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송'이 빨라서 좋아요 !
( 옛날옛적 아주 오랜 옛날... ) 알라딘에서 배송되는 책을 받기 위해서 약속을 연기한 적 있다. 일주일 전부터 잡아놓은 약속인데 말이다. 부재 시 관리실에 보관되기에, 굳이 약속을 미룰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약속을 어기고 책'을 기다리고는 했다. 소년다운 고집'이었다. 배달된 책을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것과 집에 왔더니 책상 위에 놓인 택배 상자'를 발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전자가 냉장고에서 막 꺼낸 차가운 코카콜라'라면 후자는 냉장고에서 꺼낸 지 오래된 미지근한 코카콜라'였다. 택배를 직접 받아서 그 자리에서 책을 확인하는 행위, 톡... 쏘는 맛이 좋았다.
하지만 배송일'은 정확히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겨울에는 특히 심했다. 왜냐하면 당시 내가 살던 곳은 강원도 속초'였기 때문이었다. 폭설이 내리면 한계령'은 차량들이 넘어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나는 배송 도착 예정일'에는 항상 약속을 잡지 않거나 밤 10시 이후로 술 약속을 잡고는 했다. 사정이 그러하니 예정일'이 하루 미루어졌다고 해서 항의'를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미배송 이유가 < 고객 부재에 따른 미배송 > 으로 찍힐 때였다.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 ? 나는 책 때문에 약속을 잡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약속까지 미뤄가며 텅 빈 방에서 온종일 기다렸는데 말이다. < 고객 부재에 따른 미배송 > 이란 메시지가 몇 번 반복되자,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 고객 상담실에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고객을 1,3,5,7,9로 봅니까 ? 1,2,3,4,5,6으로 보아주십시요 ! ( 띄엄띄엄 보지 말란 소리다. )
항의 때문이었을까 ? 그다음부터는 " 고객 부재에 따른 미배송 " 대신 " 배송 지연으로 인한 미배송 " 이란 메시지가 떴고, 책들은 되도록이면 예정일에 맞춰 도착했다. 아, 착한 알라딘 !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왜냐하면 내 관할 지역을 담당하시던 택배 기사님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일자리를 잃은 것은 아니겠지만, 이 변화가 꼭 내 탓인 거 같아서 꽤나 괴로웠다. 새로 오신 후임 기사 분에게 전임 기사 분의 근황을 물었으나 방그레 웃을 뿐 답이 없으셨다. 문득 형 친구'가 생각났다.
그 형은 공고 졸업해서 별다른 기술을 배우지 못한 채 온갖 배달 일을 했다. 처음에는 잠시 먹고 살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던데 배운 기술 없이 나이를 먹다보니 배달 일이 직업이 되었다. 나는 그 형을 잘 따랐다. 사람을 재지 않을 뿐더라 잰 척하는 구석도 없었고, 윗사람이라고 으시대지도 않았다.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도 우리는 종종 만나서 술을 같이 마셨다. 어느 날, 친형'은 잠시 한숨을 쉬더니 내게 말했다.
" 그 녀석 지금 병원에 있다. 배달하다가 교통사고 당해서 대가리 박살나 병원에 누워 있더라. 썩을 놈 ! 정신 차려야지. 언제까지 배달이냐. 배달은. 면 뽑는 기술을 배우던가...... " 다음날 나는 병문안을 갔다. 형 친구는 병실에 누워 있었다. 나를 보더니 방긋. 으하하하, 웃다가 이내 어디가 아픈지 으아아아, 했다. 그는 내내 으하하'와 으아아'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중심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쌍엽기처럼. 환자를 돌보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가족은 모두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전 재산을 헌납한 후 모 기도원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모양이었다. 형 친구는 그래도 방긋 !
" 내... 내, 내..가 벌써 사고만 4번 째'다. 배에에에.. 으아아아. 아프다. 배달이란 게 그런 거야. 제일 바쁠 때가 언제인 줄 아니 ? 내가 일하기 싫어할 때야. 비가 억, 억수로 내리는 여름날이거나 눈이 환장하게 내리는 겨울날. 그럴 때가 제일 바, 바쁘고, 힘들고, 위험해. 그래서 난 꽃 피는 봄이 좋았어. 제일 한가하거든. 다들 놀러 가잖냐. 가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오토바이를 몰다 보면 이러다가 교통사고 당해서 죽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늦게 도착하면 주문을 취소하거나 면발이 불었다고 욕을 하거든.... 무섭지만 그냥 전속력으로 달, 달린다. 장대비 내릴 때 달려봐. 하나도 안 보여. 그냥 눈 감고 달리는 것과 같어..... "
듣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나는 수술 때문에 밀어버린 그 형의 머리'를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 사회'는 < 속도 > 가 전부인 세상이 되었다. 전세계에서 인터넷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가 되었고, 해외거주자는 대한민국의 당일 배송 시스템이 얼마나 놀라운 현상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쇼핑몰 감상 후기에는 늘 배송이 빨라서 좋아요, 라는 기이한 리뷰가 올라오고는 한다. 어디 그뿐인가 ! 슬로우 푸드인 한식은 사실 페스트푸드인 맥도날드 햄버거보다 더 빠르게 나온다. 이 정도면 한식은 슬로우 푸드가 아니라 패스트 푸드보다 빠른 퀵 푸드'라 할 만하다.
▶ 오늘 구매한 책'이다. 모두 중고로 샀다. 차일드 44'는 워낙 명성이 자자한 터라 보자마자 골랐다. < 돈키호테 > 는 축약본으로 읽은 기억은 있으나 완역'은 읽지 못했다. 피로도 때문일까 ? 김훈의 문장이 서서히 지겨워진다. 그래서 < 공무도하 > 는 읽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읽어야 할 소설'이다. 끝으로 < 호모 코레아니쿠스 > 는 그냥 구매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사실 오늘 당일 배송으로 책을 받았다. 오후 2시에 주문장을 제출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일 배송이라는 메시지에 깜짝 놀랐다. 개인 퀵 서비스'도 아닌데 어떻게 당일 배송이 가능한 것일까 ? 배송 현황을 살펴보니 담당 택배기사의 동선이 표시되어 있었다. 내가 받아야 할 지점에는 210'이란 숫자가 찍혔다. 무엇인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내게 책이 도착하기 전까지 들려야 하는 곳이 무려 209곳이라는 뜻이었다. 갑자기 울컥 했다. 형 친구가 병상에 누워서 했던 넋두리가 생각났다.
책은 밤 10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그는 다시 211번째 고객을 향해 달릴 것이다. 사탕을 준비했었는데 늦은 밤에 개가 하도 크게 짖어 정신이 없어서 못 전했다. 이 자리를 빌려 한 마디 하자. " 택배 기사님 ! 앞으로 피곤하시거든 저에게 도착할 책은 건너뛰셔도 좋습니다. 그냥 부재에 따른 미배송으로 신고해 주십시요. 다음날 받겠습니다. 농담 아닙니다. 하하하. " 오늘.. 자꾸 형 친구'가 생각난다. 소식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 앞으로 나는 배송이 빨라서 좋아요, 라는 병신같은 리뷰는 작성하지 않을 작정이다. 언젠가 대한민국도 배송이 느려터져서 씐난다요, 라는 리뷰가 올라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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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티브이'를 항상 티븨'라고 적었다. 브이'를 븨'라고 하면 뭔가 귀족적인 느낌이 든다. 백작이 된 기분이랄까 ? 그래서 태권 브이'는 항상 태권 븨' 라고... 으하하, 좋다. 그런데 고집이 지나쳐서 이젠 < 비 /rain >마저도 븨'라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편 웅이네 가족은...... " 창밖을 봐. 븨'가 내린다. " 으하하, 좋다. 하여튼 < 븨 > 는 곰곰생각하는발이 개발한 문장이니 굳이 쓰시려거든 허락을 받고 쓰십시요.
지금 창밖에는 븨'가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