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이런 말을 한다 : " 사람 얼굴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 " 하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온 모든 정보가 집약된 텍스트'이다. 오히려 얼굴을 무시하고 비싼 명함과 명품에 혹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를 오독할 가능성이 더 높다. 시간을 오래 두고 만날 사람이 아니라면 일단은 타인의 얼굴'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나는 책을 볼 때에도 겉모습'을 유심해 살핀다. 표지 디자인은 물론이고, 판형, 줄과 자 수'까지 센다. 편집 디자인도 검토한다. 책 디자인'을 꼼꼼하게 검토하는 출판사는 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출판사이다. 반면 내용만 믿고 디자인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출판사는 게으른 출판사'이다.
출판사 사흘'에서 나온 < 지속의 순간들 > 은 출판 기획'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0점에 가깝다. 텍스트를 고려하지 않은, 별 생각없이 진행한 출판 기획이 자칫하면 훌륭한 책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 할 수 있다. 생김새만 놓고서 반대말 놀이'를 해보자. 책의 반대말은 사진이다. 책은 일반적으로 세로가 길고 가로가 짧은 직사각형'이다. 이에 반해 사진은 세로가 짧고 가로가 긴 직사각형'이다. ( 물론 세로 찍기 사진도 있으나 일반적인 형태를 논한 것이니 여기서는 예외로 하자. ) 이처럼 책과 사진은 겉모습이 서로 반대'다. 그러므로 책의 반대말은 사진'이다.
출판사 " 사흘 " 은 책과 사진이 가지고 있는 상반된 외형'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일반적인 책 형태' ( 가로 짧고, 세로 길고... ) 는 사진이나 그림'을 담기에는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가로'가 짧기 때문에 삽입된 이미지'들이 대부분 크기가 작은 형태로 입력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이 그림책 대부분은 일반적인 판형에서 벗어나 가로가 긴 변형판으로 출간이 된다. 가로 길이가 길어야지 삽입될 그림이 크고 선명하게 인쇄가 되기 때문이다. 정사각형 상자를 가장 효율적으로 담을 수 있는 상자는 정사각형 상자'와 같은 이유이다. 이러한 고민은 어린이 책에서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사진 에세이 < 뒷모습 > 은 일반적인 판형을 벗어나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습을 선보인다. 그래야지 가로 찍기'로 찍은 사진'들이 보다 큰 크기로 입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에세이'란 결국 글이 아무리 좋아도 사진이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 같은 예로 문학동네에서 나온 < 필경사 바틀비 > 는 아예 가로 길이가 세로보다 길다. 하비에르 사발라의 예술적 삽화를 부각시켜서 다른 출판사와 차별화를 두려고 한 출판사의 기획 의도'로 읽힌다. 이처럼 이미지'가 책 읽기에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되면 일반적으로 가로 길이'를 키워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그런데 출판사 < 사흘 > 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일반 판형이었다면 이런 글은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 지속의 순간들 > 은 일반적인 판형에서 가로를 1 센티미터 줄였다. 결론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판형'과 매우 흡사한 모양이 된 것이다. 설상가상 문서 테두리 설정에서 여백을 크게 두어서 그 폭은 더, 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욱 좁아졌다. ( 미리 보기'에 나온 스트랜드의 " 눈 먼 여인 " 은 이 여백 설정을 벗어나 크기를 키운, 유일한 예외다. 미리 보기'를 활용해서 이 책을 구매한 사람들은 모두 이 책에 삽입된 사진 크기가 그 정도는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선 나부터가 그런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
형태가 이런 식이다 보니 사진은 크기가 대폭 줄었다. 페이지 한 면 전체를 한 장의 사진'으로 할애했지만 놀랍게도 사진 크기가 참 크래커와 유사한 사진이 수두룩하다. 눈이 나쁜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진 디테일을 살펴볼 엄두가 안난다. 마치 포켓북 판형 안에 삽입된 < 천지창조 > 를 보는 듯하다. 제프 다이어가 쓴 글은 매우 훌륭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형편없는 책이 되었다. 출판사가 적어도 사진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이런 황당한 설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글은 작가가 만들지만, 좋은 책은 출판사가 만든다. 이 또한 만고의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