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철학의 황금기에 철학자들에겐 특별한 후원자, 주인, 또는 보는 관점에 따라선 성가신 학생이 있었다. 바로 계몽군주이다.
계몽군주가 탄생하길 열망하고 그를 직간접적으로 지도하는 일은, 단지 근대 철학의 관심사가 아니라 철학 자체의 오랜 꿈이 아닌가? 시라쿠사의 참주들을 방문하기 위해 평생 여행했던 플라톤이 잘 알려주듯, 군주를 철학으로 깨우치는 것은 철학자의 일생일대 소명이었다.
근대의 ‘계몽’은 자유를 추구하는 ‘비판적 태도’의 상속자이다.
칸트가 긍정과 인정 속에 인용하는 프리드리히 2세의 말이 알려주는 것은, 따지는 일이 복종이라는 한계 속에 자리 잡는다는 점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계몽의 용기는 통치자에 대한 복종이라는 한계 안의 용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계몽의 정신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통치자에게 복종하는 것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불화가 생긴다면? 칸트는 말한다. "국민이 자신에 대해서조차 내려서는 안 되는 결정을 하물며 군주가 국민에 대해서 내려서는 안 된다." 이 문장은 푸코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듯 칸트가 통치자 프리드리히 2세에게 제안하는 일종의 계약을 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복종은 하되, 복종해야 하는 정치적 원리가 보편적 이성에 부합하는 한에서 그럴 수 있다는 계약의 제안 말이다. 이럴 경우 "‘복종하라’는 명령이[복종하는 자의] 자율성 자체에 의거하게" 된다.
그러나 복종 자체가 이성의 자율성으로부터 유래할 때 여기에는 어떤 위험이 있지 않을까? 바로 이성 자체가 ‘자율적으로’ 통치자의 권력에 복종함으로써 권력에 불가항력적이 되는 위험 말이다. "바로 이성 그 자체가 권력의 남용과 통치화에 역사적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성 자신에 의해 정당화되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항력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9
철학자와 계몽군주 사이에, 또는 철학과 국가 사이에 계몽은 누구의 소유일까? 적어도 둘의 공동 소유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악마적인 기만이 침입하고 있지 않은지 사방을 둘러보아야 할 것이다. 계몽 또는 철학함이란 제한이 없는 것이고, 통치자는 제한을 만드는 자이다. 따라서 철학을 하되 제한에 복종하는 일, 정확히는 철학의 이름으로 자율적으로 복종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철학의 이름 아래는 제한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위반할 수 있는 길에 대한 세심한 검토가 자리 잡는다.
충직한 개들은 인간의 무용담에 출현하지만 영리한 원숭이들은 자신의 무용담을 만든다. 매력적인 원숭이 무용담은 고전부터 현대 작품에 이른다.
어두운 《서유기》가 우리 시대의 것이다. 화해와 조화의 이념에 내기를 거는 정치가 있고, 노골적인 이익 행사를 향해 걸어가는 정치가 있다. 오늘날 국제사회 어디를 돌아보건, 누구나 그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 동참하고 싶게 하는 이념을 제시하는 정치가 없다. 오로지 힘의 자랑과 토라짐과 위협이 있다. 글로 옮기기도 민망할 정도이긴 하지만, 가령 북한의 지도자와 눈높이를 맞추고서 "내 핵단추가 더 세다"고 했던 지난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인류가 바라볼 이념이 사라진 대신 동네 아이들이 주먹으로 투덕거려 골목을 제패하는 수준의 정치가 지배하는 현실을 말해준다. 그야말로 짐승들 사이의 ‘종의 전쟁’이 있을 뿐, 갈등이 상승된 화해에 가닿고, 이상에 드디어 손을 대보는 《서유기》 식 전망은 세상 밖으로 사라진 듯하다.
이런 전망은 관념적이라고? 관념 아닌 현실의 규칙에 대해서는 이미 고달픈 나날의 싸움으로부터 모두가 질리도록 체득했다. 반대로 정치만이 인간의 꿈에 귀 기울이고 그 꿈을 향해 오를 수 있는 계단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삶에는 권력가와 그가 만든 임의의 규칙, 규칙의 허점을 노린 축재蓄財, 위반에 대한 형벌, 그리고 보복으로서 ‘종의 전쟁’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인간 주체’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는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한다. 도대체 ‘주체’가 뭐길래 우리는 자신이 ‘주체’이기를 열망하는 걸까? ‘인간 주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세계 속에 담겨 있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방향 짓는, 우리가 담겨 사는 요람은 무엇인가? 바로 ‘근대modern times’이다. 근대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인 연표에서 근대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중요한 점은 근대란 연표상의 객관적인 어떤 기간을 가리키기보다는 하나의 ‘태도’라는 점이다. ‘근대modern’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형용사 ‘modernus’(모데르누스)는 ‘가까운’이라는 뜻을 지닌다. 가까움이란 지금의 시점에 대해 가까운 것이니, 곧 새롭다는 뜻이다. ‘근대’란 자신의 현재를 새로운 시기로 감지하는 태도인 것이다. 이 점은 근대를 대표하는 저작들의 제목에서부터 표현된다.
주체라는 말은 애초에 인간과는 상관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주체’를 소유하게 된 것일까? 어떻게 ‘인간 주체’가 탄생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근대 학문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
이성이 지닌 원리들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수數’이다. 이성은 수를 바탕으로 연구 공간을 열어놓고, 그 안에 들어서는 것을 대상으로 파악한다. 즉 수리물리학적 질서가 대상 세계의 본질로서 부여되는 것이다. 더불어 수적 계산의 ‘정밀성’은 학문이 갖추어야 할 이상이 된다. 수가 본질적인 것이 됨으로써, 근대는 어떤 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정밀함의 시대가 된다. 강물은 수량으로 측정되는 수자원으로, 임야는 생산할 수 있는 목재의 총량으로 계산된다. 자연에 대한 이런 수학적 파악을 바탕으로, 자연을 가공할 수 있는 근대 기술이 탄생한다. 근대 기술은 무엇을 위한 기술인가? 바로 인간에게 유용하기 위한 기술이다.
결국 인간 이성이 자연 속 모든 대상들의 원리(수학과 물리학)를 제공하는 대상 세계의 ‘근거’, 휘포케이메논(주체)이 된 것이다. 또한 수리물리학적으로 파악된 대상은 근대 기술을 통해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귀결된다. 세계의 근거와 귀결의 자리 모두에 인간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 주체’가 탄생한 것이다. 이 인간 주체의 등장을 ‘인간중심주의’라는 말로 불러도 좋겠다. 인간중심주의는 근대의 곳곳에서 목격된다. 예를 들어 근대 종교가 있다. 앞서 근대에 자연은 수리물리학적으로 파악되며, 이를 바탕으로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고 했다. 이는 곧 자연으로부터 신들이 떠나갔다는 뜻이다. 이제 숲에 사는 정령도 없고, 산을 지키는 신령도 없다.
인간중심주의는 예술의 영역으로도 파고들었다. 바로 ‘미학’이 근대에 등장한 사실이 이를 알려준다. 미학은 고대부터 있어왔던 예술철학 일반과 혼동하면 안 되는 특수한 의미의 근대 학문이다. 미학을 뜻하는 ‘Asthetik(esthetique)’의 원래 의미는 ‘아이스테시스‘에 관한 학문’이다. 그리스말 ‘아이스테시스’란 감각적 지각을 뜻한다. 그러므로 ‘에스테틱’이란 감각적 지각을 가능케 하는 인간 마음의 능력인 감성에 관한 학문, 즉 ‘감성론’이다. 그런데 어쩌다 감성론이 미학이 되었을까? 바로 근대는 아름다움의 척도를 인간의 감각하는 능력, 즉 감성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인식론과 존재론에서 일어난 근대의 혁명이 예술의 영역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데카르트와 더불어 시작된 이 혁명은 인간 주체의 생각함(코기토)을 모든 지식과 존재의 토대로 만들었다. 미美의 영역에서는 미학의 출현과 함께 인간의 감성이 아름다움의 척도로 등장한 것이다.
‘인간의 주체 되기’라는 이 프로그램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우리는 지금도 근대인이며, ‘근대’는 곧 ‘현대’를 뜻할 것이다. 반면 인간이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면, 즉 주체로서의 인간이 죽었다면, 우리는 근대라는 인간의 계획을 뒤로 한 채 미지의 시간으로 나아가는 현대인일 것이다.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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