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금곡주공에 살았어도 복도 가장 끝 호에 사는 아이들은 곧 탈출할 애들이었다. 끝 호에는 방이 하나 더 있었고, 그 평수에 사는 이들은 대체로 1년을 넘기지 않고 주공을 떠났다. 오래도록 남게 된 아이들은 고통의 서열을 셈하는 데에 점점 능숙해지고 익숙해졌다. 전세 사는 아이가 월세 사는 아이를 깔봤고, 아파트 평수로 최고의 상태와 최악의 처지를 따졌다. 악한 어른이 아이들을 조종한 결과가 아니었다. 주위의 평범한 어른들을 보며 자연히 터득한 아이들 나름의 ‘지혜’였다.

몇 년 후 성인이 되어 ‘휴거’(‘휴먼시아 거지’의 준말. LH 공공임대아파트 휴먼시아 거주자에 대한 멸시이자 ‘거지’로 멸칭되는 빈곤층에 대한 낙인과 혐오를 동시에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10)라는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출입구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혐오가 탄생하는 데 일조한 것 같아서. 이 죄책감이 모두의 것이 될 때쯤엔 세상이 바뀔까. 나는 회의적이다.

금곡주공으로 이사를 오고부터 공부를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겼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잘 벌려면 학력이 높아야 한다고 믿었다. 나를 위해 나보다 더 가난하게 사는 엄마를 건사하려면 2인분의 생활비는 너끈히 벌어야 하고, 알코올중독자인 아빠를 입원이라도 시키려면 3인분 이상의 돈이 수중에 있어야 했다.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학력이 살 길인 것 같았다.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떠미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엄마도 날 닦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험 기간에 밤을 새우는 내게 공부 그만하고 제발 일찍 자라고 잔소리를 했다.
집안 사정 때문에 무언가를 끝까지 배워본 적 없는 것이 한이었는지, 깨달음이었는지, 엄마는 형편없는 생활비를 쪼개 나를 학원에 보냈다.

세 식구의 생활비는 수급비로 충당하고, 엄마가 버는 월급의 상당액이 나의 학원비로 쓰였다.11 엄마는 나를 긁지 않은 복권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엄마의 결핍을 채워보려는 악다구니였을까? 나중에 들어보니 최루성 사연은 전혀 없었다. 그냥 별나게 기억력이 좋은 자식에게 쏟아지는 주위의 잔잔한 시기심과 지나친 관심에 엄마의 자존심이 반응한 결과였다.

수급비를 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은 늘 딜레마에 빠진다. 수급비는 생활의 최저 수준을 가정한다. 이보다 더 가난하지 않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일정 금액 이상의 수입이 생기면 수급비가 낮아지고, 그러면 보탬이 되던 월급은 줄어든 수급비를 채우는 수단이 되어버려 결국 생활의 수준이 빠르게 떨어진다. 엄마는 수급비를 받지 않아도 되니 돈을 더 벌길 원했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경력단절 여성에게 허락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내 눈에 엄마의 노동은 엄마의 팔꿈치나 무릎 그 자체로 보였다. 그런 엄마의 뼈를 갈아 넣은 시간 속에서 나는 부지런해야 했다.

내게 공부는 가성비 좋은 행위였다. 적어도 공부를 하는 동안은 가난한 나와 가난하지 않은 남들 사이에 놓였던 벽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타고난 암기력 덕분에 들이는 노력에 비해 결과가 좋은 편이기도 했다. 공부도 재능이라면, 이 재능은 내가 다른 데에 한눈을 팔지 않고 학생이라는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커다란 원동력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받는 이런저런 국가 지원의 명목이 ‘우수한 학업 성적’인 것이 만족스러웠다. 가구 소득이 대한민국 평균에 한참을 못 미치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부모의 자녀여서가 아니라, 장차 이 나라를 이끌 훌륭한 재목이자 사회에 득이 될 인재여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직 훌륭하지도 득이 되지도 않지만, 그렇게 될 예정이니까 그 값을 당겨서 쓰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곤 했다. 사라져가는 개천 용 신화의 마지막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항상 나일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용이 된다면 내 가난도 신화가 될 것이었다.

수급자 가구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어정쩡하게 수급 기준을 넘는 일자리를 얻어 수급자에서 ‘탈락’하면, 기초생활 급여에서 차감은 되지만 적게나마 보탬이 되었던 수준의 벌이를 할 때보다 한 달 가용 생활비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늘 선택을 계산했다. 플랜 B는 물론이고 플랜 C도 세웠다. 플랜을 짜는 원칙은 ‘가성비’였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확실하게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러다 보니 평행세계의 나와 이 세계의 나 사이에는 간극이 컸다.

대학 입학 전부터 엄마와 나는 냉전 상태였다. 기껏 합격해둔 부산의 한 사범대학을 뒤로하고 굳이 대구에 있는 대학교를 가겠다는 딸이 못마땅했던 엄마는 자주 성질을 냈다. 그 마음이 나와 떨어진다는 불안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이야 솜털로도 감지할 수 있었지만, 나는 나대로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쩌면 엄마는 내가 국어교육과를 가지 않고 국어국문과를 선택한 것이 불만이었을지도 모른다.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도 아빠의 밀린 술값을 다 갚을 수 없는 판에, 열아홉 살의 나는 아주 낭만적인 문장을 날렸다.작가가 되고 싶어. 엄마는 제발 꿈으로 남겨두라고 말렸지만, 나는 몰래 휴대전화 번호를 바꿔버렸다. 부산의 사범대학 예비 1번 합격 전화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작전은 성공해 나는 대구 K대학 국어국문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서울에 있는 S대학 문예창작과에도 1차 합격했지만, 국어교육과 대신 국어국문과를 택했으니 국립대라는 가성비는 지켜야 했다. 학교와 엄마에게는 S대 문예창작과를 1차에서 떨어졌다고 속였다. 문예창작과가 1지망이었지만 국립대도 플랜 A에 속했다. 우선순위의 기준은 욕망이 아니라 실현 가능성이었다.

글밥을 짓는 사람이고 싶었고, 글을 쓰지 않는 삶은 그려본 적도 없었지만, 대학에 와서 글을 쓰는 시간은 극히 적었다. 장학금을 4년 내내 받으려면 일정 점수 이상의 학점을 유지하는 성실성이 요구됐는데,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하는 사정은 양해되지 않았다. 나는 작가 지망생이기 전에 장학생이었고, 장학생이기 전에 아르바이트 노동자였다.

장학금 성적 기준은 4.3 만점에 3.1이었는데, 아르바이트를 서너 개씩 하며 맞추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학점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등록금과 생활지원비가 끊겼다. 기초생활수급자이면서 장학금 수혜자인 대학생은 학기당 생활지원금 180만 원을 받았는데, 나는 이 돈을 전부 엄마에게 보냈다. 집안의 생활비이자 내가 대학에 잘 다니고 있다는 자랑스러운 증거물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성적이 땅으로 떨어진 원인은 수면 부족에 있었다. 교직 이수를 노리는 학생들이 학점 올리기에 열중할 때,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뺏긴 수면 시간을 중국어 시간에 채웠다. 결국 중국어 학점으로 D 마이너스가 떴고, 학기 평점은 3.12가 나왔다. 장학금 기준이 3.1 이상이라지만, 너무 아슬아슬한 점수였다. 장학생 잘리는 거 아닐까. 불안한 마음으로 부랴부랴 관계처에 문의하니, 한 번이라도 점수 미달이면 바로 잘릴뿐더러 지금 점수는 절대값만 보면 아슬아슬하게 통과되지만 퍼센트로 변환하면 장담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살아야 했다. 무조건 장학금을 살려내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으로 시작하는 긴 메일을 썼다. 어려운 형편과 수업을 듣는 시간보다 노동이 더 많은 스케줄을 낱낱이 쓴 후, 대학생으로서 본분을 잊지 않겠다는 사과와 다짐으로 마무리했다. 교수님의 아량 덕분에 나는 겨우겨우 C 플러스를 받아 아슬아슬하게 학점이 올랐고, 장학생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누구는 공사장에서 일하면서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던데 나는 왜 이럴까?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아주 세게 질책했다. 돈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국고에서 나오는 장학금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잘해야 나오는 것이니, 무조건 잘해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이후 나는 시험 기간에 사흘이고 나흘이고 밤을 새워 공부했다. 잠 좀 못 잔다고 까짓것 죽기야 할까. 시험을 보고 멍한 상태로 닭집에 가서 닭을 나르면서도 생각했다. 죽기야 할까. 아, 죽고 싶다. 아니지, 지금 통장에 무려 200만 원이나 있는데, 죽어도 계약한 자취방에서 죽어야지.
피곤에 찌들어 기숙사에서 늦은 잠을 청하면, 평행세계의 내가 유럽 여행을 가는 꿈을 꿨다. 그것조차 싫었다.

과외를 하는 사이사이 무한 리필 고깃집에서 주 4일, 12시간씩 일했다. 내가 해본 일 중 가장 고강도 육체노동이었다. 일 자체는 단순했다. 테이블마다 고기를 구워주고 볶음밥을 볶아준 후 손님이 나가면 상을 치우고 그릇을 설거지했다.

설거지를 하다 보면 더워서 기절할 것 같았다. 동료들과 번갈아가며 냉동창고에 들어가 몸을 급랭시켰다. 안에서는 창고 문이 열리지 않는 구조이다 보니 밖에 있는 사람이 까먹지 않고 열어줘야 동사를 면할 수 있었다. 번아웃이 올 대로 온 나는 곧 팔릴 고기들 사이에서 자극적인 상상하기를 즐겼다. 갈고리가 내 모가지를 낚아채고, 마침 동료들이 날 꺼내는 것을 깜빡해 꽁꽁 언 안온맛 갈비. 그렇게 날 죽이고 나면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게 허락된 일탈이 상상 자해였다. 남겨질 엄마가 더 가난해질까 봐 죽을 수는 없었다. 죽지 못해 보내는 하루가 반복될수록 감정이 가라앉았다. 조금 부러웠던 친구들의 여행이 조금도 부럽지 않게 됐다. 최저 수준도 안 되는 기숙사만 탈출하면 행복할 것 같았던 실낱같은 희망도 감각할 수 없었다. 그냥 일어났으니까 일했고 일했으니까 잤다.

어느 날, 과외를 할 때 뿌렸던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에두르는 기색도 없이 그 여자는 내게본론부터 말할게요. 합격하면 두 장 더 드리는 걸로 해서 큰 거 일곱 장으로 삼성 자기소개서 대필 가능하세요? 라고 물었다. 큰 거, 영화에서는 억 단위던데 학원가에서는 100만 원이었으니 700만 원짜리였다. 나는 첨삭 지도는 가능하나 대필은 할 수 없다고 잘라서 거절했다.

내가 쓰는 글이 시도, 소설도, 에세이도 아니고 ‘큰 거 일곱 장’이 돼버리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살아서 이리 된 걸까, 아니면 열심히 살지 않아서 이리 된 걸까. 그 뒤로도 대구 바닥에 뿌려질 대로 뿌려진 내 휴대전화로 대필 의뢰가 들어왔다. 죄다 단칼에 거절했다. 자기소개서 대필은 불법이고, 내 글들에 부끄럽지 않고 싶었으며, 내 자아를 남의 미래를 위한 자원으로 소진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아무리 궁할지언정 자존심을 팔 수 없었다. 그때 내가 가진 것이라곤 기숙사에 있는 이불 한 채와 그 이불 아래에 늘 소중히 두고 나오는 자존심뿐이었다. 들고 다니면 쉬이 오염되고 찢어지고 해지는 자존심. 나는 매일 밤 누워 이불 속에서 새근새근 잠든 자존심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묻혀 온 때가 묻진 않았는지, 밖에서 내가 한 짓을 알고 스스로 깨져버리지는 않았는지.
내가 줄기차게 대필을 거절하는 4년, 5년 동안 원장은 계속해서 대필을 하라며 종용하고 윽박질렀다. 필사적으로 거절하며 먹고살기 위해 버텼고, 6년을 채운 후 진저리를 치며 학원을 떠났다.

2016년 4월-6월: 빵집
대구에 올라와서 처음 했던 빵집 아르바이트는 일도 크게 고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동료들이 든든했다. 샌드위치 기사, 케이크 기사, 미성년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경력이 빵빵한 동갑내기, 그리고 나까지 모두 여자였다. 우린 서로를 도왔다.
잔잔한 분위기 속에 오래 다닐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어느 날 나타난 Sam이라는 외국인 남자 손님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면, 내게 영어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처음 본 손님도 아니어서 공짜로 영어를 배울 요량으로 카톡 아이디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놈에게서 톡이 왔다. 잘못 봤나 싶어 번역기를 돌려보았다. 너는 인생에서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있니? 너의 보이프렌드와 함께라면 어때?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Sam의 가해에 대해 동료들에게 알리고 빵집을 때려치웠다.

2016년 6월-12월: 빵집
빵집에서 빵판을 닦느라 양팔 인대에 만성 염증이 생겼다. 대충 파스를 붙이고 버텼는데, 팔꿈치까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근육 주사나 물리치료의 일부는 의료급여가 포괄하지 않는 영역이어서 치료를 거의 받지 못했다. 의료급여 수급자의 ‘미충족 의료’ 문제는 일상적으로 발생한다.20 가난한 주제에 무언가를 ‘충족’하려고 하다니, 양심이 없다고 욕먹을 것 같다. 기분 탓이면 좋겠다.

2016년 6월-8월: 닭집
너 왜 화장 안 하고 왔어? 가게 매출 떨어질라. 사장은 지치지도 않고 성차별을 실천했다.

2016년 6월-2017년 8월: 과외
형편이 어렵다고 말한 과외 학생의 과외비를 조금 낮게 받았다. 나로서는 커다란 최선이었다.

H관 호러를 매일 듣던 유리 언니가 내게 LH 대학생 셰어하우스 전형을 알려줬다(유리 언니는 자취방 보증금 300만 원을 마련하려고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 빵집에서 만난 사이였다). 대학생들이 전세 자취방을 구할 수 있게 지원하는 제도라고 했다. 전세라, 전세…. 곱씹을수록 달콤했다. 무미건조하게 굳어버린 희망의 감각이 한 꼬집 살아났다. ‘언니의 조언’은 이 정도 수준은 돼야 한다는 것을 유리 언니에게서 배웠다.
삐걱거리는 기숙사 침대에 누워 LH 전세 임대 공고문을 읽었다. 모르는 단어투성이였다.

전세 지원은 부채비율이 90퍼센트 이하인 주택에 한해 지원이 가능하며, 부채비율은 아래의 방법으로 산정됩니다.

※ 부채비율 : [근저당권 등 금액 + 선순위 임차보증금 등 + LH 지원 전세금] / 주택 가격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부채비율이니 근저당권이니 KB시세니 하는 것을 가르쳐줬다면 이렇게 머리가 지끈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교육을 성실히 이행했으나 학교에서 가르친 세상과 내가 마주친 세상은 많이 달랐다. 학교는 기회의 평등이 있다고 가르쳤지만, 사회로 나온 내게 기회는 숨어 있었고 평등은 마음속에만 사는 단어였다. 삶을 비관하는 방법을 스무 개 이상 배워서 스무 살이 된 것 같았다. 공고문을 끝까지 읽기도 전에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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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식에 멸균우유 두 상자를 짊어지고 언덕을 오르는 아이. 그것이 내 기억 속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의 첫 번째 모습이다.

2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A는 멸균우유 동지였다. 멸균우유를 배급받는 애들의 얼굴은 웬만하면 바뀌지 않았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우리는 쭉 가난했다. 아빠의 술안주이자 때때로 입이 심심한 나의 간식으로 알뜰히 먹었던 멸균우유는 빈곤가정 인증 마크나 다름없었다.

의료비 지원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를 비롯한 빈곤 계층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책이다. "세금이나 사회보험에 의해 재원이 뒷받침되는 보건의료 체계…에서는 원칙적으로 지불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의료 민영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의료급여가 1종과 2종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의료의 공급과 수요를 모두 민간으로 돌리는 것은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가 아닐까. 의료 공급이 이미 상당히 민영화되어 있으니 그것을 못 박아두자는 것이지 수요까지 민영화하자는 뜻이 아니라는 물 타기는 비겁하다. 공급 체계가 민영화되면 수요 체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뻔하다. 의료급여 체계가 놓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의료급여 1종은 생계급여와 마찬가지로 부양의무자 기준이 남아 있어서 가족관계 해체 사실을 수급을 요하는 사람이 직접 증명해야 한다.6 국민이 건강할 권리를 각자도생에 내맡긴 미국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뉴욕의 편의점에서는 셀프 치아 레진까지 판매한다. 웬만하면 편의점 약으로 때우라는 그 뜻이 충치보다 시리다.

의료급여 1종 수급자에 대한 병원의 태도는 미묘하다. 돈이 되는 비급여 진료를 안 받아서였을까. 어린 나를 보는 눈빛은 평이했으나, 할머니 또 오셨네, 할아버지 이제 가세요 같은 말에 수반되던 시선은 냉랭했다. 노골적인 냉대와 마뜩잖은 동정의 눈빛은 한번 겪으면 잊기 힘들다. 나는 그 눈빛이 어리는 전조를 파악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다

직원은 초등학생인 나를 자기 자리 앞에 세워두고 질문했다.아버지가 진짜 눈이 안 보이는 게 맞지? 어머니가 진짜 교통사고 때문에 정규직으로 일하지 못하시는 것도? 지난달에 행정복지센터에서 받은 쌀은 진짜 네가 먹었고? 너 진짜 이 집에서 사는 거 맞지, 그치? 그들은 내게 진짜가 맞느냐고 되풀이해서 물었다. 가난이 ‘진짜’가 아닐 수가 있나. ‘가짜’ 가난을 만나면 따지고 싶다. 할 짓이 없어서 가난을 도둑질하느냐고,7 하다하다 가난마저 진정성 배틀을 붙이는 거냐고.

원한 적 없는 가짜 동정이 모르는 손길과 함께 느닷없이 찾아오기도 했다.

곧 트럭 한 대가 우리 앞에 서더니 남자 두어 명과 박근혜가 내렸다. 그는 덥석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밝게 자라는 아이여서 고맙다고 했다. 이후로도 종종 자신을 정치하는 아저씨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다가와 내 머리를 함부로 쓰다듬고는 했다. 지금도 나는 재해 지역이나 쪽방촌에서 생수며 연탄, 반찬 등을 나르는 정치인들의 사진을 보면 끔찍하다. 새것이어서 유난히 빨간 목장갑과 일부러 묻힌 듯 재가 거뭇거뭇한 기름진 얼굴들. 그들이 동정마저 전시하는 동안 가난한 이들이 죽고 더 가난한 이들이 태어난다.

2000년대 초반 부산에서 가장 큰 주공아파트 단지였던 화명주공아파트는 사상공업단지에서 일하며 나중에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할 미래를 그리는 가정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가정을 비롯한 차상위 계층이 한 층에 사는 곳이었다. 이곳 주민들의 민심을 사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전략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아파트를 자가로 소유한 이들을 향해서는 재개발을 외쳤고 임차인들에게는 주거 소외 계층을 위한 구제책을 제시했다.

어렸던 나는 재개발이 무슨 뜻인지 몰라 엄마에게 물었다.재개발이 뭐야? 엄마는 심드렁하고 간단하게 설명해줬다.낡은 아파트를 허물고 새 아파트를 짓는 거야. 뭔가 희망적인 미래를 암시하는 말이었다.그럼 좋은 거네? 내가 머릿속 ‘좋은 말’ 서랍의 손잡이를 당기려는데, 엄마가 아까보다 더 심드렁하게 답했다.좋은 거지. 그런데 우리한텐 안 좋아. 나는 재빨리 ‘나쁜 말’ 서랍을 열어 ‘재개발’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주공아파트의 겨울은 재난이었다.

못 볼 꼴도 많이 보여주었지만, 화명주공은 예쁜 나무와 풀, 꽃을 내주었다. 봄에는 애기똥풀이 지천에 피었다. 여름에는 접시꽃이 곳곳에 펼쳐졌고, 가을에는 노란 은행나무 아래를 한참 걸을 수 있었다.

측량, 지반, 단지, 재개발, 벌목, 주차장 같은 단어가 자주 오르내렸는데, 단연코 튀는 말은 재개발이었다. ‘나쁜 말’ 서랍이 들썩거렸다. 친구들이 더 많이 이사를 갔다.

우리 집도 이사를 준비했다. 이사 전날, 나는 신애약국 은행나무 옆에서 서성댔다. 갈라진 줄기를 쓰다듬었다가 자수정이 또 없나 바닥을 헤집어보기도 했다. 한참 청승을 떨다가, 날 버티게 해준 우람한 줄기를 톡톡 두드리며 짧은 인사를 남겼다.안녕. 친한 친구들과 눈물의 작별을 하고 돌아와 엄마에게 물었다.또 주공이야? 그랬다, 우리 집은 화명주공에서 버스로 30분이면 도착하는 금곡주공아파트로 갈 예정이었다.

엄마는 화명주공에서 신혼을 보내고 금곡주공으로 가는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금곡주공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다. 3대인 나는 다섯 살부터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화명주공과 금곡주공에서 자랐다. 우린 뼈대 있는 주공의 가문이었다.

새로 이사를 온 금곡주공아파트는 복도식이었다. 나는 이웃과 부딪히는 게 껄끄러웠다. 더 정확히는 알코올중독인 아빠랑 사는 것이 껄끄러웠다. 아빠는 간헐적으로 심각한 중독 증세를 보였는데 그때마다 아파트 복도로 나가 "내가 안온 애비"라는 식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나 엄마를 창피하게 만들면 엄마가 숨겨놨던 돈을 내어줄 것이고, 그 돈으로 술을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나는 내가 주공아파트에 갇힌 공주라고 상상했다. 백만장자인 나의 진짜 부모님이 날 애타게 찾는 중이거나 시험하는 중이고, 버티고 있으면 날 데리고 이곳을 떠날 것이라고 말이다.

끊임없이 내 자신을 찾고, 세상살이에 대해 수다를 떨고 싶은 호기심에 쫓겨, 이곳을 찾아왔을지도 모르는 것이다."9 살기가 버거운 사람들의 세계가 찢어지는 것이 법칙이라도 되나. 여기를 뜰 상상에 들뜨다가도 현실의 엄마가 마음에 걸렸다. 엄마도 같이 가자고 해야지. 초등학생다운 망상을 하다가 현실이 버거워서 상상을 묻어두는 중학생이 됐다. 나는 자랐지만, 아빠는 여전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 지쳐 잠드는 인간이었다.

사춘기인데다 아빠의 상태도 심각해서였는지 금곡주공 3단지에는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다. 떠오르는 거라고는, 중학생 때 사귀던 남자친구가 날 데려다주며와, 여긴 변한 게 없네. 우리 집 못살았을 때 나도 여기서 잠깐 살았는데,라고 말하는 바람에 헤어질 결심을 했던 것이나 고등학생 때 성범죄자 알림e 문자가 수시로 와서 금곡주공에 사는 애들끼리 야간자율학습을 째자고 모의했던 것 정도다.

주공아파트는 우리 가족이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거주지 중에 하나였는데, 화명과 금곡을 합쳐 15년을 사는 동안 주공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이 나에게도, 남에게도 불쾌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주공아파트 몇 동에 산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없었다.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비칠지 강박적으로 체크하는 기질 탓도 있었겠으나, 주로 상황이 내 입을 막았다. 엄마가 영혼을 끌어모아 보내준 학원의 승합차 안에서 친구들은 브랜드 아파트의 커뮤니티 생활로 수다를 떨었다.

처음부터 가면을 썼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생 시절 다니던 영어학원에서 화명주공에 산다고 말했다가 친구들의 애매모호한 반응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뒷맛이 찝찝했다. 귀가하는 학원 차 안, 나와 같은 곳에서 내리던 아이가 한수 가르쳐줬다.나도 화명주공 살지만, 화명동에서 주공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우습게 본대. 그 뒤로 자진해서 내가 사는 곳을 밝힌 적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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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난이 과거형이 된다 해도 우리의 가난은 진행형이기에, 이 책은 일인칭으로 쓰였으나 일인분짜리는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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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고를 당했을 땐 기자들이나 경찰이 도와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진도대교 싸움도 누가 시켜서 했던 게 아니에요. 처음엔 촛불집회에도 가지 말자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우리 부모들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부 쪽에서는 우리 싸움을 막으려고 개인보상으로 파고들어올 테고 그걸 방어하는 게 제일 시급한데 우리는 잘 버티고 있잖아요. 최대한 막아내야죠. 큰 걱정은 안 해요. 세월호 싸움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은 덕도 크지만, 부모들이 당당하게 중심을 잡아갔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어요. 스스로 필요를 느끼니까 청와대에도 가고, 민주당 점거농성도 하고, 분위기를 주도해가고 있잖아요. 부모들이 자랑스러워요. 감동적이에요.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 마음은 다 똑같아요. 억울하게 죽은 애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은 힘든 줄도 몰라요. 의무감이지만 대단한 힘이에요. 이제는 개인의 슬픔, 분노보다는 대한민국 학부모의 대표라고 생각하면서 싸워나가야겠죠. 그래야 국민적 지지를 받아서 특별법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돌이켜보면 내 삶은 우리 현대사의 급류에 휩쓸려왔고, 그 끝에서 참사의 당사자가 되어 이렇게 길거리에 앉아 있어요. 87년 6월항쟁부터 거의 30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그때하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이렇게 변한 게 없을 수 있을까 싶어요. 오히려 더 나빠진 거 같아요. 사회의 모순은 더 고착되고 견고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 허울만 좋은 민주주의에 국민들이 완전히 속았어요. 참담하죠. 내 딸을 잃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우리가 꼭 진실을 밝힐 거예요. 이 문제를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30년 후에 나 같은 사람이 또 가족을 잃고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겠어요?

4월 16일 이후 우리는 모두 세월호 참사가 만들어낸 시간을 살아가게 되었다. 슬픔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슬픔을 잊기 위해 그 시간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며. 그 말들이 비수가 되어 다시 하나의 시간을 슬픔에 가둔다. 그러니 우리는 가족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슬픈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자식 잃은 부모가 웃는다고 쳐다볼까봐 웃지도 못한다는 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며 슬픔만 고백할 수는 없다.

하나의 시간은 균질한 시간이 아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시간들에 하나의 수식어를 붙인다면, 슬픔이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이 더 맞다. 집 밖을 나갈 수도, 집 안에만 있을 수도 없는 시간, 아이의 물건을 태울 수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시간, 밥을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는 시간.

이는 가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위로하며 같이 울고 싶지만 섣부른 위로가 가슴을 후벼팔까봐 다가서기 어려운 시간, 진실을 밝히려고 앞장서는 가족들에게 경의를 표하다가도 뒤돌아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경의조차 잔인하다 여겨지는 시간. 집에 들어가며 누군가의 존재를 느낄 때 누군가의 부재에 직면해야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소소한 일상에 행복해하지도 미안해하지도 못하는 시간. 이 책을 읽는 우리가 보내는 시간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다. 가족들은 이 시간을 살아내기를 미룰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이 없는 시간, 그동안 익혀온 어떤 삶의 기술도 무력해지는 시간, 살면서 쌓아온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감각을 처음부터 다시 써내려가야 하는 시간을 가족들은 먼저 살아내고 있다. 그것은 절망적이지만,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외쳤던 우리는 다시금 가족들로부터 배운다. 누군가 이와 같은 참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 적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더이상 확률을 따지지 않는다. 단 한 사람이라도,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으며, 모욕당해도 되는 죽음은 없다. 부인되어야 할 삶이 없는 세상으로, 가족들은 우리를 이끌고 있다.

혼자였다면 어딘가쯤에서 이 시간을 닫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죽은 아이를 통해 ‘아이들의 죽음’을 겪게 된 부모들이 서로 지켜주며, 자꾸만 돌아오는 시간을 미래로 밀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집에서, 누군가는 거리에서, 누군가는 말하며, 누군가는 들으며, 누군가는 울며, 누군가는 웃으며, 시간을 만들어간다. 시간을 밀어갈수록 죽은 아이가 돌아올 수 없다는 아픔은 뼈저리다. 그렇게 아픔을 삼키며 밀어가는 시간의 무게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시간으로 바꾸며 사람의 시간을 여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어야 한다. 8개월여의 시간을 정리한 연대기(年代記)가, 슬플 수만은 없는 연대(連帶)의 기록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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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세월호 참사 6개월 만에 직장에 복귀했다. 삶의 안정을 되찾으려는 노력 중 하나였지만 세상과의 거리를 확인하는 생활이기도 했다. 그녀는 ‘세월호 엄마’라는 말이 싫다고 했다. 세월호 엄마라는 말에는 사람들이 보고 싶은 ‘행동’과 ‘편견’이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 그래서일까. 원래 잘 웃는 그녀였지만 예전보다 말할 때 눈물을 글썽이는 일이 많아졌다. 일상을 되찾고 준우 동생 태준이를 챙기기 위해 꾹꾹 슬픔을 누르는 모습이, 직장 일을 마치고 홀로 분향소에 들러 준우 영정을 보고 가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그 쓸쓸함을 차가운 밤공기가 아닌 따뜻한 무엇이 감싸주면 좋겠다.

세월호 참사가 잊혀지지 않도록, 실종자가 잊혀지지 않도록. 누군가는 광화문에서 누군가는 국회에서 또 거리에서 그리고 누군가는 진도 팽목항에서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진도에 내려가서도 내 자식 보고 싶고 그리워 울고 싶어도 실종자 가족 앞에서는 못 울어요. 몰래 안 보이는 곳에 가서 울고 오지. 일반인들이 유가족들 보면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러잖아요. 우리도 진도에 가면 똑같아요. 우리도 실종자 가족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아직 시신조차 못 찾아서 유가족이 되는 게 소원이라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식 보고 싶다고 어떻게 말해요. 그나마 우리는 장례라도 치렀으니 할 말이 없죠.

누구는 진실을 밝히는 게 뭐 중요하냐. 앞으로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게 중요하지라고 하는데. 썩은 데가 있으면 그곳을 파내고 새 살이 돋아나게 해야 하는데 그냥 두고 새 살이 돋길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돼요.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못하고 의문만 남기는 법이라면 제2, 제3의 세월호 참사가 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어요. 그때 가서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냐고.

안전에 대해서도 자기들 일이라고 생각을 못하는 거야. 내 자식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 못해. 간담회 가면, 내가 우리 자식 물에 빠져 죽지 않게 하려고 수영 가르쳤다고 그런 얘길 해요. 한데 그게 개인이 노력해서 수영 잘해서 될 게 아니잖아. 왜 법이 만들어져야 하는지 말하는 거지.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자식 일이라고 생각 안 해요. 소를 잃어본 사람이 외양간을 고치지, 소가 멀쩡하게 있는 사람은 모르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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