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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연에 울다 ㅣ 문학동네 시집 54
양선희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너에게 보내고 싶은 엽서
양선희
生花는 꽃이 질 때 가슴이 쓰려.
조화가 좋아지니 나이가 들었나 봐.
나 요즘 조화 배우러 다녀.
조화는 신비해. 못 만들 게 없어.
조화에 정신을 쏟아부으니 아픈 게 덜해.
온 집 안에 조화뿐이야.
조화라도 있으니 집이 좀 그럴듯해.
조화를 가만히 뜯어보면
사는 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조화, 너도 한번 배워봐.
조화 모양 초보 때는 엉성해도
생화 같은 조화 만들게 돼.
색 쓰는 법도 알게 되고.
요즘 나 조화에 파묻혀서 지내, 죽은 듯.
시인은 " 요즘 조화 배우러 다" 닌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꽃봉오리 가장 아름답게 터질 때의 화사한 조화'를 만든다. 이유는 " 생화는 꽃이 질 때 가슴이 " 아프기 때문이라며 변명을 한다. 그녀는 생의 유한성'보다는 모조품이 만들어내는 불멸'을 선택한다. 그러나 조화'는 불멸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것, 박제를 떠올리게 한다. 불멸에 대한 애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죽음은 보다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조화에 대한 예찬은 이내 체념으로 끝을 맺는다. " 죽은 듯. " 이, 조화처럼, 답답해.
그녀는 생화에서 조화로의 변화'를 체념하듯 받아들인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마술에 걸린 달밤'을 넘지 못한다. 봄바람 살랑살랑 꽃봉오리 터져도 이제는 설레임이 없다. 월경은 끝을 맺고 폐경기로 접어든다. 씨방 없는 조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 폐경인 그녀'는 씨방 없는 조화'를 통해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낀다. 조화를 가만히 뜯어보면 사는 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 조화라도 있으니 집이 좀 그럴듯해 " 보이기도 한다며 조화 예찬의 이유를 말한다. 하지만 花色 ( 색 쓰는 법도 알게 ) 을 이야기하는 화자는 어딘지 모르게 病色'( 아픈 게 덜해 )이 완연하다. 이 여자, 바람에 꽃대가 흔들리는 이 여자, 위험하다. 찬 가을바람에 단풍 물들기 전에 잎 질라, 걱정이다.
+ 덧.
양선희의 < 너에게 보내는 엽서 > 라는 시에는 문장 끝에 반드시 마침표'를 찍는다. 이 마침표'는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시정'과 맥을 같이 한다. 마침표'는 단절, 고립, 폐경, 죽음에 대한 강박이다. 나는 병색 완연한 타인의 어깨를 좋아한다. 어깨마저 믿음직한 사람은 믿지 않는다. 어깨는 끝이 주는 위로'이다. 얼굴은 유혹하고 매혹, 한다(-된다). 타인에 대한 호감'은 그 사람의 얼굴에서 시작되지만 사랑을 결심하게 되는 것은 어깨'다. 듬직한 어깨는 신뢰를 주지만 쓸쓸한 어깨'는 연민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니깐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은 어깨다.
당신은 믿을 턱이 없지만, 모 시인으로부터 시를 쓰라는 권유를 받은 적 있다. 본의 아니게 개인 교습을 받았다. 어찌나 새심하게 배려를 하셨는지 나중에는 띄어쓰기 오류에서 잘못 쓰인 단어까지 꼼꼼하게 챙기셨다. 내가 신춘문예에 투고를 하는 날에도 시인은 손수 발벗고 나섰다. 인상 깊었던 것은 시인의 따스한 잔소리'였다. " 투고를 하실 때에는 반드시 명조체를 사용하세요. 바탕체, 고딕체 절대 안 됩니다. A4 용지에 작성하실 때에도 산문처럼 보이게 하지 마세요. 심사위원들이 시집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배치를 하셔야 합니다. 심사위원들은 익숙한 패턴'에 먼저 눈에 갑니다. "
아닌게 아니라, 시는 명조체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시인의 지적에 명조체와 고딕체로 각각 인쇄를 해보았다. 말 그대로 같은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고딕체는 산문으로 읽히고, 명조체는 운문으로 읽힌다. 하, 신기하다 ! 나는 명조체로 인쇄는 종이를 신춘문예 담당자에게 보냈다. 물론 나는 떨어졌다. 단 한번의 도전이었다. 지금도 시인은 시 공부를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 예,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 다시 묻는다. "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다르죠. 쓰고 계신가요 ? " 내가 시를 쓰지 않기로 한 이유는 내가 시를 쓸 만큼의 고운 성정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유독 함민복 시인이 생각난다.
+
이 시집 매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