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평범한 가난

한동안 입술만 깨물던 엄마가 결심한 듯 내 손을 꽉 부여잡았다. 정작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나를 홀로 밖에 세워 뒀다. 아무렴, 나는 ‘심심하다’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였다. 글자라면 무엇이든 읽었다. 식당 유리에 코를 대고 메뉴판을 보려 애썼다. 유리에서는 은은하게 돼지갈비구이 냄새가 났다. 고개를 조아리는 엄마가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밀린 월급 30만 원을 달라고 하는 중이었다.
눈치 없이 배가 고팠다. 엄마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양념치킨을 사 줄 것이다. 자식 입에 들어갈 치킨 값을 계산할 때면 어딘가 당당해지곤 했던 엄마 얼굴을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아예 몸을 돌려 전봇대에 나붙은 전단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숙식 제공, 100만 원, 아가씨 같은 글자가 또렷했다.

그날 이후였다. 하굣길마다 신발주머니를 빙글빙글 돌리며 언제쯤 아가씨가 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나는 100만 원만큼의 미래를 꿈꿨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보다 더 큰 돈은 내 상상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 미래에는 엄마가 30만 원 때문에 작아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지금도 여전히 꿈에 나오는 장면들이 있다. 초록색 슬립을 걸친 여자가 남자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골목으로 끌려간다. 비쩍 마른 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맨발은 검다. 그런 장면을 숨도 못 쉬고 목격한 날은 또 생각했다. ‘아가씨는 되지 말아야겠구나.’

언제쯤 아가씨가 될 수 있을까 골몰하던 10대와 이미 아가씨였던 10대가 고작 육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가진 손톱만큼의 운 덕분에 나는 그곳에 닿지 않았다.

런던에서 서울까지 약 8,000km를 건너 내 앞에 도착한 《가난 사파리》를 넘기는 동안 나는 다른 문화권에 살며 다른 언어를 쓰는 저자와 내가 경험한 가난이 너무 가깝고 때로 겹친다는 ‘당연한’ 사실에 자꾸 몸서리를 쳤다. 우리가 해 왔던 분노의 다짐과 잦은 실패와 달라지는 신념이 비슷한 뿌리를 지녔다는 게 신기했다. 대런 맥가비의 말마따나 "가난은 정치적 논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적 현상"이기 때문일 테다.

어린 시절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는 ‘가족’이 전부였다. 나의 엄마는 사남매의 둘째딸이다. 엄마와 엄마 형제들이 낳은 자녀는 나를 포함해 아홉 명이다. 그중 전문대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아이는 셋뿐이었다. 정규직 역시 세 명뿐이며, 나머지 여섯 명은 불안정 비정규 노동을 전전한다. 1980~1990년대생인 우리는 대학 진학률 80%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나는 세 명에 속하고 나의 남동생은 여섯 명에 속한다. 가까이는 우리의 차이를 숙제처럼 끌어안고 살았다. 내가 만나는 세상의 접점이 넓어질수록 숙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상업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과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은 극과 극이어서 때로 어지러웠다.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멀미 나는 격차들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기자라는 직업은 그 숙제를 얼마간 해결해 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지식인’ 세계에 진입했을 때 나는 그들과 되도록 최대한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게 가난을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새로운 세계에서 좌불안석하면서도 나는 안도했다. 물론 나는 지금도 가난으로 인해 어딘가 부서지고 망가진 내면이 언젠가는 사고를 치고 말 것이라고 긍긍한다.

상업고를 나온 사람이 드물고, 기초수급을 오랫동안 받았던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회사에서 내가 지나온 가난은 ‘자원’이었다. 다른 시각을 가졌으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기까지는 내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기 시작하기까지는 내 인생이, 또는 실로 내가 어떤 식으로든 흥미롭다거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은 이 사회의 많은 문제가 시작되는 저수지였다. 가난과 관련된 아이템은 흔하고 넘쳤다. 그래서 의미 없을 때가 많았다. 오만함과 절박함과 희망이 범벅된 진창에서 구르는 동안 ‘글’ 따위는 몇 번이고 무참히 패배했다.

생각지 못한 지출이 반복되며 내 삶도 일부분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외면했던 가난의 그림자는 이런 식으로 내 발목을 잡곤 했다. 내가 잘못하며 살지 않아도 책임을 져야 했다. 부채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 중 나만 고등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던 건 그 애가 공부를 못한 까닭도 있지만, 그 이유로 그 애가 돈을 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집안 생계를 책임진 덕분에 나는 내 앞가림만 하며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누나, 나는 잘해 보려고 했던 일인데 매번 이런 식이야."
나는 그 말에 아직도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세상은 모르는 그 애의 최선을 나는 안다. 다만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비정규 노동의 틈새를 전전해 온 30대 중반의 남성은 ‘작은 성공’조차 쉽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뭔가를 하려 할 때 대단히 많은 벽에 부딪친다"는 점은 가난이 가진 질긴 속성이다. 온라인 도박 사이트는 드물게 장벽이 없는 공간이었다. 가끔이긴 하지만 성취감을 줬다. 청소년기에는 게임이 그 역할을 했었다. 나는 내 동생의 노동을 딛고 공부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동생 삶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글만 바쁘게 쓰고 있다는 자괴가 몰려왔다. 세상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동생이 2012년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주변이 모두 당혹해할 정도로 오래 통곡했다. 2.9kg의 조그만 아이를 처음 안고서 터뜨린 울음을 한동안 나조차 해석하지 못했다. 그건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깨달았다. 나는 그 아이가 살아갈 많은 날이 안쓰러웠다. 앞으로 ‘당할’ 일들이 떠올라 고통스러웠고, 무서웠고, 서러웠다. 이 아이가 자라는 동안 경험해야 할 모든 일들이 먼저 경험한 내게 무게로 다가와 나를 짓눌렀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이 부모의 가난이었다. 나는 우리의 가난을 늘 대수롭지 않아 했지만, 그건 사실 가난이 삶의 많은 것을 결정하는 대수로운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핏덩이’는 내가 가난 때문에 늘 상처받는 사람이라는 걸 상기시켰다.

나는 한때 바랐듯이 정치권력이나 체제가 바뀌기를 ‘순진하게’ 기대했다. 이제는 그저 일정 부분 망가진 울퉁불퉁한 길을 일단 걸어가 본다.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기르는 편에 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려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힘은 누군가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빈곤은 이런 방식으로 산업화되었다) 나에게도 있다는 걸, ‘가난한’ 우리도 이 세계의 일부이고 책임 있는 구성원이자 시민이라는 걸 믿으면서

실패는 안팎으로 계속됐다. 다정한 적 없던 가족과 친척은 때로 남보다 멀고, 이제는 각자의 짐을 지며 살고 있지만 애경사로 드물게 만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네가 사는 세계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말을 꼭 한번씩은 듣곤 한다. 내가 그 ‘다른 세계’에서 얼마나 자주 이방인이 되는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자꾸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서 상대가 의도치 않았던 냉소와 비난을 읽는다. 때로는 왜 나를 구분하느냐고 반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은 돈의 많고 적음으로만 구별되지 않는다. 문화와 교양과 취향으로도 드러난다. 나는 그 말에서 내가 빠져나온 세계를 본다. 그리하여 안온한 세계에서 구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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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지각마의
지각을 위한 변명

취재팀에서 편집팀으로 옮긴 지 한 달 뒤쯤이었다. 팀장과 나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나의 잦은 지각 때문이었다. "늦지 마라." "죄송합니다." 따위의 대화로 시작하는 하루가 즐거울 리 없다. 그때 우리는 둘 다 불행했다.

출근 시간은 오전 10시. 나도 의아했다. 다른 회사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파격적인 출근 시간인가. 러시아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출근하는 동안 하루치 기운을 다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선배…… 저는 10시까지 출근 못 하겠습니다."

더는 죄송하기 싫었다. 경험상 이럴 때는 차라리 솔직한 게 낫다. 문제의 성격을 막론하고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솔직함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그날, 선배도 웃고 나도 웃었다. 선배는 어이없어서 웃었고, 나는 그 말을 기어이 해 버린 내가 대견해서 웃었다. 남들이 다 할 수 있어도 나는 못 할 수 있다고, 못 하는 부분은 인정하고 ‘다르게’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직 생활인 만큼 선배의 염려를 인정하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에도 몇 번쯤 더 지각했지만 그 횟수는 현저히 줄었다. 마음의 자유를 얻으니, 몸이 적응하기 시작했다.

바뀐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팀이 바뀌었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팀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의 방식이 바뀌었고, 시간 쓰는 법 자체가 달라졌다. 기다림은 편집팀 업무의 거의 전부다. ‘내 글’을 쓰는 일에서 ‘남의 글’을 기다리는 일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세운 계획대로 일할 수 없었다. ‘연쇄 지각마’는 그 시스템에 적응하고 싶지 않은 내가 만들어 낸 또 다른 나였다.

가난한 언론사가 월급으로 최고 대우를 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 대책 없는 양반들이 내세운 최고 대우라는 건 ‘양심에 따라 쓸 수 있는 자유’였다.

그 자유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던 건 실질적인 근무 조건이었다. "돈 많이 못 주는 대신 근무 조건이라도 좋아야지." 창간 주역인 한 선배는 신입 기자 앞에서 이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그 조건이라는 게 별건 아니다. 이를테면 ‘법이 정한 대로’ 휴일을 쓸 수 있는 정도였다. 명절에 쉴 수 있고 되도록 주5일제를 보장하는 것도 다른 언론사라면 꿈꾸기 어려운 일이다. 그야말로 업계 최고의 대우다.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면 편할 거 같지만 많은 일이 그렇듯 기자도 결국 결과, 즉 기사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허투루 일한다는 건 내 이름뿐만 아니라 이 매체가 쌓아 온 신뢰에 먹칠하는 일이었다. 불안을 밥 먹듯 먹으며 시간을 쌓는 동안 나는 ‘나만의’ 일하는 스타일과 리듬과 호흡을 가지게 됐다. 그러므로 나에게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졌다는 건 엄청난 변화였다.

기자로 일하는 것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다. 기자의 일이란 ‘나’와 ‘일’을 완벽히 분리하지 못할 때가 많고, 여러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경우가 왕왕 있으며, 완벽에 가까운 책임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고강도 스트레스에 늘상 노출돼 있는 기자들은 빨리 죽는다. 원광대 보건복지학부 김종인 교수팀 조사에 따르면 11개 직업군별 평균 수명 조사에서 언론인의 수명이 67세로 제일 짧았다.
편집팀 발령은 나에게 일과 시간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첫 직장을 다닐 당시에는 대학 진학이라는 출구가 있었다. 하지만 삼십 대의 직장인은 출구를 만들 의무가 있다. 원하지 않았지만 어느덧 나도 이 사회에 책임이 있는 ‘어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른의 고민이라면 책임감에서 출발해야 하는 법이다.

한국에서 건물주로 태어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노동을 해야 한다. 시간은 돈이 되고, 우리는 그 돈으로 ‘아슬아슬’ 입에 풀칠하며 산다. 살아 보려고 하는 일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때로 우리 삶을 위협한다. 노동에 대한 다종다양한 책이 증명하고 있듯 다행히(?) 나만 불행한 건 아닌 것 같다.

다만 내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시간’이다. 우리의 일이 불행한 이유는 내가 그랬듯이 일의 과정에서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없다는 데 기인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회사에 단지 노동력을 파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노동에 대한 통제권과 자율성도 저당 잡힌다. 대부분 9시까지는 출근해야 하지만 퇴근 시간은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말이다.
장시간 노동에 대한 고민은 사치라는 듯, 세상은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불안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책 속에 길이 있을까? 적어도 길의 흔적은 더듬을 수 있다.

갑이 우리의 노동에 대해 다른 방식을 상상하지 못하고(혹은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개혁’처럼 나쁜 방향으로만 머리를 굴리고) 있다면 자주 필사적으로, 그보다는 조금 대충이라도 계속 떠드는 수밖에. 우리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내 의지로 행복하게 일할 권리가 있다. 그편이 훨씬 이익이 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도 여럿이다. 역사가 발전하는 게 사실이라면 이게 제대로 된 방향이다. ‘10시 출근 불가’를 선언하며 내가 얻은 깨달음이다.

우리 몸의 구멍이
굴욕이 되지 않도록

병원이라는 장소는 ‘어쩔 수 없음’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그곳은 웬만해서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여느 병원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기 꺼려지는 병원은 산부인과였다. 지금이야 정기적으로 산부인과를 다니지만 그렇다고 심리적 문턱까지 낮아진 건 아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 갈수록 성경험 여부를 묻는 칸을 ‘없음’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없음 칸에 체크할 때마다 내 인생의 결여에 대해 생각하며 속을 끓였다. 성폭행 경험을 성경험 ‘있음’으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 경험이 가져온 트라우마는 긴 세월 애인들에게 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평생 ‘없음’ 칸이나 채울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나를, 내 몸을 부정하면서 살았다. 그냥, 여자가 되고 싶었다. 평범한 여자. 나는 안다. 평범이나 평균은 허구라는 걸. 평범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모두들 평범을 바라는 거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랐다.

짝꿍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두 살이었다. 나를 지나간 몇 명의 다른 애인들처럼 그가 섹스를 청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전 애인들에게는 못 했던 이야기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그와 함께 ‘있음’의 세계로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꼭 그가 아니어도 상관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있음의 세계를 열망하던 그즈음 그가 내 곁에 있었다는 것, 이런 타이밍을 운명이라고 해도 좋다면 그건 그런대로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묻거나 ‘더’ 묻지 않는 사람이었다. 몸 왼쪽을 가로지르고 있는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상처도, 성폭력 경험에 대해서도. 그는 그저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나도 마침내 긴 시간(과 돈을 들인) 끝에 나를 ‘돕는’ 산부인과 의사를 만났다. 사소한 질문을 귀찮아하지 않았고, 내 몸에 대해 먼저 꼼꼼히 묻는 사람이었다. 그는 검사를 하는 와중에도 이 검사는 왜 하는지, 어떤 걸 확인할 수 있고 없는지 등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 줬다. "긴장 풀라고 해도 긴장되죠? 당연해요." "조금 아플 건데, 이 검사를 하려면 조직을 조금 긁어내야 해서 그래요. 칫솔질하는 거 같달까요." 병원 안에는 요란한 미용이나 성형 광고도 없었다. ‘기본’을 하지 않는 병원을 여럿 경험한 탓에 나는 ‘쉽게’ 이 산부인과에 반해 버렸고 내 맘대로 주치의 삼아 버렸다.

때로 망치더라도
아주 망친 것은 아닌

앞에 놓인 일들을 한번씩 가늠할 때마다 막막해서 차라리 사라지고 싶었다. 다짐이 아니라 결과로 증명되는 쓸모란 얼마나 무서운가. 일을 잘하고 싶다는 바람과 잘할 수 없을 거라는 낙담은 단짝이라, 내가 나인 게 싫어지는 시간만 성실했다. 일과 일상이 구분되지 않은 채 한 몸처럼 지낸 지 오래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생활이 불규칙해졌다. 닥친 마감과 기획안으로 엉킨 생각이 밤새 몸을 들쑤셨다. 아침에 눈떠 보면 죄 시답잖았다. 모든 게 나처럼 시시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한 반의 정원이 30명이라면 15~16등쯤 하는 학생 같은, 뭐 하나 빼어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못하는 것도 없는. 나는 이 세계에서 주로 ‘그런 애’를 맡아 왔다. 나 하나만 잘 수습하면 그럭저럭 괜찮았던 시절이 그렇게 끝났다. 선배의 선택과 판단을 무의미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짓눌렸다. 실망시킬까 봐 무서웠다. 실은, 누구보다 나를 실망시키기 싫었다. 해 봤다면 해 봤고 안 해 봤다면 안 해 본 일들을 맞닥뜨리게 될 거라는 곤란한 예감은 적중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업무 압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친구들에게 당부하게 되는 건 언제나 결과보다는 태도다. 내가 잊지 않으려 하는 건 이런 것들이다. 기자는 기본적으로 2차 생산자라는 점. 우리 일은 기본적으로 사건과 사람에서 출발한다. 누군가에게 빚지지 않고 쓸 수 있는 기사는 없다. 기사란 대부분 누군가의 불행과 불편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때로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현실에 개입하게 된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친구들을 만나면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에이, 이거 말고 딴거 해." 반쯤은 진심이었다. 일과 일상이 구분 없이 한데 뭉쳐 굴러다니기 시작하면 생활은 불규칙해지고, 몸은 망가진다. ‘기레기’로 뭉뚱그려 호명될 때마다 가까스로 쥐고 있던 긍지마저 사그라든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기자질’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로 번졌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일을 포기하지 않는 건, 이 일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기여하는 일이라는, 분명한 보람과 자부 때문이다.

자신은 원하는 직업을 가졌으면서 내가 하는 일을 원하는 후배의 ‘앞길’ 막는 얘기는 왜 자꾸 하게 되는 걸까. 모든 일이 그렇지만 이상은 현실보다 늘 앞서간다. 내가 그러했듯, 뒤에 오는 사람들이 그 낙차에 실망할까 지레 겁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기대도 실망도 당사자 몫이다. 선배는 그 모든 걸 온전히, 하지만 나보다는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겪게 해 주는 사람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만화가 이종범 씨가 쓴 ‘청소의 요정’이라는 제목의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ize>, 2014년 10월 2일) 이씨가 ‘거지 같은 만화판’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듣던 지망생 시절, 선배인 《덴마》의 양영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화가가 되면 너무 좋아. 빨리 만화가 해." 그 글을 읽은 이후 나 역시 기자 지망생을 만나면 "기자가 되면 정말 좋아. 빨리 기자 해"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살자고 다짐했다.

어떤 직업을 좋은 일, 필요한 일로 만드는 힘과 책임은 그 직업군에 속한 사람에게도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뒤에 오는 사람에게 권할 수 있으려면 내가 선 땅이 좋아지도록 부지런히 일궈야 한다. 저 짧은 두 문장을 자신 있게 건네려면 그만큼 스스로를 담금질해야 한다. 일의 조건과 환경을 바꾸는 일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어디 기자만이 그럴까. 세상의 많은 일이 그런 노력에 힘입어 나아진다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때로 망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아주 망친 일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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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는 원하지 않는
삶에 대하여

엄마는 지금도 ‘남의 주방’에서 일한다. 제 한 몸이 가진 것의 전부인 사람에게 건강 문제는 생계에 앞설 수 없는 부차적 문제가 된다. 따지고 보면 엄마는 늘 어딘가 아팠다. 불이나 기름에 데거나, 대형 솥을 반복적으로 옮기는 동안 생기는 근육통을 달고 살았다. 그런 상처는 연고와 밴드와 파스 따위로 임시 처방하면 그만이었다. 엄마의 몸에 오래 기대 살았던 나는 해외 출장이나 여행 갈 때면 그 지역의 유명하다는 파스 제품을 종류와 크기별로 사다 나르곤 했다.

수술 일정을 잡고 나오던 어느 날, 엄마가 물었다. 정말 아이를 낳지 않을 거냐고. 지겹도록 듣고 답했던 질문 앞에서 나는 입을 닫았다. 엄마가 체념한 듯 혼잣말을 했다. "너는 딸도 없고 불쌍하다." 그날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나는 엄마의 그 말이 아주 좋다고. 그건 엄마가 나로 인해 불행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무엇보다 짝꿍은 ‘다음 과제’를 완수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학에 가고, 졸업하면 취업하고, 취업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당위’와 ‘정상’에 대한 압력을 거스르고 자기 의지로 살고 싶어 했다. 그는 지금의 기쁨과 당장의 만족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이다.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그 기쁨과 만족 안에 내가 포함되었다. 결혼 전 자녀 계획에 관해 대화할 때 그의 전제 조건은 하나였다. "나는 원하지 않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는 임신과 출산에 있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함을 알고 있었고,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 만큼 내 의지와 생각이 결정의 전부여야 한다고 말했다

나의 ‘비합리’와 ‘비이성’으로 둘 다 고통받던 즈음, 우리는 일정 기간을 정하고 임신을 우연에 맡겨 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1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자주 조바심이 났다. 아이가 생겨도 문제, 안 생겨도 문제였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에 자주 휘청였다. 통상 피임을 하지 않은 부부가 1년 이내 임신이 되지 않는 걸 난임이라고 한다. 아이를 ‘안’ 갖는 것과 ‘못’ 갖는 것은 달랐다. 키울 자신도 없으면서, 막상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니 손 안의 사탕을 뺏긴 느낌이었다.

때로 그 말이 몹시 서운하고 외로웠다. 나 역시 일찌감치 아이를 내 인생에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해 왔다. 아이를 통해 미래를 사는 게 두려웠다. 내가 어쩔 수 없이 끌어안고 살아온 가난을 내 세대에서 끊어 낼 방법은 비출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가 살아야 할 미래를 예상할 때마다 몸을 떨었고, 내가 자라면서 경험한 고통을 그때마다 새롭게 곱씹었다.

취재하며 친구가 된 사람이 있다. 그도 우리처럼 아이가 없었다. 그와 만난 자리에서 나는 오랫동안 그의 ‘사적인 삶’에 관해 궁금했던 것을 조심스레 물었다. 술잔이 오가고, 그와 나 사이에 떡볶이가 끓고 있었다. 질문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아이는 일부러 갖지 않으셨나요?" 그는 주저 없이 답했다. "안 생겼다는 게 정확하죠. 같이 사는 친구랑 얘기를 해 봤어요. ‘의학적인 조치를 취해서라도 아이를 갖고 싶은가.’ 근데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고요."
나는 출산과 비출산 사이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내가 가진 정답이 무엇이든 이유와 입장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 내가 분명히 느끼는 슬픔과 상실은 충분히 설명이 안 됐다. 그래서 ‘당연히’ 중간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삶도 좀 더 가뿐해졌다. ‘그렇게까지는’ 원하지 않는다. 내 마음 역시 거기에 좀 더 가까웠으니까. 그제야 나는 현재 주어진 삶의 조건에 보다 집중하게 됐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복잡한 마음의 결을 나눌 필요를 느꼈다.

《엄마됨을 후회함》은 《아이 없는 완전한 삶》의 ‘짝꿍 책’이라 할 만하다. 책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다양한 사회 계층 여성들을 만나 이들이 엄마가 된 경로를 추적한다. 그리고 여성을 ‘엄마가 되는 길’로 몰고 있는 사회를 여성의 목소리로 폭로한다. 《엄마됨을 후회함》의 저자 오나 도나스는 말한다. "고통당하지 않고자 기꺼이 논쟁에 휘말리는 여성과 엄마들은 언젠가, 어떻게든, 무언가를 바꾸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럴 만하다." 중요한 건 이 문장을 기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여성에 의해 태어났다. 하지만 여성은 엄마로 태어나지 않았다.

한 사람이 다음 사람을
이 세계에 데리고 오는 일

그날도 피곤에 절어 겨우 집에 도착했다. 가방을 푸는 동안 책상 위에 얌전히 놓인 임신테스트기가 눈에 들어왔다. 약국 가는 걸 자꾸 까먹는다고, 갈 시간도 없다며 지나가는 말로 툴툴대던 걸 그가 기억한 결과였다.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우리’의 문제라는 걸 확인하는 경험은 언제나 든든하고 유쾌하다. 그러니까 저이와 함께라면 임신·출산·육아가 아주 나쁜 일만은 아닐 거라고 착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고, 실제 상황과 별개로 그 순간은 무척 소중해진다. 그래서였다. 간만에 깔깔대며 웃었다.

임신 중지와 임신 유지 사이에는 ‘선택’과 ‘생명’이라는 단어가 다 대표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고민과 결단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죄’로 다뤄 온 문화에서 성장해 온 사람에게는 특히 그렇다. 임신 사실보다 유산 사실을 먼저 알았던 날이 떠올랐다. 의사는 전체 임신에서 자연 유산 비율이 20% 정도 된다며 나에게만 일어난 불행이 아니라고 위로했다. 정작 내가 그 ‘불행’을 무척이나 안도했다는 걸 의사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 일을 겪으며 나는 예상치 못했던 죄책감에 시달렸다. 죄책감이라니 가당치 않아서, 오래 괴로웠다. 고작 ‘세포’를 보내고 눈치 없이 긴 애도를 건너는 동안 기존 사회의 통념에서 내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사람인지 실감했다. 생명은 설명이 필요 없는 너무나 강력한 프레임이다. 이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얼마간의 망설임 앞에 반드시 서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각자가 구성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전제를 끌어안고 산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시작하지만 여성의 몸에서 끝나지 않는다. "재생산은 어느 사회에서든 단지 구성원을 수적으로 충원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으며,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 가치 등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결국, 재생산권이야말로 ‘낙태죄’를 둘러싼 문제의 본질이다. 평등하게 성적 관계를 맺을 권리, 출산 여부를 결정할 권리, 자녀를 건강하게 양육할 권리 등을 포괄하고 있는 재생산권을 보장할 때만이 생명권 역시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낙태를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충돌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그동안 국가가 통제해 왔던 재생산권을 되돌려 받는다는 의미로 논쟁을 가져와야 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낙태가 ‘합법’이 되는 것과 임신 중단이 여성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지는 것 사이의 거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투쟁이 필요하다." 사회경제적 사유로도 임신 중지를 가능하게 한다거나, 주수를 제한하는 방법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계속해서 여성을 처벌하고 차별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낙태죄 폐지 운동은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없애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새로 만들고, 기존의 법을 여성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과정을 동반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거머쥔 승리의 경험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앞으로의 싸움은 고되겠지만 이 ‘출발선’을 여성들이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걸 지금은 마음껏 축하하고 싶다. 대체 입법은 2022년 10월 현재도 이뤄지지 않은 채 논쟁의 영역에 남아 있다. 입법 공백은 인터넷 검색과 자본이 메운 채로.

아픈 게 자랑입니다

왼쪽 팔에 간단한 신상 명세가 출력된 종이가 채워졌다. 장일호, F/36세, A(RH+). 닳지도 젖지도 않는 유포지 위에 새겨진 글자를 나는 자주 멍하게 바라봤다. 흔하고 쉬운 암이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애썼다. 쉽지는 않았다. 모든 게 처음 하는 경험이고 하나같이 어려웠다. 하루에도 환자 수십 명을 봐야 하는 의료진들은 종종 그 사실을 잊었다. 각종 검사 전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 무성의하게, 동의 없이 몸에 붙여지는 식별 스티커를 볼 때면 마음 어딘가 작게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사라지고 ‘환자’만 남았다. 수술이 끝났지만 병은 끝나지 않았다. 여덟 차례에 걸친 항암과 방사선, 수년에 걸친 약물 치료가 기다리고 있었다. 생이 그다지 살 만한 것이 아님을 지난 1년 사이 나는 매일 새롭게 배웠다.

건강검진에서 암 의심 소견이 나온 직후, 모든 치료 과정은 당연하고 신속하게 결정됐다. 마치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을 것처럼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거쳤지만, 다른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질문 있느냐"라는 의사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울거나 소리 지르고 싶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만 고꾸라졌다.

수술이 가장 쉬웠다고 기억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항암을 시작한 이후 속눈썹이 없는 눈은 자주 염증을 앓았다. 염증으로 찌걱거리는 눈 때문에 무엇 하나 집중하기 어려웠다. 피부는 거무죽죽하거나 허물 벗었다. 병원에서는 소독약 냄새 때문에 물마저 제대로 마시지 못했고 입맛은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3주 사이에 7㎏이 빠지는 일도 예사였다. 부종과 가려움으로 손발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손끝은 물 닿으면 칼에 베인 것처럼 아팠고, 발끝은 아무리 수면양말을 신어도 얼얼했다. 왜 손발톱 뽑기가 고문의 일종이었는지 깨달았다. 거의 다 빠지고도 일부 살점에 붙어 덜렁거리는 손발톱은 고작 옷 단추를 꿰거나 신발을 신는 단순한 일로도 고통을 줬다. 마약성 진통제도, 수면제도 듣지 않는 밤에는 그저 줄줄 우는 수밖에 없었다. 의사에게 들고 간 고통은 처방전으로 돌아왔다. 항암 부작용은 또 다른 약으로 덮었다. 카드 돌려막기 하듯 약 돌려막기를 했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통증이 익숙해지면서 다루는 법도 알게 됐다. 어느 정도 아프고 나면 괜찮아질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견뎌졌다. 하지만 씻고, 먹고, 싸는 기초적인 일상이 누군가의 돌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아픈 몸은 내 자존감을 끊임없이 시험했다. 고통보다는 무력감이 컸다. 수술, 항암, 방사선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표준 치료’를 다 끝내고 약물 치료를 하고 있는 요즘도 여전히 컨디션은 제멋대로 날뛴다. 특히 체온 조절이 잘 되지 않아서 땀을 비 오듯 흘리거나 갑자기 오한에 시달린다. 치료 부작용 중 하나인 조기 완경의 대표적 증상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빠진 손발톱과 머리카락이 기어이 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몸이 보이는 ‘생의 의지’에 조금 감탄했다.

수술과 입원을 마친 후 돌아온 집에서 나는 보험회사 제출용으로 뗀 조직검사 결과지를 해석하기 위해 애썼다. 사전을 이용해 단어 자체는 번역할 수 있었지만 의미를 해석할 수는 없었다. "수술이 잘됐다"라든지 앞으로 어떤 치료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결과론적 이야기가 아닌, 더 자세한 상태를 알고 싶었다. 결과지를 붙잡고 밤을 꼬박 새운 다음 날, 결국 의사 친구에게 연락했다. 그는 한 줄 한 줄 짚어 가며 내 몸 상태를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듣는 내내 어쩐지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왜 이게 ‘치료 과정’의 일환일 수 없는지 생각했다. 환우회 카페에는 조직검사 결과지를 해석해 달라며 찍어 올리는 이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개인 의료 정보가 노출되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알고자 하는 마음들이었다.
좋은 질문은 ‘앎’에서 나온다. 의료 지식이 없는 보통 사람의 질문은 구체적이기 어렵다. 매뉴얼처럼 "질문 있나요?"를 외는 의사의 말에서 환자는 ‘묻지 말라’는 뉘앙스를 읽는다. "저 괜찮나요?"가 최선의 질문이 된다. ‘아는 의사’를 찾거나 인터넷에 개인 의료 정보를 올리지 않고도, 치료의 일환으로 쉽고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는 없는 걸까. 없었다. 한국의 대형 병원에는 그 무엇보다 시간이, 없다. 의료진은 친절했지만 너무 바빴거나 바빠 보였고, 나는 그 앞에서 어쩐지 자주 주눅 들었다. 드디어 질문이 생겼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질문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임에도 그랬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를 쓴 양창모는 의사이기 이전에 ‘손님’이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는 환자를 살리는 일cure만큼이나 돌보는 일care에 절박함을 느낀다. 진료실에만 머물렀다면 얻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환자를 ‘증상’이 아닌 ‘사람’으로 대할 수 있었던 건 수없이 환자 집 문턱을 넘나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곳에서 살고 무엇을 하는지와 같은 삶의 맥락은 진료실에 들어온 순간 모두 사라진다. 모든 것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증상만 남는다. 이것이 의사가 경험하는 첫 번째 마술이다. 하지만 왕진을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단 거기에는 ‘한 사람’이 자신의 방에 앉아 있다. 그 모습이 의사에게 주는 정서적인 변화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는 자기 삶의 맥락 속에 앉아 있으므로 나는 그를 ‘한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양창모는 왕진을 통해 환자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 보는 경험을 한다. 환자가 다 말하지 못한 사정과 상황을 헤아리는 법을 배운다. 진료실을 지키며 "주지 않아도 될 약을 처방하거나 해 줘야 할 얘기를 빼먹은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마음속으로 처방전을 끊임없이 수정"하던 그는 결국 병원이라는 ‘하드웨어’ 바깥으로 삐져나온다. "‘없어서’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구체적인 얼굴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냉기가 사라지지 않은 봄 산에 올라가 나물을 캐 온 할아버지의 손에서 돈이 대신하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배웠다. 시계가 세 개나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시간 맞는 시계가 없었던 집에서는 언어가 되지 못한 사정을 읽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일상이 있다는 걸 헤아렸다. 그 과정에서 ‘증상의 뿌리’가 사회임을 마주한다. 그는 ‘내가 아프다’는 것이 곧 ‘우리가 아프다’는 일임을 알게 된다. 전문가에게 부족한 것이 "자기 지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의 지식을 바라보는 태도"임을 깨닫는다.

"답이 없다 말하는 순간 답은 사라진다. 나는 무관하다 말하는 순간 답은 없어진다." 그래서 양창모는 ‘하나의 답’이 되기로 했다. 제도는 언제나 사후적이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내는 변화는 거저 오지 않는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애써 일궈 가야 한다. "질문들의 대부분은 정답이 없다. 정답을 찾아가는 최선의 과정이 있을 뿐"이라 양창모는 구멍 난 의료 시스템을 메우고, 넓히고, 나아간다. 시스템을 탓하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찾고 안 되는 이유는 고치고 개선하면서, 부족하지만 할 수 있는 꼭 그만큼을 해낸다. 그의 말마따나 "새로운 세상이란 장소가 아니라 행동"이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는 그 행동 위에서 써 내려간 기록인 동시에 초대장이다. 국가보다 중요한 ‘단 하나의 이웃’이 서로에게 되어 주자고, 그렇게 "연대의 그물망"을 함께 짜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행간마다 빼곡하다.

그는 모든 의사가 ‘양창모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강권하지 않는다. 다만 다르게 사는 모습으로 필요를 증명한다. 그리하여 독자는 가능하다면 양창모의 삶의 기록이 ‘양창모들’을 만들 수 있길 바라게 된다.

노인이 되는 건 그의 말마따나 "운이 좋아야" 하는 일이라, 요즘 나의 장래희망은 ‘할머니 되기’다. 나는 어쩔 도리 없이 현대 의학을 신뢰한다. 하지만 현대 의학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기를 또한 바란다. "병은 삶을 바꾸는 질문"이 되어야 하는가, 혹은 될 수 있는가. 나는 절반만 동의한다. 병은 내 삶을 흔들어 대고 일정 부분 바꿨지만, ‘나라는 사람’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병의 원인을 내가 살아온 삶을 반성하는 일로 갈음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내가 살아온 삶을 바꾸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아픈 몸을 대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가 바로 그런 다정한 세계라고 믿는다.

제 장례식에 초대합니다

10년을 일하면 한 달을 유급으로 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연차도 다 소진해 본 적 없었다. 안식월 요건을 채우고도 쓸 수 있다는 생각조차 안 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일이 좋아서 그랬다. 좋았다기보다 불안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잘하고 싶어서 안달했다는 것도. 그 모든 것은 ‘좋아한다’ 안에 뒤죽박죽 담겨 있는 감정이기도 했다

건강검진 결과 유방암이 의심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놀라지 않았다. 처음 들었던 감정은 안도였다.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찾아왔다.

암의 존재를 알았을 때 나는 암 덕분에 내가 앞으로 쓰게 될 글이 넓고 깊어질 가능성을 떠올렸다. ‘의료화’된 사회의 최전선에서 질병 경험이 한 개인을 어떻게 바꾸는지, 또 암 경험자가 어떤 낙인과 차별을 경험할지 등을 글이 아니라 몸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그러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조금은 기대되기도 했다.

투병을 결정하고 알게 된 가장 괴로운 일 중 하나는 내가 아프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었다. 나는 가능하면 병과 관련된 많은 일을 혼자 감당하려고 했다. 코로나19는 좋은 핑계였다. 그럼에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이 놀랍도록 많았다. 병원 대기실에서 예상치 못한 얼굴을 만나는가 하면, 한동안은 거의 매일 택배와 봉투를 받았다. 아픈 몸으로 사는 일은 어쩌면 긴 장례를 치르는 일 아닐까. 은유 선생님 덕분에 나는 내게 벌어지는 일들을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픔은 너무도 혼자의 일인데 투병은 다행히 모두의 일"이라는 것을.

안식월을 다짐한 건 수술 이후 지난하게 이어지던 항암과 방사선 치료가 끝난 몇 달 뒤였다. 제주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꽃집 찾기였다. 다이소에서 2000원짜리 작은 병을 사서 꽃집에 들고 갔다. 병에 맞춰서 꽃을 꽂아 달라고 부탁했다. 아침에 눈뜨면 상한 가지를 솎아 내고 물을 갈아 주었다. ‘찰나’와 ‘무용함’을 생각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제주에서 지낼 집은 카페공드리 사장 부부가 미리 알아봐 줬다. 머무는 동안 드는 각종 비용은 회사 선배들이 앞다퉈 댔다. 그러고 보면 내가 회사에서 배운 가장 큰 것은 기사나 취재가 아니었다. 선배들은 선배가 베푼 것은 선배에게 갚으려 하지 말고 후배에게 갚으라고 당부하곤 했다. 나는 선배들을 통해 마음은 정확하게 셈해 갚는 게 아니라 흐르는 것임을 배웠다. 고마워하되 미안해하지 않고, 받은 마음을 아직 서툰 타인을 위해 내어 주는 법도 함께 익혔다.

제주는 지천에 무덤이 있다. 밭 한가운데, 길가에, 집 옆에. 삶의 자리마다 죽음을 끌어안고 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늘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나는 그 모습이 몹시 보기 좋았다. 적어도 제주에서 죽음은 추상이 아니었다. 버젓이 물리적 형태를 갖고 일상에 있었다. 죽음을 삶에서 격리시키지 않았다.

내가 편집자로 처음 기획하고 만든 책인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시사인북, 2021)는 제주에서 보낸 그런 시간 덕분에 묶을 수 있었다.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를 통해 나는 ‘존엄한 죽음’ ‘좋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감추고 있는 현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죽음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사건임을, 우리 모두가 연루된 일임을 드러내 질문하고 싶었다. 한 사람이 사회에서 병들고 아프며 죽어 가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많은 사람이 관여한다. 삶을 이야기하다 보면 질병이, 질병을 이야기하다 보면 돌봄이, 죽음과 섞여 들었다. 우리는 왜 아프면 ‘깨끗하게 죽어 버리는’ 미래를 상상할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면서. 존엄사를 허용하는 국가들은 사회복지가 잘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존엄사가 존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복지가 존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나의 죽음을 운에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죽음을 둘러싼 각자의 내밀한 경험이 더 많은 보편의 이야기로 나눠질 때 삶도 조금은 덜 잔인해진다.

‘운이 좋다면’ 살아 있을 때 장례식을 열고 싶다. 내 장례의 상주가 되고 싶다. 당신들 덕분에 살아서 좋았다고 눈을 마주치며 인사하고 싶다. 장례식에 오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야만 입장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조문객들이 가져오는 사진은 모두 내 영정사진으로, 장례 기간 동안 벽에 전시해 두면 근사할 것 같다. 돌아가는 길에 가져갈 제철 꽃을 준비하는 것도 장례 계획의 일부다. 시간과 자연을 목적 없이 걸어 다닌 그해 여름, 나는 꽃이 주는 무용한 기쁨과 찰나의 순간이 삶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됐다. 가능하면 그 순간과 순간들을 정성껏 보내고 싶다.

책의 말이 허물어지는 자리에서
김애란

개인적인 고백을 덧붙이자면 40대는 ‘옳은 말’을 의심하고 싫증 내는 때이기도 하다. 그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너무 자주 들은’ ‘다 아는 말’이라 여기기 쉬워서다. 그러나 그 ‘다 아는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이 들어 있는지. 그리고 그 삶 하나하나는 얼마나 구체적이고 육체적인지. 우리가 지레 빤한 말이라 치부한 그 말이 누군가에는 목숨 줄이고, 실존의 테두리임을 다시 깨닫는다. 그 선이 비단 타인뿐 아니라 나도 지켜 주는 선이었음을 깊이 수긍하면서.

더불어 이 책은 사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다 아는 말’이란 없으며, 그런 ‘앎’은 앎이 아니라고, 그러니 이웃뿐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새 말이 지나가는 길을 함께 터 주고 넓혀야 한다고 일러 준다. 가끔은 그 일을 ‘독서’라 불러도 좋다고 조용히 끄덕이면서. 그 발화가 고맙다. 한두 번이 아닌 누군가의 일생에 걸친 발화라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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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

노력을 쏟아야 하는 관계,
바꾸거나 끝내야 하는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이러한 물리적 분리를 이뤄낼 수 있도록 사회에서 확실하게 생활과 경제적 차원의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쿼터라이퍼는 분리를 미룰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리 본능을 무시하면 막대한 좌절감에, 갇혀버렸다는 기분에 휩싸일 수 있다.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삶을 시작하고 싶은 내적 욕구가 있다. 내면의 목소리는 ‘논리적인 결정’이 무엇인지, 생활에 어떤 제약이 생길지 신경 쓰지 말고 그저나아가라고, 탐험하고 호기심을 충족하라고 외친다. 그것은 정확히 명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욕구이자 갈망이다. 어린 시절의 집과 관계에서 분리되고 싶은 욕구,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도 같은 욕구를 묵살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다. 이 걷잡을 수 없는 허기는 고통, 공포, 소란, 불안, 심지어 폭력까지 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집을 떠난 쿼터라이퍼들이 알고 있듯 그것은 첫 단계일 뿐이다. 진정한 분리란 관계 속의 경제적?정서적?심리적 의존을 천천히 바꿔나가면서 자기 자신도 바꿔나가는 긴 과정이다. 건강한 분리 작업에는 새로이 관계의 선을 긋고, 의사소통 능력을 개선하고, 부모와 형제자매가(그리고 수많은 타인이) 자신의 자아 인식에 미치는 오묘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자세히 살펴보는 활동이 포함된다. 목표는 자신에 대해 알아내는 것,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을 신뢰하는 것, 독립하는 것, 그렇게 타인과의 친밀감을 높이는 것이다. 이루기 힘들 때도 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감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나는 코너가 아니라는 대답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코너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용서받고 싶었다. 그간 코너가 납덩이처럼 무거운 죄책감을 지고 살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를 용서해줄 권리가 없었다. 정말이지 용서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코너는 상처로 남은 찢어진 관계를 직면해야 했고, 과거로부터 배워야 했다. 친구이자 연인, 몹시 사랑하던 사람을 삶에서 잘라낸 후로 느꼈던 깊은 상실감과 외로움을 인정해야 했다. 상실의 슬픔과 죄책감을 솔직하게 직면하면, 새로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나는 사건의 핵심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부모의 기대는 쿼터라이프 시기에 해결해야 할 문제 중 가장 어려운 축에 속하며, 이는 부모의 헌신에 직접적인 의문을 제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점차 알게 되었다. 부모 공경은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선’하고 ‘도덕’적인 일로 수호된다. 많은 문화권과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이다. 하지만 쿼터라이퍼에게는 뿌리로부터 진화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이런 본능은 작은 속삭임과 회의감을 심어줄 때도 있고 요란한 비명을 외칠 때도 있다. 부모에게 의존하고 영향받는 삶과 분리하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삶에 익숙한 상태인 데다가 부모의 믿음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허용하는 사회적 기반이 거의 없다 보니, 부모의 관점이 나 자신의 본능보다 더 중요해진다. 어린 시절의 충심을 너무 오래 간직하면 심리에 위험할 수 있다. 서로 싸우고 있는 두 명의 주인을 모시면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코너는 자신이 부모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껄끄러웠다. 원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수 있을 정도의 결단력이나 용기가 없었고, 그 결과 림보나 연옥 같은 곳에 갇혀 자기 삶을 향해 나아가지도 못하고 부모의 기대에 맞게 살지도 못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이제 혼자서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완전히 마비된 채로 추락하고 말았다.

코너는 용기를 내서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자기만의 욕망과 선택을 추구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것 때문에 부모님의 욕망으로부터 멀어진다 한들 상관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는 부모님의 반응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코너의 분리 작업에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끊임없이 공유하고 소통하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코너가 부모님의 복제품이나 후계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인식해야 했다. 그는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깊이 탐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이 코너가 창조할 평생의 걸작이 될 것이었다.

자식이 자기만의 길을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로 자식에게 자유나 신뢰를 주지 않는 부모라면, 일단 자기 자신을 깊이 돌아봄으로써 온 가족을 이롭게 할 수 있다. 성인 자식에게 부모 노릇을 하려면, 부모부터 자신의 어린 시절의 관계로부터 분리되고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추구하는 작업을 마쳐야 한다. 자식이 새롭고 독립적인 삶을 찾아 나서야 하는 만큼 부모도 동일한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식이 쿼터라이프에 진입하면, 더는 부모라는 사실만으로 부모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다. 부모는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 양육에 집중하기 위해 미뤄두었던 과제,자기만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살아간다는 과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야망, 창의력, 두려움, 희망을 탐험하고, 자기만의 심리적 장애물을 용감하게 넘어서야 한다.

나는 확신했다. 코너는 여자 친구를 향한 애정을 존중하기 전에자기 삶을 지키기 위한 용기부터 찾아내야 했다. 이 작업은 도덕적 용기를 함양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쿼터라이프 시기의 분리 작업은 타인이 자신의 관점과 선택에 어떤 영향과 압력을 행사하는지 의식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따라서 분리 작업은 심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필요하다. ‘내가 믿는 것’과 타인이 믿는 것을 세심하게 분리해내면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과 자기 인생을 향한 신뢰가 강화된다. 자신의 진심이 평온한 일상에 방해가 될 때조차, 아니 그럴 때일수록 분리에 노력을 쏟아야 한다. 분리 능력이 있으면어떤 것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고 어떤 것은 아닌지 알아내기 수월하고, 상황이 모호하거나 순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을 때 그 갈등 속에서 자신이 어떤 입장인지 알아낼 수 있다. 자신에 관해 알아가기를 거부하고자신의 욕구를 지켜내지 않는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대의 욕망과 욕구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자기만의 삶을 살고자 한들, 남에게 판단당할까 봐 줄곧 고통스러울 터였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거나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는 분리 작업이 사뭇 다르게 진행될 수 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거나, 함께할 수 없거나, 처음부터 옆에 없었다면 분리 작업은 기억, 이야기, 부모가 남긴 물건을 통해 정체성을 발달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때로는 가족에게 정보를 구하거나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기억하는지 물어보고, 오래된 편지나 일기를 읽으면서 절박한 질문에 답을 찾고 자신의 역사에 관한 미지의 직감을 확인해야 한다. 이는 어려운 일이다. 특히 분노와 상실, 고통, 기쁨이 밀려드는 가운데서 힘들다고 토로하고, 질문을 던지고, 용서를 구할 상대가 없을 때는 더욱 어렵다. 삶의 방향을 바꾸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다. 축복을 빌어줄 사람이 없을 때, "미안하다"는 말이 절실히 듣고 싶은데 그렇게 말해줄 사람이 없을 때도 그렇다. 미라는 홀로 이런 역할을 해내야 했다. 가장 급한 일은 미라의 욕망을 옭아매고 있는 어머니의 욕망을 풀어낼 수 있도록 스스로 허락하는 것이었다.

쿼터라이프 시기에는 과거의 관계를 바꾸고 싶은 자연스러운 발달 욕구가 생긴다. 타인에게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의지하던 습관으로부터 ‘분리’하고, 독립성과 개성을 포용하는 새롭고 더 성숙한 관계를 맺으려는 본능적인 욕구다.

바람직한 미래는 삶의 여정 속에서 부모와 자식이 평등하게 진화하는 것, 위계와 의존성이 사라진 상태로 다시 서로를 마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할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상당한 양의 의식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는 압박이나 오해, 상처, 좌절 같은 함정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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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들을 수 있나요?

쿼터라이프의 두 번째 성장 기둥은 ‘경청’이다. 더는 유익하지 않은 관계와 관점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도록 용기와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에 더해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내면에서 들리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경청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직감, 느낌, 신체 감각, 우연, 침묵, 꿈을 비롯한 온갖 비언어적 정보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도취라고 성급하게 판단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경청의 목표는 자아도취와 거리가 멀다. 자신의 진실을 직시하려면 불굴의 정직성과 겸허함이 필요하고, 때로는 현실의 안정을 흩어낼지도 모르는 내면의 지침에 오롯이 헌신해야 한다.

경청은 일상 속의 건강과 방향감각을 기를 때 도움이 된다. 우리는 전부 ‘행복과 불행’을 경험하고, 때로는 경험의 정도가 몸이 실감하는 수준보다 지나쳐서 내면의 현기증을 겪듯 위험할 정도로 ‘도취’될 수도 있다. 혹은 납덩이를 짊어진 듯 일어서지 못하고 ‘가라앉을’ 수도 있다. 때로는 ‘무질서’라든가 ‘방향 상실’의 감각을 느낄 수도 있다. ‘홍수’가 난 듯 감정이 터져 나오거나, ‘통제 불능’이 될까 봐 두려워지거나,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끙끙댈 수도 있다. 그러다가 기분이 좋아지면 ‘안정’이나 ‘균형감’이나 ‘집중력’이 생겼다고 느낀다. 타인의 말 한마디나 시선이 자신을 ‘쓰러뜨렸’거나 ‘북돋아줬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이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감정이 생겼고 다음에는 어떻게 기분 전환할 수 있을지 알아내는 법을 익힐 수 있다.

때로는 인내력과 시간을 쏟아서 이전에 ‘불안정’의 감각이 시작된 시기를 돌아보고 다시 느껴봐야 한다. 과거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유용한 정보가 드러나는 법이다.

자기 내면을 경청하는 행위의 목적은 방향감각을 얻고 직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때로는 외부의 소음을 줄여야 한다. 남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줄이고, 기술과 단절하고, 수면 시간을 늘리고, 트라우마와 중독을 치유해야 한다. 트라우마와 중독은 욕구를 느끼고 표현하는 능력을 망가뜨리고 의식을 흐려놓기 때문이다. 어떤 방법을 택하든, 결국 이런 활동은 안테나를 세워서 과거에 쉽게 감각하지 못했던 자기 삶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수신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청은 그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분별력을 요구한다. 분별력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 혹은 ‘어떤 것의 특성을 옳게 판단하고 그런 판단력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분별력은 자기 자신을 든든한 거름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때로는 반문화적 신념과 실천에 전념하는 집단이나 운동도 지배 문화만큼이나 자기 내면을 경청하는 작업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경청으로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효과는 결정 과정을 단순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심리적 성숙의 바탕, 그리고 성숙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건강한 사회의 바탕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하는 능력, 주변 사람의 관점과 거리를 둔 채 스스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자신을 신뢰하는 능력이다. 끊임없는 도전과 실수를 통해 안간힘을 쓰거나 지나치게 고민하는 일 없이 내면의 신호를 알아채는 법을 깨우쳤다면, 최종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제다이가 포스를 느끼게 된 것처럼.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역사가 있는 경우, 쿼터라이프 초반의 몇 년은 거센 급류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버거워도 줄곧 힘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이 피로가 쌓인다. 많은 쿼터라이퍼는 ‘경직 상태’에서 영웅적인 회복력을 유지하지만, 끊임없이 흐르는 삶 속에서 점차 지치고 만다. 회복력이 바닥나고, 그 밑에 있는 겹겹의 절망과 공포가 드러난다. 곧 휩쓸려 떠내려갈지도 모른다. 대단하든 미미하든 트라우마 역사가 남아 있다면, 자기 내면을 경청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트라우마 치유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 해묵은 트라우마와 해로운 패턴의 목소리가 본능과 욕구가 내는 믿음직한 목소리와 싸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능과 욕구에 관한 정보를 내부에서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쿼터라이프 내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줄곧 힘겨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트라우마 중심의 심리 치료를 포함해 일반적인 심리 치료 역시 상처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서 현실 세계에서 자유와 독립성을, 무엇보다기쁨을체험하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그레이스를 포함한 수많은 의미형에게 이는 현실 세계가 자신을 품어줄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하다는 믿음을 다지는 과정이다.

수많은 쿼터라이퍼, 특히 안정형 쿼터라이퍼는생각으로 이해하는 법 대신느낌으로 판단하는 법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딱 적당한 온도를,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고딱 적당한 크기를 직접 판단하는 것이다.

경청은 쿼터라이프의 핵심적인 요소다. 카를 융은 과거엔 경청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여겼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세상에 진입한 쿼터라이퍼는 본능과 호기심을 따라가며 조금씩 원하던 지식을 얻어낸 것이다.

쿼터라이프에서 경청이라는 행위는 삶의 중심을 목표 성취에서 호기심 탐구로 옮기는 것을 뜻한다. 자기만의 특성에 관해 정보를 모으는 행위다.

쿼터라이퍼는 오직 시도와 실수를 통해서 자기 삶을 정확히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어진 상황에서 신체와 감정이 보이는 반응에 집중하면, 아주 미묘한 반응이라도 정보가 될 수 있다. 내가 내담자에게 권장하는 것은 저항, 두려움, 갈망, 즐거움, 피로, 호기심, 부끄러움 등 다양한 감정을 느낄 때 자신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경청해보는 것이다. 그런 반응의 의미를 질문하기 전에 그저 귀 기울여보고 자신의 경험에 관찰자적 태도를 취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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