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 아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48일 간의 입원기간이었기에 집은 딱 48일만큼 엉망진창이었다.
더군다나 1년의 기숙사 생활과 하숙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의 물건까지 합세하여 6인 가족의 우리집은 뭐랄까
임시 대피소같은 느낌이 든다.
하루 하루 짬짬이 물건을 치우면서 버렸다.
버리지 않으면 정리가 되지 않을 것이란 당연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루는 옷장의 옷들을 버렸고, 하루는 냉동실의 돌덩이가 된 음식 재료들을 버렸다.
이 옷들은 언제 또 입을 것 같은데....
이걸 버리면 또 새 옷을 사게 될텐데....
음식 재료들을 해동해서 날치 알밥도 해 먹을 수 있고,
약밥도 따뜻하게 먹을 수 있고, 치즈도 뿌려 먹을 수 있고,
나물도 해 먹을 수 있고....해동만 한다면.....
헌데 이게 언제 적에 얼렸던 걸까?
해동해서 먹다가 죽으면 안 돼.
옛날 옷들을 내가 언제 다시 꺼내 입었던가?
이젠 몸이 좀 커져서 안 돼.
생각을 고쳐 먹으니 버릴 게 천지였다.
입 짧은 아빠의 항암 음식을 차려가면서 집안 정리를 하려니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았다.
어제 순간 현타가 오는지라 잠시 중단해버렸다.
나머지는 다음에 정리하자.
그래. 오늘만 날이 아니잖은가.
3주 뒤에 다시 입원하러 오란 간호사의 말에 맥이 빠졌어도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건만
헐....1주일이 그새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까운 시간들.....ㅜㅜ
아빠의 항암 음식 때문에 늘 골칫거리다.
어떻게 차려야 하는 건지 애매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아빠는 입맛을 잃어버리셔서 구미에 맞게 음식을 차린다는 게 여간 쉽지 않고 늘 스트레스다.
그래도 하루 하루 차츰 식욕을 찾아가고 계신 것 같아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가슴을 쓸어 내려본다.
아침 일찍 고3 딸1은 학교에 공부하러 간단다.
아..그래?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떠 아침밥을 차려 줬다.
(병원에선 일찍 잠이 들어 일찍 눈을 뜨는 게 익숙했지만 집에선 아이들 때문에 매번 늦게 잠이 드니 아침 일찍 눈을 뜨는 게 힘들다. 그야말로 수면 패턴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근데 점심 도시락을 싸가기로 친구들과 약속했단다.
이런!!!!!!!!
어젯밤 잠들기 전 도시락 얘기를 했던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요즘 건망증이 너무 심해져 나름 고민이다.)
후닥닥.....야단법석을 떨며 도시락을 싸서 딸1을 내보내고
아빠와 학원 가야 하는 딸2의 아침밥을 또 준비했다.
아들은 일부러 깨우지 않는다.
이럴 땐 아침잠 많은 아들이 효자다.
요즘 아침을 두 번 정도는 차리게 되는 것 같다.
설거지를 끝내고 좀 씻고 나왔더니 11시!
아빠와 아들의 오전잠이 새삼 고마워 책을 펼치고 커피를 내렸다.
익숙한 자리,
익숙한 물건.
정말 오랜만에 맡아 보는 커피향과 독서대의 질감이 새삼스럽다.
집으로 돌아왔더니 몇몇 분들의 응원이 조용히 도착해 있었다.
커피 박스가 차곡차곡 줄을 서 있었는데
새로 바뀐 커피 박스의 로고가 낯설어 처음엔 멀리서 한참 쳐다봤다.
내가 비타민을 주문한 적 없는데, 남편이 주문했나?
만져보니 예가체프 커피 박스였다.
헐....!!!!!
이렇게나 많이 오다니?
내 생일인가? 싶었다.
책도 선물 받았다.
책과 커피를 선물해 준 분들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어떤 인연이기에....^^
나란 존재가 그동안 많은 분들의 마음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여 많은 응원과 사랑을 받았다.
모두에게 감사하단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
제가 많이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을 못하겠네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커피를 내려 마셨더니 맛있었다.
그동안 40여일 간의 드립 커피 디톡스가 되었던 걸까?
예가체프 커피의 맛이 혀끝으로 하나 하나 살아나는 것 같다.
병원에서 커피를 잠시 끊었다가 간편하게 믹스 봉지 커피에 맛이 들어 계속 아, 달다. 하면서 홀짝였더니 예가체프의 맛이 이제사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몇 주 전 주말에 카페에서 예가체프를 마셨었구나!
드립 커피 디톡스가 아녔군.^^;;
그 카페를 떠올리니 또 나의 어리버리하게 행했던 실수가 떠오른다.
커피를 주문할 때 메뉴판에 ‘쵸코렛맛, 과일맛....‘이라고 적혀 있는 게 눈에 띄어 종업원에게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쵸코렛맛으로 따뜻하게 해주세요.˝
종업원이 주문한 메뉴를 되짚어 주는데 쵸코렛 맛은 번복하지 않는다. 응? 이상하네? 나는 쵸코렛맛을 먹어야 하는데?
갑자기 초조해진 마음이 일었다.
˝저기요. 예가체프는 쵸코렛맛이어야 하거든요.˝
둘이서 눈을 마주쳤다. 눈싸움을 좀 했는데.....
뚱해진 종업원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적혀 있는 쵸코렛 맛은 그저 늬앙스일 뿐이다.라고 했다.
헐.......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지만 마스크를 쓰고 있어 표시나지 않았을 게다.
자리로 돌아와 남편에게 ˝내가 금방 있잖아...어쩌고 저쩌고 쵸코렛 어쩌고 저쩌고...내가 좀 바보같재?˝ 얘길 해줬다.
남편은 ˝울 마눌. 카페가 오랜만이라 주문도 잘 못하네? 우짜겠노?˝ 놀렸다.
자긴 주문 더 못하면서....
나이 들수록 주문이 좀 어려워 우린 늘 서로 니가 해라.
미루게 된다.
특히 키오스크 앞에선 늘 느릿느릿....
예가체프를 마시면서 그 때의 일을 떠올린다.
내가 마신 알라딘 드립백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할로 베리티는요.
꽃향기랑 살구맛이랑 부드러운 단맛이 난다고 적혀 있는데요.
살구맛이 아주 강하구요.
부드러운 단맛이 시럽맛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것이
쵸코렛맛...제가 찾던 그 맛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번에 읽다 만 이승우의 소설책과 예가체프를 보니 또 인증샷 본능이 나를 옥죄어 와 선물받은 것들의 인증샷을 포함해 또 자랑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