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에 '4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을 띄워놓는다고 목록을 추슬러놓았었는데, 저녁을 먹은 포만감에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보통 매달 1일에 리스트를 올리곤 헸지만 아무래도 4월은 좀 특별한 달이어서 '만우절'에 뭔가 진지한(?) 일을 꾸미긴 어려운 게 아닌가 생각되어서였다. 하지만 일어난 시각이 이미 자정이 넘은지라 하는 수 없게 되었다(물론 평소 이 서재를 드나드는 분들은 대개 나의 농담도 진지하게 받아주시는 편이지만).

20권 가량의 책을 아래에 꼽아놓았지만 그걸 다 읽는다고 하면 '거짓말'스러운 것이고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최소 목표치는 네 권이고 나머지는 '참고문헌'이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책들을 주로 꼽았는데, 내가 고려한 독자층은 대학 신입생들이다. 마침 1학년 전공과목을 맡고 있기도 해서 '프레쉬맨(과 우먼)'들을 강의실에서 자주 보게 되는데, '습관적으로' 눈높이를 못맞추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20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4월의 목록은 그들에게, 혹은 프레쉬맨의 추억을 갖고 있는 모두에게 바쳐진다. 기본 목록으로 내가 꼽은 책은 강경애의 <인간문제>,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그리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서문)이다.

 

 

 

 

한국문학 작품으로 강경애(1906-1944)의 <인간문제>(문학과지성사, 2006)를 골랐다(전집을 포함해서 강경애의 작품은 여러 출판사의 판본들이 출간돼 있다). 1934년동아일보에 연재됐던 장편소설로서 우리 근대문학사에 드문 여성작가의 대표작이자 최원식 교수에 따르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성과와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지난 2005년 3월 문화관광부가 정한 '이달의 문화인물'이었고, 작년은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온라인 문학관은 http://koreanliterature.kaist.ac.kr/kangkyungae/). 하지만 내가 대학 1학년일 때에는 읽어볼 수 없었던 작품인데, '믿을 만한 텍스로'로 처음 출간된 게 <인간문제>(창비, 1992)가 처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해서 '말로만 듣던' 작품을 나로선 이번에 읽어볼 작정이다(이미 한달도 더 전에 작품과 연구서, 그리고 논문 몇 편 등을 구해놓았기 때문에 내가 따로 준비할 건 없다).

강경애의 <인간문제>와 같이 읽어볼 만한 작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효시로 평가받는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어머니>(열린책들, 2006)이다. 지난 80년대 중반쯤에 국역본이 나오기 시작해서 지금은 러시아어 완역본만으로도 두어 종이 나와 있다. 고리키는 강경애가 태어날 무렵에 이 작품을 씌어졌고, <인간문제>가 발표되고 이태쯤 후에 세상을 떠났다. 아래는 1936년판 <어머니>의 표지(러시아 인터넷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책이다).

Мать

주지하다시피 <어머니>는 러시아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자 의식의 각성과정을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비록 오래전 일이지만) 한때 대학 신입생들의 필독서 목록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었다. 그러한 독서의 사회사까지도 이 작품의 구성소가 아닌가 싶다(영역본은 http://etext.library.adelaide.edu.au/g/gorky/maksim/g66m/).   

 

 

 

 

<인간문제>와 <어머니>가 모두 한국(식민지 조선)과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달과정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문제작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고른 책은 이미 대학가에서는 자본주의 입문서로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리오 휴버먼(1903-1968)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책벌레, 2000)이다(하지만 이 또한 내가 대학 1학년때는 읽을 수 없었던 책이다. 그때는 <철학에세이>를 '교재'로 읽었다). 그러니까 굳이 군말이 필요하지 않은 책이지만 '액면 확인'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의 저자 리오 휴버먼은 폴 스위지와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진보 잡지인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를 공동으로 창간한 바 있고, 좌파 지식인치고는 보기 드물게 급진적 사상을 대중적으로 설명하는 데 독보적인 재능을 보였던 인물이다." 아직도 대학가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비결이라 할 만한데, 놀라운 것은 원저가 1936년에 나온 책이라는 것(내가 바로 확인해보지 못하는 것은 박스보관도서이기 때문이다). 강경애의 <인간문제>와 바로 동시대 저작이라는 게 흥미롭다.

개인적인 관심거리 하나는 휴버먼이 스탈린시대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하는 것인데(국역본에는 이 대목이 빠져 있다) 국역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동녘, 1986) 외에도 먼슬리 리뷰에서 출간한 <소비에트 권력 50년(50 years of Soviet power)>(1967)을 참조해볼 참이다. 러시아혁명 50주년 기념으로 출간되었던 책이다(다시 상기하자면 올해는 러시아혁명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이미 읽으신 분이라면 휴버먼의 또다른 책 <가자, 아메리카로! : 그리고 부자의 문전에 거지 나사로가 함께 살고 있었다>(비봉출판사, 2001)를 이 참에 읽어보시는 것도 좋겠다. <미국의 역사와 민중>(비봉출판사, 1982)라고 출간됐던 책인데, 말 그대로 '부자의 문전에 거지가 함께하는' 미국 자본주의사와 민중사의 풍경을 보여주는 책이겠다. 원제는 'We, the people : the drama of America'. 사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도 원제는 'Man's worldly goods : the story of the wealth of nations'이다. 둘다 국역본에 붙여진 제목이 탁월하달 수밖에.  

덧붙인 책들은 최근에 나온 자본주의 관련서들로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책들이다. 더글러스 다우드 외 6인이 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이해>(필맥, 2007)의 원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 Capitalism)>이고, 마르크스부터 아마르티아 센까지 7명의 경제학자(혹은 경제학파)를 다루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앞에서 리오 휴버먼과 먼슬리 리뷰를 창간한 경제학자 폴 스위지이다. 대표작은 <자본주의 발전이론>(1942)으로 이 책과 더불어 비로소 미국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국내에는 이 주저 대신에 공저인 <미국 자본주의의 위기>(일월서각, 1986), <자본주의 이행논쟁>(광민사, 1980), <쿠바 혁명사>(지양사, 1984) 등이 소개돼 있는 정도이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동유럽의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다룬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시유시, 2007)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데(요긴한 서평은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3301533101&code=900308), 저자들은 전통적인 자본주의 이행론과는 다른 '신이행이론'을 제안한다고. 이 "‘신이행이론’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아담 스미스나 칼 마르크스의 고전적 견해-자본주의를 위해서는 자본가 계급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capitalists before capitalism)는 견해-에 대한 강력한 반론인 동시에 ‘영미식 자본주의 모델’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유형의 자본주의 변종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다."라는 평가가 흥미를 끈다. 

그리고, 내주에 출간된다는 <자본주의와 자유>(청어람미디어, 2007)는 "20세기 후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의 자본주의 사상을 집약해놓은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경제적 자유를 이룩하기 위한 장치이자, 정치적 자유를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경쟁적 자본주의의 역할에 주목한다." 시카고학파의 대부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저자의 1962년작인데, 1980년대 레이건과 대처 행정부의 경제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면서 또한 중국의 경제체제 전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니까 관심을 가져보게 된다. 내주말이면 출간과 함께 보다 자세한 리뷰들이 나올 듯하다.

 

 

 

 

그리고 세번째 책은 더 소개할 것도 없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2006). 아직 안 읽어보신 분이라면 작년말에 나온 출간 30주년 기념판을 읽는 게 좋겠다. 최근에 나온 책 <리처드 도킨스>(을유문화사, 2007) 또한 원저는 작년에 <이기적 유전자> 출간 3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의 사고를 바꾼 과학자'가 끼친 다양한 영향과 불러일으킨 다양한 반을을 모아놓은 책이다. 휴버먼이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가장 탁월한 대중적 해설자라면 도킨스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가장 뛰어난 대중적 해설자이다.

해서, <자본론> 대신에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읽는 식으로 <종의 기원> 대신에 <이기적 유전자>를 읽을 수 있다. 시간이 없으신 분이라면 다이제스트판이라고 할 만한 <에덴의 강>(사이언스북스, 2005)을 읽어보셔도 좋겠다. 개인적으론 <리처드 도킨스>에 실린 글 중 마이클 루즈의 '리처드 도킨스와 진보 문제' 와 '다윈주의 좌파'란 원제를 가진 피터 싱어의 <다윈의 대답1>(이음, 2007)을 읽는 게 이번 달의 목표이다.

 

 

 

 

우리들 육신의 진화사, 즉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에 대해 공부했다면 우리 정신의 역사에 대해서도 공부해두는 게 공정하겠다. 헤겔의 <정신현상학>(한길사, 2005)는 바로 그 '정신의 역사', 혹은 '정신의 오디세이아'를 다룬다. 1807년 5월 예나에서 초판이 나온지라 올해는 출간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독영 대역본은 http://www.gwfhegel.org/PhenText/compare.html 참조). 초판을 낸 조세프 안톤 굅하르트 출판사는 이런 광고문을 냈었다고.

"이 책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 정신을 그것이 순수지나 절대정신에 이르는 단계로 파악한다.(...) 현상된 정신의 불완전성은 이러한 필연성에서 해서되고 보다 놓은 단계의 진리로 이행한다. 정신의 현상은 최종적인 진리를 우선 종교에서 발견하며 그 다음에는 전체의 결과인 학문에서 발견한다."

이러한 여정 전체를 따라가보는 일은 물론 1년 공부로도 턱없이 부족하다. 다만 이달에 할일을 그 문제적인 '서론' 정도를 읽어보는 것이다. 다행히 <정신현상학>의 새 번역본이 재작년에 출간됐고, 작년에는 테리 핀카드의 두툼한 평전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이제이북스, 2006)도 번역돼 나왔기에 여건은 좋은 편이다. 게다가 최신한 교수의 <정신현상학>(살림, 2007)과 강순전 교수의 <진리를 향한 의식의 모험: 헤겔의 정신현상학>(삼성출판사, 2006) 같은 도우미들도 나와 있으며, 인터넷에는 강유원의 헤겔 강의록도 번역과 함께 떠 있다. 거기에 장 이폴리트의 해설서 <헤겔의 정신현상학>(문예출판사, 1989)도 보탤 수 있겠다. 두루 참조하면 인류가 산출해낸 가장 어려운 책 중의 하나인 <정신현상학>의 '문턱'을 이달에는 넘어볼 수 있을까?..

07. 04. 01.

P.S. <인간문제>와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에 대한 '보유'를 달아둔다(일종의 '심화학습'이다). 사실, 노동계급(의식)의 형성이나 자본주의에 관한 책이라면 적잖은 책들이 나와 있다.

 

 

 

 

고전적인 저작은 물론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창비, 2000)이다. 장서용으로라도 꽂아둘 만한 책이다. 이 책의 미국 버전이 마이크 데이비스의 <미국의 꿈에 갇히 사람들>(창비, 1994)이며, 한국 버전이 구해근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창비, 2002)이다.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까치글방, 1997)은 이 주제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논문 모음집이다.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자본주의'는 키워드 중의 키워드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관련서들은 차고 넘친다. 단지 몇 권을 임의로 꼽아본다. 피에르 잘레의 <자본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 2006)은 얇은 책이다. 필자가 리오 휴버먼 등과 같이 '먼슬리 리뷰'의 필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기에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와 같이 읽어봄 직하다. 그리고 백승욱 교수의 <자본주의 역사 강의>(그린비, 2006)와 작년에 작고한 경제평론가 정운영의 <자본주의 경제 산책>(웅진지식하우스, 2006)은 국내 필자의 저작이란 점에서 눈에 띈다. 물론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인식틀 자체까지 '우리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에 '현실적인' 대안이 있는가? 영국의 트로츠키주의자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책갈피, 2003)이 그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세계화) 대 반자본주의(반세계화)'란 구도로. 소개에 따르면 "오늘날 반세계화 운동의 내부에는 몇가지 쟁점과 상이한 입장이 존재한다. 이 책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체계적인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 1장은 반자본주의 운동의 배경이 되는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금융불안정과 과잉 생산 위기, 환경 위기가 심화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그리고 "2장은 반자본주의 운동 내부의 다양한 흐름을 여섯 가지로 분류한 후,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의 입장에서 앞의 다섯 가지 반자본주의 운동 전략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분석한다. 다소 도식적이긴 하지만 반자본주의를 이처럼 유형화하고, 비교.분석한 것은 캘리니코스가 처음이다." 최근에 출간된 <제국이라는 유령>(이매진, 2007)은 바로 그러한 입장에서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이학사, 2001)을 비판하는 캘리니코스의 글을 포함하고 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99687.html). 이건 덩치가 큰 주제인지라 따로 공부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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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문학사이' 이번주는 손택수 시인이다.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과 <목련전차>(창비, 2006),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이자 기대주이다(연배 자체가 젊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작년에 시집 <목련전차>가 나왔을 때 호의적인 평문을 여럿 보았음에도 시집을 구입해놓지 않았었는데, 올봄 목련이 다 지기 전에 다 읽어봐야겠다. 젊은 평론가 신형철의 리뷰(그는 "손택수는 문태준과 더불어 1970년대산 서정시의 젊은 본령"이라고 평한다)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3. 31) [작가와 문학사이](12)손택수-사연을 품어 마음을 열다

손택수(孫宅洙)라는 이름 안에는 풍경이 있다. 강 흐르는 곳에 집 한 채. 택수야아, 하고 누가 부르는 소리 같은 것도 얼핏 들리는 이름이다. 1970년 전남 담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고 거기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98년에 시인이 되었고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송곳니로 삶을 꽉 물고 놓지 않는, (…) 생동하는 민중서사적 시인”(이시영)이라는 평이 있었다. 저 유년의 기억이 이 시인의 8할을 만들었던가 싶다. 동세대 시인들과 그의 차이가 그 어름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시란 무엇이고 시인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이런 식의 대답이 그의 것이다.

눈 내리면 호랑이 발자국 모양의 장갑을 끼고 산간지대를 어슬렁거리며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물정 모르는 이들은 멸종한 호랑이의 출현에 들뜰 것이다. 이것은 썩 유쾌한 파문이 아닌가(‘호랑이 발자국’). 반대 방향으로 박혀 있는 비늘을 역린(逆鱗)이라 한다. 이것은 “제 몸을 거스르는 몸”이자 “은빛 급브레이크” 같은 것일 텐데,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낙향하는 친구로 말하자면 이 역린의 희생자쯤 되지 않겠는가(‘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그렇다면 시인이란 멸종한 호랑이 흉내를 내고 다니는 자일 것이고 시란 저 혼자 세태의 반대방향으로 뻗어 있는 역린 같은 것이겠다. 은빛 급브레이크 한 편 읽는다.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스윽, 제비 한 마리가,/집을 관통했다//그 하얀 아랫배,/내 낯바닥에/닿을 듯 말 듯,/한 순간에,/스쳐지나가 버렸다//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그야말로 무방비로/앞뒤로 뻥/뚫려버린 순간,//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방심(放心)’ 전문)

앞뒤 문을 다 열어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마음을 놓아버리고 드러누워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집도 사람도 모두 방심한 터라 제비가 묘기 한 번 부려보고 싶었겠다. 그 찰나의 체험에서 눈 밝고 몸 예민한 시인들은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도 보고 몸의 숨구멍들이 죄다 열리는 듯한 경이도 느낀다. 이런 시들이 있어서 메트로폴리스의 숨구멍도 가끔씩은 탁탁 열린다. ‘결심’이 아니라 ‘방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편히 내려놓아야 그 틈으로 시도 찾아들어오곤 하는 것이다.

그 방심은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여는 일이기도 하다. 열린 마음속으로 타인들의 곡절이 흘러들어온다. 그의 시들은 사연을 품고 있을 때 특히 아름다워진다. 추석날 고향에도 못 가고 화장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로 흐느껴 우는 안마사 김양 누나의 사연이 있고(‘추석달’), 목련 전차를 타고 간 동래온천에서 신혼 첫날밤을 보낸 어머니 아버지의 사연이 있고(‘목련전차’), 보험서류를 들고 찾아온 여자 후배의 입에서 문득 튀어나온 ‘자기’라는 말이 둘 다를 무안하게 한 사연도 있다(‘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작업을 걸면서’ 쓰는 시들이 아니라 ‘작업을 당하면서’ 쓰는 시들이어서 이리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좀 들어야 한다. 네 말이 내 모서리를 갉아먹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너의 사연을 먼저 수락하지 않고서는 내가 네게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서정시가 세상과 연애하는 방식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너의 사연을 받아 안지 않으면 내 말이 둥글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손택수는 문태준과 더불어 70년대산 서정시의 젊은 본령이다. 방심한 자가 뜨는 사랑의 눈 덕분에 얻은 성취라고 믿는다. 그는 작업 당하는 데 선수다.(신형철|문학평론가)

두 번째 시집 『목련전차』(창비, 2006) 펴낸 손택수 시인

컬처뉴스(06. 06. 23) "시는 일상에 탁 끼어드는 생명의 박동"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 스윽, 제비 한마리가, / 집을 관통했다 / (…) /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 그야말로 무방비로 / 앞뒤로 뻥 / 뚫려버린 순간,” - 「放心」(『목련전차』, 창비, 2006) 중에서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에서 가족의 서사를 중심으로 깊은 서정을 뿜어냈던 손택수(36)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목련전차』(창비)를 펴냈다. 이번 두 번째 시집에서는 시인의 가족에서 시작됐던 서정의 시선이 도시문명의 속도에 뒤쳐지는 혹은 그것을 거부하는 남루한 삶들에 대한 연민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19일(월) 홍대 인근 카페에서 고봉준 문학평론가와 함께 만난 시인은 “그것은 자신을 향한 연민이기도 하다”고 털어놓는다. 2년 전 결혼과 함께 30년이란 세월을 함께 했던 ‘부산’을 등지고 일산으로 이사 온 그는 “부산이 내게 줬던 이미지가 근대라는, 도저히 내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도시공간이었는데, 일산이라는 공간은 더 그렇죠”라고 말한다.

‘부산’이 나에게 준 두 가지

흙냄새 풀풀 나는 전남 담양 ‘봉산’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항구도시 ‘부산’에 살다가 수도권 신도시 ‘일산’으로 주거지를 옮겨온 시인. ‘농경문화적 상상력’이 서정의 근간에 깔려 있는 시인에게 이 같은 공간들이 주는 의미가 적지 않아 보인다.

“공간이란 것은 제가 구체적 실존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예요. 때문에 흙을 만져보고 흙을 먹어봤던 저로서는 대지라는 공간이 최초로 세계와 밀착감을 느낀 곳이라 할 수 있는데요. 그곳을 벗어나 부산이라는 공간에 왔을 때 순환적인 시간 속에 있다가 탁하고 끊어져버린 듯한 공포감이 들었어요.”

부산역에 다다랐을 때 산꼭대기에 다닥다닥 모여 있는 집들을 보면서 ‘뭐 이따위 도시가 다 있나’라고 생각했다는 시인은 “근대적 시간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시인은 ‘촌놈근성’이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시인에게 ‘공간’이라는 것은 시인이 화두로 삼고 있는 근대라는 ‘시간’과 맞물려 있다. 때문에 근대적 공간으로서의 ‘부산’은 시인에게 근대라는 시간을 함께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시인에게 ‘부산’이 부정적인 공간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부산을 통해 “근대 도시공간이 놓쳐버린 신화체험과 오래된 미래, 가치적 미래를 향한 역방향으로의 진화와 더불어 시원을 향해 끝없이 퇴보하고 싶은 적극적인 퇴행의 욕망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흙에만 있었다면 미처 지나치고 말았을지도 모를 시원에 대한 지향점을 ‘부산’이 발견하게 해준 것이다. 시인이 이번 시집의 끝 시로 「미조항」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다. 부산은 시인에게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준 공간이기 때문이다.

“철길이 바다로 들어간다 // 19번 국도의 출발점, 표지판 속의 0km / 0을 갓 낳은 물새알처럼 품고 있는 어항 // 나는 길을 통해 늘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길은 나를 통해 매번 바다에 이르고자 했다 / (…)” - 「미조항」(『목련전차』, 창비, 2006) 중에서

달빛이 화장지를 들고 제비에게 쉬러오다

90년대 이후 전통적인 서정의 문법이 변하기 시작했다. 신서정 또는 서정의 진화라는 이름 하에 탄생한 이른바 미래파 시인들의 낯선 화법과 종잡을 수 없는 파격이 그것인데. 이러한 동시대 문학의 변화 속에서 재래적인 시 문법을 고집하며 일각의 흐름을 거스르는 지점에 손 시인이 있다.

“제 시의 근간을 ‘농경문화적 상상력’이라고 흔히 말하는데요. 그것이 정말 퇴행적이고 복고적인 것이 될 수 있지만 그런 형식을 통해서나마 지금의 질서, 지금의 속도에 대한 반성의 기제가 됐으면 하는 소박한 믿음이 저 나름대로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시집은 이러한 시인의 소박한 마음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소박하지만은 않다. 시인은 삶의 근간인 ‘집’과 ‘땅’을 통해 사람과 우주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는 단칸집이다 / 시름시름 기울어가던 처마 끝이다 // 진흙둥지 되바르며 보수공사에 여념이 없는 제비 한쌍 / 신접살림을 차렸다 (…) 이 허름한 적산가옥에 세를 들러 온 두 내외 / 덕분에 가난한 나도 / 이제는 어엿한 집주인이 된 셈인가 / (…) / 달빛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와서 하룻밤 묶었다 간 뒤다” - 「제비에게 세를 주다」(『목련전차』, 창비, 2006) 중에서
 
제비가 세를 든 ‘집’은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제비 덕에 집주인이 된 ‘화자’와 광활한 우주의 한 지점에 있는 ‘달빛’을 연결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열림은 모든 세계를 향해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 환하게 뚫려”(「화엄일박」)있는 ‘구멍’과도 연결된다.

오늘이 그날 같고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생명감을 잃고 살기 쉬운데, 그 일상의 흐름의 중간에 탁 끼어들어서 순간적으로 생명의 박동음에 가 닿게 하는 시적 순간이 있잖아요. 아마도 저에게는 신화적 관심이 바로 그것의 기제가 되는 것 같은데, 그것을 집과 몸과 우주와 연결시켜 얘기한 것 같아요.”

 

 

 

 

 

 

 

 

 

 

잘 쓴 시가 아닌 나의 시 쓰고 싶어

시인에게 향후 계획을 물었더니 굉장한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저도 몰라요”라는 말이 되돌아온다. “시 한편을 쓸 때도 이 시가 어떻게 끝맺음을 할지 모르거든요. 그러니 제 시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더더욱 모를 일이죠”라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답변이 내심 미안했는지 “다만 모험을 향해, 황무지를 향해 유배를 내리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하얀 종이 앞에 서면 늘 막막하거든요. 그 막막함이 나를 깨어있게 하고 살아있게 하는 것 같아요”라고 덧붙인다. 

시인에게 문학은 “스스로를 버티게 하는 힘”이라고 했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의 방편으로서의 힘이 아니라 그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근거로서의 힘이다. 때문에 시인은 “시를 잘 쓰고자 하는 욕망은 버리고 나의 시를 쓰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마음을 다잡는다.(위지혜 기자)

07. 0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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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31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이 발자국은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 목련 전차도 읽는다 읽는다 해놓고 못 읽고 있네요 ㅎㅎ 가장 좋은 것은 아껴두는 심정이랄까요. 아직 읽을 좋은 시집이 남았다는 ^^;

나비80 2007-04-01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손택수는 제가 요즘 가장 아끼는 시인입니다. 이번에도 시집 하나 구매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기인 님! 좋은 건 빨리빨리 드셔야지요.^^
 

강의준비를 하는 틈에 잠시 짬을 내어 들어가본 담론비평 사이트에서 리뷰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문학평론가이자 계간 황해문화 주간이기도 한 김명인의 한국근현대 문학사에 대한 '시론적 소묘'를 요약정리하고 있는 리뷰이다. '가족로망스'라는 구도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닌데, 국문학계에서는 아직 이러한 시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완결된 '문학사'가 기대된다.

담비(07. 03. 29) 평론가 김명인의 야심찬 '문학사 기획'

시인 김수영을 통해서 근대를 향한 성찰적 개인의 위대한 모험을, 평론가 조연현을 통해서 근대에 투항하는 복잡한 현대인의 내면을 짚어보았던 문학평론가 김명인의 문학사 쓰기가 새로운 국면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것은 한국 근대문학 1백년을 '가족'이라는 주제로 꿰뚫는 자못 거시적인 작업이어서 주목을 끈다.

김명인은 '민족문학사연구' 최근호(32호)에 발표한 '한국 근현대소설과 가족로망스'에서 자신의 이러한 과업의 "시론적 소묘"를 펼쳐보였다. 그 아이디어의 시발은 바로 프로이트다. 프로이트가 1908년에 쓴 '신경증환자의 가족 로망스'는 어린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한 모방과 동일시가 충족되지 않을때 상상의 아버지를 갈망하게 되는 신경증을 분석했다. 로버트 단턴(*린 헌트)은 이 가족로망스 이론을 프랑스혁명에 적용했다.

이런 견해를 근대소설에 적용하면 근대소설의 문제적 개인들은 신이 사라진 시대(=아버지가 부정된 시대)에 새로운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자발적 고아들이다. 특히 성장소설이 그렇다. 내발적 경로를 통해 주체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를 이룬 서구사회의 경우, 봉건체제의 부정과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이 자기사회 내의 논리에 따라 계기적으로 일어남으로 해서 비교적 낡은 아버지 부정과 새 아버지 긍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지만 식민지라는 경로를 통해 외재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의 길로 들어선 비서구 지역에서는 이것이 자연스러울 리가 없다.

낡은 아버지는 부정되어야 할 존재이면서 동시에 지켜야할 존재이며, 새로운 아버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동시에 부정해야 마땅할 존재이다. 가족로망스는 시작부터 길을 잃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버려진 존재인 식민지 고아들은 낡은 아버지를 부정할 겨를도 없이 그를 부양해야 하며, 새로운 아버지를 찾을 겨를도 없이 가짜 새 아버지와 대결해야 한다. 그들은 문제적 개인이지만, 행로가 단순하지 않고, 가족로망스는 늘 지연되고 그 자리엔 다른 악몽이 시도 때도 없이 개입해 들어온다. '피식민주체의 서사시'가 시작된 것이다. 김명인은 이런 문제의식 아래 한국 근현대소설을 개관한다.

제1기(19세기말~1920년대 초반)는 봉건체제의 붕괴와 식민체제의 형성이 동시적으로 진행된 시기이자, 넓은 의미의 '계몽주의 시대'와 엇비슷이 일치하는 시기로서 가족로망스에서 이른바 '고아의식'과 '업둥이의식'이 발생하는 시기이다.

제2기(1920년대 중반~1945년)는 '식민지 근대'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는 시기로서 부정된 아버지에 대한 복합심리와 새로운 가족에 대한 동경, 대안으로서의 형제애 등이 복잡하게 착종하는 시기이다.

제3기(해방기~1950년대)는 분단체제 형성기다. 새로운 아버지에 대한 동경이 다시 한번 좌절하고 1기의 고아 혹은 업둥이들은 아버지로서 다시 부정되거나 실종되고 2기의 소년들은 재차 더 극심한 시련 속으로 내던져진다.

제4기(1960년대~1980년대)는 한국 자본주의의 본격적 발전기이자 권위주의적 군부독재기로서 가짜 아버지에 의한 전체주의적 가족국가와 진짜 아버지의 복원열망이 충동하는 시기이다.

제5기(1990년대~현재)는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시기로서 제4기의 새로운 세대가 다시 아버지가 되고 가족로망스 자체가 붕괴되어가는 시기이다.

김명인은 이런 시기구분 하에 이광수, 염상섭, 이상, 김남천, 채만식, 최인훈, 김원일, 조세희, 방현석, 신경숙, 배수아 등의 작품이 이런 특징들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지 간단간단히 짚어나간다. 이광수의 '무정'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만든 무정한 세계에 대한 한탄과,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가짜 선구자의 곤혹스러움이 서로 용해되지 못한채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양립해있는 형국을 보여준다.(제1기)

제2기에는 카프 계열 작가들이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평등한 가족체계를 꿈꾸며 '고향', '황혼' 등의 작업을 보여주는가 하면, 그 반대편의 국민문학파가 그에 반발하며 옛날 아버지를 불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다소 단순한 반응이었고 보다 복잡한 심리는 이상과 김남천, 채만식에게서 나타난다는 게 김명인의 판단이다. 이상은 첨단의 모더니티를 향해 냅다 달렸지만, 그에게 더 절실했던 것은 어떠한 봉건적 관계의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우면서도 그의 애정결핍을 충족시켜 줄 사적인 가족 형태였으며, 그것은 곧 성적, 정서적 동반자로서의 여성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김명인은 남매애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상의 여성집착은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차라리 손위 누이를 감싸 안는 김남천이나, 손아래 누이를 지키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소년 주체가 제시되는 채만식을 주목한다.

하지만 제3기에서 김남천과 채만식이 남겨놓은 씩씩한 소년들은 타락하지 않은 시원의 아버지를 만났는가. 아니면 스스로 좋은 아버지가 됐는가. 최인훈의 '광장'에서 이명준이라는 청년은 남북 양쪽의 아버지들이 가짜라는 눈치를 챘지만, 새로운 아버지에 대한 열망보다는 가짜 아버지들에 대한 절망이 더 커서 전도된 남매애로서의 여성에 대한 성적 집착의 길을 걷다가 결국 이 땅에서 탈주했다.

제4기에 들어서면 가짜 아버지에 대한 부정과 그가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가족국가에 대한 거부가 두 방향으로 본격화된다. 하나는 '분단소설'들로서 가족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지워진 아버지를 되살리려는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소설에서 보여지는 형제애에 기초한 가족의 형성욕망이다. 김원일이 '노을', '어둠의 혼'에서 분단동이들은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부정하기도 전에, 더 큰 외부의 힘이 아버지를 부정해버린 제1기의 고아들과 비슷한 형국인데, 이들에게 미래의 가족로망스는 곧 과거의 아버지를 되살려내는 것이라는 역설적 상황이 주어진다. 발전의 서사와 대비하여 '복원의 서사'라 부를 만한 이런 경향은 비극적 식민지를 겪은 제3세계 문학의 공통된 경향이라고 김명인은 말한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자본주의체제의 형성과정에서 눌려서 난장이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위한 복수의 서사다. 이 작품은 80년대의 급진화하는 가족로망스를 예비하는 성격을 가지면서도, 봉건시대로 거슬로 올라가는 노예적 가족사의 사슬을 끊고자 하는 비원도 담고 있다. 방현석의 '내일을 여는 집'은 노동계급운동의 미증유의 활성화라는 분위기와 맞물려 본격적인 사회주의적 형제애에 기초한 가족로망스를 구가하였으나, 희망태에 불과했고, 지금 돌아보면 어딘가 허망하고 고립된, 1980년대적으로 특수화된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정리한다.

90년대에 들어오면 가족로망스는 현격히 쇠퇴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집단무의식의 문제로는 포착하기가 힘들게 되어 버렸다. 부-모-자녀로 이루어지던 최소단위도 유지하기가 힘들게 돼 구성원들은 단자로 내몰렸다. 불륜소설이 붐을 이뤘고, 신경숙, 조경란, 공선옥 등이 예외적으로 가족이라는 굴레로부터의 이탈과 가족을 추수려 세우려는 노력을 보여 예외적 현상으로 남았다.

김명인은 이상의 가족로망스에서 그 주체가 '아버지-아들'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식민지의 이 기구한 가족로망스 속에서조차 여전히 타자이자 또다른 식민지였던 여성의 역사를 겹쳐놓는다. 나혜석, 강경애, 박완서, 신경숙, 배수아의 소설로 계보를 이어가는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여성의 삶'은 때론 비극적이고 적나라하고 지그재그적 행보를 보여준다. 배수아의 소설집 '바람인형'에 오면 여성으로서 성장한다는 것은 곧 그 여성-인간을 살해하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명제를 입증하는데 바쳐진다.

김명인은 이러한 여성 주체의 근대적, 혹은 탈근대적 해방이라는 주제야말로 주목할한만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자체가 세계사적 보편성과 당대적 폭발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근대/식민지 근대가 낳은 사회체제, 문화, 이데올로기 전반의 문제들을 가로지르고 재구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근본적(radical) 거대주제라는 점에서 가족로망스의 악순환과 근대적 삶에 편만한 식민성을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 잠재력을 내장하고 있다고 말한다.(리뷰팀)

07. 03. 29.

P.S. 가장 최근에 낸 김명인의 평론집은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6)이다. 책에 관해서는 프레시안의 관련기사가 유익하다(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6092917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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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4-01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버트 단턴은 이 가족로망스 이론을 프랑스혁명에 적용했다<---린 헌트 아닌가요?

로쟈 2007-04-01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필자나 리뷰팀의 착오 같습니다...
 

알라딘에 로그인 하게 되면 습관적으로 새로나온 책들을 검색해보게 된다. 막상 가끔씩 서점에 가보면 전혀 생소한 책들과 대면할 때가 있어서 역시나 '온라인은 온라인일 뿐'이란 생각도 하게 되지만 또 거꾸로 서점에서 미처 둘러보지 못한 책들을 온라인에서 처음 접할 때 느끼는 반가움도 적지는 않다. '반가움'이라고 적었지만 실상은 묘한 감정이다. 새로 나온 책에 대한 부듯함과 함께 또 사서 읽어야 하나, 언제 읽나, 하는 부담감이 묘하게 결합돼 있는. 그런 반가움과 착잡함(?)을 동시에 느끼도록 해준 책이 또 출간됐으니 미국의 저명한 동시대 작가 존 바스(1930- )의 <연초 도매상>(민음사, 2007)이 그것이다.  

 

 

 

  

미국의 현대문학에 대해 약간의 견문이 있는 독자라면 이 작가의 이름과 작품에 대해 얼마간 면식이 없을 수 없다. 특히나 포스트모더니즘 광풍(?)이 몰아치던 시절에 가장 많이 언급된 작가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존 바스였기도 했고. 이번에 출간된 <연초도매상>은 '타임'지가 선정한 100대 영문소설의 한권이기도 하니까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기도 한다.

다소 놀라운 건 1960년에 발표된 작품이므로 작가가 만 30세(이전에!) 쓴 소설이라는 것. 768쪽이라는 방대한 분량(국역본은 3권 합계 1,600쪽이 넘는다!)의 작품을 20대에 쓰고서 그것이 당대의 걸작으로 꼽힌다는 게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아무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회자되던 책이 (비록 '연착'이란 느낌을 지울 순 없지만) 완역 출간되었기에 반갑다(비슷한 경향의 러시아 현대작가들의 소설들도 소개된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혼자 해본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연초 도매상'이라는 서사시를 남긴 17세기의 시인 에브니저 쿠크의 여정을 좇는 패러디 역사소설이다. 작가는 리얼리티의 충실한 재현보다는 리얼리티가 언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 리얼리티가 어떻게 모방되고 위조되는가에 관심을 보인다. 주인공 에브니저 쿠크는 17세기에 실존했던 시인이자 연초 도매상으로, 서사시이자 풍자시인 '연초 도매상'을 비롯한 몇 편의 시를 남겼다. 에브니저 쿠크의 시 창작 과정이 전개되고 메릴랜드의 식민 역사가 패러디되는 <연초도매상>에서는 문학적인 글쓰기와 더불어 역사적인 글쓰기가 중심적인 관심사이다. 에브니저는 메릴랜드 주에 있는 아버지의 연초(담배)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영국에서 아메리카로 간다. 그리고 여정 내내 해적과 인디언, 매춘부, 폭도에게 둘러싸여 예상치 못한 모험을 하게 된다. 그는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에게 스무 개가 넘는 이야기를 듣는데,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그림으로 직조되고, 쿠크는 서사시 '연초 도매상'을 완성한다."

 

 

 

 

위키피디아의 '존 바스' 항목을 읽어보면 그가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과 메타픽션의 대가라고 소개돼 있는데, 작품의 줄거리는 그러한 소개에 딱 들어맞는 듯싶다. 특히나 <연초 도매상>은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문학과지성사, 2001)와 필딩의 <톰 존스>(삼우반, 2007) 같은 피카레스크 소설에 대한 풍자로서의 성격을 갖는다고 하며 타임지의 평에 따르면, "<캉디드> 이후 가장 흥미로운 방랑 영웅이 등장하는 현대의 고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존 바스는 대부분 영문학자 김성곤 교수의 소개에 근거한 것이다. 대부분이 박스보관 도서인지라 다시금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미로 속의 언어: 현대 미국작가와의 대화>(민음사, 1986), <탈모더니즘 시대의 미국문학>(서울대출판부, 1998) 등의 책에서 존 바스가 언급되었던 듯하다. 더불어, '고갈의 문학'과 '소생의 문학'이란 표어로 잘 알려진 바스의 문학론은 <소설의 죽음과 포스트모더니즘>(글, 1992)에 소개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얼마전 교보에서 <고갈과 소생의 변증법>(한국학술정보, 2006)이란 제목의 책이 눈에 띄어 집어든 적이 있는데, 기대한 번역서가 아니라 존 바스 연구서였다.  

 

 

 

 

한편, 영미문학연구회에서 엮은 <영미문학의 길잡이2>(창비, 2001)에서는 20세기 문학의 마지막 작가들로 '존 바스와 토머스 핀천'을 다루고 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두 작가의 소설들이 국내엔 얼마간 소개돼 있다. 먼저, 존 바스(존 바드, 존 바아드)의 경우엔 <여로의 끝>(을유문화사, 1983), <여로의 끝/ 선상악극단>(학원사, 1984) 등이 영문학 교수들의 번역으로 출간된 바 있고, <키메라>(고려원, 1979)는 전문번역가 이윤기 선생의 번역으로 일찌감치 나왔고.

토머스 핀천(1937- )의 경우에도 <브이>(학원사, 1985; 민음사, 1991), <제49호 품목의 경매>(벽호, 1994)가 번역/소개된 바 있다(단행본 연구서도 두어 권 정도 나와 있다). <제49호 품목의 경매>는 이번에 민음사에서 다시 출간됐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갖는 책은 아무래도 아직 번역되지 않은 <중력의 무지개>(1973)이다. 제목에 이끌려 오래전에 원서를 사두었지만 이 방대한 분량의 소설도 지금은 박스에 들어가 있다. <연초 도매상>에 견줄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마저 번역된다면 좋지 않을까 싶다...

07. 03. 28-31.

P.S. 핀천의 경우엔 자신의 신변노출을 극히 꺼리는 작가로도 유명하여 인터넷에서도 그의 사진은 몇 장 찾아볼 수 없다. 알려진 에피소드 한 가지는 그가 코넬대 재학시 나보코프의 문학강의를 수강했었다는 것 정도. 정작 나보코프 자신은 핀천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 '두드러진' 학생은 아니었던 듯한데, 작문 채점을 도와준 그의 아내 베라가 핀천의 필체가 인상적이었다고 한마디 덧붙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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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la 2007-04-14 15:22   좋아요 0 | URL
커트 보네거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 이 세대가 이제 진짜 끝이구나 싶어서 남은 분들(;;;)을 생각해봤더니, 핀천과 바스가 살아 계시더군요;;; 아무래도 이 분들은 보네거트 님만큼 만만한 분들이 아니어서 읽은 적 없는데, 로쟈 님 포스트 보고 <연초 도매상>에 도전합니다. -_-;

로쟈 2007-04-14 20:42   좋아요 0 | URL
저도 뒤늦게(?) 보네커트의 책을 주문했습니다.^^;
 

구내서점에 들렀다가 뜻밖에 발견한 책은 미셸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이다.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란 제목의 리뷰를 어제 옮겨왔었는데, 마침 바로 그 주제에 관한 책이 출간된 것(알라딘에는 아직 입고되지 않은 듯하다).

책 이미지

1981-1982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를 펴낸 것인데, 불어본은 지난 2001년에, 그리고 영역본은 지난 2005년에 출간되었다. 푸코의 강의록으로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비정상인들>에 이어서 세번째로 소개되는 책이다. 이 강의록 시리즈의 책임 편집자는 프랑수아 에왈드와 알레상드로 폰타나이며, 이 책의 편집자는 <푸코와 광기>(동문선, 2005)의 저자이자 <미셀 푸코, 진실의 용기>(길, 2006)의 공저자인 프레데렉 그로이다. 책에는 이 강의의 특징과 출판과정에 대한 편집자의 자세한 해설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역자는 오래전에 저명한 푸코 연구서인 존 라이크만의 <미셸 푸꼬, 철학의 자유>(인간사랑, 1990)을 소개한 바 있고 미셸 푸코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 취득 후에 귀국하여 프랑수아 샤틀레의 <이성의 역사>(동문선, 2004)를 역간하기도 한 심세광 박사이다. 모처럼 무게 있는 저작이 최적의 역자를 만나 출간되었기에 안도감이 든다. 20쪽에 이르는 해제성 역자서문도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하고.

1982년 1월 6일부터 3월 24일까지 행해진 강의에서 푸코가 주로 다루고 있는 텍스트는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등이다. 역자가 잘 정리해놓은 바에 따르면,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고대의 자기 기술둘, 특히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의 자기 기술들을 연구하면서 고대인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결코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해낸다."

"고대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가해야 할 노력이 있었다면 그것은 발견해야 할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해야 할 행동의 문제였다. 고대에 자기와 자기를 분리시키는 것은 '인식'의 거리가 아니라 '현재의 자기'와 '생이라는 작품'의 거리였다는 점을 푸코는 강조한다. 고대 주체의 문제는 자기를 인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작품의 재료로 간주하는 데 있었다.'"(25쪽) 푸코는 이를 일컬어 '실존의 미학'이라 명명한다.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자기의 테크놀로지>(동문선, 1997)도 참고해야 하는 필독서이다.

책에는 시리즈의 공동편집자가 작성한 일러두기가 서두에 실려 있는데, 푸코의 독자라면 다들 알 만한 내용이지만 생소한 독자들도 있을 것 같아 옮겨보면, "미셸 푸코는 안식년이었던 1977년만 제외하고는 1971년 1월부터 1984년 6월 그가 사망하던 때까지 줄곧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했다. 그의 강좌명은 '사유체계의 역사'였다. 이 강좌는 쥘르 뵈유맹의 제안에 따라 콜르주 드 프랑스 교수협의회에 의해 1969년 11월 30일에 개설되었는데, 장 이폴리트가 죽을 때까지 맡고 있던 '철학적 사유의 역사'를 대체한 것이다."(31쪽)

그러니까 스승이었던 이폴리트의 후임으로 새로운 강좌를 맡게 된 것인데, "교수협의회는 1970년 4월 12일 미셸 푸코를 새 강좌의 교수로 선출했다. 그때 그는 43세였다. 미셸 푸코는 1970년 12월 2일 교수 취임 기념강의를 했다." 푸코와 교수직에 나란히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신 이가 바로 폴 리쾨르였다. 그리고 푸코의 첫 취임강의는 이듬해 5월 <담론의 질서>로 출간되었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 강의를 듣는 데에는 어떠한 자격요건도 필요하지 않았고 교수들은 지도학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청강생들만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어반 청강생'들을 위한 교본으로 생각하면 책값이 그렇게 부담스럽지만은 않을 듯하다.

국역본이 나온 김에 나는 도서관에서 이전에 너무 두꺼운 탓에 엄두가 나질 않아 대출하지 못했던 영역본을 대출했다(영역본은 556족으로 588쪽의 국역본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건 국역본의 페이지당 행수가 30행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역본은 35행이다). 그리고는 아예 영역본은 아마존에 주문했다. 배송료를 포함해도 국역본보다 훨씬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고, 그 정도면 책을 복사하는 것보다 경제적이어서이다. 영역본으로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가 네댓 권 정도 번역돼 있는 듯하다.

Интеллектуалы и власть. Избранные политические статьи, выступления и интервью. Часть 2

한편, 러시아어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비정상인들>이 번역돼 있다(이 중 <비정상인들>은 모스크바 체류시에 구입한 책이다). <주체의 해석학>의 경우에는 한국어본이 먼저 나온 셈이다. 러시아어본으로 최근간은 대담집인 <지식인과 권력> 2부(2005)이다. 1부는 지난 2002년에 출간됐었다... 

07. 03. 27-28.

P.S. 푸코가 주로 다루는 책 중의 하나가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라고 했는데, 이번에 우리말 번역본이 출간됐다. <알키비아데스>(이제이북스, 2007).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의 첫 권으로 나온 듯싶다. 소개에 따르면, "정암학당의 학자들이 7년간의 시간을 기울여 번역한 플라톤 전집 중 한 권.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라는 장래가 유망한 젊은이를 상대로 질문을 던져 가며, 알키비아데스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고 앞으로 해야 할 바를 자각게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양한 주제에 걸쳐 질문을 주고 받는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모습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의 진미를 느낄 수 있으며, 위서 논란이 있지만 플라톤 사상의 전조(*전모)를 보는데도 부족함이 없다." 한국의 플라톤 수용에 있어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가 될지 기대된다.

07.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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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7-03-28 00:36   좋아요 0 | URL
* 영역본을 살려고 했는데 잘 됐군요. 역자가 '심세광'씨라서 믿음도 가고요. 고마운 정보 감사합니다.

로쟈 2007-03-28 01:19   좋아요 0 | URL
저는 아예 영역본까지 주문해버렸습니다.^^;

Ritournelle 2007-03-28 01:27   좋아요 0 | URL
예스 24에서 꽤 싸게 파네요. 17, 420원... 2주 정도가 걸리니 저도 영역본을 주문해야 겠습니다. '삶의 미학적 차원' 혹은 '삶의 예술적 차원'이라는 주제는 정말 멋있는 것 같습니다. 푸꼬가 그토록 매력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 아닐런지요?

로쟈 2007-03-28 01:31   좋아요 0 | URL
알라딘도 빨리 '국제화'되면 좋겠는데요...

Ritournelle 2007-03-28 03:4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예스 24는 책 값의 10% 정도를 마일리지로 적립해 줍니다. ^^* 물론 플래티넘 고객한테만요. 다른 고객에게는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푸코와 교수직에 나란히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신 이가 바로 폴 리쾨르였다." 이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오는 군요.

이비 2007-03-28 09:47   좋아요 0 | URL
참고할 필독서로 <자기의 테크닉>을 소개해주셔서 검색해보았는데 잘 찾을 수가 없네요. 이 책도 역시 푸코의 저서인가요?

주니다 2007-03-28 11:52   좋아요 0 | URL
기대되는 책이군요. 번역본이 원서보다 훨씬 비싸네요. ㅎㅎ

로쟈 2007-03-28 14:42   좋아요 0 | URL
tavola님/ 제목을 제가 축약해버렸네요. <자기의 테크놀로지>입니다.^^;
주니다님/ 원서보다 비싼 게 요즘은 대세 같아요.--;

테렌티우스 2007-03-28 20:00   좋아요 0 | URL
하 희소식이네요. 그런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국내번역서의 정확한 제목은 원저와 마찬가지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가 되어야 맞습니다.

이 제목은 푸코가 주장하는 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의 이른바 '보수적인' 사람들이 기존의 윤리적 정치적 가치를 비판받을 때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는 말을 푸코가 비판적으로 인용한 내용을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불어원서도 그대로 "Il faut defendre la societe"로 출간되어 있지요(알라딘 넷에도 인용부호 없는 사회를 보호한다로 잘못 되어 있지요). 즉 일종의 비판 혹은 비아냥(?)식의 책제목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사실 푸코가 말하고 싶은 것은 - 제목을 얼핏 들었을 때의 일반적인 느낌과는 정반대로 - 차라리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고?"라는 반문에 더 가깝지요.

이는 예를 들면 독일 제3제국 시절의 어느 한 나치주의자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말이 당시 가졌을 정치적 함의를 생각해보면 그 뜻을 잘 알 수 있지요...

여하튼 로쟈님, 빠른 소개 정말 반갑고 고맙습니다.^^

로쟈 2007-03-28 22:2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국역본도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고 나와 있구요, 제가 누락시키긴 했지만.^^; 푸코의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오해의 소지는 없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그나저나 테렌치우스님의 활동도 기대가 됩니다.^^

2007-03-28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3-29 14:00   좋아요 0 | URL
**님/ 제가 알기에 푸코는 권력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공모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런 비판이 나온 게 아닌가 싶네요. 자세한 건 맥락을 봐야 할 거 같습니다...

2007-03-29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테렌티우스 2007-03-29 23: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해야 할텐데 걱정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