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은 늘 사회에 가해지는 징벌로 간주된다. 에이즈를 둘러싼 은유도 일종의 징벌로 부풀려짐에 따라, 사람들은 에이즈가 필연적으로 전 세계에 확산될 것이라는 주장에 길들여졌다. 성 관계를 통해 감염되는 질병은 전통적으로 이런 식의 대접을 받기 마련이다. ...... ( 중략 ) 파국을 가져오는 유행병들을 도덕적 방종이나 정체의 쇠퇴를 알려주는 징표로 해석하는 이런 방식은, 죽음의 질병을 외래의 산물(또는 결멸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공포를 안겨줬던 소수자들)과 결부시켜 왔던 19세기에는 흔한 일이었다...... 질병을 죄인이나 가난한 사람들과 결부시키는 이런 반응은 언제나 중간 계급의 가치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특히 규칙적인 습관, 생산성, 감정에 대한 자제심을 결여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나중에 가서는 건강 그 자체가 이런 가치들과 동일시됐는데, 이 가치들은종교뿐만 아니라 상인들의 요구에도 부응하는 것이었다. 건강은 미덕의 증거였으며, 질병은 타락의 증거였던 셈이다.
- 에이즈와 그 은유, 수전 손탁
최병승, 천의붕 그리고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 성재기'가 실종되었다는 글 밑에 누군가가 인과응보'라는 덧글을 달았다. 사자성어'를 써가며 논리를 펴는 것을 보면 배운 티'가 났다. 좋게 말하면 인과응보'이지만 속뜻은 < 죽어도 싸다 > 는 논리'이다. 내가 반론을 제기했다. " 한 인간의 불행한 사고를 두고 인과응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천박한 짓이니 입 닥치고 똥이나 싸시오 ! " 이에 따른 예상 가능한 답변, " 혹시 남성 연대 회원이니 ? 개 마초 꼴통 수컷이구나 ? " 나는 한순간에 성재기 지지자'가 되었다. < 적대적 대상 > 이라면 죽음마저도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태도'는 혐오스럽다. 노무현 서거 때 보여주었던 각하의 유유자적과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인과응보'를 거들먹거리는 태도는 비슷하다. 다르지 않다. 자신이 증오하던 대상이 죽었을 때에는, 굳이 그 죽음 앞에서 애도'를 보일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예의'는 갖추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예의' 말이다.
나는 성재기가 주장하는 말에 동조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얼토당토 않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성불평등 순위가 조사대상 137개국 가운데 107위'인 최하위국가에서 남성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 더 큰 모순은 남성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여성'을 라이벌'로 세웠다는 점이다. 얼토당토 목금토, 일'요일은 당연히 짜빠께띠'다. 징징거리는 서사'다. IMF 이후 언론은 집요하게 고개 숙인 남성 사회'를 다루기 시작했다. 문제는 고개 숙인 남성'을 다루면서 그 원인으로 여권신장'을 지목했다는 점이다.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그 흔한 클리세'를 흩뿌리면서 말이다. 성재기가 선택한 전략과 언론 데스크를 장악했던 4,50대 남성 꼰대'가 퍼트린 < 고개 숙인 남성 동정론'> 에 대한 접근법'은 매우 흡사했다.
당당한 여성'의 위풍당당은 고개 속인 남성 심리를 위축시키는 데 큰 몫을 차지했다는 논조는 거짓말이다. 당당한 여성'은 남성들이 쫒겨난 틈새 자리'를 노린 결과'가 아니다. 더군다나 당당한 여성은 몇몇 특권을 가진 성공한 직업여성'에 대한 이야기일 뿐, 대부분의 여성은 IMF로 인해 남성들보다 더 큰 고통'을 받아야 했다. 남성의 고통 지수가 4라면 여성은 7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는 남성이 고통받으면 여성은 더욱 고통받는 구조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 " 언론이여, 시부랄... 입 닥치고 똥이나 싸라 ! " 한국 언론이 제대로 작동된 적은 한번도 없다. 각하와 근혜 정권에서만 언론은 불공정 보도'를 했던가 ? 눈물이 앞을 가린다.
성재기'는 남성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성적 소수자인 여성 인권'부터 말해야 옳다. 그것은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 환경은 무시하면서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노동 환경에만 큰 목소리'를 내며 징징거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무시하면 안 된다. 새 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천둥소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잔 손탁이 한 말 ( 손탁은 " 건강은 미덕의 증거이고, 질병은 타락의 증거 " 라는 일반적 믿음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 을 살짝 비틀어서 " 행복은 미덕의 결과이고, 불행은 타락의 결과 " 라는 일반적 믿음은 헛소리'에 가깝다. 쉰소리다.
불행은 인과응보'에 따른 필연적 결과'가 아니다. 불행한 삶을 산 사람은 반드시 타락한 삶을 산 것에 대한, 신이 내린 정당한 복수가 아니다. 불행은 사회적 < 증후' > 로 읽어야지 착하게 살지 못한 사람에 대한 명징한 < 증명' > 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소리'이다. 불행이 타락의 결과라면 쿠데타로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이 누린, 이토록 판타스틱한 극락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가 대한민국에서 누린 천수는 바르게 살아온 날들에 대한 선물이었을까 ? 잘잘못을 떠나서 성재기, 살아서 돌아왔으면 싶다. 종적을 감춘 것도 쇼'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비난을 나는 하지 않겠다. 그러니 살아서 돌아오라.
최병승과 천의붕'이란 사람이 있다. 아무도 모르리라 ! 어쩌면 모를 수밖에 없다. 모든 언론이 외면했으니 말이다. 비가 오면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피해 상황을 전달하고, 장마철에 대비한 위생 관리'에 대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뉴스 대부분은 생활백서'에 할애된다. 살모낼라 균에 대한 척결 의지와 웰빙과 웰-다잉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참... 친절하다. 이러다가는 방송국에서 시청자 똥구멍까지 닦아줄 심산이다. 방송은 대중을 위한 기쁨조인가 ? 심지어는 영국 왕세자비'가 득남을 했다는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룬다. MBC는 왕세자비 신생아의 체중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다음 날에도 왕세자비에 대한 훈훈한 이야기를 전한다. 남의 나라 갓난이'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심을 가지던 언론은 정작 굶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오른 두 명의 철탑 노동자'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 침묵은 금이 되지만 때론 악'이 되기도 한다.
당신은 오로지 자신이 누릴 < 행복 > 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 블링과 힐링'이 목표다. 중국 영화 감독 장률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중국의 오늘은 어둡다. 미래는 모르겠다. " 내가 하고 싶은 말도 같은 말이다. " 한국의 오늘은 어둡다. 미래는 모르겠다. " 만약에 한참 세월이 흘러... 그때 그 철탑 노동자'가 투신해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 저 사람들에 비하면 내 삶은 행복하구나. " 타인의 불행에서 위로'를 얻는 것, 그것은 내적 성찰'이 아니라 이기심'이다. 연민'을 느끼는 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보다 가치 있는 것은 고통을 공유하는 것이다. < 측은지심 > 은 연민'이 아니라 < 역지사지 >에 가깝다.
꽃잎은 무겁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볍기에 바람에 날린다. 바람보다 가벼운 존재만이 흔들리고, 떨어지며, 날린다. 그러므로 꽃이 지는 풍경을 두고 < 낙화 > 라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은 낙화가 아니라 < 비화/飛花 > 이다. 먼지는 바람보다 가볍기에 날리는 것이니, 같은 이유로 바람은 바위보다 무거운 비행기'보다 더 무거운 존재'다. 그러므로 모래알이나 바위나 물 속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행복과 불행, 미덕과 타락'도 매한가지다. 또한 인간에 대한 귀함과 천함도 그렇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고, 사람 사이에 높고 낮은 것 없다. 두 명의 노동자가 있다. 그들은 철탑에 올랐다.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오르지 못하는 길'이다. 누군가는 그들이 선택한 불행을 통해서 위안을 삼을 것이다. 고통을 외면된, 타인을 향한 위로'는 가짜다.
살아서 내려왔으면 싶다. 살아서 돌아오라. 최병승, 천의붕 그리고 성재기'는 돌아오라. 이 세상에는 죽어도 싼 놈은 없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배제하는 태도는 나쁘다. 이 세상에 잡초'란 이름을 가진 풀은 없다. 당신이 잡초라고 부르는 풀은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여튼 살아서 돌아오라, 오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