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춘향뎐 > 에서 가장 뻔뻔한 인물은 변학도'가 아니다. 변학도보다 더 뻔뻔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이몽룡 암행어사다. 16살에 춘향이를 만났다고는 하나 이미 그 전부터, 중학생 나이에, 음주와 성매매를 자연스럽게 하셨으니 지금이었다면 < 세태 보고 : 지도층 자녀들의 탈선 이대로 좋은가 > 라는 기획 취재에 음성 변조와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로 등장했을 이력'이다. 이몽룡이 들락날락거린 곳이 고을 사또와 같은 세도가들이 드나들던 당대 최고의 물 좋은 룸살롱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몽룡의 집안이 얼마나 빵빵한 가문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화 김승현 회장의 피도 안 마른 막내 아들이 최고급 룸살롱에서 아가씨 젖가슴 만지다가 싸움이 붙어 사회적 문제가 된 것과 뭐가 다른가 ? 노력 없이도 선택 받는 존재요, 놀고 먹어도 미래 걱정이 없는 지도층 양반 가문의 아들이 바로 이몽룡 되시겠다. 그 지도층 자녀의 기방 출입기'가 바로 < 춘향전' > 이다. 사실 변학도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당시 기생이란 관아 소속이었다. 타관 벼슬아치들이 방문하면 기생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니깐 변학도'가 수청을 들라, 고 했을 때 거절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직무 유기다. 그 시대의 눈높이로 보자면 수청'은 자연스러운 요구였던 셈이다. 그런데 사랑에 눈이 먼 춘향은 수청 대신 숙청'을 받기로 한다. 한 마디로 목숨 걸고 사랑한 것이다. 아, 이몽룡의 그 달콤한 밀어는 얼마나 황홀했던가. 춘향전 내용 모르면 간첩이기에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바로 클라이막스로 가자. " 고약한 년, 지금 당장 저 년의 목을 쳐라 ! " 라고 변학도가 말할 때 이몽룡이 등장한다. 암행어사 출두다 !
2.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몽룡은 자신의 얼굴을 부채로 가린 채 춘향이 앞에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유도신문을 한다. " 허어, 네가 기생 주제에 한 남자에 푹 빠져서 벽학도의 수청을 거절했다는 그 기생이더냐 ? 변학도 저 놈이야 악랄한 탐관오리'이니 그렇다고 치자. 내 변 사또를 혼내줬으니 오늘 밤은 내 수청을 들거라 ! " 그런데 나는 이몽룡의 유머감각이 참으로 비열하다는 생각이 든다. 변 사또보다 백 배는 비열하다.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여인에게 한다는 소리가 한 편의 연극놀이'다. 그것은 악마의 속삭임'이다. 왜 갑자기 이몽룡은 춘향의 속내가 궁금한 것일까 ? 만약에 춘향이가 암행어사의 수청을 든다고 허락했다면 어떤 상황이 연출되었을까. 자신의 신분을 속인 암행어사가 춘향이의 속내를 떠볼 때 춘향이가 yes라고 말하는 순간 춘향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런데 이몽룡은 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결혼 전 여자의 과거는 다 지난 일이어서 용서할 테니 과거의 남자에 대해 말해보라는 남편의 속내와 비슷하다. 아내가 결혼 전 백 명의 남자와 성관계를 맺었다고 한다면 뭐라 대답하겠는가 ? 이몽룡은 참... 뻔뻔하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수청을 거부한 애인에게 한다는 짓이 정절에 대한 시험'인가 ?
- 뻔한 것은 뻔뻔한 것이다, 이몽룡 편
내 부모를 가장 존경한다는 그 말 !
영화 < 봄날은 간다 > 에서 유지태는 이영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 " 나는 이 대사를 듣고 나서부터 허진호 감독을 철딱서니없는 어른 취급'을 했다. 사랑의 불변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그 태도가 한심했다. " 사랑이 변하지, 어떻게 안 변하니 ? " 아니나 다를까. < 8월의 크리스마스 > 이후 만들어진 영화는 점점 꾀죄죄해지다가 < 호우 시절 > 에 이르러서는 땟국물이 좔좔 흐르는 신파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사랑은 변한다, 그게 바로 사랑이 가지고 있는 미덕'이다. 만약에 사랑이 변하지 않는 불변'이라면 이 세상은 참 따분한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문학이라는 장르 자체가 이 불변성 때문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 불변 " 이라면 " 변심 " 을 주제로 한 그 무수한 문학 작품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히스클리프와 보봐리 부인이 없는 문학판은 밍숭맹숭한 가전 제품 사용 설명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디 그뿐인가 ?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도 자취를 감췄을 것이 뻔하니 당신이 그토록 욕하면서 열심히 보았던 < 아내의 유혹 > 이나 < 오로라 공주 > 따위는 없었을 것이야. 무슨 재미로 사나. 사실 러브 스토리'를 다룬 소설들은 대부분 사랑의 절정 부분에서 끝나기에 영원한 것처럼 보일 뿐이지 그 절정 이후를 다룬다면 그 사랑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지 않고 40대 중반이 넘은 부부가 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또 아는가 ? 서로 맞바람을 피워서 쌍방 간 간통죄로 고소를 할지 말이다. 서양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면 동양에는 이몽룡과 춘향이가 있다. 영원한 사랑'를 상징하는 춘향과 몽룡'은 정말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뜨겁게 사랑을 했을까 ?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목에 칼을 찬 춘향'을 만나는 장면'이 전부이다.
그들은 백년해로'했을까 ?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후처가 낳은 자식은 호부호형을 하지 못할 정도로 신분 차별이 심각했던 조선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생 신분인 춘향이'는 홍길동 모친보다도 더 신분이 낮은 첩에 속한다. 본처가 되지 못함은 당연하다. 설령 자식을 낳는다고 해도 홍길동보다 못한 대우를 받을 것은 뻔하다. 춘향전은 happy할 때 막을 내린 것일 뿐이지, happy ending이 아니다. 아마도 춘향이가 4,50대가 되었다면 뒷방에서 가슴을 치며 " 아이고, 내가 미친 년이지, 내가 미친 년이여 ! " 라고 후회하지 않았을까 ?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변한다. 그래서 나는 유지태가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 " 라고 말했을 때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순정이 아니라 무식'이다. 유지태가 < 폭풍의 언덕 > 이나 < 보봐리 부인 > 을 읽었다면 그런 무식한 소리는 하지 못한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전이로 작용되기도 하고, 정반대로 사랑하던 대상을 증오하기도 하며,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처럼 사사건건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도 있다.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 " 라는 말만큼이나 징그러운 소리는 "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부모님이죠. 부모님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 라는 말이다. 나는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주인을 섬기는 노예 근성'이 떠올라서 불쾌하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우선 내 가족사가 불행할 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유감스럽지만, 내 가족은 당신 가족보다 행복하다. 1년에 두 번은 온가족이 모여서 가족 여행을 떠난다. 재산 싸움을 한 적도 없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를 사랑한다. 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 < 존경 > 이라는 말은 높을 존(尊)에, 공경할 경(敬)이다. 이 말은 곧 숭배한다는 뜻이다. 365일 날마다 마주쳐야 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부모와 자식'은 볼 거 안 볼 거 다 본 관계'다.
집밖에서는 부처가 될 수 있지만 집안에서는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부처와 예수는 집을 버리고 거리의 성자가 된 것이다) 상처 주고 상처 받는 관계가 바로 가족이다. 그런데 무슨 얼어죽을 숭배'란 말인가. 그런 말은 뻔뻔한 말이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은 부처와 예수이지 내 부모가 아니다. 부처와 예수에 비하면 내 부모는 한없는 속물이다. 하지만 그 어미의 속물근성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왜 ? 내 어머니이니깐 말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티븨에서 인터뷰를 할 때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자기 부모를 거들먹거릴 때 불쾌한 감정이 든다. 오죽 잘났으면 자기 부모를 숭배할까 ? 부모란 연민의 대상이지 존경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 흔히 이런 소리를 한다. " 어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자 ! " 한국인은 통속적인 도덕 관념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 공경 > 과 < 사랑 > 은 다르다. 공경은 내 눈높이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 때 가능하다. 우러러보는 지정학적 위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아랫것'을 공경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반면 사랑은 같은 눈높이거나 내려다볼 때에도 가능한 " 러브 포지션 " 이다. " 어른 공경, 아이 사랑 " 은 차별적인 구호'이다. 그냥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르신도 사랑하면 그만이지, 굳이 공경이나 숭배 따위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공평한 잣대가 아니다. 자신보다 한 살이라도 어리면 대뜸 반말부터 하고, 학연과 지연을 따지다가 학번이 자신보다 높으면 선배'라며 굽신거리는 태도는 꼴사나운 짓이다. 사랑은 변한다. 그리고 네 부모를 하늘 같이 섬기지는 말라. 김일성과 박정희를 지지하는 자의 공통점은 자기를 낳아주신 아버지도 아니면서 친아버지라고 착각하는 망상'에 있다.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한다. 하물며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소리이다. 백두 혈통 운운하는 김정은의 유훈 정치에 분노해야 하듯이 유신의 향수 운운하는 박근혜의 유훈 정치도 경계해야 되지 않을까 ? 그리고 노무현에 대한 향수가 반영된 지금의 분노도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죽은 아버지는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는 필요 없다. 그러므로 유훈도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