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문학사이' 이번주는 손택수 시인이다.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과 <목련전차>(창비, 2006),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이자 기대주이다(연배 자체가 젊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작년에 시집 <목련전차>가 나왔을 때 호의적인 평문을 여럿 보았음에도 시집을 구입해놓지 않았었는데, 올봄 목련이 다 지기 전에 다 읽어봐야겠다. 젊은 평론가 신형철의 리뷰(그는 "손택수는 문태준과 더불어 1970년대산 서정시의 젊은 본령"이라고 평한다)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3. 31) [작가와 문학사이](12)손택수-사연을 품어 마음을 열다
손택수(孫宅洙)라는 이름 안에는 풍경이 있다. 강 흐르는 곳에 집 한 채. 택수야아, 하고 누가 부르는 소리 같은 것도 얼핏 들리는 이름이다. 1970년 전남 담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고 거기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98년에 시인이 되었고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송곳니로 삶을 꽉 물고 놓지 않는, (…) 생동하는 민중서사적 시인”(이시영)이라는 평이 있었다. 저 유년의 기억이 이 시인의 8할을 만들었던가 싶다. 동세대 시인들과 그의 차이가 그 어름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시란 무엇이고 시인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이런 식의 대답이 그의 것이다.

눈 내리면 호랑이 발자국 모양의 장갑을 끼고 산간지대를 어슬렁거리며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물정 모르는 이들은 멸종한 호랑이의 출현에 들뜰 것이다. 이것은 썩 유쾌한 파문이 아닌가(‘호랑이 발자국’). 반대 방향으로 박혀 있는 비늘을 역린(逆鱗)이라 한다. 이것은 “제 몸을 거스르는 몸”이자 “은빛 급브레이크” 같은 것일 텐데,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낙향하는 친구로 말하자면 이 역린의 희생자쯤 되지 않겠는가(‘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그렇다면 시인이란 멸종한 호랑이 흉내를 내고 다니는 자일 것이고 시란 저 혼자 세태의 반대방향으로 뻗어 있는 역린 같은 것이겠다. 은빛 급브레이크 한 편 읽는다.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스윽, 제비 한 마리가,/집을 관통했다//그 하얀 아랫배,/내 낯바닥에/닿을 듯 말 듯,/한 순간에,/스쳐지나가 버렸다//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그야말로 무방비로/앞뒤로 뻥/뚫려버린 순간,//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방심(放心)’ 전문)
앞뒤 문을 다 열어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마음을 놓아버리고 드러누워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집도 사람도 모두 방심한 터라 제비가 묘기 한 번 부려보고 싶었겠다. 그 찰나의 체험에서 눈 밝고 몸 예민한 시인들은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도 보고 몸의 숨구멍들이 죄다 열리는 듯한 경이도 느낀다. 이런 시들이 있어서 메트로폴리스의 숨구멍도 가끔씩은 탁탁 열린다. ‘결심’이 아니라 ‘방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편히 내려놓아야 그 틈으로 시도 찾아들어오곤 하는 것이다.
그 방심은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여는 일이기도 하다. 열린 마음속으로 타인들의 곡절이 흘러들어온다. 그의 시들은 사연을 품고 있을 때 특히 아름다워진다. 추석날 고향에도 못 가고 화장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로 흐느껴 우는 안마사 김양 누나의 사연이 있고(‘추석달’), 목련 전차를 타고 간 동래온천에서 신혼 첫날밤을 보낸 어머니 아버지의 사연이 있고(‘목련전차’), 보험서류를 들고 찾아온 여자 후배의 입에서 문득 튀어나온 ‘자기’라는 말이 둘 다를 무안하게 한 사연도 있다(‘자기라는 말에 종신보험을 들다’). ‘작업을 걸면서’ 쓰는 시들이 아니라 ‘작업을 당하면서’ 쓰는 시들이어서 이리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좀 들어야 한다. 네 말이 내 모서리를 갉아먹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너의 사연을 먼저 수락하지 않고서는 내가 네게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서정시가 세상과 연애하는 방식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너의 사연을 받아 안지 않으면 내 말이 둥글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손택수는 문태준과 더불어 70년대산 서정시의 젊은 본령이다. 방심한 자가 뜨는 사랑의 눈 덕분에 얻은 성취라고 믿는다. 그는 작업 당하는 데 선수다.(신형철|문학평론가)

컬처뉴스(06. 06. 23) "시는 일상에 탁 끼어드는 생명의 박동"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 스윽, 제비 한마리가, / 집을 관통했다 / (…) /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 그야말로 무방비로 / 앞뒤로 뻥 / 뚫려버린 순간,” - 「放心」(『목련전차』, 창비, 2006) 중에서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에서 가족의 서사를 중심으로 깊은 서정을 뿜어냈던 손택수(36)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목련전차』(창비)를 펴냈다. 이번 두 번째 시집에서는 시인의 가족에서 시작됐던 서정의 시선이 도시문명의 속도에 뒤쳐지는 혹은 그것을 거부하는 남루한 삶들에 대한 연민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19일(월) 홍대 인근 카페에서 고봉준 문학평론가와 함께 만난 시인은 “그것은 자신을 향한 연민이기도 하다”고 털어놓는다. 2년 전 결혼과 함께 30년이란 세월을 함께 했던 ‘부산’을 등지고 일산으로 이사 온 그는 “부산이 내게 줬던 이미지가 근대라는, 도저히 내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도시공간이었는데, 일산이라는 공간은 더 그렇죠”라고 말한다.
‘부산’이 나에게 준 두 가지
흙냄새 풀풀 나는 전남 담양 ‘봉산’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항구도시 ‘부산’에 살다가 수도권 신도시 ‘일산’으로 주거지를 옮겨온 시인. ‘농경문화적 상상력’이 서정의 근간에 깔려 있는 시인에게 이 같은 공간들이 주는 의미가 적지 않아 보인다.
“공간이란 것은 제가 구체적 실존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예요. 때문에 흙을 만져보고 흙을 먹어봤던 저로서는 대지라는 공간이 최초로 세계와 밀착감을 느낀 곳이라 할 수 있는데요. 그곳을 벗어나 부산이라는 공간에 왔을 때 순환적인 시간 속에 있다가 탁하고 끊어져버린 듯한 공포감이 들었어요.”
부산역에 다다랐을 때 산꼭대기에 다닥다닥 모여 있는 집들을 보면서 ‘뭐 이따위 도시가 다 있나’라고 생각했다는 시인은 “근대적 시간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시인은 ‘촌놈근성’이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시인에게 ‘공간’이라는 것은 시인이 화두로 삼고 있는 근대라는 ‘시간’과 맞물려 있다. 때문에 근대적 공간으로서의 ‘부산’은 시인에게 근대라는 시간을 함께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시인에게 ‘부산’이 부정적인 공간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부산을 통해 “근대 도시공간이 놓쳐버린 신화체험과 오래된 미래, 가치적 미래를 향한 역방향으로의 진화와 더불어 시원을 향해 끝없이 퇴보하고 싶은 적극적인 퇴행의 욕망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흙에만 있었다면 미처 지나치고 말았을지도 모를 시원에 대한 지향점을 ‘부산’이 발견하게 해준 것이다. 시인이 이번 시집의 끝 시로 「미조항」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다. 부산은 시인에게 닫힘과 열림을 동시에 준 공간이기 때문이다.
“철길이 바다로 들어간다 // 19번 국도의 출발점, 표지판 속의 0km / 0을 갓 낳은 물새알처럼 품고 있는 어항 // 나는 길을 통해 늘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길은 나를 통해 매번 바다에 이르고자 했다 / (…)” - 「미조항」(『목련전차』, 창비, 2006) 중에서
달빛이 화장지를 들고 제비에게 쉬러오다
90년대 이후 전통적인 서정의 문법이 변하기 시작했다. 신서정 또는 서정의 진화라는 이름 하에 탄생한 이른바 미래파 시인들의 낯선 화법과 종잡을 수 없는 파격이 그것인데. 이러한 동시대 문학의 변화 속에서 재래적인 시 문법을 고집하며 일각의 흐름을 거스르는 지점에 손 시인이 있다.
“제 시의 근간을 ‘농경문화적 상상력’이라고 흔히 말하는데요. 그것이 정말 퇴행적이고 복고적인 것이 될 수 있지만 그런 형식을 통해서나마 지금의 질서, 지금의 속도에 대한 반성의 기제가 됐으면 하는 소박한 믿음이 저 나름대로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시집은 이러한 시인의 소박한 마음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소박하지만은 않다. 시인은 삶의 근간인 ‘집’과 ‘땅’을 통해 사람과 우주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는 단칸집이다 / 시름시름 기울어가던 처마 끝이다 // 진흙둥지 되바르며 보수공사에 여념이 없는 제비 한쌍 / 신접살림을 차렸다 (…) 이 허름한 적산가옥에 세를 들러 온 두 내외 / 덕분에 가난한 나도 / 이제는 어엿한 집주인이 된 셈인가 / (…) / 달빛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와서 하룻밤 묶었다 간 뒤다” - 「제비에게 세를 주다」(『목련전차』, 창비, 2006) 중에서
제비가 세를 든 ‘집’은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제비 덕에 집주인이 된 ‘화자’와 광활한 우주의 한 지점에 있는 ‘달빛’을 연결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열림은 모든 세계를 향해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 환하게 뚫려”(「화엄일박」)있는 ‘구멍’과도 연결된다.
“오늘이 그날 같고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생명감을 잃고 살기 쉬운데, 그 일상의 흐름의 중간에 탁 끼어들어서 순간적으로 생명의 박동음에 가 닿게 하는 시적 순간이 있잖아요. 아마도 저에게는 신화적 관심이 바로 그것의 기제가 되는 것 같은데, 그것을 집과 몸과 우주와 연결시켜 얘기한 것 같아요.”

잘 쓴 시가 아닌 나의 시 쓰고 싶어
시인에게 향후 계획을 물었더니 굉장한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저도 몰라요”라는 말이 되돌아온다. “시 한편을 쓸 때도 이 시가 어떻게 끝맺음을 할지 모르거든요. 그러니 제 시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더더욱 모를 일이죠”라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답변이 내심 미안했는지 “다만 모험을 향해, 황무지를 향해 유배를 내리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하얀 종이 앞에 서면 늘 막막하거든요. 그 막막함이 나를 깨어있게 하고 살아있게 하는 것 같아요”라고 덧붙인다.
시인에게 문학은 “스스로를 버티게 하는 힘”이라고 했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의 방편으로서의 힘이 아니라 그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근거로서의 힘이다. 때문에 시인은 “시를 잘 쓰고자 하는 욕망은 버리고 나의 시를 쓰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마음을 다잡는다.(위지혜 기자)
07. 0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