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 전자책 그리고 육미집.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리 없듯이 서평 블로거'들은 한 번쯤 < 종이책이냐, 전자책이냐 > 에 대한 생각'을 적고는 한다. 대부분은 아날로그적 감성'에 호소하며 종이책이 가진 우월성을 주장한다. 가난하지만 착한 여자 주인공'에게 보내는 드라마 시청자의 지지'가 읽힌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복고에 대한 향수'가 강해서 디지털에 대한 반감이 있다. 그런데 " 아날로그적 감성 vs 디지털 모더니티 " 의 싸움에서 승자는 항상 디지털 모더니티'였다. 필카'가 디카'에 의해 멸종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 코닥이 파산 신청을 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 이제 35미리 필름 카메라 사용자'는 옛것을 고수하는 청학동 사람들 취급을 받는다. 세상에 이런... 일이.
<종이책이냐 전자책이냐> 논쟁은 마치 <필카냐 디카냐> 논쟁처럼 보인다. 과거에 겪은 경험은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결국은 전자책이 승리할까 ? 개인적 취향이 고려된 판단을 전제로 한다면 : 종이책은 전자책을 신나게 박살내지는 못하더라도 그럭저럭 힘겨운 승리'를 거두리라. 종이책이 전자책을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 촉감 " 이라는 감각의 논리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눈과 손이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각과 함께 촉각이 동시에 진행된다. 눈으로는 정보를 받아들이지만 손가락은 분주히 종이가 가지고 있는 체온과 결'을 감지한다. 하지만 모니터는 접촉이 주는 위안이 없다. 모니터는 < 보는 > 것에 방점이 찍히고, 종이책은 < 읽는 > 것에 방점이 찍힌다. 동일한 텍스트'라고 가정을 해도 전자는 보는 것이고 후자는 읽는 것이다. 독서'에서 독은 읽다'를 의미하는 것이지 본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
여기에 개인적인 독서 취향에 따라 밑줄을 긋거나 종이 모서리를 접기도 한다. 이보다 과격한 사람은 연필로 메모'를 하거나 포스트-잇'을 붙인다. 나 같은 독자'는 종이의 재질을 유심히 본다. 노란 색연필을 긋기 위해서는 형광 모조지'보다는 거친 느낌이 있는 e-light紙'를 선호한다. 손으로 만질 때의 그 촉감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다. 밑줄 긋기에 가장 좋은 책(종이)는 70년대 즐겨 사용되던 산성지'로 만든 책이다. 황변 현상으로 인해 옅은 갈색이 되어버린 거친 종이 말이다. 색연필은 미끄러지지 않고 종이 결 속에 스며든다. 아, 이 느낌을 좋아한다 !
이왕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니 < 종이책 독서 행위 > 는 < 전희 > 와 비슷하다. " 전희 " 란 뜻이 무엇인가는 이 자리를 통해 밝히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 이웃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기 때문이다. ( *** 님 전희'는 숙희 동생 전희'를 말하는 겁니다. ) 각설하고, 종이책을 선호한다는 것은 전희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시각적 욕망뿐만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침을 묻히고, 접고 하는 과정이 바로 전희'이다. 노련한 손기술은 조루를 커버할 수 있는 무기이다. 비아그라'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전희'이다. 상대를 만족시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정성스레 접촉할 때, < 아 > 하는 탄성이 나오게 되어 있다. 사령관이자 상관이신 나으리인 클레어 님이 자주 말씀하시는 상투어를 빌리자면 " 발광 다이오오오오드적 극성 " 이다. 짜릿하다는 말이다. ( *** 님, 성교는 반포대교의 사잇길입니다. 모르셔도 됩니다. )
반면 전자책'은 까탈스러운 접대부'와 같다. 그냥 보기만 할 뿐이다. 저 아름다운 유두'에 침이라도 한번 묻히려고 하면, 손등을 냅다 후려치며 이런 소릴 한다. " 아저씨, 시간 없어요." ( *** 님, 유두는 두유의 자매품입니다. 시중엔 없으니 찾진 마세요. ) 전자책이 딱 그 느낌이다. 쇼윈도우에 진열된 예쁜 마네킹 같다. 이처럼 만질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것이다. 과연 우리가 시집을 전자책으로 읽어낼 수 있을까 ? 정말 그런 날이 올까 ? 종이책이 사라지는 날 시집도 사라지지만 소설은 살아남는다. 시란 본질적으로 모니터로는 읽을 수 없는 장르가 아닐까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독서는 시각과 촉각이 함께 하는 행위'이다.
종각 인사동 쪽에 위치한 < 육미집 > 이 불에 타 전소되었다. 다양하고 저렴한 안주로 주머니 사정이 고약한 서민들에게 이십 년이 넘게 사랑을 받았던 허름한 술집이다. 자주 가는 단골집'은 아니지만 < 육미집 > 이 불에 타 없어지자 왠지 모르게 아날로그적 정서'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편했다. 피맛골은 디자인 서울 계획으로 사라진 지 오래이고, 이젠 왕이 살았던 곳'만 살아남았다. 폐허 위에 다시 건물이 세워질 것이지만 옛것은 종적을 감추고 새것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처럼 사라지는 것은 모두 옛것'뿐이다. 아날로그는 한순간에 사라진다. 남대문이 그랬고, 필름 카메라'가 그랬고, 육미집이 그렇고, 삐삐가 그랬다. 정말 ? 응, 정말 그랬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들이다.
책만큼은 종이책'으로 오랫동안 살아남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