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식에 멸균우유 두 상자를 짊어지고 언덕을 오르는 아이. 그것이 내 기억 속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의 첫 번째 모습이다.

2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A는 멸균우유 동지였다. 멸균우유를 배급받는 애들의 얼굴은 웬만하면 바뀌지 않았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우리는 쭉 가난했다. 아빠의 술안주이자 때때로 입이 심심한 나의 간식으로 알뜰히 먹었던 멸균우유는 빈곤가정 인증 마크나 다름없었다.

의료비 지원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를 비롯한 빈곤 계층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책이다. "세금이나 사회보험에 의해 재원이 뒷받침되는 보건의료 체계…에서는 원칙적으로 지불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의료 민영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의료급여가 1종과 2종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의료의 공급과 수요를 모두 민간으로 돌리는 것은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가 아닐까. 의료 공급이 이미 상당히 민영화되어 있으니 그것을 못 박아두자는 것이지 수요까지 민영화하자는 뜻이 아니라는 물 타기는 비겁하다. 공급 체계가 민영화되면 수요 체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뻔하다. 의료급여 체계가 놓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의료급여 1종은 생계급여와 마찬가지로 부양의무자 기준이 남아 있어서 가족관계 해체 사실을 수급을 요하는 사람이 직접 증명해야 한다.6 국민이 건강할 권리를 각자도생에 내맡긴 미국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뉴욕의 편의점에서는 셀프 치아 레진까지 판매한다. 웬만하면 편의점 약으로 때우라는 그 뜻이 충치보다 시리다.

의료급여 1종 수급자에 대한 병원의 태도는 미묘하다. 돈이 되는 비급여 진료를 안 받아서였을까. 어린 나를 보는 눈빛은 평이했으나, 할머니 또 오셨네, 할아버지 이제 가세요 같은 말에 수반되던 시선은 냉랭했다. 노골적인 냉대와 마뜩잖은 동정의 눈빛은 한번 겪으면 잊기 힘들다. 나는 그 눈빛이 어리는 전조를 파악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다

직원은 초등학생인 나를 자기 자리 앞에 세워두고 질문했다.아버지가 진짜 눈이 안 보이는 게 맞지? 어머니가 진짜 교통사고 때문에 정규직으로 일하지 못하시는 것도? 지난달에 행정복지센터에서 받은 쌀은 진짜 네가 먹었고? 너 진짜 이 집에서 사는 거 맞지, 그치? 그들은 내게 진짜가 맞느냐고 되풀이해서 물었다. 가난이 ‘진짜’가 아닐 수가 있나. ‘가짜’ 가난을 만나면 따지고 싶다. 할 짓이 없어서 가난을 도둑질하느냐고,7 하다하다 가난마저 진정성 배틀을 붙이는 거냐고.

원한 적 없는 가짜 동정이 모르는 손길과 함께 느닷없이 찾아오기도 했다.

곧 트럭 한 대가 우리 앞에 서더니 남자 두어 명과 박근혜가 내렸다. 그는 덥석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밝게 자라는 아이여서 고맙다고 했다. 이후로도 종종 자신을 정치하는 아저씨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다가와 내 머리를 함부로 쓰다듬고는 했다. 지금도 나는 재해 지역이나 쪽방촌에서 생수며 연탄, 반찬 등을 나르는 정치인들의 사진을 보면 끔찍하다. 새것이어서 유난히 빨간 목장갑과 일부러 묻힌 듯 재가 거뭇거뭇한 기름진 얼굴들. 그들이 동정마저 전시하는 동안 가난한 이들이 죽고 더 가난한 이들이 태어난다.

2000년대 초반 부산에서 가장 큰 주공아파트 단지였던 화명주공아파트는 사상공업단지에서 일하며 나중에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할 미래를 그리는 가정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가정을 비롯한 차상위 계층이 한 층에 사는 곳이었다. 이곳 주민들의 민심을 사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전략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아파트를 자가로 소유한 이들을 향해서는 재개발을 외쳤고 임차인들에게는 주거 소외 계층을 위한 구제책을 제시했다.

어렸던 나는 재개발이 무슨 뜻인지 몰라 엄마에게 물었다.재개발이 뭐야? 엄마는 심드렁하고 간단하게 설명해줬다.낡은 아파트를 허물고 새 아파트를 짓는 거야. 뭔가 희망적인 미래를 암시하는 말이었다.그럼 좋은 거네? 내가 머릿속 ‘좋은 말’ 서랍의 손잡이를 당기려는데, 엄마가 아까보다 더 심드렁하게 답했다.좋은 거지. 그런데 우리한텐 안 좋아. 나는 재빨리 ‘나쁜 말’ 서랍을 열어 ‘재개발’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주공아파트의 겨울은 재난이었다.

못 볼 꼴도 많이 보여주었지만, 화명주공은 예쁜 나무와 풀, 꽃을 내주었다. 봄에는 애기똥풀이 지천에 피었다. 여름에는 접시꽃이 곳곳에 펼쳐졌고, 가을에는 노란 은행나무 아래를 한참 걸을 수 있었다.

측량, 지반, 단지, 재개발, 벌목, 주차장 같은 단어가 자주 오르내렸는데, 단연코 튀는 말은 재개발이었다. ‘나쁜 말’ 서랍이 들썩거렸다. 친구들이 더 많이 이사를 갔다.

우리 집도 이사를 준비했다. 이사 전날, 나는 신애약국 은행나무 옆에서 서성댔다. 갈라진 줄기를 쓰다듬었다가 자수정이 또 없나 바닥을 헤집어보기도 했다. 한참 청승을 떨다가, 날 버티게 해준 우람한 줄기를 톡톡 두드리며 짧은 인사를 남겼다.안녕. 친한 친구들과 눈물의 작별을 하고 돌아와 엄마에게 물었다.또 주공이야? 그랬다, 우리 집은 화명주공에서 버스로 30분이면 도착하는 금곡주공아파트로 갈 예정이었다.

엄마는 화명주공에서 신혼을 보내고 금곡주공으로 가는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금곡주공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다. 3대인 나는 다섯 살부터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화명주공과 금곡주공에서 자랐다. 우린 뼈대 있는 주공의 가문이었다.

새로 이사를 온 금곡주공아파트는 복도식이었다. 나는 이웃과 부딪히는 게 껄끄러웠다. 더 정확히는 알코올중독인 아빠랑 사는 것이 껄끄러웠다. 아빠는 간헐적으로 심각한 중독 증세를 보였는데 그때마다 아파트 복도로 나가 "내가 안온 애비"라는 식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나 엄마를 창피하게 만들면 엄마가 숨겨놨던 돈을 내어줄 것이고, 그 돈으로 술을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나는 내가 주공아파트에 갇힌 공주라고 상상했다. 백만장자인 나의 진짜 부모님이 날 애타게 찾는 중이거나 시험하는 중이고, 버티고 있으면 날 데리고 이곳을 떠날 것이라고 말이다.

끊임없이 내 자신을 찾고, 세상살이에 대해 수다를 떨고 싶은 호기심에 쫓겨, 이곳을 찾아왔을지도 모르는 것이다."9 살기가 버거운 사람들의 세계가 찢어지는 것이 법칙이라도 되나. 여기를 뜰 상상에 들뜨다가도 현실의 엄마가 마음에 걸렸다. 엄마도 같이 가자고 해야지. 초등학생다운 망상을 하다가 현실이 버거워서 상상을 묻어두는 중학생이 됐다. 나는 자랐지만, 아빠는 여전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 지쳐 잠드는 인간이었다.

사춘기인데다 아빠의 상태도 심각해서였는지 금곡주공 3단지에는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다. 떠오르는 거라고는, 중학생 때 사귀던 남자친구가 날 데려다주며와, 여긴 변한 게 없네. 우리 집 못살았을 때 나도 여기서 잠깐 살았는데,라고 말하는 바람에 헤어질 결심을 했던 것이나 고등학생 때 성범죄자 알림e 문자가 수시로 와서 금곡주공에 사는 애들끼리 야간자율학습을 째자고 모의했던 것 정도다.

주공아파트는 우리 가족이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거주지 중에 하나였는데, 화명과 금곡을 합쳐 15년을 사는 동안 주공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이 나에게도, 남에게도 불쾌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주공아파트 몇 동에 산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없었다.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비칠지 강박적으로 체크하는 기질 탓도 있었겠으나, 주로 상황이 내 입을 막았다. 엄마가 영혼을 끌어모아 보내준 학원의 승합차 안에서 친구들은 브랜드 아파트의 커뮤니티 생활로 수다를 떨었다.

처음부터 가면을 썼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생 시절 다니던 영어학원에서 화명주공에 산다고 말했다가 친구들의 애매모호한 반응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뒷맛이 찝찝했다. 귀가하는 학원 차 안, 나와 같은 곳에서 내리던 아이가 한수 가르쳐줬다.나도 화명주공 살지만, 화명동에서 주공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우습게 본대. 그 뒤로 자진해서 내가 사는 곳을 밝힌 적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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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난이 과거형이 된다 해도 우리의 가난은 진행형이기에, 이 책은 일인칭으로 쓰였으나 일인분짜리는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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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고를 당했을 땐 기자들이나 경찰이 도와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진도대교 싸움도 누가 시켜서 했던 게 아니에요. 처음엔 촛불집회에도 가지 말자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우리 부모들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부 쪽에서는 우리 싸움을 막으려고 개인보상으로 파고들어올 테고 그걸 방어하는 게 제일 시급한데 우리는 잘 버티고 있잖아요. 최대한 막아내야죠. 큰 걱정은 안 해요. 세월호 싸움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은 덕도 크지만, 부모들이 당당하게 중심을 잡아갔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어요. 스스로 필요를 느끼니까 청와대에도 가고, 민주당 점거농성도 하고, 분위기를 주도해가고 있잖아요. 부모들이 자랑스러워요. 감동적이에요.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 마음은 다 똑같아요. 억울하게 죽은 애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은 힘든 줄도 몰라요. 의무감이지만 대단한 힘이에요. 이제는 개인의 슬픔, 분노보다는 대한민국 학부모의 대표라고 생각하면서 싸워나가야겠죠. 그래야 국민적 지지를 받아서 특별법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돌이켜보면 내 삶은 우리 현대사의 급류에 휩쓸려왔고, 그 끝에서 참사의 당사자가 되어 이렇게 길거리에 앉아 있어요. 87년 6월항쟁부터 거의 30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그때하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이렇게 변한 게 없을 수 있을까 싶어요. 오히려 더 나빠진 거 같아요. 사회의 모순은 더 고착되고 견고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 허울만 좋은 민주주의에 국민들이 완전히 속았어요. 참담하죠. 내 딸을 잃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우리가 꼭 진실을 밝힐 거예요. 이 문제를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30년 후에 나 같은 사람이 또 가족을 잃고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겠어요?

4월 16일 이후 우리는 모두 세월호 참사가 만들어낸 시간을 살아가게 되었다. 슬픔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슬픔을 잊기 위해 그 시간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며. 그 말들이 비수가 되어 다시 하나의 시간을 슬픔에 가둔다. 그러니 우리는 가족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슬픈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자식 잃은 부모가 웃는다고 쳐다볼까봐 웃지도 못한다는 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며 슬픔만 고백할 수는 없다.

하나의 시간은 균질한 시간이 아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시간들에 하나의 수식어를 붙인다면, 슬픔이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이 더 맞다. 집 밖을 나갈 수도, 집 안에만 있을 수도 없는 시간, 아이의 물건을 태울 수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시간, 밥을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는 시간.

이는 가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위로하며 같이 울고 싶지만 섣부른 위로가 가슴을 후벼팔까봐 다가서기 어려운 시간, 진실을 밝히려고 앞장서는 가족들에게 경의를 표하다가도 뒤돌아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경의조차 잔인하다 여겨지는 시간. 집에 들어가며 누군가의 존재를 느낄 때 누군가의 부재에 직면해야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소소한 일상에 행복해하지도 미안해하지도 못하는 시간. 이 책을 읽는 우리가 보내는 시간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다. 가족들은 이 시간을 살아내기를 미룰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이 없는 시간, 그동안 익혀온 어떤 삶의 기술도 무력해지는 시간, 살면서 쌓아온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감각을 처음부터 다시 써내려가야 하는 시간을 가족들은 먼저 살아내고 있다. 그것은 절망적이지만,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외쳤던 우리는 다시금 가족들로부터 배운다. 누군가 이와 같은 참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 적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더이상 확률을 따지지 않는다. 단 한 사람이라도,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으며, 모욕당해도 되는 죽음은 없다. 부인되어야 할 삶이 없는 세상으로, 가족들은 우리를 이끌고 있다.

혼자였다면 어딘가쯤에서 이 시간을 닫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죽은 아이를 통해 ‘아이들의 죽음’을 겪게 된 부모들이 서로 지켜주며, 자꾸만 돌아오는 시간을 미래로 밀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집에서, 누군가는 거리에서, 누군가는 말하며, 누군가는 들으며, 누군가는 울며, 누군가는 웃으며, 시간을 만들어간다. 시간을 밀어갈수록 죽은 아이가 돌아올 수 없다는 아픔은 뼈저리다. 그렇게 아픔을 삼키며 밀어가는 시간의 무게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시간으로 바꾸며 사람의 시간을 여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어야 한다. 8개월여의 시간을 정리한 연대기(年代記)가, 슬플 수만은 없는 연대(連帶)의 기록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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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세월호 참사 6개월 만에 직장에 복귀했다. 삶의 안정을 되찾으려는 노력 중 하나였지만 세상과의 거리를 확인하는 생활이기도 했다. 그녀는 ‘세월호 엄마’라는 말이 싫다고 했다. 세월호 엄마라는 말에는 사람들이 보고 싶은 ‘행동’과 ‘편견’이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 그래서일까. 원래 잘 웃는 그녀였지만 예전보다 말할 때 눈물을 글썽이는 일이 많아졌다. 일상을 되찾고 준우 동생 태준이를 챙기기 위해 꾹꾹 슬픔을 누르는 모습이, 직장 일을 마치고 홀로 분향소에 들러 준우 영정을 보고 가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그 쓸쓸함을 차가운 밤공기가 아닌 따뜻한 무엇이 감싸주면 좋겠다.

세월호 참사가 잊혀지지 않도록, 실종자가 잊혀지지 않도록. 누군가는 광화문에서 누군가는 국회에서 또 거리에서 그리고 누군가는 진도 팽목항에서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진도에 내려가서도 내 자식 보고 싶고 그리워 울고 싶어도 실종자 가족 앞에서는 못 울어요. 몰래 안 보이는 곳에 가서 울고 오지. 일반인들이 유가족들 보면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러잖아요. 우리도 진도에 가면 똑같아요. 우리도 실종자 가족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아직 시신조차 못 찾아서 유가족이 되는 게 소원이라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식 보고 싶다고 어떻게 말해요. 그나마 우리는 장례라도 치렀으니 할 말이 없죠.

누구는 진실을 밝히는 게 뭐 중요하냐. 앞으로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게 중요하지라고 하는데. 썩은 데가 있으면 그곳을 파내고 새 살이 돋아나게 해야 하는데 그냥 두고 새 살이 돋길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돼요.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못하고 의문만 남기는 법이라면 제2, 제3의 세월호 참사가 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어요. 그때 가서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냐고.

안전에 대해서도 자기들 일이라고 생각을 못하는 거야. 내 자식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 못해. 간담회 가면, 내가 우리 자식 물에 빠져 죽지 않게 하려고 수영 가르쳤다고 그런 얘길 해요. 한데 그게 개인이 노력해서 수영 잘해서 될 게 아니잖아. 왜 법이 만들어져야 하는지 말하는 거지.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자식 일이라고 생각 안 해요. 소를 잃어본 사람이 외양간을 고치지, 소가 멀쩡하게 있는 사람은 모르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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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도 눈물바다구나ㅜㅜ

여기서라도 우리 아이가 이렇게 살다 갔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요. 우리 아이도 소중하다는 걸, 우리 아이도 정말 사랑스럽고 예쁜 아이였다는 걸, 그런 아이가 세상에 왔다가 갔다는 걸. 저는 그거 하나예요. 사건의 단추가 어디서부터 끼워졌고 어디서 끝날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잘못한 사람들이 제발 미안해하는마음이라도 가졌으면 좋겠어요. 미안하다는 말을 듣더라도 우리 가족이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겠지만… 아, 그래도 미안해하기는 해야죠.

그냥 4월 16일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그날 이후 모든 시간이 꿈 같아요. 채원이가 간 다음에는 순간순간이 다 새롭고 처음이니까. 그 처음을 시작하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제일 힘든 게 주말이에요. 식구들이 다 함께 있으면 사람이 하나 빠진 상황을 어쩌질 못하겠는 거예요. 어디다 화를 내야 하는지 모르겠고. 이번 추석 때도 죽는 줄 알았어요. 식구들 셋이 아무데도 못 가고 우리끼리 있는데 정말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거예요. 그때 폭발할 것 같더라고요. 아직도 실감 안 나요. 우리 애가 어떻게 됐다는 게.

사람들이 나보고 속에 있는 얘기를 하라고, 혼자 있으면 안 된다고 얘기를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는 게 너무 피곤해요. 나 자체로도 힘들고 가족끼리 있는 것도 너무 힘들고… 트라우마라는 뜻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공포감이 떠나질 않아요. 나가서 사람들 만나면 웃으면서 얘기하기도 하는데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두려움이란… 내일 일이 너무 무서워요. 작은애가 하다못해 자전거를 타고 나가도 너무 무섭고. 내가 알던 국가라는 게 이런 건지도 몰랐고. 내가 이렇게까지 세상을 모르고 살았구나. 영화 속세상만 앞서가지, 진도에서 일어난 일은 정말 미개한 수준이고. 내가 그 속에 끼어 있는 것도 너무 힘들고…

잘 모르겠어요. 새로운 관계가 부담스럽고 그냥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으면 또 번민이 너무 많아지고. 주체가 안 되는 생각들에… 불구가 된 것 같아요. 생각하는 것에서도 불구, 판단하는 것에서도 불구, 결단하는 것에서도 불구.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가 없어, 겁이 나서. 윤일병 사건 같은 사회문제가 터지면 다 내가 겪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무 데로도 나아갈 수가 없어요.

천주교에서는 연도(영혼을 위한 기도)를 하잖아요. 근데 내가 내 아이를 위한 연도를 할지는 정말 몰랐거든요. 누가 이렇게 짧게 왔다 갈지 생각을 했겠어요. 솔직히 애 장례 치를 때는 감정이 없었어요. 실감도 안 나고 그저 멍한 느낌. 우리 아이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켜주지 못해서, 여기 안산에 살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동안 나한테 와주어서,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다고. 그뒤부터는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죠. 부모로서 작은아이 곁에도 있어줘야 하니까 살기는 살아야죠. 근데 남은 시간이 좀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시간이 빨리 가서 이 삶이 정리가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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