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부정당하는 관계에 얽혀 있다면 차라리 친구가 없는 편이 훨씬 낫다. 유쾌하지 않은 인간관계는 차라리 모두 정리해버려도 나쁘지 않다는 말이다.
‘친구가 아예 없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보편적인 생각은 아니다. 나도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어쨌든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인간관계가 있는 편이 훨씬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인정 욕구의 힘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인정 욕구는 ‘매슬로의 5단계 욕구’ 중 네 번째 단계에 꼽힐 정도로 중요한 욕구이기도 하다. 관계 속에서 인정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는 것만으로 우리는 자존감을 높이며 살아갈 수 있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칭찬이나 추앙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할 때 상대가 조용히 끄덕여주기만 해도 사람의 인정 욕구는 충족된다.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관계 속에서 평생 살아갈 수 있다면 행복은 이미 내 것이나 다름없다.

괴로울 때
도망칠 자리를 만든다

당신에게는 ‘나의 자리’라고 말할 만한 공간이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자리’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유대, 교감이 형성되는 곳이라면 특정 장소일 필요도 없다.

가능하다면 여유로운 관계의 장을 두 군데 정도 마련해두면 좋다.

만약 ‘나의 자리’가 하나밖에 없다면 그 관계에만 의존하기 쉽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떠나거나 거리를 두기 힘들다. 거기서 멀어지면 다른 사람과의 연결고리가 모조리 끊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말하자면 ‘관계에 인질 잡힌’ 모양새다. 한정된 관계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면 완전히 고립되기 쉬우므로 튀는 행동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과 다른 견해를 보이기도 어렵다.
어떤 조직에서 벗어나고 싶을 정도로 갈등을 맞닥뜨리거나 누군가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상황적 여건 때문에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유로운 관계의 장에서도 이런 문제가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나의 자리’를 두 곳 이상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싫어하는 사람과는
마음의 거리를 둔다

우리는 진실 되고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상대에게 진심을 보여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게 모든 상황,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진리는 아닌 것 같다. 누구든 나를 괴롭히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군다면, 최선을 다해 그에게 진심을 보일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그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반응하지 않는 연습

인간관계를 ‘마음의 거리’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자.

마음의 거리는 마음속에 떠올리는 시간이나 횟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깝다고 무조건 사이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부정적으로 느끼는 대상이라면 가까운 마음의 거리는 고통이 된다. 불편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전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평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반응하는 이유는 상대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다. 물론, 대부분 사람에게는 그렇게 반응해도 괜찮다. 하지만 멀어지고 싶은 사람에게까지 굳이 그렇게 반응해줄 필요는 없다.

변화를 일으키는 소수의 역할

모두와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은 확실한 가치가 있다. 즉, ‘남과 조금 다른 사람’이어도 괜찮다. 아니, 그것이 가장 좋다. 조금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집단이라면 내가 먼저 거절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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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살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상태란 어느 정도를 말할까? 최소한 자신의 의지로 하고자 하는 일에 매사 걸림돌이 되는 정도라면, 남은 인생을 위해서라도 돌파할 필요가 있다. 꼭 과거의 나처럼 불안장애가 있지 않더라도 누구나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이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문제다.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일상의 매 순간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에 짓눌린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의식’일까? 바로 ‘주객이 전도된 때’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주가 되고, 그것을 기준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이미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거기서부터 진짜 고통이 시작된다. 남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말은 많이들 하지만, 사람들이 많고 서로를 관찰하는 장소에 있다면 그 말을 따르기가 더욱 어렵다.

나를 존중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 있을’ 것

특정한 상황에서 불안을 느낄 때 그 상황에 반복적으로 맞닥뜨리는 훈련을 통해 마음을 단련하는 심리 치료가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이런 방법이 더 큰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반대로 완전한 회피를 택한다면? 같은 스트레스에서는 벗어나겠지만 동시에 평생 해결할 기회도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문제를 피하려고만 하면 그로 인한 불안은 다른 대상으로 전염된다. 이것은 의학계 정설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나를 존중해주는 관계’를 찾고 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 방법은 불안증까지는 아니지만 단순히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수준인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다. 좀 더 증상이 심하다면 지원 모임이나 자조 모임도 활용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친절하고 여유로운 인간관계로 갈아타야 한다.

동료 따돌림에
가담하지 않는다

따돌림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와 교류하는 사람도 어느새 같이 따돌림을 당한다. 과거 촌락 사회 중엔 이런 규칙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던 곳도 있었다. 모두와의 약속인 ‘절교’를 지키지 않으면 크건 작건 제재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규칙, 지금의 우리 사회와도 너무나 닮아 있지 않은가?
동료들 사이에서 따돌림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론 단순한 따돌림에 핑계는 없지만, 신입사원 시절의 나에게 ‘그런 분위기는 무시해라’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까? 타인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안전도 지켜야 하기에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관계적 공격

보통 촌락 사회의 생활에서 가장 심한 제재는 모두와 절교하는 ‘따돌림’이었다.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우물에 쌀겨를 뿌리거나, 밭에 잡초를 뿌리는 등 한층 더 심한 제재도 있었다. 요즘 세상에 이런 괴롭힘을 가했다가는 인권침해로 강력하게 비난받을 것이다. 그 대신 훨씬 더 교묘한 방식의 따돌림 문화가 생겼다.

‘관계적 공격’이라는 것이 있다. 즉 당사자가 아니라 인간관계를 이용해서 공격하는 것이다. 아시아권에서 나타나는 따돌림의 가장 흔한 특징은 ‘무리에서 제외하기’나 ‘무시’가 상당히 많다. 어떤 사람과 갈등이 있을 때, 그를 뺀 다른 친구들과의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맺거나 상대방에게 그 모습을 과시하여 점차 눈에 띄게 하는 방법이다. 이 또한 인간관계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관계적 공격과 공통점이 있다.

다수보다 자존의 편에 서라

따돌림에 휘말려버렸을 때 대처하기란 쉽지 않다. ‘똑같이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 상황을 간단히 빠져나갈 수도 없다.
그러나 최소한 행동의 방향을 수정할 수는 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행동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이 무섭거나 위험하다고 느낀다면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 심한 따돌림이라고 생각하면 동조하지 않아도 괜찮고, 반대해도 괜찮다. 남을 괴롭히는 집단이라면 같이 어울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명확한 기준을 세운다.

무엇보다 가장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 이제 더 이상 힘이 강한 쪽, 다수인 쪽을 기준으로 인간관계를 맺지 말자. 어리석은 군중의 꼭두각시로 사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친구 없는
시기가 있어도 괜찮다

친구들의 연락도 피했고, 입학 후 쏟아지는 술자리 부름에도 일절 응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이유는 하나였다. 더 이상 그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모여서 주고받는 말이라곤 누군가를 도마 위에 올리고 흉보거나 놀리는 얘기뿐이었다. 때론 내가 그 대상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에 대항하기 위해 나도 똑같이 상대를 놀리며 갚아주곤 했고, 집에 돌아오면 내가 들은 말, 뱉은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돌아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험담이 기본인 모임에서 자리를 비운다는 건 매우 위험하고 찝찝한 일이지만, 이쯤 되니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마음이 되었다. 넌더리가 났다.

그 인간관계는 필요 없었다

술자리 약속을 거절한 뒤로는 매일 혼자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다.

색깔로 표현하자면 고등학생, 재수생 시절의 새카맣던 일기에 어렴풋이 빛이 스미는 것 같았다.
매일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지내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그 인간관계는 필요 없었다.

학교 밖으로 나와보니 이런 관계는 차라리 없는 편이 행복에 도움 됐다. 정말로 좋은 관계라면 학교에서도 학교 밖에서도 어떻게든 만나고 싶지 않았을까.
내가 의식적으로 작정하고 끊어냈기 때문에 대학 이후에는 더 이상 불필요한 관계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관계를 대하는 내 삶의 태도를 대전환한 큰 사건이었다.

친구가 많으면 좋다는 착각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도, 혼자 있는 것도 장단점이 있다. 다만 오랫동안 인간 사회에서는 인간관계가 넓은 사람과 고독한 사람을 대척점에 두고, 친구가 더 많은 쪽을 행복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반대로 고독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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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요한 방에 홀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온다.
_블레즈 파스칼BlaisePascal

집단에서 멀어지자
병이 나았다

수많은 시선으로 둘러싸인 고등학교 교실 속에서 나는 지독한 마음의 병을 얻었다.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병이었다.

프리랜서 작가가 되고 나서는 사무실과 같이 ‘사람들이 밀집한 장소’에 발길을 완전히 끊었다. 살면서 처음 해본 선택이었다. 책이 팔리고, 원고 집필에 몰두하거나 인터뷰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 찾기도 훨씬 쉬워졌다. 그러다 보니 마음의 병은 사라졌다.

사회는 당신이
모두와 똑같아지기를 원한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사회 집단은 크게든 작게든 ‘표준화’를 강요한다. 개인에 대한 구속이 심한 집단 내에서 다른 사람과 똑같아지려고 해봤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 때일수록 집단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더불어 소속 집단을 쉽게 바꿀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두면 좋다.

사람으로 꽉 찬 상자는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상자 속 인생에 지친 사람을 위한 다른 선택권이 있어야 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상자에 들어가 있던 시간은 인생의 절반 정도였다. 상자에서 나온다고 해서 누구나 무조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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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축제만큼 설레게 하는 것도 없다. 따분한 날들을 보내는 어린 학생들은 학교 축제를 기다린다. 그때만 잠시 예외적인 자유와 창의적인 생각을 폭죽처럼 터트릴 기회가 찾아온다.

왜 사람들은 축제를 원하며, 공동체는 축제를 자신의 소중한 자산으로 간직하려는 걸까? 축제의 사전적 뜻은 ‘축하하여 벌이는 큰 행사’이다. ‘제사’의 의미 또한 지닌다. 세속적 삶과 종교가 구분되지 않은 고대 세계에서는 신에게 바치는 제사가 곧 축제였다. 축제는 성스럽고도 세속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축제에는 노래와 춤,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있다. 즉 일상의 기분을 바꾸어줄 즐거움이 있다. 이는 축제가 노동으로부터의 방면을 뜻한다는 것, 축제란 곧 ‘놀이’임을 알려준다.

축제의 또 다른 얼굴이라 해도 좋을 ‘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놀이를 주체와 동떨어진 어떤 대상처럼 여길 수 없다. 놀이를 즐기려면 하나의 고립된 주체가 대상을 멀거니 바라보듯 해서는 안 되고, 놀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놀이 속에는 놀이의 고유한 법칙이 있을 뿐, 자신의 독자성을 고집하는 주체는 사라진다. 여럿이 함께 넘는 줄넘기나 강강술래 같은 놀이에는 놀이 자체의 법칙이 있지, 주체의 독자적인 의지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축제는 해마다 다르고 새로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축제의 시간은 우리의 통상적인 직선적 시간을 통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축제는 ‘회상’이 아니다.

축제는 언제나 새로운 사건으로 찾아온다. 그것이 축제의 시간, 반복의 본질이다. 반복은 이미 존재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는 반복이다.

인간에게 축제가 있는 것은 축복이다. 축제는 인간이 하루하루를 잃어가며 늙어가는 운명을 벗어나 매번 새로 태어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축제 속에서 삶은 되찾을 수 없는 시간으로 추억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실현된다. 우리가 설레는 마음으로 축제를 기다린다면, 축제가 시작과 삶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쓰다듬는 손길

모든 삶은 위안을 필요로 한다. 강한 이에게도 약한 이에게도 삶은 끌고 가기 힘든 수레인 까닭이다.
우리는 무엇에 위로받는가? 어떤 이들은 희망이나 미래나 발전 같은 말이 우리를 지탱해준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개념들은 물론 의미 있으나, 위안을 준다기보다는 우리에게 과제를 부여하는 것 같다. 희망이나 미래나 발전을 어떤 내용으로 꼭꼭 채워 넣으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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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마니아 또는 수집가

그는 외모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회색 점퍼, 흰 운동화 차림으로 뭔가 가득 찬 백팩 하나만을 메고서 중고 완구점 구석을 기웃거린다. 흔히 ‘오타쿠’라 불리는 자, 그는 ‘레어(희귀) 아이템’을 쫓고 있는 수집가다. 오타쿠의 역사는 깊다.

그들은 수집이라는 꿈속의 길만을 걸어간다. 세상의 어떤 사물에 몰두하지만, 동시에 세상 바깥에서 기존의 세상이 바라보는 방향과 정반대 편에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 같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이런 허무한 재테크로서의 수집이 아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작업’으로서 수집이다. 발자크가 그의 형편없는 수집 취향을 소설 속으로 가져와 수집물들에 투영했을 때 그것들은 한 시대의 진실을 새기는 유물들이 되었다. 그렇다. 어떤 진실은 역사가의 공식적인 기록에 남지만, 그보다 더욱 귀중한 진실은 어쩌면 개인적인 수집품들 속에 남을 것이다. 하나하나 모은 수집품들은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와 같은 효과가 있다. 잊힌 과거를 갑자기 의미심장한 보석으로 만드는 효과 말이다.

진정한 수집가란 이미 공적으로 가치가 정해진 물건의 뒤를 쫓아다니는 자가 아니다. 그의 독창성이란 니체처럼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것이다.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는 이 기분 나쁜 주제를 외면할 수 없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가지 않는다. 죽음은 얌전히 오지 않으며 기분 나쁜 폭력을 데리고 온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간혹 영웅들은 죽음을 하찮게 보는 듯도 하다.

사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우리와 같이 있지 않고, 죽음이 왔을 때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산 사람도 만날 수 없고 죽은 사람도 만날 수 없다. 인간은 영원히 승리하는 숨바꼭질 놀이 속에 들어선 듯 죽음과 마주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멸하는 영혼 없이 소멸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흔히 우리는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며, 죽음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계속될 자아를 열망한다.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해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일, 즉 삶이 있으면 죽음이 없고 죽음이 있으면 더 이상 죽음이 공격할 삶이 없다는 생각은 죽음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아무리 삶과 죽음은 마주칠 일이 없으며 죽음은 삶을 고통스럽게 하지 못한다고 자신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또 수긍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죽음이 두렵다. 죽음은 논리와 이성적 깨달음이 간신히 세운 수비벽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며 침입한다. 인간은 죽음을 사유하는 데 그치지 못하고 실제 죽어야 할 운명인 까닭이다.

삶의 ‘경계’로서 죽음을 염두에 둠으로써 우리는 삶의 좌표를 찾을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죽지 않는 자라고 생각해보라. 죽지 않으므로 시간을 다투어 급하게 해야 할 일도 없다. 청춘의 시간을 아껴 쓸 필요도 없다. 왜 아끼겠는가? 죽지 않는 인간에겐 시간이 무한한데.

생명의 뿌리에는 죽음이 있다. 우리 삶은 겉으로 다양한 방식의 쾌락을 추구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쾌락은 긴장이 모두 사라진 죽음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노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성행위일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인 성행위가 고도로 강화된 흥분의 순간적 소멸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경험한 바 있다."6 결국 "무생물계의 정지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7이 선택한 수단이 쾌락의 흥분이다. 고조된 긴장 상태로 올라가야만, 긴장이 소멸한 죽음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죽음은 존재 저편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아니라, 존재의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실은 우리의 본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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