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물과 잉여'
< 속물과 잉여 > 라는 책이 나와서 출판사가 제공하는 책 소개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적는다. 나는 그동안 주로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꾸준히 올렸었다. 텃새보다는 철새에 가까운 인간인 나는 이 짓'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사이버 공간은 온통 허세를 가장한 < 잉여 > 와 친절을 가장한 < 속물 > 로 가득했다. ( 내 이웃들은 대부분 솔직하고 매력있는 사람들이었다. 오프에서도 자주 만난다. ) 속물'이 통속과 신파로 버무려진 골뱅이와 소면'이라면 잉여는 엽기와 자학으로 욕망을 드러낸다. 잉여의 약빨'이란 소주 한 병 사서 안주 없이 병나발 불면 해결되는 빈곤형 자학에 가까우니 손해볼 것은 없다. 잉여는 자신을 소진시키는 집단이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매혈'이다. 잉여는 허삼관'이다.
내가 네이버 블로그'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만난 놈 가운데 가장 이상한 놈은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디자인 회사 ceo였다. 그의 이웃들은 그가 나열한 스펙'에 열광했다. 내가 그 사람이 가진 스펙을 나열하면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반하지 않을 수 없다. ① 포르쉐를 몰고다니는 디자인 회사 ceo인 그는 틈틈이 ② 대학 출강을 나가는 미술 강사다. 여기서 끝이냐 ? 아니다. 그는 ③ 모 미술관 큐레이터도 겸하며 ④ 전시회도 꾸준히 여는 현역 화가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⑤ 책을 출간한 적이 있는 작가이니 대,다,나,다. ⑥ 그리고 연예 기획사 대표로 모 아이돌 그룹을 야심차게 선보이기도 했다. ⑦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신을 음반 제작자이면서 스스로 음반을 낸 적이 있는 가수라고 소개한 점이었다. 그가 서른이 되기 전에 이룩한 왕국이었다. 웃으면서 코 팠다.
이 정도면 쓰리 잡'이 아니라 텐잡이'였다. 가지도 아니면서 가지가지하는 꼴이다. 또 하나 ! 이 골드 스펙'에 화룡정점을 찍는 것이 있었으니 자신을 해외 파병 군인이라고 소개한 대목이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전투에 참가하여 수류탄 던지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전쟁터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전역할 때에는 육군참모총장 표창장을 받았다며 자랑스럽게 무용담을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다. 이제 태평양에서 새우 잡고 중국 가서 탁구만 치면 포레스트 검프'형 스펙이 될 지경이었다. 잉여가 만들어낸 과잉'이었다. 평소 < 부러우면 지는 거다 > 가 생활 신조'인 나는 지지 않기 위해서 그가 올린 글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을 했다. 자기가 만든 작품이라는 의자'는 알고 보니 어느 유명한 디자이너가 만든 작품이었고, 글과 그림은 이곳저곳에서 온통 베낀 것들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육군은 해외에 공병대를 파병한 적은 있어도 전투병을 파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그 거짓말을 굳이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도대체 그는 국군이었을까, 미군이었을까 ? 그는 결국 산더미처럼 쌓인 거짓말에 대한 해명을 할 수가 없어서 블로그를 폭파하고 존나 멋지게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상한 년은 인지도가 낮은 여자 배우 사진을 대문에 걸어놓고 그 배우 행세'를 하다가 걸리기도 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몸매가 환상적인 여자 배우 사진을 도용한, 자칭 대기업 연구소 선임 연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그녀는 블로그 이웃 남자들을 유혹해서 벌거벗은 사진을 서로 주고받으며 사이버 섹스'를 했다는 점이 밝혀져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 당신의 뜨거운 불기둥 때문에 내 사타구니 사이로 애액이 흘러서 넘쳐요 ! "
따위를 남발하면서 말이다. < 애액 > 이라는 단어에서 한참을 웃었다. 얼마만에 들어보는 단어인가 ! 중학교 때 세운 상가'에서 몰래 구입했던 빨간책에서나 보았던 단어였는데, 평소 존나 교양 있는 척을 하며 바로크에서 로코코까지의 예술사를 꿰뚫고 있던 입에서 이 단어가 튀어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했다. 아마도 애액이 흘러넘쳤던 그녀는 여자를 가장한 " 네카마 "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 둘의 공통점은 " 속물을 동경하는 잉여 인간 " 이었다. 사이버 공간에서 911 포르쉐를 타고 출퇴근하던 이'는 현실에서는 365 편의점에 앉아서 벼룩 시장 구인 코너를 꼼꼼하게 체크했을 것이고, 상상 속에서는 c컵 가슴에 44사이즈 몸매'였던 그녀는 현실 속에서는 a컵 가슴에 77사이즈였을 것이다. 쌓이는 것은 밀린 고지서과 동창생들이 보내오는 청첩장'일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 그/그녀'와 관계를 맺은 이웃들은 새빨간 거짓말이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이탈자를 제외하고는 더욱 공고히 뭉쳐서 우상을 섬겼다. 어떤 놈은 인간에 대한 예의 운운하며 죽기살기로 대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거짓말이 탄로가 나면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야 정상인데 오히려 강하게 뭉쳐서 공격적 성향을 보인 것이다. 믿숩니까 ? 라고 외치면 일제히 믿숩니다 ! 라고 외쳤다. 곰곰 생각했다. 결론은 인지부조화'였다. 새빨간 거짓말로 자신을 속인 이웃을 비판하게 되면 결국 그 비판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 왜냐하면 새빨간 거짓말을 한 그들을 비판하게 되면 결국은 새빨간 거짓말에 속은 자신 또한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 불일치 > 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믿었던 행동이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거짓말쟁이'를 오히려 옹호해서 < 불일치 > 를 < 일관성 > 으로 바꾼다. 황우석 사태'가 전형적인 인지부조화 현상'이다. 황빠'들은 황우석을 옹호했다기보다는 황우석에게 속은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서 비겁한 변명을 한 것이다. 이처럼 잉여는 체제 내' 에 포섭되지 않을 때 발생하게 된다. 프로이드의 지적처럼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을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잉여는 겉으로는 체제 내에 소속된 꼰대와 속물의 경직과 우아함을 자유분방한 방식으로 조롱하지만 속내는 부러움'이다. 잉여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속물이다. 그들은 현대판 완장인 사원증'을 차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역설이 존재한다. 단물 쏙 빠진 속물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 또한 잉여'이기 때문이다.
속물은 돈 많이 벌어서 빌딩 사고, 그 빌딩에서 나오는 돈으로 띵가띵가 놀면서 잉여로운 삶을 사는 것이 목표다. 잉여는 적당히 바쁘게 사는 것이 목표이고, 속물은 한가하게 사는 것이 목표이니 이 둘은 기묘한 짝패'이다. 한쪽은 놀고 싶은데 먹고 살려니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다른 한쪽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고 싶은 데 갈 곳'이 없으니 다르지만 동시에 닮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속물과 잉여 모두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둘 다 " 먹고 살기 위한 " 몸짓이니 말이다. 알고 보면 속물과 잉여는 모두 생존자본주의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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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와 힐링을 가장한 감성팔이 책이나 자기계발서'가 꾸준하게 주장하는 것은 " 나에게 채찍을 휘두르자 ! " 이다. 이들 책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주장은 모든 문제는 < 모자란 내 탓 > 에서 시작된다. 당신이 그 모양 그 꼴인 이유는 5분 늦게 일어나기 때문이고, 한 숟가락을 더 떠먹기에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것이고, 사람을 다루는 처세가 부족하기에 비정규직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사회와 제도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기에 앞서 내 탓을 하자는 것 ! 기득권이 보기에 이보다 좋은 조언도 없다. 이런 메시지'가 박정희 정권'이후로 계속 지속되다 보니 이젠 세뇌'에 가까운 정언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한국인은 < 네 탓 > 을 어른스럽지 못한 부끄러운 태도라 생각하고 < 내 탓 > 을 당연한 도리와 반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 내 탓 > 이 지나치면 자학이 되고 자학이 깊어지면 우울증이 된다.
우울'이란 화를 외부 대상에게 쏟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향할 때 생기는 병이다. 자기 자신을 향한 공격이 우울증'이고, 그 처벌 수위가 높아지면 자살이 된다. 대한민국이 자살률 1위인 까닭은 바로 < 내 탓 > 을 강요하는 사회 탓'이 크다. 차라리 < 내 탓 > 보다는 < 네 탓 > 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내 탓'은 지배 계급이 퍼트린 노예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줘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 악랄 > 하게 살면 안 되지만 < 지랄 > 하며 사는 것에 대해서는 용서할 필요가 있다. 계급 연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고소하려 했던 포르쉐 쌍놈과 44사이즈 쌍년을 용서하기로 했다. 나는 당신보다 더한 잉여킹'이니깐 말이다. " 하여튼.... 씨발것들아, 잘 먹고 잘 살아라 ! " 이 말은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