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금곡주공에 살았어도 복도 가장 끝 호에 사는 아이들은 곧 탈출할 애들이었다. 끝 호에는 방이 하나 더 있었고, 그 평수에 사는 이들은 대체로 1년을 넘기지 않고 주공을 떠났다. 오래도록 남게 된 아이들은 고통의 서열을 셈하는 데에 점점 능숙해지고 익숙해졌다. 전세 사는 아이가 월세 사는 아이를 깔봤고, 아파트 평수로 최고의 상태와 최악의 처지를 따졌다. 악한 어른이 아이들을 조종한 결과가 아니었다. 주위의 평범한 어른들을 보며 자연히 터득한 아이들 나름의 ‘지혜’였다.
몇 년 후 성인이 되어 ‘휴거’(‘휴먼시아 거지’의 준말. LH 공공임대아파트 휴먼시아 거주자에 대한 멸시이자 ‘거지’로 멸칭되는 빈곤층에 대한 낙인과 혐오를 동시에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10)라는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출입구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혐오가 탄생하는 데 일조한 것 같아서. 이 죄책감이 모두의 것이 될 때쯤엔 세상이 바뀔까. 나는 회의적이다.
금곡주공으로 이사를 오고부터 공부를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겼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잘 벌려면 학력이 높아야 한다고 믿었다. 나를 위해 나보다 더 가난하게 사는 엄마를 건사하려면 2인분의 생활비는 너끈히 벌어야 하고, 알코올중독자인 아빠를 입원이라도 시키려면 3인분 이상의 돈이 수중에 있어야 했다.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학력이 살 길인 것 같았다.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떠미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엄마도 날 닦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험 기간에 밤을 새우는 내게 공부 그만하고 제발 일찍 자라고 잔소리를 했다. 집안 사정 때문에 무언가를 끝까지 배워본 적 없는 것이 한이었는지, 깨달음이었는지, 엄마는 형편없는 생활비를 쪼개 나를 학원에 보냈다.
세 식구의 생활비는 수급비로 충당하고, 엄마가 버는 월급의 상당액이 나의 학원비로 쓰였다.11 엄마는 나를 긁지 않은 복권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엄마의 결핍을 채워보려는 악다구니였을까? 나중에 들어보니 최루성 사연은 전혀 없었다. 그냥 별나게 기억력이 좋은 자식에게 쏟아지는 주위의 잔잔한 시기심과 지나친 관심에 엄마의 자존심이 반응한 결과였다.
수급비를 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은 늘 딜레마에 빠진다. 수급비는 생활의 최저 수준을 가정한다. 이보다 더 가난하지 않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일정 금액 이상의 수입이 생기면 수급비가 낮아지고, 그러면 보탬이 되던 월급은 줄어든 수급비를 채우는 수단이 되어버려 결국 생활의 수준이 빠르게 떨어진다. 엄마는 수급비를 받지 않아도 되니 돈을 더 벌길 원했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경력단절 여성에게 허락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내 눈에 엄마의 노동은 엄마의 팔꿈치나 무릎 그 자체로 보였다. 그런 엄마의 뼈를 갈아 넣은 시간 속에서 나는 부지런해야 했다.
내게 공부는 가성비 좋은 행위였다. 적어도 공부를 하는 동안은 가난한 나와 가난하지 않은 남들 사이에 놓였던 벽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타고난 암기력 덕분에 들이는 노력에 비해 결과가 좋은 편이기도 했다. 공부도 재능이라면, 이 재능은 내가 다른 데에 한눈을 팔지 않고 학생이라는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커다란 원동력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받는 이런저런 국가 지원의 명목이 ‘우수한 학업 성적’인 것이 만족스러웠다. 가구 소득이 대한민국 평균에 한참을 못 미치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부모의 자녀여서가 아니라, 장차 이 나라를 이끌 훌륭한 재목이자 사회에 득이 될 인재여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직 훌륭하지도 득이 되지도 않지만, 그렇게 될 예정이니까 그 값을 당겨서 쓰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곤 했다. 사라져가는 개천 용 신화의 마지막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항상 나일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용이 된다면 내 가난도 신화가 될 것이었다.
수급자 가구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어정쩡하게 수급 기준을 넘는 일자리를 얻어 수급자에서 ‘탈락’하면, 기초생활 급여에서 차감은 되지만 적게나마 보탬이 되었던 수준의 벌이를 할 때보다 한 달 가용 생활비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늘 선택을 계산했다. 플랜 B는 물론이고 플랜 C도 세웠다. 플랜을 짜는 원칙은 ‘가성비’였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확실하게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러다 보니 평행세계의 나와 이 세계의 나 사이에는 간극이 컸다.
대학 입학 전부터 엄마와 나는 냉전 상태였다. 기껏 합격해둔 부산의 한 사범대학을 뒤로하고 굳이 대구에 있는 대학교를 가겠다는 딸이 못마땅했던 엄마는 자주 성질을 냈다. 그 마음이 나와 떨어진다는 불안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이야 솜털로도 감지할 수 있었지만, 나는 나대로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쩌면 엄마는 내가 국어교육과를 가지 않고 국어국문과를 선택한 것이 불만이었을지도 모른다.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도 아빠의 밀린 술값을 다 갚을 수 없는 판에, 열아홉 살의 나는 아주 낭만적인 문장을 날렸다.작가가 되고 싶어. 엄마는 제발 꿈으로 남겨두라고 말렸지만, 나는 몰래 휴대전화 번호를 바꿔버렸다. 부산의 사범대학 예비 1번 합격 전화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작전은 성공해 나는 대구 K대학 국어국문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서울에 있는 S대학 문예창작과에도 1차 합격했지만, 국어교육과 대신 국어국문과를 택했으니 국립대라는 가성비는 지켜야 했다. 학교와 엄마에게는 S대 문예창작과를 1차에서 떨어졌다고 속였다. 문예창작과가 1지망이었지만 국립대도 플랜 A에 속했다. 우선순위의 기준은 욕망이 아니라 실현 가능성이었다.
글밥을 짓는 사람이고 싶었고, 글을 쓰지 않는 삶은 그려본 적도 없었지만, 대학에 와서 글을 쓰는 시간은 극히 적었다. 장학금을 4년 내내 받으려면 일정 점수 이상의 학점을 유지하는 성실성이 요구됐는데,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하는 사정은 양해되지 않았다. 나는 작가 지망생이기 전에 장학생이었고, 장학생이기 전에 아르바이트 노동자였다.
장학금 성적 기준은 4.3 만점에 3.1이었는데, 아르바이트를 서너 개씩 하며 맞추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학점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등록금과 생활지원비가 끊겼다. 기초생활수급자이면서 장학금 수혜자인 대학생은 학기당 생활지원금 180만 원을 받았는데, 나는 이 돈을 전부 엄마에게 보냈다. 집안의 생활비이자 내가 대학에 잘 다니고 있다는 자랑스러운 증거물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성적이 땅으로 떨어진 원인은 수면 부족에 있었다. 교직 이수를 노리는 학생들이 학점 올리기에 열중할 때,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뺏긴 수면 시간을 중국어 시간에 채웠다. 결국 중국어 학점으로 D 마이너스가 떴고, 학기 평점은 3.12가 나왔다. 장학금 기준이 3.1 이상이라지만, 너무 아슬아슬한 점수였다. 장학생 잘리는 거 아닐까. 불안한 마음으로 부랴부랴 관계처에 문의하니, 한 번이라도 점수 미달이면 바로 잘릴뿐더러 지금 점수는 절대값만 보면 아슬아슬하게 통과되지만 퍼센트로 변환하면 장담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살아야 했다. 무조건 장학금을 살려내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으로 시작하는 긴 메일을 썼다. 어려운 형편과 수업을 듣는 시간보다 노동이 더 많은 스케줄을 낱낱이 쓴 후, 대학생으로서 본분을 잊지 않겠다는 사과와 다짐으로 마무리했다. 교수님의 아량 덕분에 나는 겨우겨우 C 플러스를 받아 아슬아슬하게 학점이 올랐고, 장학생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누구는 공사장에서 일하면서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던데 나는 왜 이럴까?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아주 세게 질책했다. 돈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국고에서 나오는 장학금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잘해야 나오는 것이니, 무조건 잘해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이후 나는 시험 기간에 사흘이고 나흘이고 밤을 새워 공부했다. 잠 좀 못 잔다고 까짓것 죽기야 할까. 시험을 보고 멍한 상태로 닭집에 가서 닭을 나르면서도 생각했다. 죽기야 할까. 아, 죽고 싶다. 아니지, 지금 통장에 무려 200만 원이나 있는데, 죽어도 계약한 자취방에서 죽어야지. 피곤에 찌들어 기숙사에서 늦은 잠을 청하면, 평행세계의 내가 유럽 여행을 가는 꿈을 꿨다. 그것조차 싫었다.
과외를 하는 사이사이 무한 리필 고깃집에서 주 4일, 12시간씩 일했다. 내가 해본 일 중 가장 고강도 육체노동이었다. 일 자체는 단순했다. 테이블마다 고기를 구워주고 볶음밥을 볶아준 후 손님이 나가면 상을 치우고 그릇을 설거지했다.
설거지를 하다 보면 더워서 기절할 것 같았다. 동료들과 번갈아가며 냉동창고에 들어가 몸을 급랭시켰다. 안에서는 창고 문이 열리지 않는 구조이다 보니 밖에 있는 사람이 까먹지 않고 열어줘야 동사를 면할 수 있었다. 번아웃이 올 대로 온 나는 곧 팔릴 고기들 사이에서 자극적인 상상하기를 즐겼다. 갈고리가 내 모가지를 낚아채고, 마침 동료들이 날 꺼내는 것을 깜빡해 꽁꽁 언 안온맛 갈비. 그렇게 날 죽이고 나면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게 허락된 일탈이 상상 자해였다. 남겨질 엄마가 더 가난해질까 봐 죽을 수는 없었다. 죽지 못해 보내는 하루가 반복될수록 감정이 가라앉았다. 조금 부러웠던 친구들의 여행이 조금도 부럽지 않게 됐다. 최저 수준도 안 되는 기숙사만 탈출하면 행복할 것 같았던 실낱같은 희망도 감각할 수 없었다. 그냥 일어났으니까 일했고 일했으니까 잤다.
어느 날, 과외를 할 때 뿌렸던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에두르는 기색도 없이 그 여자는 내게본론부터 말할게요. 합격하면 두 장 더 드리는 걸로 해서 큰 거 일곱 장으로 삼성 자기소개서 대필 가능하세요? 라고 물었다. 큰 거, 영화에서는 억 단위던데 학원가에서는 100만 원이었으니 700만 원짜리였다. 나는 첨삭 지도는 가능하나 대필은 할 수 없다고 잘라서 거절했다.
내가 쓰는 글이 시도, 소설도, 에세이도 아니고 ‘큰 거 일곱 장’이 돼버리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살아서 이리 된 걸까, 아니면 열심히 살지 않아서 이리 된 걸까. 그 뒤로도 대구 바닥에 뿌려질 대로 뿌려진 내 휴대전화로 대필 의뢰가 들어왔다. 죄다 단칼에 거절했다. 자기소개서 대필은 불법이고, 내 글들에 부끄럽지 않고 싶었으며, 내 자아를 남의 미래를 위한 자원으로 소진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아무리 궁할지언정 자존심을 팔 수 없었다. 그때 내가 가진 것이라곤 기숙사에 있는 이불 한 채와 그 이불 아래에 늘 소중히 두고 나오는 자존심뿐이었다. 들고 다니면 쉬이 오염되고 찢어지고 해지는 자존심. 나는 매일 밤 누워 이불 속에서 새근새근 잠든 자존심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묻혀 온 때가 묻진 않았는지, 밖에서 내가 한 짓을 알고 스스로 깨져버리지는 않았는지. 내가 줄기차게 대필을 거절하는 4년, 5년 동안 원장은 계속해서 대필을 하라며 종용하고 윽박질렀다. 필사적으로 거절하며 먹고살기 위해 버텼고, 6년을 채운 후 진저리를 치며 학원을 떠났다.
2016년 4월-6월: 빵집 대구에 올라와서 처음 했던 빵집 아르바이트는 일도 크게 고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동료들이 든든했다. 샌드위치 기사, 케이크 기사, 미성년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경력이 빵빵한 동갑내기, 그리고 나까지 모두 여자였다. 우린 서로를 도왔다. 잔잔한 분위기 속에 오래 다닐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어느 날 나타난 Sam이라는 외국인 남자 손님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면, 내게 영어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처음 본 손님도 아니어서 공짜로 영어를 배울 요량으로 카톡 아이디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놈에게서 톡이 왔다. 잘못 봤나 싶어 번역기를 돌려보았다. 너는 인생에서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있니? 너의 보이프렌드와 함께라면 어때?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Sam의 가해에 대해 동료들에게 알리고 빵집을 때려치웠다.
2016년 6월-12월: 빵집 빵집에서 빵판을 닦느라 양팔 인대에 만성 염증이 생겼다. 대충 파스를 붙이고 버텼는데, 팔꿈치까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근육 주사나 물리치료의 일부는 의료급여가 포괄하지 않는 영역이어서 치료를 거의 받지 못했다. 의료급여 수급자의 ‘미충족 의료’ 문제는 일상적으로 발생한다.20 가난한 주제에 무언가를 ‘충족’하려고 하다니, 양심이 없다고 욕먹을 것 같다. 기분 탓이면 좋겠다.
2016년 6월-8월: 닭집 너 왜 화장 안 하고 왔어? 가게 매출 떨어질라. 사장은 지치지도 않고 성차별을 실천했다.
2016년 6월-2017년 8월: 과외 형편이 어렵다고 말한 과외 학생의 과외비를 조금 낮게 받았다. 나로서는 커다란 최선이었다.
H관 호러를 매일 듣던 유리 언니가 내게 LH 대학생 셰어하우스 전형을 알려줬다(유리 언니는 자취방 보증금 300만 원을 마련하려고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 빵집에서 만난 사이였다). 대학생들이 전세 자취방을 구할 수 있게 지원하는 제도라고 했다. 전세라, 전세…. 곱씹을수록 달콤했다. 무미건조하게 굳어버린 희망의 감각이 한 꼬집 살아났다. ‘언니의 조언’은 이 정도 수준은 돼야 한다는 것을 유리 언니에게서 배웠다. 삐걱거리는 기숙사 침대에 누워 LH 전세 임대 공고문을 읽었다. 모르는 단어투성이였다.
전세 지원은 부채비율이 90퍼센트 이하인 주택에 한해 지원이 가능하며, 부채비율은 아래의 방법으로 산정됩니다.
※ 부채비율 : [근저당권 등 금액 + 선순위 임차보증금 등 + LH 지원 전세금] / 주택 가격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부채비율이니 근저당권이니 KB시세니 하는 것을 가르쳐줬다면 이렇게 머리가 지끈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교육을 성실히 이행했으나 학교에서 가르친 세상과 내가 마주친 세상은 많이 달랐다. 학교는 기회의 평등이 있다고 가르쳤지만, 사회로 나온 내게 기회는 숨어 있었고 평등은 마음속에만 사는 단어였다. 삶을 비관하는 방법을 스무 개 이상 배워서 스무 살이 된 것 같았다. 공고문을 끝까지 읽기도 전에 우울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