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미루어두었던 연재를 마저 해치우기로 한다(자꾸 미뤄지는 걸 보면 이것도 확실히 '일'인 모양이다. 아르바이트 아닌 아르바이트?). 이번에도 고른 책들은 일단 최근에 나온 책들 다섯 권이다. 개인적인 관심범위 안에 놓이면서도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책들을 꼽아보자는 게 이 연재를 끌고가는 나의 '원칙'이다(비록 모든 책에 적용되기는 힘들더라도). 단순하게 나열하는 건 재미가 덜하기에 내러티브를 부여하자면 '멸종의 역사에서 철학까지'이다. 내일 지구에 멸망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그런 무의미한...

 

 

 

 

제일 먼저 꼽을 책은 <멸종의 역사>(아고라, 2006)이다. '지구를 지배했던 동물들의 삶과 죽음'이 부제니까 제목의 '멸종'은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멸종'이다. 멸종을 다루고 있는 책들은 리처드 리키의 <제6의 멸종>(세종서적, 1996) 이후에 드물지 않게 출간되었다. 멸종의 역사가 10년내 사뭇 달라졌을 리는 없는 만큼 초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용상의 대차는 없을 거라고 본다.

No Turning Back: The Life and Death of Animal Species Cover

이번에 출간된 책도 "지구가 탄생하고 30억 년 전에 생물체가 살기 시작한 이래 오늘날까지 생명의 역사를 다룬다. 책은 지구에 살았던 동물들의 생태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멸종의 과정을 이야기 하는 것임을 밝힌다. 지구에 처음 생물이 나타났을 때 있었던 종 중에 지금까지 살아있는 종은 1,000분의 1밖에 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종이 나타난 지 1,000만 년 안에 멸종했다. 이 수치는 지구에 나타났던 생물 중 99퍼센트가 멸종했음을 뜻한다." 문학이론가 프랑코 모레티가 쓴 비유이지만, 진화사는 달리 '도살장의 역사'이다.

책의 저자는 리처드 엘리스인데, 동물학자이자(보다 정확히는 '해양생물학자') 미국 최고의 자연사 작가라고 한다. "리처드 엘리스는 놀라운 상상력과 뛰어난 글솜씨로 자연의 경이로움과 신비에 대해 이야기한다."라고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추천하고 있으니까 신뢰할 만한 책이기도 하고. 그가 어떤 책을 쓰냐면 아래와 같은 책들을 쓴다. 말 그대로 '해룡'인가, 아님 '어룡'?

 

다시 <멸종>으로 돌아오면 "책은 현재가 오르도비스기, 데본기, 페름기, 트라이아스기, 백악기에 일어났던 다섯 차례의 대량 멸종에 이은 제6의 대량 멸종이라고 말한다. 특히 제6의 대량 멸종은 진화와 멸종의 개념을 아는 유일한 종인 인간이 자연의 균형을 철저하게 뒤집은 결과라고 지적한다. '죽음의 기록'이기도 한 지구 생명의 역사를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풀어내면서 생명체의 소중함을 얘기하는 동시에 인류의 종말을 경고한다." 네들 다 끝났어!

 

 

 

 

사실 저 우주공간에서 빛나는 '항성'들 또한 '역사'를 갖는 것이니 이런 멸종의 위협이 구체적인 '실감'으로 다가서지 않을 수도 있겠다(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좀더 '노골적인' 경고를 기대한다면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좋은생각, 2006)을 펼쳐들어야 하는지도(최근에 영화도 개봉된 듯하다). 너무 불편하다면, 몇년 전 출간되어 파문을 불러 일으켰던 <회의적 환경주의자>(에코리브르, 2003)와 맞대결시켜보면서 읽는 것도 한 가지 방책이겠다. 그 길로 더 나가면 생태학적 위협(니콜라스 루만)과 위험사회(울리히 벡)를 경고하는 사회학자들의 책까지 (다시) 챙겨볼 수도 있겠다. 오버인가?

 

 

 

 

두번째 책은 도널드 케이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까치, 2006). 저자는 예일대 교수라고 하고(<전쟁과 인간>이 이미 국역돼 있다) 국내 그리스/로마사 권위자들이 우리말로 옮겼다. 오전에 구내서점에 가보니까 '명품서적' 30% 할인판매장에 이미 책이 나와 있었지만, 형편상 페이지를 들춰보는 것에 만족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려면 여러 전쟁사들은 놔두고서라도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범음사) 정도는 같이 읽어줘야 할 텐데, 그럴 만한 여유를 내기가 어디 쉽겠는가. 하여 출간소식을 승전소식처럼 전하는 데 만족하기로 한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그리스의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민주주의의 흐름을 뒤엎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대의 투키디데스의 역사서를 뛰어넘어 2,400년 전의 전쟁을 오늘날의 세계에도 적용되는 보편적 질서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냈다"고. 마저 인용하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대제국의 흥망, 매우 이질적인 두 사회와 삶의 방식 사이의 충돌, 인간사에서 지성과 우연의 상호 작용, 리더십의 가능성과 한계를 알려준다. 이미 학자를 대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지은이는 일반 독자가 즐겨 읽을 수 있도록 쉽고 흥미로운 서술로 사라져버린 세계를 풍성하고 자세하게 그려낸다." 인간과 국가의 흥망을 집약하고 있는 것이 전쟁사인 만큼 흥미롭게 읽을 법하다. 무슨 '배틀'들에 몰입하시는 분들이 이런 쪽으로 방향을 트는 건 어떠실지?   

저자인 케이건 교수는 1932년 리투아니아 태생의 원로 역사학자이다. 1958년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69년부터 예일대에 봉직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2003년에 출간된 그의 최신작이다. 알라딘의 저자 소개에는 그가 2002년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인권 메달'을 수상한 걸로 돼 있는데, 그가 받은 건 'National Humanities Medal'(국가 인문학 메달)이니까 인권과는 무관하다.

 

 

 

 

세번째 책은 김시천 교수의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웅진지식하우스, 2006). 국가간의 이기주의는 간혹 전쟁을 낳기도 하지만, 리뷰들을 얼핏 보니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이기주의는 소소한 개인, 곧 소인들의 이기주의이다. '진정한 개인의 행복을 찾은 동양 지식인들의 내면 읽기'란 부제가 말해주는 바 그대로. 사실 공자왈 맹자왈의 대종은 군자/대인에 관한 것이라 생각되지만 우리 인간의 대종은 아무래도 소인들이 아니겠는가. 책은 이 소인(배)들의 (정당한) 탐욕과 권리를 옹호하고자 하는 시도로 보인다.

소개에 따르면, "동양의 이기주의란 씨실과 동양고전이란 날실을 엮어 동양적 이기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았다. 동양 이기주의의 역사적인 흐름을 만들고, 대인의 큰 이기주의와 소인의 작은 이기주의에 대한 명확한 구분과 그들의 역할을 명시했다... 책은 소인의 작은 이기주의, 즉 사회적 이기주의를 보다 당당하게 누리자고 권장한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이기적으로 살아보지 못하고 국가권력에게 자신을 희생했던 소인들에게 ‘당신들은 대인이 아니라 소인이니 권리를 내세우며 오늘 하루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보라’고 말한다."

저자는 소인을 '작고 평범한 사람들'로 평범하게 정의한다. 예전에 한 국가의 대통령이나 재벌 총수들도 스스로가 '보통사람'임을 내세워 난감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이 그런 양반들의 자기변명서로 활용될까 걱정된다(하긴 이 책이 아니더라도 최근에 '행복한 이기주의'는 한 트렌드이기도 하지만). 인간됨의 그릇이 작아 '소인'이라고 하지만,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와 얼만큼 겹쳐지면 어떻게 구별되는가에 대해서도 합당한 관심이 기울여져야 할 것이다. 아직 실물을 보지 못한지라 책이 그런 내용까지 다 포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번째 책은 미국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힐러리 퍼트넘/퍼트남의 <존재론 없는 윤리학>(철학과현실사, 2006). 국내엔 <이성-진리-역사> 이후에 그래도 몇 권 소개돼 있는 편인데, 퍼트넘은 "캘리포니아 대학(로스엔젤레스)에서 H. 라이헨바흐에게 과학철학을 배우고 하버드 대학에서 W.V.O. 콰인에게 현대 논리학을 배운" 미국의 주류/정통파 철학자로서 1965년 이후 하버드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그러니까 존 롤즈와 넬슨 굿맨 등의 그의 과 동료들이다. 한편으로 또 다른 동료인 저명한 철학자 스탠리 카벨의 책들이 소개되지 않는 건 상당히 기이한 일이다).

사실 윤리학 분야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책들은 피터 싱어의 책들이다(싱어의 책들은 열댓 권 가량이 출간됐다). 하지만, 눈길을 끈 건 퍼트넘의 책인데, '존재론 없는 윤리학'이란 제목부터가 뭔가 유혹적이지 않은가?  

 The Collapse o fhte Fact/Value Dichotomy and other essays

물론 퍼트넘의 전작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 책 또한 상당히 '딱딱한' 책일 거라는 걸 미리 점쳐볼 수 있다. 그래도 고통을 좀 덜어주는 건 200쪽 분량의 아주 얇은 책이라는 것. 그의 전작 <사실/가치 이분법의 붕괴>와 합본을 해야 보통의 '철학서' 분량이 된다. 그 얄팍한 분량에 유혹되어 책을 사두긴 했는데, 언제나 정독하게 될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그래도 <수학의 철학> 같은 책에 비할 바가 아닌 건 분명하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스페인의 국보급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5)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2006)이다. 특이한 이름 때문에라도 기억하게 되는 27세에 마드리드대학 철학부 정교수가 된 '천재'였다. 소개에 따르면 알베르 카뮈로부터 '니체 이후 유럽 최고의 철학자이자 문장가'라는 찬사를 받았다고도 하는데, 책은 그의 대중 철학 강의를 엮은 것이다. 그러니까 오르테가 이 가세트 버전의 철학입문서이다. "서양 철학사를 꿰뚫는 오르테가가 철학이란 무엇인지, 왜 우리가 철학을 해야 하는지를 친밀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철학이란 우리의 삶과 멀지 않으며, 자신의 삶에서 철학이 생성되면서 나 역시 철학 세계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라는 게 이 책에 대한 나머지 소개이다.

작년봄에 <대중의 반역>이 다시 번역돼 나와서 한번 언급할 기회가 있었던 듯한데, 내가 갖고 있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미지는 대표적인 엘리트주의 혹은 귀족주의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런 첫인상을 심어준 이는 <예술의 비인간화> 등에 대한 서평을 썼던 문학평론가 이동하이다. 두번째 인상은 러시아 체류시 받은 것인데, 러시아어로는 대표작들이 문고본으로 출간되어 있어 그 지명도를 짐작케 했다. 그러니까 오르테가 이 가세트 정도를 읽는 건 '교양'에 해당한다는 것.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그 '교양'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겠다. 내가 더 기대하는 건 언젠가 을유문화사의 문고본으로 출간되었던 <돈키호테의 성찰>이 세련된 장정으로 재출간되는 것이다(저자 자신이 멋쟁이이기도 했으니까).

마지막에 덧붙인 책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리더스북, 2006)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문체가 니체에 버금한다고 하여 떠올려본 것인데, 철학서는 아니고 어빈 얄롬이라는 정신과 의사의 소설이다. 책이 친숙한 건 예전에 교보문고의 철학코너에서 뻔질나게 보던 책이어서이다.

소개를 옮겨오자면, "서구 사상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 19세기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에 지적 상상력을 더해 집필한 팩션"으로서 "음울한 천재 철학자 니체가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브로이어와 벌이는 화려한 지적 공방을 그린다. 1992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이듬해 '커먼웰스 베스트' 픽션 부문 금메달을 수상했고, 이후 13년간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품이다." 그러니까 니체와 프로이트에 관한 이야기들의 성찬일 텐데, 장기 베스트셀러였던 만큼 철학책보다 철학자에 더 흥미를 갖는 독자에게라면 자신있게 권할 만하겠다.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이야기를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자. 그의 눈물이 비명이 되기 전에...

06. 0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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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09-19 17:47   좋아요 0 | URL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다가 생소한 지명이 나오는데 나오는 지도도 친절하지 않고 해서 포기했었는데 케이건 교수의 책은 상세한 지도가 새로운 지명이 나올때마 나와 읽어나가는데 헤메이지는 않더군요. 번역은 읽기는 무난한것 같은데 학자들이 번역한 뻑뻑한 느낌이 나고, 보자마자 눈에 띤 옥에 티는 책 앞날개에 donald kagan이 donal로 d가 빠졌더군요. 네오콘과 관계있다고 하는것 같은데 그리 강성인 책은 아닌것 같은데 끝가지 읽어봐야겠습니다.

로쟈 2006-09-19 17:49   좋아요 0 | URL
부지런하시네요.^^ Donald를 Donal로 오타를 낸 건 알라딘도 마찬가지입니다(그걸 베껴서 그렇겠지만).

푸른괭이 2006-09-19 20:52   좋아요 0 | URL
이렇게 어려운 책들 일색이라니 -_- 나는 요즘 뜻밖에도(!) 김탁환의 [리심]이 눈에 들어오네요.

로쟈 2006-09-20 00:05   좋아요 0 | URL
난이도 문제가 아니라 그냥 취향의 문제입니다...

털세곰 2008-01-01 04:23   좋아요 0 | URL
한참 때 늦게 "최근에 나온 책들"에 다는 댓글이라...

리투아니아 출신의 케이건Kagan 교수라 함은 러시아어로 까간 교수를 말함일 확률이^^...

로쟈 2008-01-01 11:12   좋아요 0 | URL
러시아어로는 그렇게 읽겠지만, (러시아계) 미국 학자이니까요.^^
 

오래전에 셰리 터클의 <라캉과 정신분석 혁명>(민음사, 1995)를 읽고 리뷰까지 올려두었는데, 다시 들춰보니까 옮겨놓지 않은 대목들이 눈에 띈다. 내용상 '밑줄긋기'에 해당할 듯도 싶지만, 그냥 페이퍼로 정리해둔다. 내 기억에 터클의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었으며 그녀의 책으론 <스크린 위의 삶>(민음사, 2003)이 더 번역돼 있다.

<라캉과 정신분석혁명>은  라캉 이론의 테두리를 긋는데 도움이 되는 저작이지만, 이론의 내면까지 들어가지는 않는다. 사실 그걸 목적으로 하지도 않은 책이지만. 정신분석의 사회학이면서 일종의 지성사인데, 프랑스에서 프로이트 혁명이 지니는 의의와 그 변모 과정을 잘 개괄하고 있다. 

인상적인 대목: “정신분석의 비전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은 우리 내부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며 라캉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과 자신 안에서 대면하도록 끊임없이 촉구한다고 많은 분석가들은 믿는다. 이것이 라캉 세미나의 위력이다.”(304쪽) “정신분석의 핵심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진실, 즉 인간이 자신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과 대면하는 것이다.”(307쪽) 그런 점에서 미국식의 적응주의적, 실용주의적 정신분석은 일종의 ‘자살 행위’이다.

다음. “알튀세르와 라캉에 있어 <과학만이 전복적이다>”(310쪽) 두 이론가가 모두 왜 그렇게 과학(과 수학)에 집착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또 “사람들이 정치와 언어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에 미친 라캉의 영향은 프랑스의 새로운 대중적인 철학(신철학)과 알렉산더 솔제니친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평가에서 나타난다.”(311쪽)는 대목.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책세상, 1991)의 저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 등이 신철학의 대표자이다. 그리고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1973)가 제일 먼저 출간된 곳은 프랑스였다.

터클의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그래도 미국에서의 라캉을 다룬 에필로그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자기를 형성하는 인간을 강조한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일종의 시작(詩作)이다. 라캉에게 시인과 정신분석가는 언어에 대한 그들의 관게에 의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332쪽) “<정신병은 엄밀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정신병자라고 말하고 싶다. 항상 엄밀해지고자 노력해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정신병자이다.>”

‘정신병자’ 라캉의 전략은 과학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는 어렵고 엄밀한 작업을 피하기 위해 시적인 합리화를 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수학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과학적 엄밀함이 시야를 좁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334쪽) 그리하여 “라캉은 정신분석을 과학으로 재발견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시인이다.”(336쪽)

06. 0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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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9-19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데리다에 '관한' 가장 좋은 책, 혹은 입문서는 그의 대담집들이라는 게 제 지론입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데리다' 쯤 되겠지요. 사실, 순전하게 데리다 자신의 책들만 해도 차고 넘치지요. 초기의 <입장들>만이 국역돼 있는 게 아쉽습니다(그나마 썩 좋은 번역은 아니고). 데리다를 많이 읽으셨다면 제가 굳이 추천해드릴 형편은 못되고 그래도 국역돼 나온 책들 가운데는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책이 낫지 않나 싶습니다(원서와 대조해서 보신다면)..
 

어제부터 딸아이의 방을 '진짜로' 만들어주기 위한 '공사'를 시작한 탓에 집안이 어수선하다. 서가들을 대부분 거실로 내오고 방에는 벽지를 다시 바르거나 페인트칠을 다시 해야 하는 탓에 한동안은 준-전시상태로 지내야 할 듯하다. 그런 와중에 옛날 파일들도 정리하다가 언젠가 대학원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번역문을 발견했다. J. M. 번스타인의 <예술의 운명(The Fate of Art)>(Polity Press, 1993)에서 하이데거를 다룬 장의 한 절이다(2장 8절). 기억에 부분적으로 발췌한 번역문인데 문장을 약간 다시 손보면서 가급적 병기된 원어들을 삭제했지만 번역문을 원문과 다시 대조하지는 않았다([ ]안의 말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였던 것이다). 절제목이 '미적 소외'였던 탓에 '하이데거와 미적 소외'란 제목을 달아서 창고에 넣어둔다(아래 이미지는 다른 판본인데, 폴리티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까만색 장정이다).  

 

이 장 전체를 통해서 나는 예술과 미학의 담론이, 테크놀로지적 현전화의 지배에 대항하고 그러한 지배를 폭로(개시)하는 유리한 비판적 거점을 제공해준다고 주장해왔다. 이 [테크놀로지의] 지배는 [예술작품에서의] 유한한 초월에 대한 억압으로서 역사 속에 자리한다. 이러한 거점과 역사를 하이데거의 에세이(「예술작품의 근원」)는 제공하고 있다. 「근원」에서 하이데거의 전략,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결속을 다루는 그의 방식은 후기 에세이인 「테크놀로지에 관한 문제」에서 이들의 관계를 표지화하는 방식, 즉 테크네와 포이에시스의 동일성과 차이에 관하여 말하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근원」에서 제기하고 있는 중심적인 문제는 우리가 미학적이지 않은 방식[비-미학적 방식]으로 예술에 관여할 수 있는가, 즉 (미적) ‘쾌감’의 안쪽에, 그리고 (이론적) 인식과 도덕(적 실천)의 바깥쪽에 울타리 지워지는 예술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예술에 관여할 수 있는가이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하이데거는 미감적 지각이 ‘자신의 마땅한 제값’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초월한다는 테제를 세운다. 그리스 신전을 지적하면서 (하이데거는 예술의 또 다른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는 예술이 (지배적이건 위축되었건 하여간에) 지금도 [그런 또다른 개념에 따른] 동일한 요구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그러한 미학-외적 요구는 예술이 더 이상 단순히 미적인 것[미학]이라는 범주적 분류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을 수[동일시할 수] 없다는 자각 안에서, 그리고 그런 자각을 통해서 성립한다.

이 자각은 예술이 주류적인(진보적인) 문화, 즉 모든 창조를 생산으로, 현전화 작용을 [눈앞의] 현전으로(만) 축소시키는 지배적인 현전의 경제[단도리]와 병치되도록 내던져져 있다는 자각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논변은 그 길로 빠질 수밖에 없는데[그런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데], 그리스 사원이 세계를 개시한다는 주장은 현대 세계가 그에 상응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데야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전은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지만, “그 작품속에 들어서 있던 세계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세계의 퇴거'와 '세계의 쇠퇴'는 어찌해볼 도리가가 없다.” 그리스 신전이 드러내주는 것은 한때 예술이 단순한 (심)미적 대상 이상이었다는 사실이다. 반 고호의 그림에도 이러한 ‘뭔가’가 더 있지 않는 한,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인식과 테크놀로지의 현전화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적인 것은 자신을 초과하는가?

 

 

 

 

휠덜린의 한 편의 자연시, 반 고호의 한 짝의 구두 그림, 하이데거가 들고 있는 이들 작품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우리를 우리가 정당화할 수 없고, 지지할 수 없으며,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개시에로 잡아끈다. 그것들은 우리를 거주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또다른 개시[세계의 열어젖힘]에로 유인한다. 이런 생각을 많이 듣던 소리로 옮겨볼까: 예술작품은 현재에는 현실화되지 않은 어떤 현상의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이해가능성을 제공한다]라고. 그래서 예술은 그것이 상상적인 가능성들을 다루기 때문에 허구적이라고.

 

비록 하이데거의 테제가 처음엔 이런 식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근원」의 의도가 그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사실 바로 그런 테제를 거부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단순한 가능성’이란 조작적 개념은 현전을 (초월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현전화 작용]보다 먼저, 그리고 그것과는 무관하게 현실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감적’ 인식을 (단순히) 취미로 축소시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가능성(에로)의 축소[환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 고호와 횔덜린의 작품에서 어떤 요구를 제기할 수 있는가? 위대한 예술의 종언이 암시하는 바대로, 이들 작품들은 그저 ‘사물-존재’, 그러니까 미감적 의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위대한 예술은 한물갔지만 ‘작품-존재’적인 뭔가는 남아있는 것일까? 하이데거는 반 고호의 작품에 대해 그것이 “독특하게도 자신에 의해 열려진 영역 안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새로운 세계도 아니고 상상력의 영역도 아니라면, 그 영역은 환상 세계인가?

 

 

 

 

 

 

 

 

 

<진리와 방법>에서 가다머 또한 예술을 미적인 것[미학]과의 유착에서 구출하고자 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미의식은 그 자신 자유롭게 예술작품을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미의식은, 즉 취미판단에 기초하여 예술작품들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우리의 자의식은 보다 더 기본적인 경험에 근거하고 있으며, 일단 어떤 예술작품의 요구에 붙들리게 되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작품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데 있어서 더 이상 자유롭다고 느낄 수 없다.

 

여기서 가다머의 요점은 말하자면, 무사심성[무관심성]이 우리를 작품에 대한 경험이 그저 좋아하고 말고의 차원을 넘어서는[초월하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예술작품의] 요구를 훨씬 강력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이데거를 좇아서 그는 예술작품이 이미 시초부터 단순히 미적인 수용(혹은 거부)만을 위해 창조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의식, 즉 미의식은 “예술작품으로부터 발원하는 직접적인[즉각적인] 진리 요구[주장]에 대해 언제나 이차적인 것이다.” 

취미 판단은 우리를 예술작품과의 이러한 근본적인, 인식(론)적인 연계[동거]로부터 소외시킨다. 미적 소외의 경험은 작품 본래의 진리 요구와 그 요구에 대한 (심)미적 반응[수용] 사이의 간극에 대한 경험이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청원과 거절의 간극에 대한 경험이며, 작품의 유혹과 [그 유혹에] 자리할 수 없음 사이의 간극에 대한 경험이다. 그러한 간극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작품이 미학(의 테두리)를 초과하는 걸 경험한다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지배문화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정당한 가치평가는 그 간극 속에 놓이는 것이고 미적 소외의 경험(이 경험이 하이데거의 사유를 불러낸다) 속에 놓이는 것이라는 거다.

 

다시 한번 반 고호의 그림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우리를 잡아끌며 닦아세운다. 그러나 어떻게인가? 먼저 어떤 현상의 ‘진리’를 개시함으로써이다. 그 그림에 대한 하이데거의 재-평가가 우리에게 그 작품에 대한 한 가지 해명으로서 유효한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한 그림이나 시를 두고서 우리가 하이데거의 해명이 보여주는 바에 상응하는 [진리] 요구를 감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그런 해명에 대해서 자연스럽지만 순진한 두 가지 비판적 반응이 있다. 첫째는, 마이어 사피로의 비판이다. 그는 그 해명을 다른 여러 가능한 성격부여에 대립하는 한 가지 재현적 성격부여로 다루면서, 하이데거의 해석에 당연한 시비에 건다. 그런 식의 비판[사피로의 비판]이 (비록) 부당하고 부적절하더라도, 그것은 재현(론)적이고 (심)미적인 고려가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얼마나 철저하게 주도하고 있는가, 그래서 미(학)적 담론의 지반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정말 잘 보여준다. 사피로의 비판은 본의 아니게도 중심의 지배, 즉 (심)미적 문화에 대한 진보적 문화의 헤게모니 앞에서 예술작품의 '어찌할 바 없음'을 드러내준다.    

 

하이데거의 해명을 인간과 사물, 그리고 자연이 함께였고, 마치 하나였던, 그래서 제각기 따로 노는 오늘날과는 전혀 달랐던 과거 농촌 세계에 대한 순진한 낭만화로 비판하는 것은 보다 핵심에 근접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와 동일한 비판이 <존재와 시간>에서 망치에 대한 하이데거의 유명한 논의에 대해서도 가해질 수 있다. 이 두 경우에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은 하이데거의 뭔가 의고적인 접근방법이다. 도구(혹은 공간)에 대한 ‘사실적인’ 해명 대신에 하이데거는 우리를 이해와 실천의 이전 형태로 되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특정한 과거의 가능성의 재현을 도모하는 것처럼, 과거 농촌의 이데올로기를 현재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수련발전 댐이나 로봇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망치나 시골 아낙의 구두와 동일한 의미연관을 가질 수는 없다. 도구의 본질은 그때 이후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에 사정이 그러하다면, 과거 도구 개념의 단순한 제시는 별로 의미가 없는 바, 그것은 상상의 세계에서의 가벼운 산책과 다를 바 없다. 「근원」에 대한 비판은 우리를 세계에 대한 이 두 개념으로부터, 사물에 대한 그 낙천적인 재현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이다.(“우리가 믿기에 우리는 사물들의 직접적인 둘레 속에 안주한다. 그것은 친숙하며 신뢰할 수 있고 일상적이다. 그럼에도...”)

 

그래서 하이데거가 그 본성이 바뀔 수도 있다는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도구의 본성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겠다고 말할 때, 그는 명시적으로 이 두 해명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역사로부터 자유롭게 도구성을 숙고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는 󰡔존재와 시간󰡕에서의 그것, 그러니까 망치의 예와 아날로지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가 세계를 탈은폐하는 그리스 사원과 [고호의] 그림을 대조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단지 그 시골 아낙이 알고 있는 바가 비역사적인 것이라는 걸 알려줄 따름이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형이상학적인 태도에 대한 하이데거의 자기비판과 모든 비역사적인 계시적 예술이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반 고호의 그림에 대한 해명이 그리스 사원과 대조되고 있는 결과, 도치된 형태로 [여기서도] 유효하다. 그리스 신전, 그리스 비극, 중세 성당, 그리고 <신곡>에 대해서도 이 작품들이 사물들에 드러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드러남을 가지게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하이데거가 결코 충분히 해명하고 있지 않는 것이지만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반 고호의 그림에 대해서는 뭔가 그럴 듯하지 않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의 종언(의 시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하이데거는 탈은폐 같은 인식(론)적 체제와 동종적인 용어를 가지고 그 그림을 끌어들이는가? 반 고호의 그림은 어떻게 미학을 초과하는가?(즉 <존재와 시간>은 어떻게 형이상학을 초과하는가?) 비록 근대 예술작품에는 인식적 요구[진리 요구]가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반 고호의 그림은 그리스 신전이 아니다), 예술작품의 그러한 요구 자체는 재현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작품은 여전히 생산물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물이며 하나의 작품이다. 우리에게 부과되는 예술작품의 요구는 과거의 (진리)개시의 가능성을 불러모으는 그 작품의 현존이고 물질적인 만들어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끄집어내고 싶은 것은 근대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요구의 성격이다. 그것은[그 요구는] 어떻게 자신을 주장하고 우리 생활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는가? 한 가지 대답은 이미 제거되었다. 세계(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탈은폐를 통해서라는 것 말이다. 그러나 좀 거리를 두고 볼 때, 그 작품이 세계의 탈은폐를 자신이 직접 전달할 수는[가져올 수는] 없지만 그 탈은폐를 부추긴다고 말하는 것까지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그것은[근대 예술작품은] 자신만의 [세계]개시 가능성에의 (필연적인) 실패 속에 거주한다. 그래서 그것을 생산물이 아닌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창조됨은 작품(들)의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세계와 대지를 뒤섞는다.

 

예술작품에 들러붙어 다니는 이념성, 허구성, 상상력은 그것의 내용들(농촌세계, 이상적인 미래 등등)의 기능이 아니라 그것의 ‘형식’이고 그것의 예술작품됨이다. 작품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요구는 바로 예술 자체의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들이다. 그들[근대 예술작품]의 세계 개시 실패,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개시하는 것, 그들의 인식(론)적 무능력, 진리문제로부터의 배제됨[소외] 등이 그래서 그들이 가진 힘의 원천이며 그들의 부정적 인식(능력)이다.

 

근대 예술작품들은, 천재의 작품들은 자신의 본질적인 불가능성[무능력], 위대한 예술작품이 되고 세계를 개시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를 자양분으로 삼아 번성한다. 그리고 그런 거 말고는 다른 걸 할 수도 없다. 바로 거기가 [근대]예술이 서 있는 자리이다.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의 주변성을 특정한 주변성으로서 의식하게 되고, 그래서 중심적인 것[주류적인 것]의 지배의 의미를 경험하게 된다. [근대]예술작품은 예술의 힘과 잠재성에 대한 기억과 예감 속으로 (우리를) 잡아끈다. 이 잠재성은 그것이 현전의 실재성으로만 다루어지게 되면 그 작품의 진짜 의미, 기억과 예감의 작업을 숨기게 된다. 이 작업이 성취되면 현재적인 것은 특정한 현전으로 이동한다.

 

위대한 예술의 불가능성은 테크놀로지의 지배 하에 놓여 있는 예술의 운명이다. 만약 하이데거의 도식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테크놀로지적인 개시는 현전하는 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냄 없이 개시한다. 포이에시스에 대한 그것의 거부는 예술을 주변을 내보내고 그래서 예술은 그 근원[기원]으로부터 소외된다. 이것은 말끔하고 엘레강스한 정식화이지만, 틀렸다. 진리로부터의 예술의 소외는 하이데거가 공표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며 다른 문제이다.

 

 

반 고호의 그림이 떠맡아주리라고 하이데거가 기대했던 역할을 모더니스트 작품들만이 온전하게 실행할 수 있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데리다의 성취이다. 그러나 [모더니즘 예술이] 일단 그러한 지위를 부여받은 이상, 일단 모더니티가 예술적 모더니즘 작품들을 통해서 그 반성적인 (자기)이해를 부여받은 이상, 하이데거적인 프로젝트에 대한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게 된다.

 

06.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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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는 배제하라? 문예지 신인상 심사에서 '노티'나는 작가들은 암묵적으로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기사를 읽고 '소설가의 나이'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기서 '시인의 나이'는 고려되지 않는데, 상업적인 계산과 밀착되어 있는 것은 소설가의 나이이지 시인의 나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관련기사는 이렇다. 

북데일리(06. 09. 13) 문예지 신인상 아줌마는 배제? 작가의 주장 파문

“문예지 신인상을 심사할 때 편집위원 혹은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아줌마를 배제하라’라는 규율이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일단 무조건 아줌마 냄새가 나는 작품은 제외시킨다. 요즘은 신인상 공모 공고에 대놓고 ‘우리는 젊은 작가를 원한다’라고 주를 달아놓는 문예지도 있단다. 그럼 젊지 않은 작가는 아예 응모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한겨레출판. 2006)로 제11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조영아가 문예지 신인상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시사 주간지 한겨레21(제626호)을 통해서다. 조영아는 “수준이 고만고만한 몇 작품을 뽑아놓고 일일이 전화로 나이를 확인한 다음 연락이 없다. 그중에 나이 제일 어린 누군가가 다시 연락을 받는 행운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모를 준비할 때면 아줌마 티가 나는 작품은 일찌감치 제쳐둔다. 뛰어나게 잘 쓰지 않은 이상 뽑히기 어렵다는 지론에서다”라고 덧붙였다.

-문학상 심사에 나이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은 일반인들로선 의외로 받아질 대목(*하지만 얼마간은 '상식적인' 것이기도 하다. 특히 수천 만원의 상금을 내건 신인상들의 경우, 잡지나 출판사에선 '본전'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고 판매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나이'를 한 가지 변수로 고려하는 것이다. 기사에서 이 '돈' 문제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일단 조영아가 민감할 수 있는 문제를 거론한 것은 젊은 작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문학판의 풍토를 지적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할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우려는 깊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조만간 문학상 공모에 나이 제한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나이가 많고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아줌마 티가 난다는 이유로 심사 대상에서 일찌감치 제외된다는 것은 창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나라를 떠나라’는 말로밖에 안 들린다”

-올해는 유독 신춘문예, 문학상에서 나이든 늦깎이 신인들의 출현이 돋보였다. 오래 묵혀 온 문학에의 열정과, 탄탄한 습작 과정을 통해 등단한 실력 있는 신인들에게 ‘나이’란 문제조차 되지 않는 납득할 수 없는 잣대다. 따라서 만약 신인상에 그같은 풍토가 작용하고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신인상에 거액의 상금만 내걸지 않으면 된다. 혹은 수상작가가 상금을 거절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독자가 작가의 나이와 무관하게 책을 좀 사주든가).

-조영아 역시 나이 마흔에 등단한 아줌마 작가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서른 넘어 시작한 부단한 글쓰기의 수련과정을 공개 한 바 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결혼 후 전업주부로 생활하면서도 늘 ‘글밭’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두 아이를 키우며 가정 살림을 이끌어야 하는 주부에게 창작의 여유를 부릴 시간은 충분치 않았다. 번갯불에 콩 볶듯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을 출근 시키고 고시원에 출퇴근하며 이를 악물고 글을 썼다.

-동화는 물론 단편, 중편 습작을 거듭했으나 등단은 쉽지 않았다. 각종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상에 도전했지만 최종심에만 오를 뿐 수상은 하지 못한 것. 그러나 창작을 향한 그의 투지는 쉽게 사그라질 만큼 약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잠든 때를 틈타 밤잠까지 줄여 가며 매일 10시간 이상 글을 쓰며 갈고 닦은 열성으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게 됐다. 조영아의 이번 칼럼은 그의 이같은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이번 신춘문예나 문학상에서 드러났듯이 실제로 잘 쓰는 아줌마 작가들, 혹은 나이 많은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반문하며 "`우리도 한 때는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아줌마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가”라고 일갈했다.

-그의 이번 주장은 고시원, 공공 도서관의 좁은 칸막이에 갇혀 등단에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전국의 늦깎이 습작생들에게 띄우는 격려이자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문예지 신인상을 향한 시의적절한 채찍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기사는 최근에 번역돼 나온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뒤 부슈롱을 떠올리게 했는데, 지난 200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상을 수상한 그의 소설 <짧은 뱀>(문학세계사, 2006)이 그가 76세에 쓴 처녀소설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작가 부슈롱은 프랑스의 엘리트 학교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했다. 항공 산업에서 시작해 텍사스 주의 테제베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산업분야에서 일했다고 한다. 사전 습작의 경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2004년, 76세의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 <짧은 뱀>으로 일약 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작가의 나이를 불문하는 걸 보면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도 공쿠르 상처럼 상금이 얼마되지 않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려나 부슈롱의 '노익장'은 가령 미셸 투르니에처럼 40대에 데뷔하는 늦깎이 작가들조차도 젊어 보이게 만든다.

소개에 따르면 <짧은 뱀>은 "정교한 고증학적 지식과 잔혹한 상상력이 결합된 종교적 모험 이야기. 14세기 말 북극지대에서 펼쳐지는 문명과 야만의 충돌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작가 베르나르 뒤 부슈롱이 76세에 쓴 생애 첫 소설로, 200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수상했다. 야만의 지옥에서 타락의 길을 걷는 북방동토(누벨툴레)의 기독교도들을 구원하기 위해 출발한 원정대. 그들이 '짧은 뱀'이라는 선박 한 척에 의지하여 빙산과 폭설로 고립된 혹한의 섬을 찾아가는 과정이 일인칭 시점의 보고서 형식으로 기술된다." 나이로 보아 '긴 여정'을 남겨놓지 않은 작가의 데뷔작이지만, '굵은 여정'의 시발점으로 기록되기를 기대한다.

 

 

 

 

한편 한국문단의 가장 대표적인 늦깎이 작가 박완서(1931- ) 선생의 단편문학전집이 전 6권으로 문학동네에서 새롭게 출간됐다. "1999년 출간된 전집을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선보이는 개정판"으로 "초판에는 빠져 있던 1998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던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추가하여, 총 여섯 권으로 구성했"으며 "1971년 3월부터 1998년 11월까지 발표된 박완서의 단편소설들을 총망라했으며, 각각의 작품은 발표시기 순으로 나누어 실었다"고 한다.

1970년「여성동아」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의 경력이 올해로 서른 여섯 해이다(그간의 업적으로 몇달 전 작가는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설가로서 나이보다 중요한 것이 작가로서의 태도, 혹은 각오에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나이를 핑계삼는 문단/출판계 일각의 '계산'은 속좁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혹 그러한 계산이 요즘 한국문학의 독자들을 점점 말라붙게 한 것은 아닌가?). 문학의 신이시여, 그들의 소갈머리를 어찌해야 하옵니까?..

06. 09. 16-17.

 

 

 

 

P.S. 마흔도 멀지 않은 요즘 같아선 나도 소설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와 폴 오스터/크누트 함순의 <굶기의 예술>을 (다시) 읽고 정신을 차려야겠다. 그들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선 얼마나 강퍅해야 하며 굶주려야 하는가를 증언해주고 있으니까(기름기 좀 들어간 작가들은 다른 종의 소설가들이다). 하긴 네가 지금 배부른 처지냐고 하면 대답이 사뭇 궁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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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9-1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화로 나이를 확인'하다니. 참 잔머리라고 해야할지 나름의 고심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국외자가 보기에는 그저 '꼴깝'으로만 보이네요.

로쟈 2006-09-1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일이든 노골적으로 나오게 되면 좀 추해지지요...

니브리티 2006-09-2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소설이라... 로카드님도 전에 소설 쓰신다고 조금 올리신 적이 있는데.. 이번 문예중앙 시인들의 대담코너에서 이런 말들이 오가더군요..좀 다른 의미에서 동의하는 말이긴 한데, <장르는 운명이다>

로쟈 2006-09-21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는 묘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해소시켜 준 작가가 쿤데라입니다. 쿤데라의 소설을 좋아하면서 저도 언젠가는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지젝 스타일의 책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도 갖고 있어서 어느 것이 실현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욕심을 뛰어넘는 게 또한 게으른 일상인지라...

다크아이즈 2006-09-27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묘사적 강박을 주입시키는 경로들(각종 신춘문예나 메이저급 문학 잡지)을 극복하는 게 우선이겠지요. 지겹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나저나 '참을 수 없는~' 말고 쿤데라의 어떤 소설을 읽으면 그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한 권만 권해주세요.

로쟈 2006-09-2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쿤데라의 모든 소설이 그런 건데요... 소위 에세이적 소설, 성찰적 소설 류라고...

다크아이즈 2006-09-28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소설을 묘사와 산문적 성찰로 구분해서 말씀하신 거군요. 저는 묘사와 서술(이야기)로 구분할 때 우리 소설은 지나치게 묘사에 올인한다는 뜻이었어요. 이것이야말로 인문학자와 일반독자의 차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또 배우고 싶은 게 있어요.


양파와 문첸가 하는 제목으로 김훈에 대해 언급한 것 읽은 적 있는데(아직 카테고리 성격을 파악 못해 다시 찾아 읽으려니 못 찾겠어요.) 로쟈님 말씀으로는 김훈은 소설가보다 에세이스트로서 탁월하다, 뭐 이렇게 읽혔거든요. 그건 문체만 얘기할 때 그렇다는 것인지요? 즉, 쿤데라 소설이 묘사보다는 성찰이 우선한다는 전제를 두고 볼 때 김훈은 해당 사항이 없는 건가요? 그 미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문체만으로는 '쿤데라적 소설가'(제가 지은 말)가 되기에는 어림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김훈의 문체를 부러워하지만, 소설이나 에세이 두 편 정도만 읽어도 김훈적 문체가 너무 드러나는 바람에 뻔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제 질문의 요지는 김훈의 문체로는 쿤데라적 성찰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인가요? 왜냐면 김훈 보고는 에세이스트가 어울린다고 하고 쿤데라는 그 에세이적 성찰 때문에 뛰어난(?) 소설가라 하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 지금 생각난 건데 김훈은 감각(감성)적 에세이스트, 쿤데라는 철학적 에세이스트, 고로 철학적 에세이스트가 더 소설가에 합당하다, 뭐 이렇게 해석해도 되나요? 아휴, 골치 아파, 제 미흡한 독해를 해독해주세요. 요즘 로쟈님 서재 훔쳐보느라 미치도록 즐거워요. 그나 저나 언제 이 보물들을 완독할 수 있을지...

로쟈 2006-09-28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을 간추리면 김훈의 에세이가 쿤데라의 에세이적 소설과 뭐가 다른가쯤 될까요? 저는 쿤데라를 에세이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그가 비평적 에세이들도 썼지만). 그는 작가, 곧 소설가이지요. 거꾸로 저는 김훈을 소설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좀 과도한 주장이지요. 하지만, 그가 아직 3인칭 소설을 쓰지 못한다는 점에 기대에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들은 독백적이며 제겐 김훈 자신의 복화술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3인칭의 시점으로는 세계를 기술하지 못한다는 것. 그런 게 에세이스트의 운명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반면에 소설은 (바흐친에 기대어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대화적이고 대화적이어야 하지요. 다른 말, 다른 의식, 다른 이데올로기의 간섭과 혼종이 소설의 규정항입니다. 얘기가 너무 거창해지는군요.^^

다크아이즈 2006-09-29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접수 잘 했습니다. 에세이스트와 에세이적 소설이 이렇게 다른 거군요. 혼자 씨불이느냐,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상충이 있느냐에 따라... 왜 김훈의 소설(문장)이 빛나긴 했지만 지겨웠는지 감이 오네요.
 

 

 

 

 

로마 최고의 웅변가이자 정치가 마르쿠스 톨리우스 키케로의 <수사학>(길, 2006)이 번역돼 나왔다.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다룰까 했지만, 역자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길래 따로 자리를 마련한다. 키케로의 책으로 오래전에 출간된 <의무론>(서광사, 1989)와 작년 천병희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도서출판 숲, 2005) 정도를 꼽아두고 있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화술에 대한 책들이 그간에 더 출간돼 있었다. 양태종 교수의 번역으로 나온 <화술의 법칙>(유로서적, 2005), <화술과 논증>(유로서적, 2006)이 그것이다. '말하기의 규칙과 체계'란 부제를 달고 있는 <수사학>이 같은 책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얼마간은 겹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수사학에 관한 책들이 아주 드물진 않다. 박성창, 김욱동 교수의 입문서가 각각 <수사학>(문학과지성사, 2000), <수사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2002)로 출간돼 있고, 고전수사학과 수사학의 역사 등을 다룬 번역서들도 여러 종 나와 있다. 물론 아직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도 번역되지 않았으니까 사정이 '양호'하다는 말은 못하겠다. 더불어 서양 수사학의 고전들과 함께 리쾨르의 <살아있는 은유>(영역본은 <은유의 규칙>) 정도까지 출간되어야 어느 정도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

해서 갈길은 아직 멀다 하겠지만 이번처럼 역량 있는 전공자들에 의해서 고전들이 번역/출간된다면 먼길의 수고가 그래도 많이 덜어질 수 있겠다. 소개에 따르면 이번 책은 "그리스의 수사학 전통을 집대성한 수사학의 대가인 키케로의 책 <수사학 : 말하기의 규칙과 체계>를 분석하고 라틴어 원문을 함께 담았다. 사론이나 그릇된 내용을 현학적으로 수식한다는 편견을 넘어, 수사학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 체계로서 전달하고자 하였다."

눈에 띄는 건 책에 들인 공인데, "라틴어 원문과 현대어 해석과 더불어 상세한 옮긴이 주"가 달려 있는바, "일례로 비유법에서 알고 있는 은유, 환유, 제유, 아이러니 등의 기법을 실제 정확히 이용되도록 환유, 제유 등의 실례를 들고 그리스 로마의 학술 전문 용어에 대해서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또한 'stasis'를 '쟁점'으로 바꾸는 등 우리나라 어문학계에서 아직 수사학 전문 용어로 정착되지 못한 것을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시도하였다"니까 여러 모로 눈길이 가는 책이다. 게다가 아래 인터뷰 기사의 사진을 보니 안면도 있는 양반이 아닌가?(나이 들어서 오히려 젊어보이누만.)

경향신문(06. 09. 16) ‘고전문헌학’입각 키케로 원전 번역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서가 있다. 영어판이나 독어판의 ‘이중 번역’이 아니라 그리스어나 라틴어 원전 번역이다. 이쯤 되면 번역서로는 최상급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질문 한 가지. 과연 그 원전이 원저자의 저술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고전 문헌들이 원저자의 필체로 기록되지 않은 데다, 설령 그것이 원저자의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서양 고전문헌학은 ‘주어진 텍스트’를 ‘원전’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합니다. 모든 필사본을 수집해 이들 중 원전에 가장 가까운 것을 찾아내고, 다른 필사본과 비교해 오류를 바로 잡고 원전을 복원코자 하는 학문입니다.”



안재원 서울대 강사(38)는 국내 몇 안되는 ‘고전문헌학’ 전공자다. 최근 키케로의 ‘수사학’(도서출판 길)을 국내 최초로 고전문헌학의 원전 작업 방식에 입각해 번역했다. 한글 번역 아래에 라틴어 원문을 수록하고, ‘비판장치’(다른 판본들과의 비교)를 본문 밑에 넣었다. 또 옆 페이지에는 옮긴이 주를 상세하게 달았다. 이 때문에 원 텍스트는 40쪽 정도지만 번역서는 400쪽이 넘는다. 이처럼 지난한 작업을 자처한 것은 “이제 우리도 우리의 원전을 갖자는 노력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독일·영국·프랑스 등은 그리스·로마 고전의 부활을 외치면서 그들만의 시각으로 원전에 접근했고, 이는 그들 각각의 문화적·사상적·이념적인 고유성과 독창성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정본 텍스트에 대한 주석 작업을 통해 우리 문화의 고유성과 독창성을 모색하자는 거지요.”

그는 “원전 번역 같은 기본적인 것이 안된다면 인문학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 원전’들과 그에 대한 지식들이 쌓이면 그것이 우리 사회의 ‘아이덴터티’를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인문학이 ‘수입학문’이라고 하는데 이런 작업을 용기내 해보면 더딘 작업과정 중에 그들보다 나은 시각과 깊이를 가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고전문헌학은 글자 하나하나의 해석에 매달린다는 점에서 ‘미시 진리(micro veritas)’를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 해석 하나 하나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작업이다. “조그마한 미시 진리가 결국 거시 진리와 연결됩니다. 우리 사회는 거대 담론에 강하지만 과연 그것이 구체적인 대안들을 만들어 냈습니까. 거대 담론 하는 것도 좋지만 겸손하게 텍스트를 잘 번역하고 주석을 잘 다는 작업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왜 ‘키케로’이고, ‘수사학’일까. 키케로는 단지 빼어난 연설가나 정치가가 아니라 그리스 정신과 사유세계를 서양 사회에 ‘번역’한 인물이고, 보편시민이 가져야 할 덕목을 강조한 인문학자였다. 키케로가 말한 수사학도 단순히 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수사학은 한 인간이 공동체에서 어떤 입장과 언어 표현을 가지고 갈등을 조율할 것인가에 대한 학문입니다. 이는 보편교양인으로서의 시민사회와 연결됩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시민사회의 진입로에서 개인들이 갈등하고 투쟁하고 있지만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요. 이런 의미에서 키케로와 수사학은 지금의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다른 길이 없겠다. 논술과 함께 웅변도 입시과목에 집어넣는 수밖에.)

06. 0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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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De 2008-12-23 21:58   좋아요 0 | URL
양태종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것과 안재원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것은 키케로의 같은 텍스트입니다. partitiones oratoriae (연설의 부분 쯤으로 번역할 수 있겠네요). 이 책에서 분명하게 밝히기를, 양태종 선생님은 독어본을 번역한 것이라고 하네요. 서양 고전학적 안목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쉬웠다고 했습니다. 같은 텍스트를 번역한 것입니다.

로쟈 2008-12-23 23:4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실물을 확인해보지 못해서 긴가민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