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낙지와 가위 그리고 노무현
말이 좋아 " 나이프 " 이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 식칼 " 이다. 종종 중세 풍경을 다룬 그림을 보면 식탁 위에 돼지가 통째로 올려져 있는 모습을 보고는 한다. 그러니깐 나이프'는 사체'를 해부하기 위한 용도'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도살 작업이 식탁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나이프 문화'보다는 젓가락 문화가 열 수 위'다. 젓가락 문화에서 칼질'은 반드시 부엌에서만 이루어진다. 엘리아스의 표현을 빌리면 젓가락은 우아하다. 동양에서는 식사 도중 다툼이 생기면 밥상을 엎지만 서양에서는 종종 나이프'로 찌르거나 포크로 찍었을 것이다.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370810 : 낙지 사회 )
- 낙지 사회 중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 문명화 과정 > 에서 동양의 젓가락 문화'를 세련된 문명화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식재료'에 대한 해체 작업은 부엌에서만 이루어지고 식탁에서는 우아하게 젓가락질'만 하면 된다. 반면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서양'은 동양에 비해 비문명화된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부엌에서 이루어져야 할 식재료 해체 과정이 식탁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다 젖혀 두고서라도 일단 식문화'에서는 동양이 한 수 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산낙지'를 손님이 보는 앞에서 펄펄 끓는 냄비 속에 넣는 식당 풍경'은 한식 문화의 퇴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모양이 예쁘지 않은 생선은 제삿상에도 올리지 못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이 살벌한 풍경 앞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숨탄것'을 볼거리'로 이용하려는 태도는 천박하다. 생명 윤리'에 대한 코딱지 만한 관심이라도 있었다면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 때문에 몸부림치는 낙지'를 보며 침을 흘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식문화의 퇴화'는 < 빨리빨리 > 문화가 정착되면서 더욱 노골적인 형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열에 달아오른 뚝배기'를 이'를 뽑는 집게'처럼 생긴 도구'로 잡아 식탁 위에 내려놓는 모습은 일상이 되었다. 열 때문에 거품은 미친듯이 끓어올랐다가 터지기를 반복한다. 뜨거운 것을 좋아하는 민족이라고는 하나, 적어도 거품이 미친듯이 춤추는 과정은 주방에서 처리해야 될 과정은 아닐까 ? 그리고 이제는 거의 모든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위'다. 언제부터인가 재단 공장에서나 있어야 할 가위가 식탁에 버젓이 놓여 있다. 이상한 진풍경이다. 냉면집에 가면 종업원들은 자랑스럽게 손님이 보는 앞에서 가위질'을 한다. 볼 때마다 항상 의문이다. 냉면을 자르는 행위 자체'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이러한 절단( 해부, 해체 ) 작업은 부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건 상식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식당에는 무식한 가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고기를 자르고, 냉면을 자르고, 김치와 무를 자른다. 무식한 짓'이다. 이건 한국 음식 문화가 산업 사회'로 진입하면서 이상한 방식으로 퇴화를 거듭하는 중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에 갓 쓴 조상 앞에서 가위로 냉면을 자르다가는 천한 것이라며 쌍욕을 먹었을 것이 분명하다. 곰도 아니면서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가지도 아니면서 가지가지 생각을 해 보았고, 별도 아니면서 별별 생각을 다 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어이없다. 결국은 빨리빨리'다. 한국인은 음식을 주문한 지 10분이 지나면 불쾌한 얼굴 표정을 짓는다. 정확히 11분이 되면 종업원을 호출한다. 그러니깐 모든 한식'은 10분 안에 세팅이 완성되어야 한다.
누가 한식을 슬로우 푸드'라고 했던가 ? 식당에서 파는 한식'은 이제 더 이상 슬로우 푸드'가 아니다. 패스트 푸드'다. 주방에서는 당연히 10분 안에 음식을 완성해야 한다. 11분이 되면 주인은 불호령을 내리리라. 결론은 완성되지 않은 음식을 내보내는 것이다. 주방에서 잘라야 할 냉면은 시간 관계상 생략하고 손님이 보는 앞에서 남은 뒷처리'를 하는 것이다. 결국 가위'가 식당 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유는 손님과 주인 간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손님 입장에서는 주문한 음식이 빨리빨리 나와서 좋고, 주인 입장에서는 테이블 회전율에서 이득을 본다. 결국은 천박한 문화'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살아있는 낙지와 가위 그리고 집게'는 부엌에서 밖으로 내놓으면 안 될 식재료이거나 주방 도구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들을 자랑스럽게 밖으로 꺼내놓는다. 이것을 두고 괴팍한 과시 효과'라고 해야 할까 ? 낙지는 부엌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가위와 집게도 손님들이 보지 못하도록 부엌에서나 사용되어야 할 도구'인데 말이다. 그것을 꺼내서 식탁에 내놓으면 미성숙한 문화가 되는 것이다. 감출 것은 감추어야 된다는 말이다. 포르노가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감출 부분을 적출했기 때문이 아닐까 ? 속내는 은근히 보여줘야지 예술이 되는 것이지 까뒤집으면 프로파간다'가 되거나 포르노가 된다. 바로 그 점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것'이다.
노무현의 NLL 문서'는 국정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부엌에서 보관되어야 할 주방도구'이다. 옛날이라면 조선 시대의 사초 ( 史草 ) 와 같다.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던, 천하를 호령하던 임금'도 절대 읽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사초'다. 사초를 읽는 순간 현대 사극의 단골 주인공이 된다. 그런데 지금 국가는 너 나 할 것 없이 NLL문서를 부엌 밖으로 꺼내서는 손님 앞에서 가위질'을 존나 하고 있는 것이다. 알 권리'라는 오색찬란한 변명을 대면서 말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인가 ?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당신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피가 거꾸로 솟아야 한다. 그것은 노무현을 지지했는가, 지지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보수인가 진보인가에 대한 문제도 아니다. 대통령 정상회담 기록 문서'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은 국가 원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죽은 자에 대한 일말의 대우'다. (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정상회담 내용도 공개했으나 차후에 박근혜 정상회담도 공개하라,는 두고 보자 식 주장 또한 무식한 말이다. ) 그런데 지금 이 풍경은 재미 삼아 죽은 시체에 칼을 푹푹 찌르는 꼴이다. 한국 사회는 이상한 방식으로 천박해지고 있다. 펄펄 끓는 냄비 속에서 살아있는 낙지가 몸부림을 치면 입에서는 침이 고이고, 주방에서 미처 하지 못한 작업'을 손님이 보는 앞에서 가위질'로 주방에서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한다. 냉면 면발을 싹뚝, 잘 익은 무도 싹뚝 ! 우리는 그것을 무뚝뚝~
하게 바라본다. 내가 보기엔 < 노무현의 NLL > 은 해물탕 가게에서 주인이 손님 앞에 내놓은 살아있는 낙지'와 똑같은 신세다. 싱싱한 생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인 ( 정치가 ) 은 손님 ( 국민 ) 앞에서 산낙지를 부글부글 끓는 냄비 속에 넣는다. " 요래, 요래, 오래 ! 낙지가 힘차게 꿈틀거리는 거 보십시요. 지랄하는 거 보이십니까 ? 얼마나 싱싱하면 끓는 물 속에서 3분 동안이나 꿈틀거리겠습니까 ! 하하하. " 처절한 고통(死) 을 싱싱한 것 (生)으로 인식하려는 심리'는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 일말의 동정이 있다면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못하리라. 그래서 두 말 하지 않으련다. 세 말 하면 잔소리이니 말이다. 내 말 명심해라. 내가 한 말을 털려면 마굿간에서 하길 바란다. 당신은 보글보글 끓는 해물탕 냄비 앞에서 침이 고인다. 배가 고프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