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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 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 하다.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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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는 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 아이들, 그토록 충실한 나의 반려, 나의 일"이라고. 이 대목을 길잡이 삼아 나는 한 사람의 생으로 들어갔다. 케테는 격동의 시대에 성장했다.

‘그토록 충실한’ 반려인 남편이 무료 진료소에서 일하는 의사였기에 케테의 생활도 하층민의 삶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가까이서 제대로 보았다. 그래서 민중을 지배당하는 대상에만 가두지 않고 억압을 뚫고 살아내는 역동적인 존재로 표현했다. 인생에는 유쾌한 면도 있는데 왜 당신은 비참한 것만을 그리는가 하고 묻는 이에게 케테는 답했다. "나는 정확한 답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은 명확히 말해두고 싶다. 나는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에 동정하거나 공감했기 때문에 그들을 그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들에게서 단순 명쾌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유언처럼 남긴 석판화의 제목은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다. 우리는 전쟁터에 보내려고 자식을 낳은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케테가 전쟁이 끝나는 걸 못 보고 숨을 거둔 게 안타까웠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적이 있었던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관심 두지 않는 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그때마다 씨앗들이 가장 먼저 제일 쉽게 무참히 짓밟혔다. 세르비아 속담대로 정치인은 전쟁을 시작하고, 부자는 무기를 대고, 가난한 사람은 자녀를 제공한다. 전쟁이 끝나면 정치인들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하고, 부자들은 생필품의 가격을 올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녀의 무덤을 찾아간다.
‘나의 아가야, 봄이 왔다’는 케테의 속울음이 판화처럼 복제되고 있다. 이 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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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겨울눈은 이미 가을에 꼴을 갖춘다. 늦여름부터 나무는 잎으로 향하는 양분을 차츰 줄여 결실과 겨울눈 만드는 데 에너지를 더 쓴다. 혹독한 시절을 견딜 어떤 힘을 비축하는 것이다. 나무는 겨울눈을 안전하게 만들고 나서야 낙엽을 떨어뜨린다. 이파리가 연둣빛을 상실한 채 말라간다고 해서 나무가 발달을 멈추는 건 아니다. 더 치밀하게 세포를 만드는 방식으로 겨울을 대비한다. 깊이 생각하거나 몰입하듯이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일이겠지. 그건 생존 전략인 동시에 일종의 신성한 의식일 수도 있다. 겨울을 무사히 건너기를 빌고 봄의 새순을 희망하는, 나무 세계의 동제 같은 것.

고사리 새순의 등장은 봄을 알린다. 노인이 된 우리 할머니는 등이 굽어 고사리순처럼 구부정했지만 어린 내 눈에는 팽나무 고목처럼 강건해 보였다. 뿌리째 먹는 봄나물 냉이는 캐야 하고 고사리는 뿌리가 상하지 않게 순만 취해야 한다고, 그러니 고사리는 캐는 게 아니라 새순을 꺾는 거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당신의 엄마한테 배웠다고 했다. 열매 맺고 나면 뿌리마저 시드는 두해살이 냉이와 달리 고사리는 여러해살이라 뿌리를 살려야 내년에도 순을 얻을 수 있다고. 어린 나는 그 애순을 모으며 식물이 싹을 내밀고 잎을 펼치고 또 말라가는 자연스러운 이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고마운 식물을 내가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그들의 질서를 인간이 함부로 훼손하지 않도록 지켜줘야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 게 그 무렵이던가. 나는 당신의 눈이었을까.

생명이 눈을 틔우고 결실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시작도, 절정도, 쇠락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봄을.

어느 인류학자는 친밀한 존재를 떠나보낸 이들이 "흐르는 시간에서 비껴나 고이는 시간에 갇힌 존재"라고 했어. 죽음이라는 사건은 남겨진 이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해. 유교 상례는 애도하는 존재가 상중의 시간을 온전히 통과할 수 있도록 안식처를 제공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시간은 무언가를 ‘함’보다는 ‘하지 않음’으로 채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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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형인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흔히 생각하듯이 우리가 어떤 사실을 정신적으로 지각하면 그것에서 감정이 생기고 육체적 표현이 뒤따르는 게 아니라고 한다. 이를테면 나쁜 일을 당하면 슬퍼서 울고 곰을 만나면 무서워서 도망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울기 때문에 슬픔을 느낀다. 몸을 덜덜 떨고 도망치기 때문에 무서워진다. 신체 표현이 없다면 지각은 흐릿하고 색도 없고 감정적 온기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 나의 계절도 가을이다. 낮이 점점 짧아지고 총기도 사그라진다. 심장이 덜컹거리고 감정은 둔탁하다. 가을은 시들고 이우는 계절이지만, 무성한 잎을 내주는 대신 결실을 맺는 계절이기도 하다. 찬란하지는 않지만 쓸모가 있는 계절이다. 그래야 하는데, 어느덧 시대가 바뀌었고 내가 지금껏 축적해 온 지식이 무용해져 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요새는 알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50년을 살았는데, 다음 해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요즘처럼 많이 한 적은 없다. 그런데 그것 또한 어쩌면 자연스러운 섭리인지 모른다. 나이 든 사람은 닥쳐오는 어두운 겨울을 애써 들여다보는 대신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는 것도. 이 가을에는, 다가오는 겨울을 생각하면서 아직 어린 것들을 거두어 건사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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