상 재능이 가장 떨어지는 감독으로 선정된 에드우드는 끝끝내 9회말 역전 홈런을 날리지 못했다. 60년대에는 싸구려 포르노를 찍다가 잊혀져 갔고, 무일푼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비록 영화 역사상 재능이 가장 떨어지는 감독이었지만 그가 가진 포부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오손 웰즈'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버려진 나무토막으로 만들어졌으면서 통나무로 만들어진 것처럼 위장을 한 책장을 보며 당신 영화를 떠올리는 팬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당신이 평생 동안 만든 영화의 총제작비보다 많은 제작비로 당신을 위한 최고의 영화를 만든 이도 있었다는 사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