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잊기 위해 읽는다.
종종 < 한글 > 이 절묘하다는 생각을 한다. 가만 보면 가장 중요한 단어들은 한 글자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 숨 > 이다. 만약에 숨'이라는 단어가 1음절이 아닌 7음절로 이루어졌다면 이 단어를 발음하는 사이 숨넘어가는 사람도 꽤 있었을 것이다. < 숨 > 이라는 단어가 < 김수한무거북이와월월이 > 라고 하자. 어떤 이가 떡을 먹다가 떡이 목구멍에 걸려서 켁켁거리며 " 숨 막혀. " 라는 말을 전달해야 한다고 할 때 이 단어가 길면 " 김수한...무...거북이와....월월....... 이.... 막혀.... " 라고 해야 될 것이 아닌가 ? 의사를 전달하려다가 죽는 수가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 < 물 > 도 마찬가지'다. 떡이 목구멍에 걸려서 가슴을 치며 급히 물을 좀 달라고 요구할 때 " 김수한무거북이와월월이 좀 줘 ! " 라고 하다가 그 사이에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그래서 중요한 단어는 한 글자'인 경우가 많다. 밥, 숨, 물, 삶, 눈, 코, 입, 손, 발.......
< 사랑 > 이라는 단어가 2음절'이라는 사실은 사랑보다는 밥이 먼저'이고, 사랑보다는 숨이 먼저'이고, 사랑보다는 삶이 먼저'라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예수의 말을 인용하며 "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 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인류가 굶주림을 벗어나서 풍요롭게 산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옛사람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날마다 끼니 걱정을 해야 했으니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치'에 가까웠을 것이다. 눈물이 앞, 을 가린다. 만약에 옛 조상이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넉넉하게 살았다면 < 사랑 > 이라는 단어는 1음절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하느님이 계시는 구름 위 천국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한 글자'가 아닐까 싶다. 이런 낭만적 진술은 됐고 !
로르샤흐 검사'라는 게 있다. 잉크 얼룩을 보고 연상되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심리 검사 방식이다. 작동 원리는 간단하다. " 종이에 새겨진 얼룩 " 과 " 심장에 새겨진 얼룩 " 간의 유사성을 끄집어내는 방법이다. 그러니깐 어떤 이에게는 코끼리 아저씨 코 같은 얼룩이 살인자의 눈에는 몽둥이처럼 생긴 그림처럼 보일 수도 있다. 눈이 나쁜 나는 < 사랑 > 이라는 단어를 자주 < 사람 > 이라는 단어로 착각하고는 한다. 그만큼 형태가 유사하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같은 생각일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감탄사 아, 를 쏟고 가야 한다. 아.... 좋다. 이것이 바로 웅숭깊은 맛이다. 사람은 네모'를 가지고 태어난다. 네 개의 꼭지점은 네 개의 모'다. 미음 ( ㅁ ) 을 가지고 태어나니 생래적으로 모가 난 상태인 것이다. 이 모가 난 삐딱이를 모가 나지 않게 다듬는 과정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란 네모를 동그라미 ( ㅇ ) 로 만드는 과정이다. 모나지 않은 상태가 사랑이다.
한글은 이처럼 절묘한 구석이 있다. 모양이 비슷한 단어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는 사실은 " 타자성 " 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던져준다. 내가 사랑하는 님과 나와 인연을 맺지 않은 남'은 반대말이 아니라 유사한 존재'이다. 점이라는 작은 얼룩 하나가 님을 만들거나 남을 만드는 것이다. 측은지심' 또한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뺀 결과이다. 데리다나 푸코 혹은 라캉이 한글을 모국어로 사용했으면 더 빛나는 업적을 세웠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던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망각'이다. 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줄거리를 자세히 기억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책을 덮고 나면 잊는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누군가는 기억도 못하니 차라리 안 읽는 게 낫다는 소리도 한다. 셈셈 ( same same ) 이라는 주장이다. 코끼리 귀처럼 팔랑귀'를 가진 나는 그 말이 맞는 소리처럼 들렸다. 내용도 기억 못할 바에는 차라리 안 읽는 게 낫다. 암, 그렇고 말고 !
하지만 다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독서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 읽기 > 가 아니라 < 잊기 > 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잘 읽기 위해서는 잊어야 한다.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나서 다음 소설을 읽어야 한다. 지우지 않은 상태에서 읽기 시작하면 섞이게 된다. 그래서 잘 읽기 위해서는 잘 잊어야 한다. 탁월한 가객, 김광석이 말하지 않았던가. "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썼다 지운다... " 라고 말이다. 어제는 큰 마음 먹고 개복치를 들였다. 몸무게가 400kg이나 나가는 생선'이다. 눈이 새파란 무 밑동처럼 내리던 밤, 나는 하루종일 개복치를 부위별로 나누는 작업을 했다. 목이 말랐다. 사람들은 내 직업을 비아냥거리며 칼질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일이 좋다. 부위별 해체 작업에서 가장 흥미로운 때는 배를 가르는 일이다. 어제는 개복치 뱃속에서 뚜껑을 따지 않은 코카콜라 병'이 발견되었다. 잘 씻은 다음 뚜껑을 따 한 모금 마셨다.
피라냐 떼가 몰려와서 내 혓바닥을 물어뜯는 맛이 났다. 개복치 뱃속에서 발견된 코카콜라는 신이 내게 준 선물일까, 아니면 우연이 내게 준 선물일까. 개복치 뱃속에서 코카콜라를 발견하듯이, 인생이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