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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영화 <리턴>(2003)이 9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어 제목을 따서 '리턴'이라고 붙인 모양인데, 제목 자체는 <러브 오브 시베리아>만큼이나 짜증스럽다. 집을 나간 뒤 아무 소식이 없다가 12년만에 귀환한 아버지와 두 아들 사이의 대면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므로 그냥 우리말 '귀환'이나 그 언저리에 있는 제목을 붙이는 게 타당했다('리턴'이라고 붙이면 관객이 더 드나?). 

 

영화는 여하튼 지난번에 소개된 러시아 영화 <러시안 묵시록>과는 레벨이 좀 다르다. 감독 즈뱌긴체프(1964- )의 데뷔작이면서 2003년도 최대의 문제작이었고, 그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기도 하다(영어 표기를 음역해서 '즈비야긴체프'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즈뱌긴체프'가 맞다). 재작년 모스크바 체류시 TV에서 영화와 함께 메이킹 필름을 부분적으로 보았던 기억이 있다. 비디오CD를 갖고 있는데, (지난여름을 아쉬워 하는 의미에서)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을 본 다음에 언제 시간을 내야겠다.

이 영화의 개봉소식은 아침에 이번주 <필름2.0>을 사서 읽다가 접하게 된 것인데 마침 티켓링크에서 소개기사를 제공하고 있기에 옮겨놓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개봉 이후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하겠다. 가능하다면... 

티켓링크(06. 08. 29) <리턴> - 성장의 아픔에 관한 끔찍한 우화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사는 형제 안드레이(블라디미르 가린)와 이반(이반 도브론라보프)은 12년 만에 갑자기 집에 돌아온 아버지(콘스탄틴 라브로넨코)와 마주하게 된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어색한 두 형제는 아버지와 친해지기 위해 낚시여행을 떠나지만,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아버지와 친해지는 것이 쉽지가 않다. 12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하는 것 치고는 너무나 친절하지 않아서 진짜 아버지가 맞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러는 사이 형 안드레이는 아버지에게 묘한 유대감을 느끼지만, 동생 이반은 자신을 꾸짖기만 하는 아버지가 밉기만 하다. 본래 목적은 사라지고 미움과 갈등만이 남은 세 부자의 여행은 계속되고, 아버지는 무엇을 하려는 심산인지 인적이 없는 섬으로 두 아들을 데려간다.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즈비야긴체프 감독의 데뷔작 <리턴 The Return>은 무시무시한 성장드라마다. 어머니 밑에서 자라던 두 형제 앞에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존재는 평온했던 삶을 뒤흔들어 혼란을 가져오는 테러리스트에 가깝다. 가족을 떠나있던 12년에 대해서 어떤 설명조차 해주지 않고(*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나로선 소비에트 해체 이후 '12년'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부재의 시대), 그저 자신의 목적과 방법대로만 여행을 강요하는 아버지는 이미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듯 보인다. 그래서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반기를 드는 말썽쟁이 동생 이반에 비해 아버지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형 안드레이의 모습이 더 유약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는 두 형제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워주는 조력자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웅덩이에 빠진 자동차를 빼내는 방법이나 배의 노를 젓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형제는 폭력과 질타를 일삼는 아버지에게 대들거나 순응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의지를 시험받는다. 마침내 아버지와의 갈등이 최고치에 달했을 때, 형제는 감당하기 힘들만큼의 끔찍한 비극을 마주하게 되고 아버지와 함께 왔던 길을 홀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리턴>이 보여주는, 아직 여리기만 한 마음 한구석을 섬뜩한 칼날로 도려내는 성장의 고통은 아버지를 죽여야했던 오이디푸스의 그것과도 닮아있다. 2003년 베니스영화제는 이 외면하기 힘든 한 편의 '끔찍한 우화'에 황금사자상을 선물했다.

HOT  우리에게 낯선 러시아 영화지만 <리턴>이 주는 재미는 적지 않다. 특히 악동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갖춘 이반 도브론라보프의 매력적인 연기가 쏠쏠한 웃음과 진한 감동을 이끌어낸다.

COLD 등장인물이 적고(영화 중반부터는 세 명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건의 진폭이 작아서 흥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듯.

06. 08. 28.

P.S. 참고로, 러시아 관객의 지적에 따르면, 영화속 아버지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변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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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 알바 주연의 영화 <슬리핑 딕셔너리>(2002)의 배경은 1930년대 영국의 식민지 말레이시아의 사라와크 섬이다. 아버지의 유업인 원주민 계몽사업을 위해 영국군 청년장교 존이 섬에 오게 되는데, 총독은 그에게 원주민 최고의 미인인 셀리마(알바)를 ‘슬리핑 딕셔너리’로 붙여준다.

‘슬리핑 딕셔너리’란 주인과 잠자리를 함께 하며 원주민 언어를 가르치는 여자를 가리키는데, 존은 자신의 신념에 어긋난다면 거부하지만 곧 셀리마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며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영국과 원주민 양편에서 환영받지 못하며 법적으로도 금지돼 있다. 이들의 사랑은 과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번역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폴 리쾨르의 <번역론>(철학과현실사, 2006)과 함께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해설’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더글러스 로빈슨의 <번역과 제국>(동문선, 2002)를 읽다가 문득 떠올리게 된 생각은 텍스트간(더 나아가 ‘문화간’) 번역의 중재자로서의 번역자(혹은 통역자)의 위치와 운명이라는 게 바로 ‘슬리핑 딕셔너리’의 그것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비교불가능한 것을 비교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등가성의 창출을 주된 임무로 하면서 동시에 잠자리도 제공해주는 하녀! 

그러한 생각이 연이어 떠올리게 한 건 번역의 ‘일반론’을 제시하고 있는 리쾨르의 <번역론>이 지닌 ‘특수성’이다. 그의 지적대로 ‘이국적인 것의 시련’과 ‘비교불가능한 것의 충격’이 번역의 대전제이지만, 리쾨르는 언어 내적 번역을 외적 번역 못지않은 의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격상시킴으로써 그러한 시련/충격을 흡수해버린다: “(내적 번역에서처럼) 이렇게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외국어를 번역하는 번역자가 하는 일이다.”(121쪽) 이로써 “(언어) 내적 번역과 언어 외적 번역 간의 가교가 이루어진다”고 리쾨르는 주장하지만, 포스트식민주의의 맥락에서도 그러할까?


로빈슨이 간결하게 정의한바 “포스트식민주의는 지리적/언어적 전치와 지배와 복종으로 서로 얽혀 있는 동력에 의해 야기된 심리/사회적 변형들인 통문화적 권력을 바라보는 방식이다.”(29쪽) 하면, 문제는 단순하게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않을까? 가령, “어떻게 멕시코의 스페인어로 씌어진 텍스트를 미국 영어로 다시 써서, 가난한 제3세계 국가의 구성원에게 지니는 의미를 지구상의 가장 부유한 나라의 구성원에게 같은 의미로 전달할 수 있는가?”(47쪽)


또한 “우리에게 빵을 달라!”라는 시위대에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고전적인 사례는 번역의 문제가 언어 내적 번역에서도 단순하지 않음을 시사해준다. 번역이 다루는 것은 단순히 문화적 관계뿐만이 아니라 지배/복종의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국제관계가 국가들간의 (이념적으로)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인 것과 마찬가지이다(FTA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도 다 그런 이유 때문 아닌가?).

 

세계는 평평한 듯 보이지만, 거기엔 굴곡이 있고 보이지 않는 곡률이 작용한다. 그리고 그걸 평평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힘은 균등하게 분배돼 있지 않다. 그렇다면, 텍스트번역에서건 문화번역에서건 번역은 불가능한가? 그건 아니다. 리쾨르에 따르면, “번역은 이론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하나 실제로는 수행 가능한 작업”(100쪽)이다.


다만, “번역 작업은 이국적인 것에 대한 공포와 증오로 발생하는 내적 저항을 물리치고 이루어진 회상의 작업”이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번역이라는 이상 자체를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애도의 작업”(118쪽)이라는 것을 승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때 번역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며, “이국성을 가진 이방인과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독자”(117쪽)가 그 두 주인이다. 번역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독자를 저자에게 데리고 가는 이국화/외국화(foreignizing)와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자국화(domesticating)가 번역의 두 가지 양태이다.


포스트식민주의 번역론에 따르면, 이때의 저자와 독자는 추상적인 무국적자가 아니다. “문화의 번역불가(능)성은 가장 첨예한 문제이지만 동시에 경계 지역에서는 실제 해결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즉 그 국경의 양측에 걸쳐 있는 ‘멕시코인들’(그리고 몇몇 ‘북미인들’까지도)은 두 개의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고, 그 다양한 구성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들의 경험을 양쪽 언어로 번역한다.”(47쪽) 역설적이지만, 이렇듯 “이론적으로는 어렵고 고된, 그러나 실무적으로는 쉽고 순조로운”(리쾨르, 100쪽) 것이 번역 작업인 것이다. 더 나아가 번역은 우리의 일상이기까지 하다.

 


번역의 신화적 기원으로서 흔히 ‘바벨 이후’를 거론하지만,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그 역사적 기원으로서의 ‘바빌론 유수 이후’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다가 하느님께 징벌을 받아서 각기 다른 말들을 하게 됐다는 것이 ‘바벨 이후’가 뜻하는 바라면, 바빌로니아가 유대왕국을 정복한 뒤 유대인들을 강제로 데려가 바빌로니아에 억류시킴으로써 언어가 다른 이민족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다른 말들을 배우게 됐다는 것이 ‘바빌론 유수 이후’가 의미하는 바이다. 이것은 곧 ‘디아스포라’(이산)의 기원이기도 하다.

 

번역의 역사적 기원이 암시해주는 것은 최초의 번역적 상황이라는 것이 항상 제국의 정복/점령과 그로 인한 권력의 분화, 그리고 이산의 문제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로빈슨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제국의 정복자들은 새로운 신민들과 의사소통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종속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계발하여 순응적이거나 ‘협력하는’ 신민으로 변모시켜야 했다. 제국으로서 번역의 역사에 대한 초기의 관심 영역 중 하나는,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지인 사이를 매개할 수 있는 통역가들의 선발과 훈련이었다.”(22쪽) 이것이 바로 ‘슬리핑 딕셔너리’의 탄생 배경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다 확장해서 말하자면, “전체 포스트식민 세계가 번역의 장으로 계속해서 간주되어야만 한다. 이 맥락에서 번역은 하나 이상의 국가 혹은 지역 문화와 관련된 문화적/언어적 재능을 지닌 소수의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언어 텍스트의 의미상 전달은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 의사소통의 기초이다. 이렇게 번역은 처음으로 번역을 형성해준 식민 권력의 분화에 계속해서 참여하는 것이다.”(49쪽) 물론 이러한 참여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번역에 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관점을 요약하자면, (ⅰ)번역은 식민화의 채널로서 교육에 필적하며, 교육과 연관되고, 제도와 시장의 명백한 혹은 숨어 있는 통제를 받는다, (ⅱ)번역은 식민주의의 붕괴 이후 계속된 문화적 불평등을 위한 피뢰침이다, (ⅲ)번역은 탈식민화의 채널이다(51쪽)가 된다. 여기서 핵심은 번역이 식민화의 채널이면서 동시에 탈식민화의 채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리쾨르가 시도하고 있는 ‘번역에 관한 철학적 성찰’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번역과 번역행위에 대한 이러한 인류학적 성찰, 정치적 성찰이다.

 

<슬리핑 딕셔너리>에서 존과 셀리마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며 영국군과 원주민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에서 존은 자신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셀리마와 재회하게 되며 둘은 서로의 사랑을 다시 확인한다. 이 정념론적인 차원의 확인은 번역의 관점에서 윤리적인 차원으로까지 승화된다. 리쾨르가 제안하는바, “두 주인을 섬기려다가 두주인을 모두 배신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가는 것, 혹은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것은 결국 언어적 환대를 실행하는 것”(119쪽)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속에서 셀리마는 존(영국)과 자기 부족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려다가 두 주인 모두를 배신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 아닌가? 무엇 때문에? ‘(언어적)환대’의 요청 때문에. 그러한 환대의 공간은 지리적으론 접경지대이며, 사회적으론 교통공간이고, 문화적으론 혼합공간이며 인종적으론 혼혈공간이다(셀리마는 혼혈이다). “이국의 언어를 모국어라는 자신의 집에 맞아들임으로써 타자의 언어를 체험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리쾨르, 89쪽)으로서의 번역은 그러한 공간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행복한 도전’이다. 더불어, 그것은 디아스포라의 공간에 처한 이주민들이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필사적인 모험이기도 하다.    

 

 

 

 

 

하면,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박상익,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지적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뼈아프다. 번역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행복을 위해서도, 생존을 위해서도 너무 안이한 것 아닌가?..

 

06. 08. 27.

 

P.S. 이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본래는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 대한 서평을 기획했었지만, 너무 '뻔한' 얘기들만 늘어놓게 되어 8매 정도를 쓰다가 접었다. 그리고는 결들여서 쓰고자 했던 리쾨르의 <번역론>과 로빈슨의 <번역과 제국>을 중심으로 구도를 다시 짰다. 로빈슨의 책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긴 하지만, 정독할 만한 성격의 책은 아니다.

 

리쾨르의 <번역론>은 읽어볼 만하지만,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를 던져주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국역본의 편제는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순한 본문에 비하면 너무 장황하다싶은 해제 '논문'이 책의 성격을 딱딱하게 만들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사실 본문의 각주들도 미주로 돌리는 게 가독성을 위해서는 더 좋았을 것이다) 교정상의 실수들도 적지 않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85쪽의 역주18)에서 낭시의 책은 <경계의 미학>이 아니라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이며, 128쪽 역주23)에서 첼란의 시집 <죽음의 푸가>는 문학과지성사가 아니라 청하출판사에서 나왔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건 전영애 교수의 첼란 연구서(학위논문)인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이다. 그리고 앙리 메쇼닉에 대한 각주는 같은 내용이 해제(53쪽)와 본문(154쪽)에서 반복되고 있다. 85쪽 역주19)에서 "도야는 독일 신인본주의에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한 사명으로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는데..."라는 건 교정이 안된 문장이다. 117쪽에서 "이국성을 가진 있는 이방인과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독자가..."도 마찬가지이다. 71쪽 역주3)에서는 벤야민의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기술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오기됐다. 그리고, 62쪽에서 '각주(各主)'의 한자는 엉뚱하다. '각주(脚註)' 아닌가?

 

여하튼 이런 실수들이 공들인 번역에도 불구하고 책이 조급하게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분량에 비하면 저렴한 책도 아닌데, 좀더 세심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건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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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6-08-28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어요. 번역과 슬리핑 딕셔너리가 겹쳐지는 부분이 교묘하네요. 언어적 환대와 육체적 접대를 동시에 제공하는 주체들이 저 바벨의 성 주변에는 아주 많았겠군요. (바벨 그림도 무지 멋집니다.^^)

로쟈 2006-08-28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히 인상에 남는 영화는 아니지만, 글이 딱딱해질 거 같아서 집어넣어본 거죠. 사실 번역이란 게 허드렛일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기도 하구요...

푸른괭이 2006-08-2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선정적이네요(=재미있네요) ㅋㅋㅋ 실상, 번역이라는 것 자체는 허드렛일 정도가 아니라 거의 '고문'인데...

은라라 2011-08-3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환대라는 의미가 와닿ㅈ 않네요. 중요한 키워드 같은데요.
누군가를 환대한다 에 나오는 '환대'를 말씀 하신 것 맞지요.
그리고 번역을 허드렛일 일이라고 하는 건.. 좀
번역 자체는 초고의 지성인(모든 책은 아니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봐요.
허드렛일로 만드는 시스템이 문제지요
 



 

 

 

러시아의 사상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국역본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을 해설한 책이 '세계를 뒤흔든 선언' 시리즈의 여섯번째 책으로 출간됐다. 책이 나온 건 지난주이고, 나는 몇 가지 이미지들을 챙겨놓았었지만, 외부 리뷰들을 참조할 수 없었던지라(더불어 옮겨올 수도 없는지라)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알라딘의 소개를 참고로 해서 몇 개의 이미지 정도만을 띄우도록 한다. 저자는 이미 아나키즘 관련 문헌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하승우씨이다.

"러시아의 사상가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쓴 아나키즘의 고전 <상호부조론>은 당시 유행하던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나온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 사회발전의 원리라는 사회진화론적인 논리에 대항하면서 아나키즘의 당위성을 세운 저서로,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이다." 일제하 한국의 아나키즘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러시아의 귀족 출신인 크로포트킨은 역사, 과학 등에 박식한 지식인이기도 했지만 귀족의 작위를 버리고 인민들에 대한 애정을 보인 혁명가의 면모를 가진 아나키스트이기도 했다. 그런 크로포트킨이 사회진화론의 논리에 맞서 내놓는 개념은 '상호부조'이다. 생존경쟁이나 적자생존이 아니라 협력과 연대에 기초한 '상호부조'가 인간사회의 이끌어온 힘이었으며, 그 힘은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을 동물학, 역사학, 인류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증명한다." 아래는 러시아에서 출간된 크로포트킨 선집이다. 제목이 <아나르히야>로 돼 있다. '아나르히야(αναρχία)'는 '아나키(anarchy)'의 그리스 어원이다 



"책은 크로포트킨의 삶과 <상호부조론>으로 촉발된 아나키즘 운동의 역사 전반을 짚으면서, 그의 사상이 한국 아나키즘운동과 맺는 관계에도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의 강한 엘리트가 살아남아 약자를 지배한다는 주장에 반박하는 <상호부조론>은 당시 식민 상태에 있던 한국인들에게 식민지 침략을 반대하는 근거로서 굉장한 매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해방 전후의 아나키즘 운동의 맥락을 새로이 복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아나키즘에 관해서는 이전에 관련서들을 훑어본 바 있어서 따로 다루지 않는다. 아나키즘 또한 여러 이론과 운동의 분파를 거느리고 있는데, 최근에 강세를 보이는 건 생태주의와 결합된 아나키즘인 듯하다. "상호부조의 전통에서 아나키즘의 정당성과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는 한편, 비폭력적인 투쟁을 지지하는 크로포트킨의 사상에서 테러리스트로 지목받곤 하는 아나키즘에 대한 일반의 오해를 풀기도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 신자유주의 반대운동 등을 통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아나키즘의 그림자를 만나볼 수도 있다." 아래는 크로포트킨의 저명한 자서전(재작년 모스크바대학 구내 헌책방에서 구한 책이다). 러시아어 제목은 <한 혁명가의 수기>이다.

매트 리들리가 쓴 <이타적 유전자(원제: 미덕의 기원)>(사이언스북스, 2001)에 보면 프롤로그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게 이 크로포트킨 공작의 탈출기이다. 1876년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차르의 감옥에서 탈출한 사건이야말로 크로포트킨의 살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는데 리들리는 이렇게 덧붙인다.



"오랜, 아주 오랜 세월 뒤에도 탈옥수는 자신의 자유가 손목시계를 넣어준 여자와 바이올린을 연주한 여자, 마차를 몬 동료와 마차 뒤에 앉아 있던 의사, 그리고 마차가 도주하는 동안 길이 막히지 않게 도와준 여러 친구들의 용기 덕택이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의 탈옥은 동지들이 힘을 모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기억은 그의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 오랜 세월 후에 인간의 진화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점화시키도록 예정되어 있었다."(11쪽) 그 '인간의 진화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란 게 바로 '상호부조론'이었던 것(그러니 '상호부조론의 기원'이라 할 만하다). 아래는 리들리가 참조한 <크로포트킨 평전>(1950)과 영역본 <상호부조론>.



요컨대, 우리가 서로 돕는 존재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한번쯤 '빵'에 가봐야 하고 또 거기서 '탈옥'해 봐야 하는 것. 물론 빠삐용처럼 탈출하면 안되고 반드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탈옥해야 한다. 덧붙이자면, '광복절 특사' 같은 걸로 나오는 것도 곤란하다. 아나키스트가 되는 대신에 내셔널리스트가 되지 않겠는가?..

06. 08. 27.

P.S. 성공한 탈옥을 다룬 영화로 기억에 남는 건 베아트리스 달이 주연한 영화 <샹떼>(1992)이다. 영화에서 베아트리스 달이 수감돼 있는 남편을 탈출시키기 위해 마차를 몬 게 아니라 헬기를 몰았다는 게 크로포트킨의 경우와는 좀 다르다고나 할까(아니면 이건 그냥 '부부부조론'의 사례에 불과한 걸까?)...



P.S.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의 저자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6. 09. 09) “아나키즘은 무정부 아닌 공동체”

-'아나키즘(anarchism)’은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된다. 그 어원(語源)인 그리스어 ‘아나르코스(anarchos)’는 ‘지도자가 없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들’을 뜻한다. 아나키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나키즘 하면 ‘무질서’ ‘혼란’ 같은 단어들을 떠올린다.



“아나키즘은 결코 질서 없는 사회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크로포트킨을 봐도 무정부가 아니라 코뮨(공동체)과의 연대를 말했고, 분별 없는 테러리즘을 비판했어요.”

-하승우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36)는 최근 펴낸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그린비)을 통해 아나키즘에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걷어낸다. 아나키즘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한 표토르 크로포트킨과 그의 저서 ‘상호부조론’을 중심으로 아나키즘 운동의 역사를 되짚고, 그 현재적 의미를 살폈다.

-<상호부조론>은 인간사회를 이끌어온 힘이 적자생존이나 생존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연대에 기초한 상호부조라고 주장한다. ‘사회진화론’이 갈등과 경쟁만을 강조함으로써 강자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반대했다. 하교수는 “당시 사회주의조차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에 주목하고, 사회진화론을 극복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힘을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무정부주의’와 ‘테러리스트’라는 오해와 비난 속에 역사에서 점점 사라졌다. 서구에선 지배층의 탄압과 볼셰비키의 성장으로 세력을 잃어갔다. 사정은 국내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분단, 한국전쟁, 군부독재를 겪으면서 쇠퇴했다.

-아나키즘은 최근 들어 관심을 받고 있다. 그가 책머리에서 밝혔듯이 ‘사회가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하면 할수록 ‘푸른 초원을 힘차게 질주하는 야생마의 자유로움’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마음 한 구석에 몰래 남겨뒀던 사람냄새 나는 공동체’를 소환한다. “우리 사회가 ‘20대 80의 사회’로 간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같은 사회를 꿈꾸지는 않을 겁니다. 모두들 냉혹한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대안을 찾고 있는 겁니다.”

-현실화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아나키즘은 단순한 이상이 아닐까. 그는 “아직 큰 물줄기를 이루지 못했을 뿐이지 아나키즘은 현실에서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풀뿌리민주주의운동, 신자유주의반대운동, 대안공동체운동, 생태주의운동 등은 아나키즘의 명칭을 달고 있지는 않지만 그 근본정신은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 사회는 새로운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1987년 이후 사회운동세력은 위에서 아래로의 조직화 노선을 걸어오면서 자기체계를 갖춰갔지만 권위적, 관료적 노선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나키즘은 그 같은 방식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아나키즘은 또 기존 사회 흐름의 반대 방향에서 그 대안을 고민토록 하고 있습니다. 아나키즘이 현대사회의 ‘대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진지한 화두는 던질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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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괭이 2006-08-28 15:19   좋아요 0 | URL
혹시 <크로포트킨스캬> 역시, 저 양반의 이름을 딴 건가요?

로쟈 2006-08-28 16:20   좋아요 0 | URL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지난번에 소개한 사라 케이의 <슬라보예 지젝>(경성대출판부, 2006)을 어제 받았다. 이달말쯤 배달되는 걸로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배송되었다. 덕분에 나의 '가을'이 좀 일찍 시작되었다. 하긴 내일모레면 이미 '새학기'가 아닌가? 문학과 여성을 주제로 한 강의들을 맡은지라 지젝의 몇몇 책들을 재독하며 정리해둘 필요성을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느낌만으로 뭐가 될 리는 만무하고 책을 손에 잡을 여가를 그간에 갖지 못했다.

다급한 처지에 '요약정리'라도 미리 읽어두기 위해 펼쳐든 것이 <슬라보예 지젝>이다. 책의 4장이 '성차이의 실재계'이기 때문이다. 한데, 조금 읽다가 곧 주마간산으로 뒤적거리게 됐다. 어제 서문을 읽으면서 번역본이 별로 미덥잖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원서를 참조하지 않는다면 낭패를 볼 만한 대목들이 자주 눈에 띄어서이다. 그런 걸 몇 가지 지적하기 전에 먼저 번역본이 다소 무성의하다는 걸 꼬집고 싶다. 혹은 교만하다고 해야 할까? 다른 게 아니라 그간에 출간된 지젝 번역서들의 제목이나 내용이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런데 특이한 건 이 무성의/교만이 비일관적이라는 것이다. 역자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삐딱하게 보기>, <향락의 전이>, <까다로운 주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등의 번역은 기존의 번역서명을 갖다 쓰면서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그들은 그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로,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는 <너의 증상을 즐겨라>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은 <항상 라깡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물어보지 못한>으로, <진짜 눈물의 공포>는 <진정한 눈물의 공포>로, <환상의 돌림병>은 <환상의 역병> 등으로 다르게 옮겼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대신에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옮기는 게 타당하지 않다는 점뿐만 아니라(나는 두번 읽어봤지만 책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오역으로 범벅돼 있는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도 제목이 참조된 걸로 보아 여기에 특별한 '규칙'이 적용되는 것 같지는 않다. 말 그대로 임의적인 것이다. 역자는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도 국역본 제목인 <앙띠 오이디푸스>를 취하고, 버틀러의 책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도 제목을 그대로 갖고 오는 것으로 보아 말 그대로 '랜덤'이다.

그리고 인명 표기의 경우 'Lacan'은 가끔씩 '라캉'이란 표기도 나오지만 대부분 '라깡'으로 통일시키고 있는데, 그게 '원칙'이라면 'Foucault'는 왜 '푸꼬'가 아니라 '푸코'이고, 'Guattari'는 왜 '가따리'가 아니라 '가타리'이며, 'Althusser'는 '알뛰세'가 아니라 '알튀세'일까?(그런 한편으로 '쥬디스 버틀러'는 '쥬디쓰 버틀러'로 표기됐다.) 또 지젝의 동료이자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주요 멤버인 'Mladen Dolar'는 어떤 표기 규칙에 의해 '믈라덴 돌라르'가 아닌 '밀러던 돌러'로 표기되는 것일까? 내가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냥 임의적이란 것. "모두가 번역자 맘이다!"

그러니 나의 참견은 좀 주제넘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독자의 맘 혹은 구매자의 맘이란 것도 함부로 무시할 건 아니라는 뜻에서 몇 마디 참견을 보탠다. 내가 잠시 들여다본 페이지들에 국한하자면, 먼저 133쪽에서 "그러나 그는 페니스(penis)와 남근(phallus)의 차이점에 대해 개의치 않기 때문에 종종 둘을 혼돈한다"라고 옮겼는데, 페니스/남근의 이분법을 택한 것은 역자의 권리이지만, '혼동한다'를 '혼돈한다'로 적은 것은 오류이다. 그런데, 이러한 혼동은 역자 자신의 것이기도 해서, 분명 역자후기에서는 'enjoyment'를 '향락'으로 'pleasure'를 '쾌락'으로 번역했다고 설명해놓고 있지만 상당수의 'enjoyment'는 그냥 '쾌락'으로 옮겨졌다(가령 <까다로운 주체>의 부제인 '정치적인 요소로서의 쾌락Enjoyment as a Political Factor'). 그런 차이점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인가? 

"사실 지젝은 성 인식이라는 사회적 내용에 비교적 무관심한 편이다"에서도 '성 인식'은 (좀 놀랍게도) 'gender identity'의 번역이다. '성 인식'과 '성 정체성' 사이엔 그래도 개념상 얼마간의 차이가 가로놓여 있는데, 역자는 그런 데 비교적 무관심한 편이다. "마찬가지로 여자를 일반화하려는 모든 시도가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보편성에 대해 도전하는 것은 여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란 문장에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보편성에 대해 도전"한다는 표현은 "challenging the universal as non all"을 옮긴 것이다. 여기서 'non all'(흔히는 'not all'로 영역되는데)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옮긴 건 역자의 부주의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게 '무지'가 아니라 '부주의'인 것은 몇 페이지 뒤인 138쪽에서 "그러므로 이것은 여성적인 전부가 아닌 것(non-all)을 나타낸다"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면 '무성의하거나 부주의하거나'로 정리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은 '논증불능(undecidability)'(138쪽)인 것일까?('결정불가능성'으로 옮겨져야 한다.) "어떻게 실제로 경험된 보편성이 특수한 현실이 되는가라고 지젝은 묻는다."(133-4쪽)도 역자에게 묻고 싶은 문장인데, 원문은 "How, he asks, is the universal experienced as a lived, particular reality?"이다. "어떻게 보편성이 살아있는, 개별적인 현실로서 경험되는가, 라고 그는 묻는다."란 뜻 아닌가? 여러모로 영문학 전공자의 번역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다(교양과정부 학생들의 번역인가?).

 

 

 

 

사실 서문에서부터 몇 가지 암시/단서는 이미 주어졌었다. 저자 사라 케이가 '지젝 연구'의 창시자로서 엘리자베스 라이트와 에드먼드 라이트 부부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서문은 시작되는데(엘리자베스 라이트의 책들은 언젠가 소개한 바 있다), "<지젝 독본>과 그들이 편집한 지젝에 관한 <문단>은 통찰력과 권위를 가지고 이 미개척 분야의 서막을 열었다."(7쪽)고 한 대목에서 '문단'은 'Paragraph'란 원어가 병기돼 있지만 잡지명으로서 고유명사이기에 그냥 '패러그래프'지라고 해야 했다.

참고문헌에 나오지만, 라이트 부부는 패러그래프 지 24호(2001)의 슬라보예 지젝 특집호를 같이 편집했던 것이고, 그것이 <지젝 독본The Zizek Reader>(Blackwell, 2001)과 함께 '지젝 연구'의 서막이 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지젝에 관한 <문단>"이라고 모호하게 옮길 게 아니라 "지젝에 관한 <패러그래프>지의 특집호"라고 옮기는 게 나았다.    

저자 사라 케이는 그 자신이 밝히고 있지만 불문학자이자 중세문학 연구자이다: "중세 연구가로서 살아있는 사람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 적어도 우리말 독자들에게까지 공유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왜? "비록 이와 같은 책을 쓴다는 바로 그 행위가 지젝 본인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라는 걱정이 들지만, 라깡은 그의 통찰력을 저지시키고 그로 인해 그를 망쳐놓으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했다."(8쪽)

인용문의 원문은 "Lacan resisted all attempts to arrest and therby stultify his insights."이고, '저지시키다'로 옮긴 'arrest'는 문맥상 이런 류의 '입문서'를 쓰고자 하는 시도를 가리킨다. 라캉은 그런 류의 시도들에 저항했다는 것. 다시 말해서 라캉은 입문서를 쓰기가 어렵고(폴리티 출판사의 이 시리즈 목록에 '라캉'은 아직 포함돼 있지 않다), 견적도 잘 안 나온다는 얘기겠다. 거기에 비하면 지젝은 그래도 양반이라는 것. 하지만, "그의 통찰들을 엉성하게 포획함으로써 결과적으론 망쳐놓으려는 시도들"이 어찌 저지들만의 것이겠는가.

애초에 폴리티 출판사측으로부터 지젝에 관한 책을 청탁받고 케이 교수는 자신이 저자로서 부적합하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전공이 프랑스 중세연구인 나는 그런 일에 결코 알맞은 인물이 아니(었)다.(A French medievalist by profession, I might seem the last person in the world to take it on.)"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Which is precisely why, on reflection, I did so."

역자는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내가 그 일을 맡았던지"라고 옮겨놓았는데, 거꾸로 아닌가? "돌이켜보건대, 바로 그것이 내가 그 일을 떠맡은 이유이다." 왜? 뒤이어 <삐딱하게 보기>에서의 <리처드 2세> 인용을 저자가 재인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부적합하 듯 보이는 유리한 지점"이 지젝의 작업에서 보다 분명한 형태를 식별해낼 수 있는 좋은 지점이라는 걸 입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니, 내가 읽기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내가 그 일을 맡았던지"라는 토로는 저자의 것이 아니라 역자의 것이다. 그걸 독자의 반응으로 옮기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그가 그 일을 맡았던지." 이 책의 번역 또한 영문학 전공자가 아닌 중세 불문학 전공자가 맡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06. 08. 26.

 

 

 

 

P.S. 덧붙이자면, 사라 케이의 입문서는 토니 마이어스의 책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을 뽐낸다. 국역본에는 옮겨져 있지 않지만, 원서의 뒷표지에 보면 조운 콥젝과 맬컴 보위 같은 저명한 정신분석/라캉 연구자들이 격찬을 보내고 있다(보위는 "이번엔 지젝이 사라 케이에 관한 책을 씀으로써 보답하기를 기대해본다. 케이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까지 적었다). 좀더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서가 나오지 않은 것이 거듭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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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러시아 인터넷 서점(전공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서점은 '오존'이다)에 주문했던 책들을 소포로 받았다. 정확히 4주 정도가 소요됐는데, 내심 오늘 책을 받았으면 했는지라 배달된 책들이 반갑고 기특했다(그래서 이런 페이퍼까지 쓰는 것 아니겠는가). 내친 김에 러시아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늘어놓는다(아래 사진은 우리의 교보문고에 해당하는 모스크바의 '돔 끄니기', 직역하면 '책들의 집').

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러시아책들은 대략 주문 접수 후 발송까지 2-3주의 기간이 소요되고 실제 배송에 8-10일 가량이 소요된다. 이번에 받은 책들은 8월 17일자 소인이 찍혀 있는데, 8일만에 받을 수 있었으니까 상당히 양호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대신에 발송까지 걸린 기간이 거의 20일이었다. 그건 한꺼번에 책주문을 할 경우 발송대기까지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책들이 한두 권은 있기 마련이어서이다.

아마존 같은 미국서점과의 차이는 배송료를 건수가 아니라 책의 무게로 문다는 것. 그러니까 여러 권을 주문할수록 배송료 부담은 더 줄어든다. 이번에 주문했던 책은 모두 6권인데, 책값은 대략 55,000원이었고 배송료는 13,000원 가량이 들었다. 무거운 책이 없긴 했지만, 건당 9,000원 가량 하는 아마존의 배송료에 비할 바가 아니다.

Деррида за 90 минут

두 권의 전공관련서를 제외하면 오늘 받은 책들은 지난달에 검색하다가 발견한 데리다의 신간들과 벤야민의 책이다. 간단하게 소개하면, 먼저 <90분에 읽는 데리다>(악트, 2005). '90분에 읽는 철학' 시리즈는 재작년 러시아 체류시절에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작년에 데리다편이 출간된 것. 호기심에 주문한 것이고 책은 거의 팜플렛 수준이다. 112쪽이고 가격은 1,500원 정도. 참고로, 폴 스트라턴의 원저는 지난 2000년에 출간됐다. 96쪽이고 가격은 7.95달러, 그러니까 7,000원 정도이겠다.

두번째 책은 드디어 러시아어본이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로고스알테라, 2006). 받아보고 나니까 소프트카바라서 별로 본때가 나는 책은 아니지만(아래의 이미지 그대로이다) 어쨌거나 매우 반가운 책이다. 256쪽이고 가격은 15,000원 가량이니까 상당히 고가의 책이다(우리와는 달리 러시아의 인터넷서점의 책값이 시중에 비해 약간 더 비싼 경우가 많다).

Призраки Маркса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경우는 아마존에서 구할 수 있는 영역본(루틀리지, 1994)이 15달러 정도 하니까 이번에 나온 러시아어본이 얼마나 '고가'의 책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현재 품절상태인 국역본 <마르크스의 유령들>(한뜻, 1996)은 당시 9,000원에 출간됐지만, 근간 예정으로 있는 새 번역본은 최소 20,000원 이상의 가격이 붙지 않을까 예상된다(한번에 좋은 번역본이 나오지 않으면 이렇듯 이중으로 돈을 쓰게 된다). 우리의 책값이 싸다는 얘기는 이젠 먹히지 않을 얘기이다.

Маркс и сыновья

그리고 세번째 책은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같이 나온 <마르크스와 아들들>(로고스알테라, 2006). 이 책도 거의 팜플렛 수준인데, 104쪽이고 10,000원이 좀 안되는 가격이다(역시나 저렴하진 않다).

불어본은 2002년에 출간된 걸로 돼 있는데, 이미지가 뜨지 않아서 독역본(2004)을 대신 띄워놓는다.

   

한편, 이 책의 영어본은 (내가 알기에) 아직 단행본으로 나와 있지 않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심포지움 발표논문들을 마이클 스프링커가 묶어서 펴낸 <유령적 경계들(Ghostly Demarcations)>(Verso, 1999)에 실려 있는 데리다의 글 'Marx & Sons'가 원본 노릇을 하는 텍스트가 아닌가 한다. 

Происхождение немецкой барочной драмы

이제 끝으로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극의 기원>(아그라프, 2002)(러시아어 제목은 <독일 바로크 드라마의 기원>이다). 이 책을 구함으로써 러시아어로 번역된 벤야민의 책들은 대부분 손에 넣게 되었다. 지난 2000년에 출간된 걸로 돼 있지만 내가 러시아에 있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을 얼마전 오존에서 발견하고 주문했던 것. 288쪽의 하드카바이며 가격은 9,000원 가량.

지난 1998년에 버소(Verso)출판사에서 나온 같은 하드카바의 영역본은 42달러나 하니까 좀 비싼 책이다(중고 소프트카바는 주로 10달러선이다). 나는 영역판의 복사본을 갖고 있다. 듣기에는 벤야민 선집의 한 권으로 조만간 국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아무려나 여기에 띄운 이미지들을 전부 국역본으로 자신있게 대체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06. 08. 25.

P.S. 당장 다음주부터 개강이어서 마음이 바쁘기도 하고 울적하기도 한 며칠이다(이건 마치 리허설도 제대로 못 끝내고 부랴부랴 무대에 올라야 하는 배우의 처지 같다). 이번 가을에 내가 꿈꾸는 것은 미뤄두었던 데리다 읽기를 얼마간 보충하는 것이다. 그게 소위 여가이고 휴식이다. 생각만큼의 여가와 휴식을 가질 수 있을지는 확실히 미지수이지만, 여하튼 서재의 이미지도 며칠전에 데리다로 바꾸었다. 평일엔 지젝을 읽고 휴일엔 데리다를 읽는다? 평일엔 푸슈킨을 읽고 휴일엔 셰익스피어를 읽는다? 물론 그 전에 고래라도 한 마리 잡아야 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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