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티카 / 스피노자 > 를 읽은 적은 없지만 < 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 를 읽은 적은 있다. < 에티카 > 라는 단어'가 스피노자'가 특허를 낸 낱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대중의 " 암묵적 동의 " 와 " 정서적 합의 " 라는 것이 있다. 에티카(윤리학) 하면 스피노자'다. 그런데 신형철이 쓴 < 몰락의 에티카 > 에서는 스피노자'에 대한 언급이 한번도 없었기에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 작가의 말 > 을 대신한 프롤로그'를 훑어보아도 스피노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대신 3페이지 분량이 조금 넘는 프롤로그에는 프로이트, 니체, 하이데거, 들뢰즈/가타리, 토마스 만, 르네 지라르, 루카치, 밀란 쿤데라, 가라타니 고진, 셰익스피어, 알랭 바디우'와 같은 세계 지성인의 이름이 미친 듯이 쏟아진다. 한국 문학 평론집을 읽을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이 < 진풍경 > 은 언제나 씁쓸하다. 정작 스피노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신형철은 < 에티카 > 를 읽지 않은 것은 아닐까 ? 그런데 타이틀로 < 에티카 >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좀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 판단이다.
나 또한 스피노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 에티카 " 라는 책 제목과 " 깊게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라 ! " 라는 잠언이 전부였다. 내가 스피노자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윤리학'이란 말 자체가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17세기 철학자'라는 옵션도 크게 작용했다. 철학의 계보'를 따라 체계적으로 읽기에는 나는 지나치게 아마츄어였다. 현란해서 현기증이 나는 현대 철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 하지만 들뢰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길래, 일단은 알기 쉽게 풀어 쓴 스피노자 입문서인 < 비참할 땐 스피노자 > 란 책을 읽기로 했다. 하지만 책을 처음 넘겼을 때의 당혹감'이란......
우선 책 만듦새'는 뭔가 초현실적'이다. 표지 디자인에 사용된 서체는 마치 불량 식품 봉지에 인쇄된 조악한 글자 같다. 굴림체도 아니고, 돋움체도 아닌, 그렇다고 영화 자막체'도 아닌 초록색 제목은 압도적일 만큼 충격적이다. 싸구려'에 대한 키치적 접근일까 ? 안'을 살펴보아도 초현실적인 분위기'는 그대로다. 레이아웃은 지방자치단체'에서 급히 인쇄한 홍보물 디자인'보다 후졌다. 이런 책 디자인, 참.... 오랜만이다. 출판사 < 동문선 > 보다 후진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책 디자인에 신경을 쓰는 출판사가 책 내용도 훌륭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앍고 있는 나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읽어보기로 한다.
그런데 반전은 지금부터다. 처음에는 30분 정도 대강 훑다가 던져버릴 생각이었는데 내용은 책 모양새와는 달리 매우 알찼다. 스피노자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발타자르 토마스'가 쓴 내용은 성실했고, 번역은 무척 깔끔했다. 번역된 철학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그 신랄한 번역투'는 깔끔하게 정리 정돈이 되어 있었다. 오히려 이 책에 비하면 신형철이 쓴 < 몰락의 에티카 > 가 번역투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존재'는 스피노자 자체'이다. 카프카 식으로 말하자면 스피노자는 < 도끼 > 와 같은 존재였고,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스피노자는 < 망치 > 와 같은 존재였다. 여기에 사족을 하나 더 붙이자면 김훈 식으로 말하자면 스피노자는 < 칼 > 과 같은 존재였다.
이 짧은 스피노자 소개글을 읽고 < 에티카 >를 판단하는 것은 우습지만, 내가 이 책에서 경험한 < 에티카 > 는 21세기 신경과학자가 타임머신을 타고 17세기로 돌아가 작성한 텍스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피노자에게는 철학자 특유의 관념적 허세'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철저하게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몸과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놀라운 사실은 스피노자는 17세기 인간'이라는 점이다. 현대 신경 뇌 과학자들이나 알 수 있는 정보'를 스피노자는 이미 400년 전'에 이미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뇌 신경'에 관심이 많아서 뇌 신경 과학서'를 꽤 읽었는데 현대 뇌 관련 과학서'들이 말하는 뇌와 마음의 관계는 이미 스피노자가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혹시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는 아니었을까 ? 내게 있어서 스피노자는 < 미래의 철학자 > 이자 < 미지의 철학자 > 이다. 그러므로 < 에티카 > 는 < 미래의 책 > 이면서 < 미지의 책 > 일 것이란 판단이 든다. < 비참할 땐 스피노자 > 는 주전 공격수들이 헛발질과 똥볼을 찰 때, 수비수와 예비 후보들이 선전을 펼친 축구 경기'와 같다. 출판사'가 성의 없이 헛발질'을 할 때, 이 책을 살린 것은 전적으로 스피노자, 발타자르 그리고 번역가의 힘이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