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다 > 에 대한 이야기 : 책과 엉덩이는 하나'다.
사탕이 담긴 유리병이 있다. 맛있는, 아 ! 추파춥스. 사탕 주인은 아이에게 손을 넣어 마음껏 가져가라고 한다. 기회는 한번이다. 아이'가 유리병 속에 손을 넣어 욕심껏 사탕을 움켜쥔 후 손을 빼려는데 빠지지가 않는다. 사탕을 욕심껏 한움큼 쥐면 유리병 목이 좁기에 손을 뺄 수 없다. 아이는 운다. 그때 사탕 유리병 주인이 타이른다. " 아이야, 손에 쥔 사탕을 몇 개 놓아주렴. 물고기를 물에 놓아주듯이 말이다. 그러면 손이 빠질 거란다. " 이 동화가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욕심을 버리라는 말이다.
탐욕을 말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 < 움켜쥔 손 > 이다. 여기서 < 꽉 쥔 손 > 이라는 표현과 < 움켜쥔 손 > 이라는 표현'은 다르다. 주먹'은 정직한 노동자의 손이고, 움켜쥔 손은 탐욕스러운 자의 손이다. 케테 콜비츠'는 정직한 노동자를 스케치 할 때는 늘 불끈 쥔 주먹을 표현했다. 케테 콜비츠에게 있어서 주먹은 폭력적 도상'이 아니라 정직한 힘에 대한 은유이다. 반면 " 움켜쥔 손 " 이미지는 대부분 평판이 좋지 않다. 대표적인 장르가 신파'다.
이수일은 말하고 심순애는 운다. " 놔아아아라,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도 좋더냐 ? " 신파는 이처럼 떠나보내야 할 대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놓지 못하고 바지가랑이를 잡고 질질 짜는 서사'다. 대한민국 일일드라마의 팔 할은 바지가랑이나 치맛자락에 매달려 우는 손'에 대한 이야기다. 말이 좋아서 사랑이고, 순정이고, 나발이지 까놓고 말하자면 구질구질한 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코드'를 확장하면 결국 윤창중으로 끝이 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글의 끝맺음은 윤창중 씨'로 끝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윤창중으로 가기 위한 간이역'인 셈이다. " 이 역의 종착역은 윤, 창중. 윤창중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 끝까지 읽기를 권한다. 나는 종이책'이 전자책'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개인적 바람'이 반이니 불안한 주장이다. 근미래 사회에서 전자책으로만 독서를 해야 하는 상황은 마치 내 옆 좌석에 이명박 각하와 9시간 걸리는 볼리비아행 비행기 여행을 함께 해야 하는 꼴과 비슷하다. 아, 생각만 해도 황홀해서 몸이 존나 떨린다. 물론 가카가 일반석에 앉을 가능성은 없겠지만 말이다.
독서는 눈(시각)과 함께 손(촉각)을 만족시키는 오래된 상품이었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남기거나, 종이를 접고 서표를 넣어두는 행위 그리고 손끝에서 느끼는 종이 결'은 독서 쾌락의 5할이다. 촉감이 없는 독서는 애서가'를 만족시킬 수 없다. 독서란 기본적으로 < 읽다 > 에 방점을 두는 행위이다. 그런데 모니터는 < 보다 > 에 방점을 두는 기계 장치'이다. 그러니깐 전자책이란 읽어야 할 텍스트를 관람하는 행위로 변환시킨 것'에 불과하다. < 독서 > 가 아니라 < 시서 > 이거나 < 견서 > 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 그것은 마치 볼 수는 있으나 만질 수는 없는 쇼걸의 환상적인 S 라인 소프트 바디'와 동일하다. 나는 차라리 환상적인 S라인 바디보다는 조물딱거릴 수 있는 H라인이나 D라인을 택하겠다. 그것이 현명한 판단은 아닐까 ?
나는 화장실에 갈 때 빤스에 똥 살지언정 반드시 책을 가지고 들어간다. 너무 급한 나머지 책을 들고 가지 않았을 때에는 화장실에 놓인 유한락스 성분분석표를 손으로 뜯어서 읽은 적도 있다. 휴지는 없어도 읽을거리는 있어야 한다. 화장실은 꼬마 한스가 되는 순수한 과정. 가래떡을 밀떡으로 밀어내는 공정이 이루어지는 곳이 화장실이다. 그런데 막상 화장실에서 책을 읽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 그리 많지 않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보다는 책을 손에 쥐고 있다는 안전감 때문에 생긴 버릇이리라. 종이책을 사랑하는 애서가들은 모두 안다. 책을 읽을 때 손이 하는 역할을 말이다. 그 묘한 쾌락적 Grab !!!
애서가와 윤창중은 닮았다. 공통점은 쾌락적 Grab 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애서가는 책을 움켜쥐기를 좋아하는 반면, 윤창중은, 아, 아아 !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책 대신 엉덩이를 좋아한다. 시력이 나쁜 탓이었을까 ? 선생님은 어쩌면 엉덩이를 책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기자 회견장에 나와서 쓸데없이 늘어놓은 변명보다는 차라리 " 엉덩이를 책으로 착각했소 ! 똥 싸고 싶었는데 책을 짚는다는 것이 그만..... 내 눈엔 엉덩이가 책으로 보였소 ! " 라고 했다면 이해를 했을 것이다. 29만 원이 전부라는 두환 씨가 말한 변명보다는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렇다. 책과 엉덩이는 동일하다. 대변인 윤창중 선생님'은 책을 읽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죠, 윤창중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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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포르테 님에게 헌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