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게인에 대한 시대 유감
영화 << 웬디와 루시 >> 에서 주인공 웬디는 낡은 차를 끌고 반려견 루시와 함께 알래스카를 향한다. 그곳에 가면 일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는 고장이 나 엔진이 멈춘다. 그녀에게는 500달러가 전 재산이지만 차 수리비는 그녀가 가진 돈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다.
이 우연한 불행과 불행한 우연 앞에서 그녀는 오리건 주 작은 마을에 발목이 묶여 오도 가도 못 가는 신세가 된다. 빈털터리가 된 웬디는 동네 마트에서 개에게 줄 싸구려 통조림 몇 개를 훔치다가 그만 식료품점 아르바이트 청년에게 발각된다. 식료품점 점원은 그녀를 점장에게 데리고 가서 그녀에 대한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 개 먹이도 구할 능력이 없는 주제에 개를 키우면 안 됩니다. 모든 규칙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 용서 대신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점원의 주장을 받아들인 점장은 그녀를 경찰에 신고하고, 경찰은 웬디를 구치소에 가둔다.
그 사이에 루시(개 이름)는 사라진다. 이 영화에서 악인다운 악인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지만1) 능력주의와 공정주의를 강조하며 용서보다는 처벌을 강조하는 식료품점 아르바이트 점원은 악인보다 더 무자비해 보인다. 하나의 불행이 또 다른 불행을 낳고, 그 불행이 도미노처럼 자립의 기회를 연속으로 쓰러트릴 때 웬디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 이 불행은 전적으로 웬디 개인의 능력 문제일까 ? 가난하다는 것은 시간의 속도가 느리게 흘러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절차는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일수록 복잡하고 까다롭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루시는 임보자의 보살핌 아래 마당 넓은 집에서 지내고 있다. 그녀는 사랑하는 개 루시를 위해서는 무엇이 현명한 선택인가를 알고 있다. 돈 벌어서 다시 오겠다는 웬디의 다짐에는 힘이 없다. 마치,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링 위에 오르는 복서처럼 말이다. 감독은 극빈층으로 전락한 웬디에게 자본주의의 도덕 강령인 능력주의와 공정주의가 얼마나 냉혹하게 그녀를 단죄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식료품점 아르바이트 점원처럼 공정을 강조하는 쪽은 공화당 트럼프 지지자였을까, 아니면 민주당 힐러리로 대표되는 진보 엘리트였을까 ?
트럼프 지지자들은 현실은 불평등한데 공정만을 강조하는 진보 엘리트들의 위선에 넌더리가 났고, 그 결과는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괴물의 탄생이었다. 마이클 샌들은 << 공정하다는 착각 >> 이라는 책에서 " 공정함은 곧 정의 " 라는 통념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재능과 노력이 만든 능력을 높게 평가하면서 공정을 추구하지만 능력주의는 전혀 공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한다고 말한다. 마이클 샌들의 지적은 트럼프를 지지했던 저학력 백인 노동자의 불만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내가 JTBC 전국노래자랑 쇼 프로그램인 << 싱어게인 >> 을 불편하게 보는 시각도 마이클 샌들이 정의한 " 능력주의의 폭정2) " 과 맥을 같이 한다. 제작진은 이름을 지우고 번호를 부여한 무명 가수들에게 "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 " 라고 친절하게 말하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능력은 착취의 다른 이름이다. 무명 가수가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 때문에 돈을 버는 쪽은 방송국이다. 방송국은 상금 1억 원, 음반 제작 지원, 전국 공연 투어라는 상금을 내걸었지만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최후의 승자 1인'뿐이다. 나머지는 출연료조차 없다.
음악 전문 채널을 강조하는 모 방송국의 노래 경연 대회에 참가해서 8강까지 진출했던 출연자가 받은 돈은 고작 3만 원이 전부였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출연자는 식사는커녕 도시락을 제공받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가 방송국에서 받은 음식이라고는 차가운 김밥 2줄이 전부였다고 한다. 시청자인 우리는 언제까지 능력과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능력 착취 방송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며 감동해야 할까 ? 이것은 과연 윤리적인 태도일까 ? 감동하지 마시라. 당신의 감동은 어떤 방식으로든 유죄다.
1) 숲에서 만난 부랑자는 악인이라기보다는 정신 이상자에 가깝다.
2)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이 야기한 천박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전여옥이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하면서 내뱉은 " 국졸 대통령 " 이라는 말일 것이다. 교육은 신분의 차별 없이 개인의 능력만으로 계층 이동이 가능한 제도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교육이 차별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