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준비를 하는 틈에 잠시 짬을 내어 들어가본 담론비평 사이트에서 리뷰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문학평론가이자 계간 황해문화 주간이기도 한 김명인의 한국근현대 문학사에 대한 '시론적 소묘'를 요약정리하고 있는 리뷰이다. '가족로망스'라는 구도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닌데, 국문학계에서는 아직 이러한 시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완결된 '문학사'가 기대된다.

담비(07. 03. 29) 평론가 김명인의 야심찬 '문학사 기획'

시인 김수영을 통해서 근대를 향한 성찰적 개인의 위대한 모험을, 평론가 조연현을 통해서 근대에 투항하는 복잡한 현대인의 내면을 짚어보았던 문학평론가 김명인의 문학사 쓰기가 새로운 국면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것은 한국 근대문학 1백년을 '가족'이라는 주제로 꿰뚫는 자못 거시적인 작업이어서 주목을 끈다.

김명인은 '민족문학사연구' 최근호(32호)에 발표한 '한국 근현대소설과 가족로망스'에서 자신의 이러한 과업의 "시론적 소묘"를 펼쳐보였다. 그 아이디어의 시발은 바로 프로이트다. 프로이트가 1908년에 쓴 '신경증환자의 가족 로망스'는 어린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한 모방과 동일시가 충족되지 않을때 상상의 아버지를 갈망하게 되는 신경증을 분석했다. 로버트 단턴(*린 헌트)은 이 가족로망스 이론을 프랑스혁명에 적용했다.

이런 견해를 근대소설에 적용하면 근대소설의 문제적 개인들은 신이 사라진 시대(=아버지가 부정된 시대)에 새로운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자발적 고아들이다. 특히 성장소설이 그렇다. 내발적 경로를 통해 주체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를 이룬 서구사회의 경우, 봉건체제의 부정과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이 자기사회 내의 논리에 따라 계기적으로 일어남으로 해서 비교적 낡은 아버지 부정과 새 아버지 긍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지만 식민지라는 경로를 통해 외재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의 길로 들어선 비서구 지역에서는 이것이 자연스러울 리가 없다.

낡은 아버지는 부정되어야 할 존재이면서 동시에 지켜야할 존재이며, 새로운 아버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동시에 부정해야 마땅할 존재이다. 가족로망스는 시작부터 길을 잃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버려진 존재인 식민지 고아들은 낡은 아버지를 부정할 겨를도 없이 그를 부양해야 하며, 새로운 아버지를 찾을 겨를도 없이 가짜 새 아버지와 대결해야 한다. 그들은 문제적 개인이지만, 행로가 단순하지 않고, 가족로망스는 늘 지연되고 그 자리엔 다른 악몽이 시도 때도 없이 개입해 들어온다. '피식민주체의 서사시'가 시작된 것이다. 김명인은 이런 문제의식 아래 한국 근현대소설을 개관한다.

제1기(19세기말~1920년대 초반)는 봉건체제의 붕괴와 식민체제의 형성이 동시적으로 진행된 시기이자, 넓은 의미의 '계몽주의 시대'와 엇비슷이 일치하는 시기로서 가족로망스에서 이른바 '고아의식'과 '업둥이의식'이 발생하는 시기이다.

제2기(1920년대 중반~1945년)는 '식민지 근대'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는 시기로서 부정된 아버지에 대한 복합심리와 새로운 가족에 대한 동경, 대안으로서의 형제애 등이 복잡하게 착종하는 시기이다.

제3기(해방기~1950년대)는 분단체제 형성기다. 새로운 아버지에 대한 동경이 다시 한번 좌절하고 1기의 고아 혹은 업둥이들은 아버지로서 다시 부정되거나 실종되고 2기의 소년들은 재차 더 극심한 시련 속으로 내던져진다.

제4기(1960년대~1980년대)는 한국 자본주의의 본격적 발전기이자 권위주의적 군부독재기로서 가짜 아버지에 의한 전체주의적 가족국가와 진짜 아버지의 복원열망이 충동하는 시기이다.

제5기(1990년대~현재)는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시기로서 제4기의 새로운 세대가 다시 아버지가 되고 가족로망스 자체가 붕괴되어가는 시기이다.

김명인은 이런 시기구분 하에 이광수, 염상섭, 이상, 김남천, 채만식, 최인훈, 김원일, 조세희, 방현석, 신경숙, 배수아 등의 작품이 이런 특징들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지 간단간단히 짚어나간다. 이광수의 '무정'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만든 무정한 세계에 대한 한탄과,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가짜 선구자의 곤혹스러움이 서로 용해되지 못한채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양립해있는 형국을 보여준다.(제1기)

제2기에는 카프 계열 작가들이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평등한 가족체계를 꿈꾸며 '고향', '황혼' 등의 작업을 보여주는가 하면, 그 반대편의 국민문학파가 그에 반발하며 옛날 아버지를 불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다소 단순한 반응이었고 보다 복잡한 심리는 이상과 김남천, 채만식에게서 나타난다는 게 김명인의 판단이다. 이상은 첨단의 모더니티를 향해 냅다 달렸지만, 그에게 더 절실했던 것은 어떠한 봉건적 관계의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우면서도 그의 애정결핍을 충족시켜 줄 사적인 가족 형태였으며, 그것은 곧 성적, 정서적 동반자로서의 여성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김명인은 남매애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상의 여성집착은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차라리 손위 누이를 감싸 안는 김남천이나, 손아래 누이를 지키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소년 주체가 제시되는 채만식을 주목한다.

하지만 제3기에서 김남천과 채만식이 남겨놓은 씩씩한 소년들은 타락하지 않은 시원의 아버지를 만났는가. 아니면 스스로 좋은 아버지가 됐는가. 최인훈의 '광장'에서 이명준이라는 청년은 남북 양쪽의 아버지들이 가짜라는 눈치를 챘지만, 새로운 아버지에 대한 열망보다는 가짜 아버지들에 대한 절망이 더 커서 전도된 남매애로서의 여성에 대한 성적 집착의 길을 걷다가 결국 이 땅에서 탈주했다.

제4기에 들어서면 가짜 아버지에 대한 부정과 그가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가족국가에 대한 거부가 두 방향으로 본격화된다. 하나는 '분단소설'들로서 가족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지워진 아버지를 되살리려는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소설에서 보여지는 형제애에 기초한 가족의 형성욕망이다. 김원일이 '노을', '어둠의 혼'에서 분단동이들은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부정하기도 전에, 더 큰 외부의 힘이 아버지를 부정해버린 제1기의 고아들과 비슷한 형국인데, 이들에게 미래의 가족로망스는 곧 과거의 아버지를 되살려내는 것이라는 역설적 상황이 주어진다. 발전의 서사와 대비하여 '복원의 서사'라 부를 만한 이런 경향은 비극적 식민지를 겪은 제3세계 문학의 공통된 경향이라고 김명인은 말한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자본주의체제의 형성과정에서 눌려서 난장이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위한 복수의 서사다. 이 작품은 80년대의 급진화하는 가족로망스를 예비하는 성격을 가지면서도, 봉건시대로 거슬로 올라가는 노예적 가족사의 사슬을 끊고자 하는 비원도 담고 있다. 방현석의 '내일을 여는 집'은 노동계급운동의 미증유의 활성화라는 분위기와 맞물려 본격적인 사회주의적 형제애에 기초한 가족로망스를 구가하였으나, 희망태에 불과했고, 지금 돌아보면 어딘가 허망하고 고립된, 1980년대적으로 특수화된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정리한다.

90년대에 들어오면 가족로망스는 현격히 쇠퇴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집단무의식의 문제로는 포착하기가 힘들게 되어 버렸다. 부-모-자녀로 이루어지던 최소단위도 유지하기가 힘들게 돼 구성원들은 단자로 내몰렸다. 불륜소설이 붐을 이뤘고, 신경숙, 조경란, 공선옥 등이 예외적으로 가족이라는 굴레로부터의 이탈과 가족을 추수려 세우려는 노력을 보여 예외적 현상으로 남았다.

김명인은 이상의 가족로망스에서 그 주체가 '아버지-아들'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식민지의 이 기구한 가족로망스 속에서조차 여전히 타자이자 또다른 식민지였던 여성의 역사를 겹쳐놓는다. 나혜석, 강경애, 박완서, 신경숙, 배수아의 소설로 계보를 이어가는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여성의 삶'은 때론 비극적이고 적나라하고 지그재그적 행보를 보여준다. 배수아의 소설집 '바람인형'에 오면 여성으로서 성장한다는 것은 곧 그 여성-인간을 살해하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명제를 입증하는데 바쳐진다.

김명인은 이러한 여성 주체의 근대적, 혹은 탈근대적 해방이라는 주제야말로 주목할한만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자체가 세계사적 보편성과 당대적 폭발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근대/식민지 근대가 낳은 사회체제, 문화, 이데올로기 전반의 문제들을 가로지르고 재구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근본적(radical) 거대주제라는 점에서 가족로망스의 악순환과 근대적 삶에 편만한 식민성을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 잠재력을 내장하고 있다고 말한다.(리뷰팀)

07. 03. 29.

P.S. 가장 최근에 낸 김명인의 평론집은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6)이다. 책에 관해서는 프레시안의 관련기사가 유익하다(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6092917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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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4-01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버트 단턴은 이 가족로망스 이론을 프랑스혁명에 적용했다<---린 헌트 아닌가요?

로쟈 2007-04-01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필자나 리뷰팀의 착오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