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일과 관련된 공부를 할 때는 피를 토하는 자세로 하라고 한다. 특히 삼십 대 중반 이전에는(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적어도 2~3년 동안은(길면 길수록 좋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길거리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없어야 하므로 최대한 일터나 학교에 가깝게 살면서 시간을 아끼고, 밥을 많이 먹으면 졸려서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므로 밥을 굶거나 조금만 먹으라고 하고(내가 밥을 굶으라고까지 하는 것은 실제로 쫄쫄 굶으라는 뜻이 아니라 밥 대신 다른 것을 간단히 먹으라는 뜻이다), 시간을 철저하게 아끼려면 라면 하나를 끓여 먹는 시간도 아껴야 하므로 그냥 생으로 씹어 먹으라고까지 말한다(너무했나? 실제로 나는 5~6개월을 아침은 안 먹고 점심은 미리 삶아 놓은 계란 두 개 혹은 라면 부스러기나 찬밥 물에 말아 먹기, 저녁밥은 작은 공기 하나 정도로 때운 적이 있다. 지금도 나는 아침을 전혀 먹지 않으며, 오후의 식곤증을 없애고자 점심을 반만 먹을 때가 많다).
내가 그렇게 말을 하면 사람들이 꼭 하는 말이 있다. 그러다가 건강을 해치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말이다. 자기도 그렇게 해 보았는데 위장병만 생기는 바람에 아직도 고생한다는 말도 하고 책상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요통만 생겼다고 하기도 하며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다. 그러나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역시 건강이 최고라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면 건강 걱정하면서 그렇게 계속 튼튼하게 살아라.

10여 년이 지난 뒤 통계청이 내놓은 "99년 한국인의 사망원인분석"에서도 자살자는 10~30대에 집중되는 현상을 보였고, 그들 세대에서 자살은 교통사고 다음의 최대 사망원인으로 나타났다. 즉, 자살자들은 젊고 싱싱하고 건강한 10~30대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오며 건강 상실이 동기가 되어 자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거 좀 이상하지 않은가. 흔히 사람들은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고 모든 것을 잃었다면 당연히 절망하여 자살할 것 같은데, 그런 이유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들보다는 건강하고 탱탱한 몸을 갖고 있음에도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사실 말이다. 건강하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왜들 그렇게 죽으려고 하는 것일까? 몸이 건강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갖게 되어 고민 끝, 절망 끝, 행복 시작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 아닌가.

세계보건기구는 건강을 ‘신체적으로 병이 없는 상태이면서 정신적, 사회적으로도 안녕인 상태’라고 정의한다. 몸 건강한 노숙자는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는 아니므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몸 하나 튼튼하다고 건강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가 아니면 육체적 건강은 위협을 받는다. 핀란드의 투르크시 직업병전문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경기가 침체 국면에 있을 경우 근로자들은 더 많은 질병을 앓게 되는데, 고용불안과 일터에서의 분위기 변화 등으로 불안감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하며, 실제로 실직하게 되면 사망률마저 높아진다고 한다. 이에 덧붙여 핀란드 헬싱키대학의 연구팀은 250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실업률이 낮을 때 실직하면 사망하기 쉬우나 실업률이 높을 때는 그럴 가능성이 작아진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연구팀은 실업률이 낮을 때 실직한 사람은 본래부터 건강에 나쁜 생활 습관과 성격 등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에 사망률이 높은 것이며, 실업률이 높을 때는 심신이 건강한 사람들도 실직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주변에 실직자가 많다 보니 실직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줄어들어 사망률이 낮다고 덧붙였다.

물론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엄살은 부리지 말라

내가 20대부터 40대 초까지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뭔가를 읽고 배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신체리듬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한창 일하였던 시기에는 취미 생활을 위해 몸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였는데 그다음 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밤에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나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새벽까지 술을 마심으로써 다음 날 엉망이 된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10년에 한 번 정도뿐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직원들은 술을 통제하지 못하고 마셔 대는 사람들, 교회에서 철야예배를 마치고 출근하는 사람들, 일요일에 등산이니 뭐니 하면서 몸을 극도로 사용한 뒤 월요일에 출근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육체의 리듬을 깨는 일은 토요일에 할 것을 권유한다.

그렇다면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해법은 무엇인가.
첫째, 가시적 결과를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내부에서 찾아라. 당신 자신의 노력을 인정해 주고 칭찬하여야 할 주체는 타인이나 직장이나 사회가 아니다.

둘째, 쉬고 싶은 이유를 생각하여 보라.

셋째, 노력한 만큼의 대가는 반드시 주어진다는 것을 믿어라.

넷째, 긴장감을 잃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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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평야 | 내포땅의 풍요로움을 남김없이 느낄 수 있는 이 평화로운 길은 평범한 것의 아름다움을 되새기게 해준다.

이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들판길은 찻길이 항시 언덕을 올라타고 높은 곳으로 나 있기 때문에 넓게 내려다보는 부감법의 시원한 조망을 제공한다.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란 흔히 강을 따라 난 길, 구절양장으로 기어오르는 고갯길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런 고정관념을 깨뜨리면서 평범한 들판길이 오히려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여기다.

1959년 4월, 오랫동안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장(오늘날의 국립부여박물관장)을 지낸 금세기의 마지막 백제인 연재(然齋) 홍사준(洪思俊,1905~1980) 선생이 보원사터로 유물 조사 온 길에 마애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홍사준 선생은 이를 즉각 국보고적보존위원회(오늘날의 문화재위원회)의 이홍직(李弘稙), 김상기(金庠基) 교수에게 보고하였으며 위원회에서는 그해 5월 26일 당시 국립박물관(오늘날의 국립중앙박물관)의 관장 김재원(金載元) 박사와 황수영(黃壽永) 교수에게 현장조사를 의뢰하였고 조사단은 이 마애불이 백제시대의 뛰어난 불상인 것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는 이 불상을 서산 마애불 또는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산 마애불의 발견 아닌 발견은 실로 위대했다. 서산 마애불의 등장으로 우리는 비로소 백제 불상의 진면목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서산 마애불 등장 이전에 백제 불상에 대하여 말한 것은 모두 추론에 불과했다. 저 유명한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나 일본 광륭사(廣隆寺,코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 일본 법륭사(法隆寺,호류지)의 백제관음 등은 그것이 백제계 불상일 것이라는 심증 속에서 논의되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서산 마애불은 이런 심증을 확실한 물증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산 마애불은 미술사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불상의 양식적 특징이자 매력 포인트이기도 하다. 하나는 삼존불 형식이면서도 여래입상 양옆의 곁보살〔?侍菩薩〕이 독특하게 배치된 점이며, 또 하나는 저 신비한 미소의 표현이다.

서산 마애불의 옛 모습 | 용현계곡 한쪽 벼랑에 새겨진 마애불의 옛 모습. 한때 보호각이 설치되었으나 지금은 보호각을 걷어내서 옛 모습을 되찾았다. (1959년 11월 이경모 촬영)

가장 백제적인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은 작년(1959)에 발견된 서산 마애불이다. 거대한 화강암 위에 양각된 이 삼존불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의 만족스런 미소는 마음 좋은 친구가 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 같고, 그 오른쪽 보살상의 미소도 형용할 수 없이 인간적이다. 나는 이러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기를 제창한다.

서산 마애불 전경| 은행알 같은 눈으로 활짝 웃고 있는 여래의 모습은 ‘백제의 미소’라는 찬사를 자아내게 한다.

서산 마애불은 한동안 보호각 속에 고이 보존되어왔지만, 발견 당시의 상황을 보면 주변의 자연경관과 흔연히 어울리면서 인공과 자연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서산 마애불은 과학적 계산을 고려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구사한 작품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기계적 계산을 넘어 진짜 과학적 배려에서 위치와 방향을 설정한 결과다.
서산 마애불이 향하고 있는 방위는 동동남 30도.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그것은 한 해의 시작을 의미하며, 일조량을 가장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이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본존불이 향하고 있는 방향과 같다.
마애불 정면에는 가리개를 펴듯 산자락이 둘러쳐져 있다. 이는 바람이 정면으로 마애불을 때리는 일이 없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마애불이 새겨진 벼랑 위로는 마치 모자의 차양처럼 앞으로 불쑥 내민 큰 바위가 처마 역할을 하고 있어서 빗방울이 곧장 마애불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한다. 마침 마애불이 새겨진 면석 자체가 아래쪽으로 80도의 기울기를 갖고 있어서 더욱 효과적으로 빗방울을 피할 수 있다. 한마디로 광선을 최대한 받아들이면서 비바람을 직방으로 맞는 일이 없는 위치에 새긴 것이다.

서산 마애불의 경우 바위의 조건이 왼쪽은 높고 오른쪽은 낮다. 그래서 가운데 여래상의 조각을 보면 오른쪽 어깨가 바위에 얕게 붙어 있는데 왼쪽 어깨는 바위면에서 높이 솟게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로 인해 보는 사람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서산 마애불이 기법상으로 가장 절묘하게 구사된 점은 뭐니뭐니 해도 야외 조각의 특성에 맞춰 얼굴은 높은 돋을새김으로 하고 몸체는 아래로 내려오면서 차츰 낮은 돋을새김으로 처리한 것이다. 이 점은 실로 놀랍다.
서산 마애불은 이처럼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 제작되었으면서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제작된 결과인 듯한 편안한 인상을 준다. 바로 소리 없는 공력과 드러내지 않는 기교의 미덕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점은 실로 귀하다.

"이 마애불의 미소는 아침저녁으로 다르고 계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아침에 보이는 미소는 밝은 가운데 평화로운 미소고, 저녁에 보이는 미소는 은은한 가운데 자비로운 미소입니다. 계절 중으로는 가을날의 미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어느 시인은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라고 읊었지만 강냉이술이 붉어질 때 마애불의 미소는 더욱 신비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미소는 가을해가 서산을 넘어간 어둔 녘에 보이는 잔잔한 모습입니다."

성원할아버지 | 30여년 마애불과 함께해온 성원 할아버지가 삿갓등으로 마애불의 미소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광선의 방향에 따라 미소가 달라진다.

성원 할아버지는 마애불이 바라보는 앞산 자락 양지바른 곳에 산신각을 모셔놓았다. 언젠가 내가 물으니 산이 좋아서 신령님께 감사하는 뜻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보원사터 |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서산 마애불과 연관된 백제의 고찰로 생각되며 통일신라, 고려로 이어지는 많은 석조 유물들이 남아 있다. 당간지주, 오층석탑, 승탑과 비가 작은 내를 사이에 두고 줄지어 있다.

오층석탑은 고려시대 석탑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감은사탑 같은 중후한 안정감과 정림사탑 같은 경쾌한 상승감이 동시에 살아난 명품이다. 기단부 위층에 새겨진 팔부중상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된 릴리프(relief,돋을새김 조각)로서 손색이 없고 기단부 아래층에 새겨진 제각기 다른 동작의 열두 마리 사자상은 큰 볼거리다. 아래위로 튼실하게 짜여진 기단부 위의 오층 몸돌은 정림사탑에서 보여준 정연한 체감률도 일품이지만 마치 쟁반으로 떠받치듯, 두 손으로 공손히 올리듯 넓적한 굄돌을 하나 설정한 것이 이 탑의 유연한 멋을 자아내는 요체가 되었다.

보원사터 오층석탑 |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의 백제 전통과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의 기단 형식이 결합된 고려시대의 대표적 석탑으로 안정감과 상승감이 빼어나다.

나는 보원사터를 유난히 좋아했다. 폐사지인데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이 좋았고 전국의 어느 답사지보다도 여기처럼 산천의 자연과 농촌의 사계절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더욱 좋아했다.

보원사터 출토 철제여래좌상| 완벽한 몸매의 균형과 유연한 옷주름의 표현이 돋보이는 이 불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불로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8세기 설과 10세기 설로 나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을 수입해서 우리의 삶이 고양된다면 얼마든지 수입해서 쓰는 겁니다. 그것은 주체성의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적 포용력의 개방성이라고 해야 해요. 불교미술은 결코 이교도들의 신앙물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방식의 정직한 표정이고 사상의 산물이지요. 보십시오. 서양 중세의 문화는 기독교 문화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했고 기독교 건축과 조각이 발달했지요. 그런데 오늘날 어느 누구도 유럽의 중세 문화를 이스라엘의 아류라고 하지 않아요. 필요하면 얼마든지 갖다 쓰는 것이지요. 다만 맹목적 모방이었냐, 주체적 수용을 통한 재창조였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백제의 미학은 그래서 빛나는 겁니다. 그들이 우리 고대국가의 세련된 고전미를 창출해냈거든요. 인도·중국·일본에선 볼 수 없는 화강암의 건축과 조각, 즉 석탑과 석불이 그 대표적 예인데 우리는 그중 석불의 아름다움을 답사한 것입니다. 저 잔잔한 ‘백제의 미소’에는 그런 뜻이 서려 있는 겁니다.

서산 마애불의 보호각은 통풍의 문제로 더 이상 둘 수 없어 2007년에 철거되었고, 성원 할아버지는 정년 뒤 몇해 더 근무하다 결국 자리를 떠나게 되었으며,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외지에서 들어가는 길이 아주 쉬워졌다.

비바람 속에 깨지고 마모되긴 했어도 그 남은 자취가 하나같이 명물이어서 일찍부터 나라의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통일신라 때 만든 당간지주건 고려시대 때 만든 석탑과 물확이건 유물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멋스러움에 백제의 숨결이 느껴진다. 미술사가들은 그것이 백제 지역에 나타난 지방적 특성이라며 주목하고 있다.

서산 마애불에 보호각이 준공된 때는 1965년 8월 10일인데 그때부터 오늘(1996)에 이르기까지 30년도 넘게 마애불의 관리인으로 근무하고 계신 분이 있다. 이름은 정장옥(鄭張玉), 수계한 법명은 성원(性圓)인데 스님은 아니고 속인으로서 한평생을 이 마애불과 함께해왔다. 성원 아저씨는 작년(1995)에 환갑이었다고 하니 30세 때부터 여기를 지키고 계신 것이다.
성원 아저씨는 작은 키에 언행이 조신하고 느려서 옆에 있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한 분이다. 그러나 이 마애불에 대한 존경과 자랑, 믿음과 사랑은 그 누구도 당할 수 없어서 어떤 답사객이 오고 참배객이 오든 해설을 부탁하면 수줍어 하면서도 사양하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성원 아저씨는 마애불의 미소가 보호각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 암막을 설치하고는 긴 장대에 백열등을 달아 태양의 방향에 따라 비추면서 미소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를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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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 인물/궁예

후삼국 시대에 후고구려를 건국한 왕. 정확한 출생 경위는 모르지만 신라 진골귀족의 후예라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 말기 진성여왕 때가 되면 지방 반란이 본격화된다. 숙주의 기획, 북원의 양길 등이 등장하는데 승려였던 궁예(?~918년)는 이들의 수하에 들어가서 강릉 일대에서 세를 도모한다. 이후 철원, 개성 등으로영역을 확대했고 결국 양길 세력을 물리친 후 후고구려를 세운다.
궁예는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자주 바꾼 것으로 유명하다. 국호를 901년에 후고구려, 904년에는 마진, 911년에는 태봉으로 바꿨고 수도도 송악(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긴다. 불안정한 정국 운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데 다만 국호의 의미만큼은 곱씹어볼 만하다. 마진은 대동방국이라는 의미이고, 태봉은 서로 화합하는 세상이라는 의미인데 고구려를 계승하고 백제와 신라를 포괄하는 삼한통일의이상을 천명했다는 점에서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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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으로 의무교육을 받고도 불국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아직 경주에 가보지 못한 인생이야 있겠지만 경주를 보러 가서 불국사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국사는 우리나라 문화재 중 가장 높은 지명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불국사를 보고 나서 멋지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불국사를 보고 나서 시시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국사는 우리나라 문화재의 얼굴이며 한국미의 한 상징이다.

나의 주관적 견해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건축을 논하려면 반드시 사찰 건축을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중 뛰어난 절집이라면 당연히 영주 부석사, 순천 선암사, 경주 불국사가 꼽힐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세 절은 건축적 지향점, 특히 자연과의 조화 관계가 아주 다르다. 부석사는 백두대간의 여맥을 절 앞마당인 양 끌어안는 장엄한 스케일을 보여주고, 선암사는 부드러운 조계산 자락이 사방에서 감지되는 아늑한 산중에 자리 잡았는데, 불국사는 산자락을 타고 올라앉았으면서도 비탈을 평지로 환원하여 반듯하게 경영되었다. 그래서 부석사는 자리앉음새(location)가 뛰어나고, 선암사는 건물과 건물 간의 공간(space) 운영이 탁월하며, 불국사는 돌축대의 기교(technic)와 가람 배치(design)의 묘가 압권이다. 그런 저마다의 특징으로 인하여 한국 사람은 부석사를, 일본 사람은 선암사를, 서양 사람은 불국사를 더 좋아한다. 한국 사람은 부석사의 호방스러운 기상을, 일본 사람은 선암사의 유현(幽玄)한 분위기를, 서양 사람은 불국사의 공교로운 인공(人工)의 멋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불국사 전경| 회랑이 있는 쌍탑 1금당의 정연한 자태는 화엄불국토의 장엄한 모습이자 고대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보탑 | 석가탑과 달리 대단히 화려한 구성이지만 전혀 이질감이 없고 오히려 불국사의 다양함을 보여준다.

관음전에서 내려다본 회랑과 다보탑 | 불국사 가람 배치의 엄정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불국사 축대| 불국사 건축이 다른 사찰과 가장 큰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축대다. 반듯한 석축과 자연석을 서로 이가 맞도록 조성한 석축이 잘 어울린다.

불국사 건축의 아름다움은 석축(石築)으로부터 시작된다. 불국사 석축은 누구에게나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석축과 청운교·백운교 | 산자락을 다져 평지로 환원하기 위한 이 석축에는 불국토로 이르는 길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한 고대국가의 조화적 이상미가 구현되어 있다.

불국사의 석축은 곧 천상의 세계로 오르는 벽이다. 그 정상이 수미산인데 범영루가 이를 의미한다. 그래서 「역대기」에서는 ‘수미범종각’이라고 이름하였고, 그 정상의 누각에는 108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였다. 108은 물론 백팔번뇌를 의미한다. 그리고 천상으로 오르는 청운교와 백운교는 모두 33계단으로 곧 33천(天)의 세계를 의미한다. 청운교와 백운교의 위치는 책마다 다르게 나오는데 「역대기」에 의하면 위가 청운교, 아래가 백운교로 되어 있고, 「동경기행」에서도 위가 청운, 아래가 백운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아래 계단이 끝나면서 무지개다리 모양으로 돌이 깔려 있는 부분이 백운교이고, 위의 계단이 끝나면서 자하문(紫霞門) 문턱에 다리를 가설하듯 돌을 깐 것이 청운교라고 했다.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 위가 청운교이고, 아래가 백운교이다.

불국사가 아무리 훌륭한 교리적 상징체계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것을 받쳐주는 형식을 제시하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술로나 건축으로나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파노프스키의 친구로 그의 도상학에 동조하여 인도, 인도네시아의 불교미술을 해석한 쿠마라스와미(A.Coomaraswamy)는 『시바의 춤』(DanceofSiva)이라는 책에서 "과학에 근거하지 않은 예술은 아무것도 아니다"(The Art without science is nothing)라고 단언하면서 수리적 체계의 조화를 강조했는데 불국사는 그에 걸맞은 비례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분석은 요네다가 발표한 「불국사 조영계획에 대하여」라는 논문에 수치와 도면으로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수치란 비례 관계이며 그것이 조화(harmony)와 균제(symmetry)의 근거가 된다.

석가탑, 다보탑, 석등과 배례석,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금동비로자나불좌상, 불국사 사리탑, 그 어느 것 하나 나라의 보물 아닌 것이 없고, 명품 아닌 것이 없다.

첫 번째는 대웅전 정면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소맷돌 측면의 살짝 둥글린 곡선의 아름다움이다. 마치 옷깃의 선 맛을 낸 것도 같고, 소매끝의 곡선 같기도 한데 그 날카로운 듯 부드러운 아름다움엔 더할 수 없는 기쁨이 일고, 그런 미세한 아름다움을 구사한 옛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놀라움이 일어난다. 우드 관장을 이 자리에 끌고 오자 그는 "믿을 수 없다!"(unbelievable)를 여러 번 되뇌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번째는 석가탑의 탑날개 직선의 묘이다. 사람들은 다보탑을 볼 때 그 화려한 구조의 묘를 자세히 살피면서도 석가탑은 전체적 인상만 즐길 뿐 세부적 관찰은 포기하곤 한다. 석가탑은 무엇보다도 지붕돌이 상큼하게 반전한 맵시가 일품이다. 그러나 이를 자세히 살피면 지붕돌은 기울기가 직선으로 되어 있고 반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처마를 직선으로 뻗게 하다가 추녀 부분에서 살을 두툼히 붙여 급하게 깎아낸 것인데, 그것을 밑에서 올려다보니까 살포시 반전한 느낌을 갖게 된다. 착시 현상을 이용하여 곡선의 느낌을 창출한 것이다. 석가탑의 아름다움은 바로 우아한 부드러움이 있으면서도 견실한 힘이 느껴지는 이런 디테일의 묘에 있다.

세 번째는 석축의 그랭이법으로, 자연석 위에 얹힌 장대석을 자연석 모양에 따라 깎은 것이다. 외국인들은 대개 여기에서 자지러지듯 놀라며 인공과 자연의 조화에 얼마나 많은 공력과 계산이 들었는가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극락전 바깥쪽 서쪽 면의 축대 쌓기에 이르면 그 감동은 절정에 이른다. 불국사 석축 정면에서 왼쪽으로 돌아서면 비탈길에 드러난 극락전의 석축이 있는데, 곧게 세운 세로줄 장대석을 가로지르는 허리축 걸림돌이 수평으로 뻗어가다가 오르막에서 급격한 꺾임새를 나타내는 동세는 천하의 일품이다. 수직 수평으로 교차하는 장대석을 마치 목조건축의 가구(架構)인 양 못처럼 박아놓은 동틀돌로 조이면서 입체적으로 돌출시킨 아이디어도 여간 놀라운 것이 아니다. 우드 관장과 경주를 함께 답사하고 헤어지면서 경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 하나만 꼽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어려운 문제라며 머뭇거리더니 결국은 이 극락전 서쪽 석축의 짜임새를 꼽았다. 그때 우드 관장은 정말 "경이롭다"(marvelous)라고 했다.

네 번째는 극락전 안양문에서 연화교를 내려다보면서 연꽃 무늬가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장면을 보는 것이다. 계절과 시각과 광선에 따라 선명도에 차이는 있지만 육안으로 반드시 간취된다. 우드 관장은 이 조각 새김을 보는 순간 "믿기지 않는다"(incredible)라고 했다.
다섯 번째는 관음전에 올라 관음전 남쪽 기와담 너머로 보이는 회랑과 다보탑을 꼭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시각이, 회랑이 있는 절집의 정연한 기품이 무엇인가를 남김없이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불국사 석축 정면 | 90미터에 달하는 석축은 자연석과 인공석의 다양한 벽화로 이루어졌다. 돌계단의 설치로 긴 석축이 지루해 보이지 않고, 자연석 위에 인공석이 올라앉아 아주 조화롭다.

여섯 번째, 불국사 서북쪽의 빈터에는 불국사 복원 때 사용되지 않은 석조 부재들이 널려 있는데 이중 주춧돌이야 누구나 알 만한 것이지만, 뒷간에 사용되었던 타원형으로 구멍난 돌은 참 신기하고 재미있다. 또 한쪽에는 완벽한 단독 뒷간이 있다. 그것은 상상 외로 멋있고 조형적이다. 우드 관장이 이 멋있는 단독 뒷간을 보면서 왜 이것만 이렇게 잘 만들었는지 묻자 나는 즉흥적으로 "관장님 전용"(Director’s only)이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내가 유머 책을 쓰면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될 거라고 했다.

그랭이법 석축| 자연석의 초석을 깎는 것이 아니라 위에 얹는 장대석을 자연석에 맞추어 깎았다. 이런 기법을 목조건축에선 그랭이법이라고 한다. 다른 나라엔 예가 없다.

언젠가 나는 답사엔 초급, 중급, 고급이 있다고 했는데 불국사는 당연히 초급 코스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초급자가 초급 코스를, 중급자가 중급 코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초급자가 오히려 중급 코스를 더 가고 싶어 하고, 중급자는 고급 코스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그런데 고급자가 되어야 비로소 초급 코스의 진가를 알고 거기를 즐겨 찾게 된다. 그런 진보와 순환의 과정이 인생유전의 한 법칙이고 묘미인지도 모른다. 결국 불국사는 답사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놓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사항은 작은 일각문 너머 있는 뒷간에 다녀오는 일이다. 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서 멀리 불국사 강원(講院)을 합법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강원, 그것은 우리가 늘 보아온 산사의 한 정경인데 불국사가 회랑이 있는 평지 사찰로 경영되는 바람에 여기서 보는 산사의 편안한 분위기가 새삼 따뜻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그것을 우리는 불국사의 여운으로 삼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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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1-28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밑줄쳐주신 글 중에 고급자가 초급 코스의 진가를 알고 즐겨 찾는다는 문구가 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억울한홍합 2023-11-28 20:08   좋아요 1 | URL
리뷰 남겨주신 거 보고 제가 더 배우고 감사해요^^
 

078. 사건/유신 체제

1972년부터 1979년까지 유지됐던 박정희 독재 체제, 독재 정권, 즉 권위주의 정권의 등장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문제였다. 이승만은 두 차례 헌법을 개정하면서 13년간 집권했고, 1961년 5.16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군부 세력은 소후 박정희를 중심으로 약 20년간 집권한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신군부가 등장하여 전두환 정권이 수립된다.

유신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의 임기는 6년인데, 무한정 연임이 가능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박정희 정권의 심사를 받아야 했고 회의 의장 역시 박정희였다. 국회는 유신정우회(유정회) 일원이 의석의 삼분의 일을 사전에 할당받는데 유정회도 박정희 정권의 지지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국회의원 선거는 중선거구제로 치러졌다. 한 지역구에서 두 명의 국회의원을 뽑았는데 못해도 여당 의원이 2위는 했기 때문에 국회의 삼분의 이는 여당 의원으로 채워졌다. 또 법관 심사 제도를 강화하여 사법부도장악하는데 그야말로 ‘무늬만 삼권 분립‘일 뿐이었다.
유신 체제 기간 동안 가장 악명 높았던 제도는 ‘긴급조치‘다. 대통령에 의해 발표되는 일종의 긴급 명령으로, 때에 따라 헌법의 일부 조항을 정지시킬 수 있고 긴급조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긴급조치 위반이 되곤 했다. 유신 체제에 강경하게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던 이들을 억압하기 위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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