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장국영이 자신을 버린 어머니가 사는 집을 찾았을 때'이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어머니는 만남을 거부한다. 어머니에게서 다시 한번 버림받은 그가 뒤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씩씩하게 걸을 때, 화면은 빠른 걸음과는 달리 어느 순간 슬로우모션'이 되어 느린 걸음으로 바뀐다. 재촉은 지연된다. 어깨는 바위처럼 무겁다. 이 빠른 걸음과 느린 걸음이 주는 대비는 주인공이 품고 있는 겉과 속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빠른 걸음이 그가 어머니를 향해 내뱉는 위악'이라면, 느린 걸음은 어머니 곁에 머물고 싶은 그리움이다. 어머니는 커튼이 쳐진 창가에서 파랑에 출렁이는 배처럼 흔들리는 아들의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앞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뒤에서 보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초라한 어깨'다. 내것이 아닌 타자의 어깨'는 늘 마음 속에 오래 남는 법이다.
- 모두 다 예쁜 말들 vs 아비정전 중
오즈 야스지로'와 뒷모습.
오즈 야스지로는 대상을 향해 쉽게 나아가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감독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간섭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는 늘 한발 치 물러난 지점에 고정되어 있다. 그의 카메라는 주인들이 하는 대화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히 곁을 지나가는 늙은 고양이 같다. 이처럼 그가 다루는 카메라는 엉덩이'가 무겁다. 설령, 배우들의 동선으로 인하여 특정 배우가 등을 보일 때에도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촬영 교본에 의하면 그것은 N.G다. 왜냐하면 영화 카메라는 집요하게 배우의 얼굴을 따라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오즈의 카메라는 직무 유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오즈 야스지로는 찬란한 얼굴 표정이 보여주는, 그 현란한 메시지'보다는 둥근 어깨가 전하는 침묵이 더 강렬하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감독이었다. 그는 채플린과 함께 뒷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찍는 사람이었다. 홀로 남은 아버지 곁을 떠나야 하는, 결혼을 앞둔 딸은 결혼 날짜가 다가올수록 늙은 아비'에게 미안하다. 아버지는 그런 딸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컴컴한 다다미 방에 앉아 딸에게 속내를 말한다. 행복하게 잘 살아라, 늙은 애비 걱정은 말아라, 청춘은 60부터다. 허허허허허. 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듣고만 있다. 우리는 딸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카메라는 뒷모습만 오랫동안 비춘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침묵이 길어지면 속내를 들키는 법.
여기에는 그 수많은 대사와 표정이 필요 없다. 뒷모습 하나면 된다. 앞모습을 보고 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열정'에 불과하다. 사랑은 뒷모습마저 간절히 그리울 때 완성되는 감정이기 때문에 그렇다. 얼굴은 타인을 한순간에 사로잡을 수는 있지만 어깨는 곁에 오래 두고 보아야지만 사랑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은 뒷모습'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앞모습이 매력 있으면서 동시에 뒷모습마저 매력 있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결핍이 존재하지 않는 자는 사랑스러운 대상이 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움직이지 않은 카메라'로 찍은 영화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반면에 움직이는 카메라로 찍은 영화들은 현기증이 났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왜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를 좋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속 시원하게 설명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10년 사귄 여자와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는 무뚝뚝한 어깨를 닮았다. 나는 그 여자의 어깨를 사랑했다. 어깨는 바위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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