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에만 통하는 상징을 집어넣은 책은 그 시대에는 베스트셀러가 될지 모르지만 고전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인류는 각자 개성을 지니고 있고, 각자의 경험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와 똑같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한날한시에 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쌍둥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사람은 다양한 상황에 노출되며 자신만의 가치관을 만들고 인생을 완성해 갑니다. 예술 작품은 독자의 경험을 거울처럼 반영하며 다양하게 읽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건너뛰어 공감할 여지가 있는 것이 바로 고전 소설의 맛입니다.
우리는 눈앞의 목표와 이루어 낸 것에 얼마나 집착을 하나요? 그것을 잃었을 때 감정의 동요 없이 다음 날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가짐은요? 매일의 전쟁 같은 일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모든 것을 내던져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헤밍웨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릎이 꺾이거나, 억울한 실패를 겪었더라도 위엄과 존엄을 잃지 않고 우아함을 지키는 능력, 그것이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는 점입니다.
나만의 큰 물고기가 보이지 않을 때 기억할 것은, 언젠가 분명히 어느 시점에 큰 물고기가 나타날 것이라는 자기 확신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나를 믿고, 그 믿음을 다시 또 한번 믿는 것입니다. 강한 자기 확신 끝에 물고기가 나타났다면 그때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합니다. 신은 가장 미워하는 사람에게 작은 성공을 먼저 준다고 하죠. 작은 성공에 취해 거만하게 모든 것을 그르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항상 언제나 겸손하게 다가가는 태도를 잃지 마세요. 그리고 노력해 온 보상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전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태어난 조건을 선택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모든 상황을 마주하고 해결해 나가야 하죠. 내가 갖지 않은 것을 불평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과거로 돌아가 태어난 상황을 바꿀 수 없고, 내 부모님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불평해도 상황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비겁한 방식으로 자신의 승리를 쟁취하려 합니다. 디지털을 이용한 수법은 갈수록 악랄해지고, 이득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대이기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속 자연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하나하나의 장면은 더욱 값지게 여겨집니다. 헤밍웨이는 아마도 공정하고 선량하게 자신만의 싸움을 해 나가는 이들을 위해 이 소설을 썼을 것입니다. 《노인과 바다》를 읽는 시간만큼은 스스로가 이미 지닌 의지와 투지 등을 상기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시선을 장기적으로 가져가면 미래는 희뿌옇게 보일 뿐이고, 때로는 그 사실에 압도되어 버립니다. 언제 취직이 될지, 언제 대출금을 다 갚을지 생각하면 한숨만 나옵니다. 이럴 때는 그냥 눈앞의 순간만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운이 자기 역할을 하도록 내버려 두세요. "내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이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달려가는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위대한 소설의 첫 문장은 과연 어떻게 시작할까요? 소설에서 첫 문장은 그 소설 전체의 모든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합니다. 때문에 문학계에서는 소설 속 가장 인상적인 첫 문장을 뽑아 순위를 매기기도 합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첫 문장 역시 첫 문장계의 클래식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만큼 상징적입니다.
사람을 패배시키는 것은 실패하거나 모든 것을 잃은 그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처하는 우리의 반응입니다. 스스로 실패했다고 인정하고 반응하면 실패한 것입니다. 반면에 노인처럼 모든 걸 파멸당했을지라도 ‘지지 않았다, 실패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하고 편히 잠을 잘 수 있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한 구석이 부서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깨진 틈이 있기에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죠. 무사하게 하루하루 건너가는 날들을 꿈꾸지만, 살아 있는 한 문제는 생기게 마련이고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나약한 부분을 인지해야 스스로를 보듬고, 응원하며, 빛을 발견하고,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겁니다. "난 왜 나약하지?"라는 의문에만 빠질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몇 살이니? 너의 첫 여행이니?" "푹 쉬어 작은 새야. 그리고 돌아가서 사람, 새, 물고기가 그렇듯이 꿋꿋이 도전하며 살거라." "금방 가버렸네. 하지만 해안에 도착하기까지 너의 갈 길은 더 험하단다."
새는 주변이 오직 바다뿐인 노인의 황량한 우주에서 친구가 되어 주는 듯합니다.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이 처음 바다에 나왔냐며 나이와 안부를 묻는 대사부터, 인생 선배로서 새에게 연민을 지니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귀엽고 따듯하게 느껴집니다. 노인은 배려 깊게도 작은 새에게 인생이 험하다는 것을 알려주면서도 꿋꿋이 도전하며 살라는 조언을 잊지 않습니다. 마치 헤밍웨이가 직접 다음 세대에게 하는 조언 같습니다. 헤밍웨이가 한 단어 한 단어 세심하게 꾹꾹 눌러 담은 이런 대사 속에서 고전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전은 몇 백 년 또는 몇 천 년의 시간을 견디고 지금껏 인정받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한 번 읽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나이 들어가며 청춘에도 읽고 노년에도 읽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로 그때도 공감이 되고 지금도 공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헤밍웨이의 글은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관과 지금도 변함없이 통용되는 감정들, 그리고 도덕성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모든 작품을 통틀어, 노력해서 살아 나가는 하루하루를 중요하게 언급합니다. 그의 소설 속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딱 알맞은 인생 조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가장 눈부시고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항구로 향하며, 노인은 문득 침대를 떠올립니다. 그저 침대에 편하게 눕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널 때려눕힌 건 누구지? ‘아무것도 아냐.’ 난 너무 멀리 갔을 뿐이야."
모든 독자의 예상을 뒤엎지요. 노인의 회복탄력성이 빛나는 순간입니다.
헤밍웨이는 상징을 미리 정해 두고 쓰인 좋은 책은 없다고 단호히 말하며, 자신의 소설이 건포도 빵이 아닌 플레인 빵이 되길 원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건포도 빵에서 건포도는 무엇보다 명확하게 눈에 보이죠. 하지만 플레인 빵이야말로 겉으로 보기엔 무색무취라도 각자가 즐기기 나름에 따라 수많은 맛으로 변신할 수 있는 겁니다.
인생에 좋은 일이 생길 때, 또 안 좋은 일이 생길 때 산티아고 노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떠올렸는지 한번 기억해 봅시다. 저마다의 인생을 대입하는 이런 과정들을 통해 그럼에도 패배하지 않는 자신만의 위대한 인생을 만들어 가길 바랍니다.
스스로에게 유독 가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채찍질하며 매몰찬 혼잣말을 하는 습관이 있다면 산티아고 노인의 태도를 더욱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혼잣말은 때로는 가장 중요한 멘탈의 방어막이 되고, 지칠 때도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추진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과 바다》에서 눈여겨봐야 할 또 하나는 바다라는 무대 장치입니다. 어떤 장치나 상황 없이 단순하게 이끌어 가는 소설이기에 사실 바다 말고는 딱히 강조할 면도 없어 보입니다. 제목에서도 보이지만, 바다라는 장치는 소설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헤밍웨이는 노인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전쟁터를 바다로 설정했습니다. 이 얼마나 공정한 곳인가요? 자연 한복판에 있는, 어떤 편향된 감정도 개입할 수 없는 너무나도 객관적인 무대입니다. 따라서 결투의 결과에 누구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바다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습니다. 공정한 무대에 오른 노인은 드디어 승리를 거둡니다.
혼잣말은 무의식에 가장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낯선 목소리가 아닌 평생 들어온 자기 자신의 목소리만큼 중독성이 강하고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는 목소리가 있을까요? 혼잣말은 무의식 속을 마치 고속도로처럼 막힘없이 달려 도달합니다. 자기 자신을 극한 상황에서도 구하고 인생을 바꿀 수도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이 혼잣말인 것입니다. 혼잣말은 이토록 커다란 힘이 지녔기에 절대로 나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수많은 세월을 견디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들은 당대의 독자만 흡수하지 않습니다. 고전은 세대를 건너 독자를 만납니다. 그 독자 중에는 이 플레인 빵에 크림치즈를 발라 먹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참치를 끼워 샌드위치로 먹고 싶은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또, 플레인 빵을 그냥 갓 구운 고소한 맛으로만 느끼고 싶은 독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고전은 어떤 식으로든 해석될 수 있어야 합니다.
완벽주의를 향한 동경은 역사 속에서도 증명이 됩니다. 인간은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기정사실화한 뒤 완전한 존재인 ‘신’을 동경해 왔습니다. 신을 향한 끊임없는 애정이 중세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림과 문학 등 모든 예술 속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인간에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생물체가 자신이 더 크고 더 강한 존재처럼 보이고자 노력하는 것은 몇십만 년간 이어져 온 자연스런 생존 전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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