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상태란 어느 정도를 말할까? 최소한 자신의 의지로 하고자 하는 일에 매사 걸림돌이 되는 정도라면, 남은 인생을 위해서라도 돌파할 필요가 있다. 꼭 과거의 나처럼 불안장애가 있지 않더라도 누구나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이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문제다.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일상의 매 순간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에 짓눌린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가 ‘지나친 의식’일까? 바로 ‘주객이 전도된 때’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주가 되고, 그것을 기준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이미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거기서부터 진짜 고통이 시작된다. 남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말은 많이들 하지만, 사람들이 많고 서로를 관찰하는 장소에 있다면 그 말을 따르기가 더욱 어렵다.
특정한 상황에서 불안을 느낄 때 그 상황에 반복적으로 맞닥뜨리는 훈련을 통해 마음을 단련하는 심리 치료가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이런 방법이 더 큰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반대로 완전한 회피를 택한다면? 같은 스트레스에서는 벗어나겠지만 동시에 평생 해결할 기회도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문제를 피하려고만 하면 그로 인한 불안은 다른 대상으로 전염된다. 이것은 의학계 정설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나를 존중해주는 관계’를 찾고 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 방법은 불안증까지는 아니지만 단순히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수준인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다. 좀 더 증상이 심하다면 지원 모임이나 자조 모임도 활용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친절하고 여유로운 인간관계로 갈아타야 한다.
따돌림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와 교류하는 사람도 어느새 같이 따돌림을 당한다. 과거 촌락 사회 중엔 이런 규칙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던 곳도 있었다. 모두와의 약속인 ‘절교’를 지키지 않으면 크건 작건 제재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규칙, 지금의 우리 사회와도 너무나 닮아 있지 않은가? 동료들 사이에서 따돌림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론 단순한 따돌림에 핑계는 없지만, 신입사원 시절의 나에게 ‘그런 분위기는 무시해라’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까? 타인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안전도 지켜야 하기에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보통 촌락 사회의 생활에서 가장 심한 제재는 모두와 절교하는 ‘따돌림’이었다.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우물에 쌀겨를 뿌리거나, 밭에 잡초를 뿌리는 등 한층 더 심한 제재도 있었다. 요즘 세상에 이런 괴롭힘을 가했다가는 인권침해로 강력하게 비난받을 것이다. 그 대신 훨씬 더 교묘한 방식의 따돌림 문화가 생겼다.
‘관계적 공격’이라는 것이 있다. 즉 당사자가 아니라 인간관계를 이용해서 공격하는 것이다. 아시아권에서 나타나는 따돌림의 가장 흔한 특징은 ‘무리에서 제외하기’나 ‘무시’가 상당히 많다. 어떤 사람과 갈등이 있을 때, 그를 뺀 다른 친구들과의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맺거나 상대방에게 그 모습을 과시하여 점차 눈에 띄게 하는 방법이다. 이 또한 인간관계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관계적 공격과 공통점이 있다.
따돌림에 휘말려버렸을 때 대처하기란 쉽지 않다. ‘똑같이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 상황을 간단히 빠져나갈 수도 없다. 그러나 최소한 행동의 방향을 수정할 수는 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행동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이 무섭거나 위험하다고 느낀다면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 심한 따돌림이라고 생각하면 동조하지 않아도 괜찮고, 반대해도 괜찮다. 남을 괴롭히는 집단이라면 같이 어울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명확한 기준을 세운다.
무엇보다 가장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 이제 더 이상 힘이 강한 쪽, 다수인 쪽을 기준으로 인간관계를 맺지 말자. 어리석은 군중의 꼭두각시로 사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친구들의 연락도 피했고, 입학 후 쏟아지는 술자리 부름에도 일절 응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이유는 하나였다. 더 이상 그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모여서 주고받는 말이라곤 누군가를 도마 위에 올리고 흉보거나 놀리는 얘기뿐이었다. 때론 내가 그 대상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에 대항하기 위해 나도 똑같이 상대를 놀리며 갚아주곤 했고, 집에 돌아오면 내가 들은 말, 뱉은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돌아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험담이 기본인 모임에서 자리를 비운다는 건 매우 위험하고 찝찝한 일이지만, 이쯤 되니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마음이 되었다. 넌더리가 났다.
술자리 약속을 거절한 뒤로는 매일 혼자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다.
색깔로 표현하자면 고등학생, 재수생 시절의 새카맣던 일기에 어렴풋이 빛이 스미는 것 같았다. 매일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지내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그 인간관계는 필요 없었다.
학교 밖으로 나와보니 이런 관계는 차라리 없는 편이 행복에 도움 됐다. 정말로 좋은 관계라면 학교에서도 학교 밖에서도 어떻게든 만나고 싶지 않았을까. 내가 의식적으로 작정하고 끊어냈기 때문에 대학 이후에는 더 이상 불필요한 관계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관계를 대하는 내 삶의 태도를 대전환한 큰 사건이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도, 혼자 있는 것도 장단점이 있다. 다만 오랫동안 인간 사회에서는 인간관계가 넓은 사람과 고독한 사람을 대척점에 두고, 친구가 더 많은 쪽을 행복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반대로 고독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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