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요소는 도파민 시스템을 과자극하는 동시에 고갈시키는 패턴을 만든다. 도파민은 강한 자극을 반복해서 받으면 점점 둔해진다. 마치 시끄러운 공간에 오래 머물면 청각이 둔해지는 것처럼, 도파민 회로 역시 반복적인 고자극에 노출되면 같은 자극으로는 더 이상 충분한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도파민 반응이 둔해진 뇌는 이렇게 판단한다. ‘지금은 움직일 여유가 없다. 당장은 눈앞의 자극에만 반응하고, 나머지 에너지는 최대한 아끼자.’ 이는 게으름이 아니라, 뇌가 선택한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이 상태에서는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도, 실제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신발을 신는 데까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겉으로는 의지가 약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행동을 시작하게 만드는 시스템 자체가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상태에 가깝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단순히 ‘덜 움직이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움직일 힘과 의욕 자체가 떨어진 몸 상태가 기본값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만성 피로, 불안, 그리고 도파민 시스템의 저하가 자리 잡고 있다.
도파민은 흔히 ‘쾌락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상당한 오해다. 도파민의 본질은 즐거움이 아니라 무언가를 원하거나 시도하려는 마음, 즉 행동을 시작하게 만드는 동기 시스템이다. 우리 조상들의 환경에서는 이 시스템이 매우 단순하고 명확하게 작동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흡수 속도다. 초가공식품은 제조 과정에서 식품의 복합적인 구조가 거의 해체된다. 섬유질과 세포벽은 부서지고, 전분은 미세 입자가 되며, 지방은 유화되어 입안에서 녹듯이 들어간다. 씹는 수고는 줄어들고, 소화와 흡수는 빨라지며, 그만큼 혈당과 지방산이 순식간에 혈액 속으로 쏟아진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우리 뇌의 보상 회로에 매우 강한 신호를 보낸다.

전통적인 에너지 밸런스 모델, 즉 ‘덜 먹고 더 움직이면 된다’는 설명은 이 지점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칼로리 숫자만 보고 조금 덜 먹으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망가진 혈당·인슐린 시스템과 초가공식품에 길들여진 보상·도파민 회로는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배고픔과 스트레스를 견디라는 의지력 과제만 얹어버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는 겉으로는 합리적인 조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비틀린 대사 구조와 췌장의 부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구조적으로 불리한 게임을 제안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아무리 식단을 잘 구성해 먹더라도, 하루 대부분을 앉아서 보내며 근육이 깨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면, 그 음식은 에너지로 쓰이지 못하고 결국 지방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대사를 실제로 움직이는 기관은 근육이고, 근육은 움직여야만 켜지기 때문이다.

특히 비만인의 운동 전략은 복잡할 필요가 없다. 천천히 오래 걷는 것에서 시작해, 가벼운 근력 운동과 중강도 유산소로 범위를 넓히고, 몸이 안정되면 유연성을 보완한 뒤 점차 강도 높은 근력·유산소 운동으로 나아가는 흐름이 가장 안전하면서도 효과적이다. 몸이 준비되면 취미로 즐길 수 있는 운동을 하나씩 경험해보자. 이 순서는 단순해 보이지만 부상을 막고, 대사를 개선하며, 정서적 회복까지 이끌어내는 견고한 방식이다.
결국 운동을 지속하게 만드는 힘은 의지가 아니라 구조에 달려 있다.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설계, 무리하지 않는 순서, 실패하지 않도록 만드는 환경이 갖춰지면, 자연스럽게 운동은 ‘참고 버티는 일’에서 ‘몸이 스스로 찾는 행동’으로 바뀐다.

특히 비만인에게 운동의 지속 여부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 설계의 문제에 달려 있다. 근력·유연성·유산소 중 어느 한 가지에만 치우치면 부상 위험이 높아지고, 부상은 즉각 NEAT를 떨어뜨릴 수 있다. 이는 대사 저하와 우울감 증가로 이어지는 또 다른 악순환을 만들게 된다. 반대로 이 세 가지 운동이 균형을 이루는 순간, 운동은 고통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몸이 스스로 찾는 ‘쾌적한 루틴’으로 바뀐다.
근력은 관절을 보호하고 혈당 대사의 기반을 만들며, 유연성은 충격을 흡수해 안전한 움직임의 범위를 유지해준다. 유산소 운동은 스트레스를 낮추고 지방산 산화의 흐름을 안정화시킨다. 이 세 축이 조화를 이룰 때, 운동은 아프지 않고 오래 지속할 수 있는 활동이 된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바로 ‘즐거움’이라는 감정적 축이다. 다양한 운동을 여러 가지 놀이처럼 바라보고, 나와 맞는 감각을 경험하는 순간, 운동은 더 이상 체력 소모가 아니라 보상 행동으로 인식된다. 이 경험은 도파민 회로를 서서히 다시 켜주고,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관성을 만들어준다.

중요한 것은 가공 여부 자체가 아니라, 그 가공이 몸의 대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가다. 몸의 대사를 흐트러뜨리는 방향인가, 아니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방향인지가 핵심이다. 다만 먹는 일조차 이렇게 더 많은 지식과 선택의 수고를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쩐지 아쉽다. 그럼에도 이 같은 식품 분류 체계를 통해 ‘건강한 가공식품’의 범위를 알게 되면, 다시 균형 잡힌 식생활로 돌아가는 길도 분명해진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런 강한 도파민 자극이 반복되면, 뇌는 이를 비정상 상태로 인식하고 적응을 시작한다. 과도한 도파민 분비에 대응해 도파민 수용체의 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설탕물을 반복 섭취했을 때 측좌핵 등 보상 회로에서 도파민 수용체가 감소하는 현상이 관찰되었고,23 초가공식품 섭취가 많은 비만인에게서도 유사한 변화가 보고되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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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년에 걸친 인류의 역사에서 잠이 부족한 상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본격적인 ‘만성 수면 부족의 시대’가 열린 것은 불과 100여 년 전, 토머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이후부터다. 그 이전까지 인간의 생활은 비교적 단순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잠에서 깨고,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질서였다. 그러나 전구가 발명되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자연적인 일주기日週期(약 24시간 주기로 생체 시계가 수면·각성, 체온, 호르몬 등을 조절하는 현상) 리듬에서 벗어나 인공적인 빛 아래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여기에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발표하며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자,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잠들지 않는 세상이 완성되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자극을 소비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 뇌는 밤이 되어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환경에 놓이고 말았다. 그 결과 인류는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수십만 년 동안 유지해온 수면 패턴이 완전히 뒤흔들리는 상황에 처했다.

수면이 부족한 상황에서 혈중 코르티솔 수치가 높아지면, 열량이 높은 단맛과 기름진 맛에 대한 선호가 뚜렷해진다. 여기서 단맛은 주로 탄수화물을, 기름진 맛은 지방을 의미한다. 탄수화물은 식량이 부족할 때 근육과 뇌가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빠른 에너지원이며, 지방은 적은 양으로도 많은 열량을 제공해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연료다. 과거에는 이러한 선택이 매우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었다. 그러나 음식이 넘쳐나는 현대사회에서는 이 본능이 달고 기름진 초가공식품에 대한 탐닉으로 이어지며, 체중 증가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수면 부족은 단지 ‘조금 더 피곤한 상태’가 아니다. 뇌의 판단 저울을 고장 내고, 식욕을 바꾸며, 나아가 지방이 쌓이는 위치와 방식까지 바꾸어버리는 강력한 대사 교란 상태다.

왜 수면이 부족할 때 내장지방이 늘어나는 걸까? 그것은 내장에 위치한 지방세포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잠이 부족해 몸이 피로한 상태에서는 코르티솔 분비가 증가하는데, 코르티솔이 만성적으로 높게 유지될 경우, 면역 체계를 교란해 염증 조절 능력을 떨어뜨리고 내장지방을 늘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간헐적 단식을 활용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의 수면과 생체 리듬, 근육량과 식단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또한 단식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 사이에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까지 포함해 전체적인 대사 설계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설계의 바탕에는 수면이 있다. 잘 자지 못하는 몸은 아무리 좋은 식단 전략을 시도해도 성공시키기 어렵다.

초가공식품이 넘쳐나고,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스트레스 자극이 끊이지 않는 지금 같은 환경에서는 이 생체 시계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몸이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동안에는 그 문제를 잘 느끼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수면과 리듬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다이어트와 대사 관리에 분명한 한계가 생긴다. 같은 식단과 운동을 해도 결과가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가공식품에 의존하는 악순환은 개인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스트레스는 지속되고, 자극적인 음식은 지나치게 쉽게 접근 가능하며, 그 보상은 매우 강하게 설계된, 현대사회의 구조적 결과에 가깝다. 이런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의지로 참아라"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혼자 뛰라는 말과 같다.
이제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왜 나는 먹는 것을 참지 못할까?"가 아니라 "감정을 음식에 기대게 만드는 이 구조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바꿔야 할까?"라고 물어야 한다. 핵심은 음식을 끊는 것이 아니다. 음식이 아닌 다른 것으로 나를 진정시킬 방법을 뇌가 다시 배우게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참아라"가 아니라, 나에게 맞는 리듬과 방식을 찾는 것. 그것이 결국 살찌지 않는 몸으로 가는 가장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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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은 단순히 ‘많이 먹어서 살이 찐 상태’가 아니다. 오늘날 비만의 상당 부분은 사회·환경적 요인과 구조화된 생활 패턴이 몸의 대사와 뇌의 보상 체계를 왜곡한 결과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비만을 개인의 게으름이나 의지 부족으로 치부하며, 비만인을 향한 낙인과 편견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다.

비만은 타고난 체질도, 바꿀 수 없는 운명도 아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은 비만 환경 속에서 살더라도, 사람에 따라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은 조금씩 다르다. 잘못된 식습관 때문에 살이 찌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신체 활동이 줄어들며 문제가 생기는 사람도 있다. 또 수면과 스트레스 관리가 잘못되어 비만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차이를 무시한 채 하나의 정답을 강요한다면, 변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진정한 다이어트는 결핍을 견뎌내는 일이 아니라, 웰니스wellness 상태로 이동해 가는 과정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웰니스가 있으며, 그것은 극단적인 금욕과 통제되지 않는 탐닉 사이, 이른바 ‘건강한 변동성’ 안에 존재한다. 이 변동성이 회복되면 몸에는 대사적 유연성이 생긴다. 가끔 자극적인 음식을 먹거나 폭식하는 날이 있더라도, 다시 자연스럽게 일상의 리듬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체중의 설정값이 정상화되면 살은 의지로 붙잡지 않아도 빠지고, 그 상태가 무리 없이 유지된다. 일상은 한결 가벼워지고, 삶의 즐거움은 오히려 더 커진다.

직장에서도 비만인은 보이지 않는 차별에 자주 직면한다. 연구에 따르면, 같은 조건을 갖춘 지원자라 하더라도 비만 여성은 동일한 면접 기회를 얻기 위해 37퍼센트 더 많은 이력서를 보내야 한다.10 승진이나 연봉 협상 과정에서도 불이익을 경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낙인과 차별이 반복될수록 자존감은 점점 떨어지고, 이는 다시 비만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비만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덜 먹고 많이 움직여라"라는 조언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니, 사실상 이런 말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몸과 심리 상태를 이해하고, 식생활·수면·스트레스·활동량 등 여러 생활 영역을 함께 조정하는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이 다이어트를 의지의 문제로 생각한다. 얼마나 참을 수 있느냐, 끝까지 버틸 수 있느냐의 싸움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수년간 비만과 대사 질환 환자들을 상담하고 진료하며 내가 반복해서 확인한 사실이 있다. 체중 감량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얼마나 의지가 있느냐’가 아니라, 현재 자신의 상태를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느냐’이다. 성공적인 다이어트란 의지를 가지고 버티는 과정이 아니라, 의지로 버티지 않아도 되도록 생활 구조를 바꾸는 과정에 가깝다.

비만은 더 이상 개인이 혼자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현대사회의 과다한 초가공식품, 신체 활동의 감소,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 같은 환경적 요인들이 비만의 확산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비만이 환경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동시에 희망이 되기도 한다. 환경과 생활 습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신에게 맞는 전략으로 접근한다면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 건강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현재 자신의 상태와 맞지 않는 순서로 적용하면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음식에 대한 욕구가 이미 왜곡된 사람에게 식사량부터 줄이는 방식은 실패로 돌아가기 쉽고, 수면과 스트레스 관리가 무너진 상태에서 절식을 먼저 시작하면 오히려 폭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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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명상, 마음 챙김을 통한 내면 정화가 일어나야 우리 마음이 변하게 된다. 우리 마음에는 내면의 숲, 이너포레스트가 존재한다. 그 숲이 긍정으로 채색되어야 한다. 풍요로 채워지고, 감사로 물들어야 한다. 그때 이 마음이 또 다른 세상을 펼쳐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변화는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무의식의 밭에 뿌려진 생각의 씨앗이 싹이 트고, 가지를 뻗어, 열매 맺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보통 7~8년 이상이다.

깨달음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경험을 통한 지식의 체득 과정에서 몸으로 느끼고 마음에 각인될 때 나타난다. 마음의 자각은 ‘아, 그렇구나’의 순간이다. 그것이 깨달음의 시작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돈오(頓悟)’다. 문득 알게 된 깨달음에 마음이 설렌다. 지혜의 지식이 머리가 아닌 가슴을 울리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기억하며 이제는 그 자각을 쌓는 시간이 필요하다. 체득된 지혜를 쌓아가는 과정, 그 증득의 과정이 바로 마음 공부다. ‘점수(漸修)’의 시간은 이 기간을 통해 쌓이게 된다. 머리로 취득한 지식을, 몸으로 체득하며, 마음에 증득하는 시간이 수행이다. 그렇게 마음에 쌓은 무의식의 씨앗이 시간을 지나 내면의 숲을 이루고, 그 숲에 부는 바람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우리의 생각, 감정, 느낌은 이 바람에서 시작한다. 마음의 숲이 긍정으로 채색되고, 풍요로 채워지고, 감사로 물들 때, 우리에게 긍정의 생각, 풍요의 감정, 감사의 느낌이 나타나게 된다.

마음의 풍요가 현실의 풍족을 떠오르게 한다. ‘떠오르는 것’, 그걸 우리는 부유라고 한다.

철 속의 공기가 배를 부유(浮遊)하듯 마음의 무의식이 나를 부유(富裕)하게 한다.

부유한 삶은 마음의 풍요가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내면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의 이너포레스트를 풍요로 채우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지구별 여행의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마음의 풍요, 그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에너지가 우리를 최고의 부자로 떠오르게 한다. 그것이 바로 부력(富力)이다.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은 이거다. 사는 이유는 없다. 그냥 살고 있으니까 사는 것이다. 이미 태어났으니 그냥 살고 있다. 그러다 죽음이 찾아오면 별 이유 없이 죽는 것이다. 죽는 이유가 없듯이 사는 이유도 없다.
지금 자신의 손을 보라. 손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악수하기 위해서? 밥 먹기 위해서? 글쓰기 위해서? 그렇지 않다. 손은 그냥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그냥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다. 악수하려고 손이 있는 게 아니다. 숟가락 때문도 아니고, 펜 때문도 아니다. 그냥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사는 것도 똑같다. 살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삶의 의미와 가치는 내가 부여할 수 있다. 나는 그 삶을 행복으로 채우려 한다. 행복하게 사는 게 내 삶의 의미와 가치다. 그리고 그 행복한 삶을 위해 나는 풍요를 추구하고, 감사와 함께한다. 풍요를 통해 세상에 나눔을 실천하고, 감사를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why’ 없는 삶에 ‘how’의 가치를 담고 있다.

존재가 이유를 선행한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기에 존재의 이유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손은 있으니까 있는 것처럼, 삶은 생존하기에 있는 것이다. 죽음의 인연이 다가오면 우리는 그 존재를 다하게 된다. 그러니 사는 이유를 찾을 시간에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 고민해보라.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게 행복한 것이다. 행복은 경험이고, 경험은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니 그 경험을 할 수 있는 건강한 몸에 감사하고, 즐겁게 말하고, 행복하게 지내보자. 그러면 알게 된다.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살아 있다는 단순한 기적과 볼 수 있다는 황홀한 축복,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움에 감사하며 세상을 바라보자. 행복으로 물든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지구는 46억 년째 돌고 있다. 고작 100년 사는 인생, 행복하게 살자.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산다. 그 여생의 기간이 다르고, 선고를 받지 않은 것의 차이일 뿐이다.

누구나 죽음은 무섭고, 허망하다. 그래서 죽음은 떠올리기 싫고, 입에 담기도 무서운 단어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 엄마의 죽음을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도 죽음은 단어 자체가 주는 위압감이 있었다. 두려움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삶에 가장 두려운 존재가 죽음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인생이 짧다는 것은 이야기가 짧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풍성하게 채우는 것, 나의 언어로, 나의 문장으로 나의 스토리로 채우는 게 우리의 삶이다. 그건 시간의 길이와 무관하다. 하루를 살면서 100개의 스토리를 채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일을 살면서 하나의 이야기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삶의 차이고, 더 정확히는 삶의 속도 차이다.

가난한 삶은 없다. 삶에 대한 해석이 가난할 뿐이다. 괴로운 삶은 없다. 삶을 괴롭게 분별하기에 그런 시간을 보낼 뿐이다.

삶이 한 편의 영화임을 알 때, 우리는 그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우리가 그 영화의 감독이고, 그 영화의 비평가며, 그 영화의 관객이다. 세상은 사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텅 빈 스크린은 영화에 물들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만든 영화가 그 위에 방영되고,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 그러니 너무 무겁게 살지 말자. 가볍고 즐겁게 살자. 우리 영화 보러 갈 때 즐거운 마음으로 간다. 우리 꿈꿀 때 진지하게 꿈꾸지 않는다. 즐겁게 영화를 보고 가볍게 꿈을 꾼다. 그렇게 살자. 그것이 우리 삶이고, 우리 인생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여기에서 온다.

우리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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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픈 지금은 현실이 만드는 게 아니다. 내가 괴로운 오늘도 세상이 만드는 게 아니다. 상황은 통증만 만들 뿐이다. 괴로움은 내가 만들고 있다. 통증을 괴로움으로 확대하지 마라. 통증은 시간이 지나면 줄어든다. 그 흘러가는 과정을 지켜보면 그만이다. 그러니 스스로 괴롭히는 이 무지에서 벗어나자.

그러니 꼭 ‘3그’의 진통제를 들고 다니자. ‘응, 아프구나.’ ‘그럴 수 있다.’ ‘뭐 그래라 그래.’ 통증은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통증을 괴로움으로 확대하지 말자.

나는 인생을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가난한 어린 시절을 선택할 것이다. 그때의 가난이 미래의 부를 예언하고 있었다. 가난한 현실은 풍족한 미래를 포함하고 있다. 가난 속에서 풍요의 마음을 만들고, 그 마음을 인식하며 살 때, 그 마음의 인식이 미래의 부를 부른다. 늘 이야기하듯, 인식이 존재를 부르고, 일체유심조는 세상이 굴러가는 가장 본질적 진리다.
가난이 부의 예언자인 이유다. 예언을 하는 것은 쉽다. 로또 예언도 어렵지 않다. 일주일 먼저 존재하면 된다. 간단하다. 그래서 예언은 선행을 의미한다. 내 삶의 가난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가난은 내게 먼저 와주었다. 그 가난이 미래의 부를 인식하고 그 인식을 통해 풍족한 지금을 만들고 있다. 내 마음이 풍요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씨앗이 열매가 되기 위해 우리는 씨앗을 뿌려야 하고, 물을 뿌리고, 기다리면 된다. 씨앗이 발아하는지에 집착해서 매일 흙을 파게 될 때, 씨앗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열매에 대한 집착, 당첨에 대한 집착은 흙을 파게 되지만, 어차피 잘될 거라는 앎은 감사의 말과 풍요의 행위라는 물을 붓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당첨의 열매는 내 삶에 깃들어 있다.

대출은 레버리지가 아니다. 대출은 레버(lever)다. 레버는 막대기에 해당하고, 레버리지는 그 막대기를 이용한 힘, 지렛대의 원리에 해당한다. 지렛대를 이용해 지렛대보다 훨씬 큰 바위를 움직이듯, 대출을 이용해 자신의 자산보다 더 큰 부동산을 소유하는 게 레버리지다. 그것이 지렛대 효과다.

우리는 ‘늘’ 소유할 수 없다. 하지만 ‘항상’ 소유할 수는 있다. 그건 소유에 대한 앎이 생겼을 가능하다. 바로 ‘지금 여기’에 대한 소유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머무를 수 있다. 항상 ‘여기’에 머무를 때, 늘 ‘지금’을 소유하게 된다. 나머지는 가짜고, 렌털이고, 기억일 뿐이다.
과거 ‘100미터 14초’를 아쉬워하고, 미래에 ‘달리기를 못 할 자신’을 불안해하지 마라. 그건 시간 여행일 뿐이다. 시간 여행은 불평, 불만, 불안만 야기한다. 과거를 불평하고, 현재에 불만족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하는 시간 낭비다. 시간을 여행 말고 지금에 머물러라. 여기에 현존해라. 그러면 알게 된다. 여기는 진짜고, 지금은 소유고, 현존은 알아차림이다. 그것이 우리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현실의 화살을 맞고 아픔이 발생했다. 그 아픔을 스스로 확장해서, ‘나는 아프다’로 규정하지 마라. 자신을 해치는 길이다. 누군가 나를 아프게 할 때, 그는 나쁜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나를 아프게 할 때, 그건 어리석은 사람이다. 스스로 화살을 만들고 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무지가 습관이 되고, 그 습관 속에서 나는 화살 제조 전문가가 되고 있다.

삶은 우연이고 인생은 운이다. 삶은 내가 만든 운이 우연을 가장한 인연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인연 속에 살아간다.

가난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을 때, 우리는 그 가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가난을 품고 있는 풍요’를 알아차릴 때, 가난은 초라한 것이 아니다. 가난은 결핍이고, 결핍은 뭔가를 채우는 행위로 표현된다. 돈을 버는 것은 돈을 채우는 행위고, 그것의 바탕에는 내면의 결핍이 있다. 돈을 쫓는 시간 속에 마음의 결핍은 더 커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기부와 헌금을 실천할 때, 마음의 방향은 전혀 달라진다. 기부는 돈을 나누는 것이고, 나누는 것은 뭔가로 채워져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 나눔이 내면을 풍요로 물들인다. 가난 속에서 봉사를 하고, 궁핍 속에서 베풂을 실천할 때, 가난은 인색이 아닌 풍요의 또 다른 얼굴이 된다. 당당한 가난은 나의 스토리가 되고, 풍족한 미래의 전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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