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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글(文')을 주고 생선'을 얻다.
클림트'에 빠져든 적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첫사랑 때문에 그녀가 좋아하던 화가의 그림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클림트'보다는 에곤 쉴레'를 더 좋아했다. 클림트는 꽃 ( 봄 ) 이었고, 쉴레는 잎 ( 가을 ) 이었다. 꽃 진 자리'보다 잎 진 자리'를 좋아한 탓이다. 나는 에곤 쉴레의 그림을 볼 때마다 아, 바닥을 보게 된다.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 문태준, [ 바닥 ] ) 내가 김훈이 쓴 < 칼의 노래 > 를 읽었을 때 느꼈던 첫인상은 에곤쉴레'가 그린 그림 이미지'였다. 바짝 마른 문체. 최대한 수식을 배제한 단정한 단문은 에곤 쉴레가 그린 그림 속 벌거벗은 오브제를 닮았다.
하지만 놀랄 만한 데뷔'는 종종 오랜 슬럼프'를 겪기 마련이다. < 현의 노래 > 에서부터 시작된 기시감은 내내 김훈이 쓴 소설'에 달라붙었다. 거문고'는 칼'이라는 단어'와 겹쳤고, 우륵은 이순신과 겹쳤다. 동어반복이 주는 피로감은 김훈에 대한 호기심을 상쇄시켰다. 그 후 몇 년이 흘렀다. 그의 소설은 지겼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꼬박꼬박 읽었다. 여전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여전히 지겨웠다. 다시 < 흑산 > 을 읽었다. 곰곰 생각했다. 그리고는 < 흑산 > 을, 다시 읽었다.
김훈은 변함이 없다.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진보가 인간과 미래'에 대해 희망을 거는 진영이라고 한다면 김훈은 철저한 보수'다. 그가 보기엔 역사는 진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김훈의 반대말은 사르트르'다. 농담을 섞어 말하자면 김훈은 레비스트로스-주의자'에 가깝다. 김훈은 역사적인 진보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 대해 늘 회의적이었다. 역사는 대책없이, 혹은 주책없이 반복된다.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 레비스트로스, 슬픈열대 ) 그는 조선시대 민초의 비참에 대해 말하지만 사실은 현대인에 대한 비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소설 < 흑산 > 은 < 자산어보 > 를 쓴 정약전이 머문 유배지'이다. 김훈은 < 칼의 노래 > 첫 문장에서 "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 라고 썼지만, 유배된 섬 흑산은 그나마 꽃조차도 피지 않는 캄캄한 섬'이었다. 명민한 학자였던 정약전은 바로 이곳에서 59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죽어간다. 인간에 대한 희망은 버린 채 비린내나는 물고기를 관찰하다가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는 왜 인간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어류 생태에 대한 글을 썼을까 ? 그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환멸이 아니었을까 ?
어부의 자식들은 정약전에게서 글을 배웠다. 배움이 얕은 어부의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은 천자문과 < 소학 > 이 전부였다. 정약전은 아이들에게 글( 語,文,學)을 가르쳤고, 어부는 자기 자식에게 글을 가르쳐준 대가로 생선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語)과 물고기(魚)는 서로 등가교환이 성립된다. 결국 말'이란 밥(벌이)보다 가치가 높지도 낮지도 않다. 말은 밥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배움은 그것으로 족하다. [ 소학 ]의 가르침은 물 뿌려서 마당 쓸고 부르면 응답하는 것이다. 이치와 도리, 그리고 배움은 이처럼 간단한 것이다. 하지만 권력을 탐하는 자는 말을 배워刀로 쓰거나 말에서 力을 얻으려고 한다. 물 뿌리고, 마당 쓸고, 부르면 방긋 웃으며 답하는 것으로 족한 것을 말이다.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하루종일 비린내나는 물고기와 놀았다. 흑산은 봄이 오면 꽃 피지 않았으나 가을에는 공중에도 소리가 있어 잎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문태준 시인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