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을 하는 날이다. 예년 같으면 그냥 얻어다 먹었지만 어머니가 60포기나 되는 김장을 담그시기로 해서 며느리들을 모두 소집했고, 제일 '한가한' 나에겐 잔심부름과 애들 보는 역이 맡겨졌지만 무료한 탓에 페이퍼나 올리고 있다. 계간 <문학동네>(겨울호)의 젊은 작가 특집은 김애란을 다루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북데일리의 기사를 옮겨놓는다(고아라 기자의 기사들이 자주 눈에 띄는군). 그러고 보면 김애란씨에 대해서는 나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 듯하다. 

 

 

 

 

 

 

 

 

 

 

 북데일리(06. 11. 24) 김애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

“출판계와 저널리즘에 이르는 오늘날 문단의 불문율 중 하나는 ‘김애란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한다. 진보적 리얼리스트들에서부터 전위적 모더니스트들에 이르기까지, 젠체하는 비평가들에서부터 자유분방한 독자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작가론 ‘소녀는 스피노자를 읽는다’)에서 던진 질문이다.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려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그가 제시하는 ‘우리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그녀가 ‘명랑’하기 때문이다. 명랑하다는 건 상처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김애란의 인물들은 IMF 현실, 서울 문화의 은근한 배타성, 가족의 결핍 등과 마주친다. 그들은 상처를 받지 않을 만큼, 혹은 상처에 맞서 싸울 만큼 강하지 못하다. 조력해줄 키다리 아저씨도 없다. 국가도, 이념도, 가족도 무력하다. 하지만 고독한 개인의 안간힘으로 상처를 이겨낸다. 그 마주침의 기록이 핍진하고 그 안간힘이 애틋하다.

둘째. 김애란의 중성(中性)성. 그녀의 인물들은 자신의 성별에 의지하지 않는다. 마주침과 견뎌냄의 과정에 어떤 성별 논리도 개입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특별히 겪게 되는 마주침은 없다. 그들의 슬픔, 그 슬픔의 처리과정도 중성적이다. 이 중성성이 그녀의 명랑성을 만든다.

신형철의 열렬한 ‘김애란 애찬론’은, 그녀의 작품들을 공간, 소통, 가족, 욕망의 측면에서 조망한 평론 내내 이어진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김애란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 이가, 비단 신형철 한 명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울대 백낙청 명예교수는 계간 ‘창비’ 봄호에서 “최근 문학현장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을 준 신인작가”로 박민규와 김애란을 함께 언급한 바 있다. 솔출판사 임우기 대표는 계간 ‘유역’ 창간호에서 그녀의 소설을 “영성적 문학의 소중한 싹”이라고 표현했다.

작년 8월 김애란이 창작집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순원문학상 예심을 통과하지 못했을 때 몇몇 심사위원이 “규정을 바꾸라”며 반기를 들고 나섰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작년 11월 그녀는 ‘달려라, 아비’로 역대 최연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애란의 첫 창작집 <달려라, 아비>(창비. 2005)는 출간 한 달 만에 판매부수 1만부를 넘기며, 한동안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일반 독자들 역시 그녀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 그렇다면 정말, 신형철의 말대로 모든 사람이 김애란을 사랑하는 걸까. 물론 아니다. 그녀의 소설에 대해 실망의 목소리를 감추지 않는 독자도 있다(*우리 동네 분들이다!).

“하도 칭찬일색이기에 주문해서 읽은 책이건만 너무 실망. 자기 독백에 곁들여진 화려한 말솜씨뿐 아무것도 없다. 스토리도, 줄거리도 없다. 유머도 재치도 없다.” (알라딘 ‘기억의 집’)

“김애란의 소설들은 트렌디 드라마를 닮아 있다. 밝고, 새롭고, 경쾌하지만, 현실성이 없다. 울고 짜고 배신과 복수가 판을 치는 멜로드라마에 식상한 사람에게 트렌디 드라마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두어 편 보고 나면 금세 질리고 만다.” (알라딘 ‘urblue’)

김애란은 이제 막 스타트를 끊은 작가다. 그녀를 사랑하고, 하지 않고를 결정하기엔 섣부른 감이 있다는 말이다. 선택은 그녀의 장편이 나온 후로 미뤄둬도 그리 늦은 일은 아니지 싶다. 개인적인 바람을 한 가지 덧붙이자면,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 날까지 ‘달려라, 김애란’.

06. 11. 24.

P.S. 개인적으론 김애란의 일부 소설들을 좋아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소설들도 없지 않다. 내가 주목하는 건 단순하게도 '삶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느냐의 여부이다. 그 점에서 그녀는 얼마간 신뢰를 준다. 그녀의 본격적인 소설(장편소설)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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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2006-11-24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틈틈이 로쟈님이 올리신 글들을 읽고 있어요. 그런데 어디까지가 기사문이고 어디까지가 로쟈님 글인지 모르겠어요. 저만 그런가요? 색깔이나 구획선으로 구별해주시면 로쟈님 생각을 빨리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ㅅ^

로쟈 2006-11-24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소 불편하시겠네요.^^ 인용문에 코멘트를 집어넣을 때는 언제난 *표시를 합니다. 그밖에 인용되는 기사에 제가 끼여드는 경우는 없구요, 강조표시만 해둡니다. 인용문이 길 경우에 다소 혼동의 소지가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색깔은 부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취향상 많이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기인 2006-11-2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또 퍼갑니다. 신형철 선배가 정말 주목받고 있는 평론가인가 보네요. ㅎ :)

로쟈 2006-11-2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히 발군의 기량을 뽑내고 있습니다. 첫평론집이 나오면 보다 명확해지겠죠...

sommer 2006-11-25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를 사랑하는' 소녀에 관한 글을 읽다가, 그리고 그녀의 자전소설을 읽다가 문득 불능이 아닌 '부재'를 '상상'으로 대체하는 데서 그녀가 명랑으로 인도되는 건 아닐까 긁적이게 되더군요...

로쟈 2006-11-2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잡지를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긁적거리시는 김에 끄적거리시면 '김애란론'이 되지요.^^
 

러시아 관련 국내기사는 대부분 (1)북핵 (2)에너지 (3)테러에 집중돼 있는 듯하다. 우리의 관심과 맞닿아 있는 탓이겠다(하긴 어제는 러시아의 곰들이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지구 온난화가 이유라고). 예전에 러시아의 국영 에너지기업 '가즈프롬'에 관한 페이퍼를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오마이뉴스에 '러시아 에너지'의 근황에 관한 기사에 올라와 있어서 옮겨놓는다. 같이 읽어볼 만한 관련서들이 많지는 않은데, 요는 에너지 주권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러시아 제국'은 무엇보다도 '에너지 제국'이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06. 11. 23) 에너지의 힘... 러시아가 돌아왔다

러시아가 돌아왔다. 과거의 '핵'을 버리고 신무기인 '에너지'로 무장했다. 소련 붕괴 이후 '종이 호랑이' 신세로 전락했던 과거의 러시아는 어디를 둘러봐도 없다. 소련이 붕괴했을 때 유럽연합은 언젠가 러시아가 다시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올초 러시아는 유럽연합에 잊을 수 없는 새해 선물(?)을 선사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가격협상 논쟁을 벌이다 급기야 유럽으로 향하는 천연가스 공급을 일시 중단했다. 가스중단은 우크라이나에 한정되어 우려했던 '비상사태'는 없었지만, 수송관이 우크라이나를 지나 유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볼 때 그 의미는 분명했다.

이후 유럽연합은 해결해야 할 최선의 문제로 '에너지 독립'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렇다할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게 되자, 유럽연합은 에너지 부문의 자유시장 관계를 규정하는 '에너지 헌장' 문제를 부각시켜 러시아에 대응했다. 유럽연합은 러시아 이외의 국가에 대한 가스 수송망 자유 이용을 위한 국제 에너지 헌장의 비준을 요구했다(러시아는 1994년에 서명은 했지만, 현재까지 비준을 하고 있지 않다).

러시아 "EU는 이중잣대를 버려라"

러시아 측 입장은 간단하다. 러시아에게는 불공정하고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비준일 뿐이다, 따라서 '유럽연합이 러시아에 진출하면 투자와 국제화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러시아가 유럽연합에 진출하면 러시아 독점기업의 시장 확대'라는 이중잣대를 버리고 러시아에게도 공정한 기회와 게임의 룰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한 예로 최근 러시아 국영가스기업 가즈프롬은 영국의 에너지 회사 센트리카(Centrica)를 인수-합병하려다 영국정부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지난 22일 러시아 외무장관인 세르게이 라브로프는 "러시아는 에너지 헌장에 비준하지 않겠다, 이에 대해 이미 러시아는 여러 차례 밝혔다"고 말했다. 러시아에게 가스는 '피'와 같은, 가스 수송관은 '핏줄'과도 같은 존재이다.

한편, 세계 시가총액 톱10에 진입한 러시아 에너지 독점기업 '가즈프롬'은 인수-합병과 투자에 집중하며 에너지 분야와 가스 파이프라인 확대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15일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가즈프롬의 올해 9월까지의 순이익은 작년보다 무려 76.6%나 증가한 약 2360억 루블(약 90억달러)이라고 한다.



러시아 '가즈프롬' 제국 탄생

가즈프롬은 유럽연합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다. 유럽연합에 약 25%의 가스(러시아 가스 수출의 약 67%)를 수출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가스분쟁 사태의 중심에 서있었다. 가즈프롬의 경영진은 모두 푸틴의 최측근들이고 회사의 전략과 비전은 러시아 에너지 정책을 대변한다.

석유와는 달리 수송관을 통해 들어오는 가스는 유럽연합을 러시아에 더욱 더 의존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독일은 가즈프롬과 발트해를 통해 독일로 들어오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미래의 안전한 가스 보급망을 확보했고 프랑스는 제2의 가스공급자인 알제리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하며 원자력 에너지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유럽연합을 이끌어가는 프랑스와 독일의 이런 발빠른 전략과 책략은 러시아 가스에 의존도가 높은 동유럽과 발틱국가들에게 위기와 배신감을 가져다 주고 있다. 독일과 러시아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폴란드의 입장을 대변하듯, 폴란드 국방부 장관은 러-독 가스관 사업(Nord Stream)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 불가침 조약)이라고 비꼬아 불렀다.



독-러 공동가스관 사업 = 독-소 불가침조약?

한편, 오는 24일 유럽연합 25개 회원국들은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유럽연합·러시아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전략적 파트너십' 협약을 맺을 계획이다. 그런데 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폴란드가 자국의 육류 제품에 대한 러시아의 금수조치를 이유로 유럽연합·러시아 정상회담에 보이콧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럽연합의 규정은 회원국 전원의 동의하에만 러시아와 새 협약을 체결할 수가 있다.

따라서 유럽연합은 폴란드를 설득하는 입장이고 의견 차이로 대립하는 모습마저 나타나고 있다. 유럽연합은 러시아와의 에너지 분야를 포함한 전략적 파트너십이 적극 필요한 상황에서 폴란드의 돌출 행위가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편 폴란드의 이번 행동은 유럽연합내에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러시아에 압박을 가하려는 모습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오히려 유럽연합의 분열과 대립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 22일 대통령 보좌관 세르게이 야스트르젬브스키는 기자회견을 통해 폴란드의 딴지를 이렇게 비꼬아 말했다. "유럽연합은 자신의 문제에 봉착해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닌 러시아로서는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유럽연합은 최근 러시아의 '여기자 살해 사건'과 영국에서의 '전 KGB요원의 독살사건'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테러를 자행한다고 러시아를 비난하며 정치적으로 압박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오히려 유럽연합의 이중잣대를 비난하고 있다.

중요한 건 유럽연합의 어떤 공세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에너지 국유화 정책과 강한 러시아 건설은 전세계에 '러시아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 위협적이고 지능적인 무기를 가지고 돌아온 러시아 제국은 부활하고 있다.(정인고 기자)

06.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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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학판>이 5주년 기념호를 냈다(어느덧 '중견' 잡지의 대열에 들어서는 듯하다). 2006년 겨울호가 그것이다(계간지 겨울호들이 계절을 더욱 재촉하는 듯하다). 자체 소개에 따르면, "전위적이며 독창적인 작업을 실험하는 작가들의 활동을 지지해온 계간 <문학 판>의 창간 5주년을 맞이했다. 2001년 겨울, 편집인 이인성은 '문학의 상업화에 맞선다는 기본 취지 아래 대중적 감각과 지성적 이해를 결합'시키며, '평단에서 소외된 신인작가의 전위적 작업을 부각'시키겠다는 포부로 창간 의의를 밝힌 바 있다."

"이번 호 특집은 새로운 문학 세대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자리로 꾸몄다. 김진수, 손정수 두 평론가가 각각 시와 소설 분야의 새로운 세대의 문학에 대해 논했다. 시인 김민정, 진은영, 황병승, 김태형, 소설가 구경미, 편혜영, 김중혁, 김애란, 평론가 허윤진, 신형철 등 각 장르의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열 명의 작가들이 각자의 글쓰기의 근거에 대해 발언했다."고 돼 있다. 이에 대한 최재봉 기자의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6. 11. 24) 문단 막내들에게 듣는 ‘문학이란?’

“말하자면 어떤 그리움이나 상실감이 없는 채로, 부정해야 할 대상도 없고 증언하고 싶은 시절도 없이, 고백해야 할 내면이나 문학적 책임의식도 없는 20세기 막바지 세대가 21세기에 문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소설가 편혜영(34)씨가 <문학/판> 겨울호에 쓴 ‘교본의 시간’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전통적으로 문학 창작의 동기로 꼽히는 요소들을 두루 나열하면서 그 어느 것 하나도 제 몫이 아닌 채로 문학을 해야 하는 세대로서의 자괴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 글은 <문학/판>이 창간 5주년을 맞아 기획한 특집 ‘21세기 문학세대’에 포함되었다.

이 기획에는 시인 진은영 김태형 김민정 황병승씨와 소설가 구경미 편혜영 김중혁 김애란씨, 그리고 평론가 허윤진 신형철씨 등 10명이 참여했다. ‘우리는 문학으로 무엇을 하는가’라는 편집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의 이 특집에 참여한 이들은 1980년생인 김애란 허윤진씨를 제하고는 모두 1970년대생이다. 문단의 막내들이라 할 만하다.

대부분이 도시 태생인 이들에게는 “오히려 알 수 없는 전원과 자연의 풍경을 보면 두려움이 느껴”지며 “회색 콘크리트가 기왓장이나 대청마루처럼, 전봇대가 마을 앞의 수령 깊은 나무처럼 느껴진다.”(편혜영) ‘전통 서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이 젊은 시인들은 종종 ‘미래파’라는 저널리스틱한 이름으로 뭉뚱그려지기도 하는데, 그 대표자 격인 황병승씨가 “나는 미래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흥미롭다. 미래파는 그 이름을 창안한 이의 의도와는 달리 자주 비판과 공격에 노출된다. 자폐적 상상력과 폭력적인 이미지, 대중문화적 기호의 범람이 주로 빌미를 제공한다. 황병승씨 글의 마지막은 그를 의식한 것 같다: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승리가 있다/배척된 채로/배척된 채로”

비장한 결의와 뻔뻔한(?) 각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은영씨의 말을 들어보자. “우린 다소 지겹다. 지나치게 전복적인 것이 아니라 다소 빤하고 몇 가지 문학적 수사에만 능숙하다. 우린 너무 쉽다. 결코 난해하지 않다. 몇몇 인디밴드 음악이나 일본만화, 퀴어문화 등등 특정한 문화적 코드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사실은 누군가를 감염시키는 데 실패했다.(…)우리는 복화술사가 아니라 특정문화를 소비하는 부류의 또렷한 입으로 전락할 위기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른다. 무성한 소문과 달리 아직 우리는 새로운 문학으로 탄생하기 이전이다.”

아마도 21세기에 문학에 종사하는 이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주창한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일 것이다. 자기 안에 갇혀 사회 전체의 긴급한 현안에 대응하지 못하는 지금의 문학은 본래적 의미의 문학에서 멀어졌으므로 지금 문학은 없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주장이다. 이제 막 문학을 시작하는 이들을 향해 누군가는 문학이 진작 끝났노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낭패가! 신형철씨의 화려한 글 ‘몰락의 에티카­: 21세기 문학 사용법’은 가라타니의 선언을 크게 의식하고 있다.

“거인으로서의 문학이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본래 난쟁이였고, 더 작게는 ‘짱돌’이었으며, 더욱더 작게는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 가장 ‘협소한’ 영역 안에서 가장 ‘깊게’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문학이라 하면 어떨까.(…)넓은 총체성이 아니라 깊은 총체성 말이다.”

“다른 총체성이 있고 다른 윤리가 있다”고 신형철씨는 주장한다. 그 새로운 총체성의 이름은 ‘파편으로서의 총체성’이라고. “21세기라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면서 여전히 아름다움과 상상력에 대한 믿음을 피력하는 김중혁씨의 글은 평론가의 주장과 다르면서도 같다.(최재봉 기자)

06. 11. 24.

P.S. 굳이 분류하자면 '20세기 문학독자'로서 내가 동감하는 견해는 시인 진은영씨의 것이다. 일곱 가지 항목으로 규정하면, '21세기 문학'은 (1)다소 지겹다. (2)지나치게 전복적인 것이 아니라 다소 빤하고 (3)몇 가지 문학적 수사에만 능숙하다. (4)너무 쉽다. (5)결코 난해하지 않다. (6)몇몇 인디밴드 음악이나 일본만화, 퀴어문화 등등 특정한 문화적 코드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7)사실은 누군가를 감염시키는 데 실패했다.

"거인으로서의 문학이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건 '21세기 문학세대'의 활기찬(하지만 수세적인) 상상력이다. '본래'라는 어사가 굳이 동원될 필요가 있을까? 지겹고 빤하고 쉽고 그래서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 그 '바닥'에서 뭔가 기대해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몰락의 에티카'는 몰락의 승인을 전제로 작동하는 윤리학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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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24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어. 저 중 진은영 시인이 '우리'라고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닐텐데. (물론 긍정적 의미로). 진은영 시인 또한,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지양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읽히는 데요. 구해서 읽어봐야겠네요. 퍼갑니다. :)

로쟈 2006-11-2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기사상으론 '우리', 혹은 '우리세대 문학'에 대한 고백으로 읽히는데요...
 

드라마 '황진이'를 잠깐 보니 하지원이 시조 한 수를 읊조리는 게 나온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라고 시작되는 시조이다. 문득 오래전에 황진이의 시조 한 수에 대해서 주석을 덧붙인 글이 생각났다(그때는 전기소설은커녕 관련자료도 거의 없었다).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이라고 이름붙인 것인데(페이퍼로 올려져 있다) 다시 찾아보니 이미지들이 여기저기 깨져 있다. 황진이의 시조와 관련되는 대목만 옮겨놓고, '황진이의 유머'라고 다시 제목을 붙여둔다. 그간에 나온 황진이 소설과 관련서들을 보면 거의 '황진이 산업' 수준이 아닐까 싶은 정도이다. 주석본 <나, 황진이>(푸른역사, 2002) 정도는 언제 읽어봐야겠다.   

 

 

 

 

-어져 내 일이야... Oh, my business!..

-먼저, ‘어져’에 대해서 말하여야 한다. ‘어져’가 전제로 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라는 두 시간적 계기이다. 그런데 이 두 계기는 따로 놓여 있지 않다. 그것들은 겹쳐 놓인다. ‘어져’는 이 겹쳐 놓임의 양태에 대한 평가적 발화의 한 가지이다. 두 음절의 이 발화가 집약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어떤 사건에 대한 현재의 안타까운 회한이다. 이 회한은 세계-내-존재로서의 유한한 인간이 이 세계에 지불하고 있는 자신의 몸값이며, 자기 삶의 무게이다. 현재의 우리는 간혹 목욕탕에 가 체중계에 올라서듯이 과거의 한 시점을 불러내어 닦아세운다. 자백해라, 왜 그랬더냐?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어리석음(=무지) 때문이었다(‘그릴 줄을 모로더냐?’). 이 어리석음이 과거가 저지른 과오이다. 그리고 ‘어져’는 이렇듯 겹쳐 놓인 어리석음과 안타까움에 대한 우리의 평가적 발화이다.

-다음, ‘내 일’이란 건 ‘어져’가 포괄하고 있는 사태를 모두 뭉뚱그리는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렇게 뭉뚱그려진 사태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저질러놓고 후회하는 일은 그것이 반복되면서 비로소 제값의 ‘일’(=업)이 된다. 그것은 내가 저질러놓은 일이면서 내가 끊임없이 저지르게 될 일이다(그래서 ‘내’ 일이다). 우리의 회한은 결코 우리의 어리석음을 구제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러니 어이하랴, 결국 어리석게도 나는 또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 이것도 비즈니스라고? 빌어먹을!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더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나는 중장의 ‘제 구태여’를 ‘제 구태여 가랴마는’이 도치된 것으로 읽는다(혹자는 ‘제 구태여 보내고’로 읽는다. *원래는 고어(古語) 표기로 인용했었는데, 여기서는 현대어 표기로 바꾸었다). ‘가랴마는’ 뒤에 (구태여) 덧말로 붙여진 ‘구태여’가 정치된 ‘제 구태여 가랴마는’의 ‘구태여’보다 효과적이다. 말의 기능면에서 그렇다. 여기서 ‘구태여’의 주체는 님이다. 즉 내가 가는 걸 말렸더라면(=그냥 가게 내버려둔 나의 과오) 구태여 님이(=지가) 떠났겠는가(=그리고 뒤늦은 회한), 라는 것이 중장의 내용이다. 종장의 ‘보내고 그리는 정’은 이 과오-회한의 구도를 그대로 집약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도가 바로 서정(시)의 구도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단순한 서정이라면 흔한 서정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른바 기질지성(氣質之性)의 푸념을 조금 멋을 내어(‘나도 몰라 하노라’) 표현한 것. 나는 조금 더 복잡하게 읽고 싶다. 이른바 ‘복잡한 서정’이란 무엇인가? 다시 중장. 가는 걸 말린다고 해서 못 이기는 체 눌러앉는 작자를 님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님은 적어도 일류의 기녀(=황진이)라면 용납할 수 없을 님이다(품위가 떨어지는 님이기에 그렇다). 우리의 님은 (부여잡고) 말렸더라도 결단코/구태여 떠나갔을 것이다(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며). 그리고 우리에겐 그리움의 몫만을 남겨놓았을 것이다. 그런 님을 두고 짐짓 내가 가는 걸 말렸더라면 구태여 떠났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은 이중의 전략이며 복잡한 서정의 결과이다.



-어차피 떠나고 말 님을 이시라 하며 말리는 것은 성과가 없는 일일 뿐더러 정나미 떨어뜨리는 일이며 자존심만 구기는 일이다(이류들은 이런 일에 구애 받지 않겠지만). 그러니 그냥 가게 내버려두는 것. 이 사소한 과오 덕분에 나는 잘난 자존심과 님 그리는 정을 모두 지켜낸다. 그래도 이만한 어리석음(=과오)이라면 뒤집어쓰고 남을 만하지 않을까, 라는 계산이 바로 복잡한 서정이고 이중의 전략이다.

-나는 이걸 달리 ‘유머’라고 부른다(밀란 쿤데라는 ‘좋은 기분’이라고 부른다). 유머란 우리 내부의 모순들이 우리를 쓰라리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고양된 의식이다. 나의 자존심은 님을 떠나가게 할 수도 없고 눌러 있게 할 수도 없다. 이것은 모순이다. 이 모순을 쓰라리거나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길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어져 내 일’이다.

-이 시(조)에서 ‘내 일’은 ‘돌이킬 수도 있었던 과거’, 그래서 ‘달라질 수도 있었던 현재’라는 어떤 다른 삶의 (희박한) 가능성을 불행한 현실과 대질시킴으로써 완료된다. 이 일로 물론 구제 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루만져줄 수 있을 따름. 그럼에도 이 어루만짐(=유머)은 소중한 것이며 오직 유한한 인간, 중간쯤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특권적인 라이프 스타일이다...

06.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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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6-11-24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머라기 보다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해 통찰하는 힘이 뛰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녀의 모순된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자가 황진이 자신, 그 상황에 개입한 님, 그 상황을 지켜보는 낯선 이들 중에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통찰과 유머가 같은 길(상황의 극복이나 상처의 어루만짐, 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이해)를 지향한다고 해도 한 순간도 감정의 순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유머라 이름붙이기에는 약간 억지스러운 면이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황진이의 시조에 대한 깊은 고견은 추천 드립니다. 많은 거 배우게 되네요.

로쟈 2006-11-24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머란 우리 내부의 모순들이 우리를 쓰라리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고양된 의식이다"라는 건 헤겔의 정의인데(쿤데라의 인용을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그것이 '감정의 순화'를 상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간극, 그 모순을 그대로 보존하되 다만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죠. 지금은 느낌이 많이 사라졌지만, 한때는 '어져 내 일이야'란 시구를 떠올릴 때마다 키득거리곤 했습니다...

2006-11-24 0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24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오랜 손님이시네요.^^ 유머=몽상쯤 될까요...

sommer 2006-11-24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황진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흥미로운 점은 등장인물들의 대사 속에서 '진심'이 불가능한 그 무엇처럼 모든 담화의 비어있는 중심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에서 벽계수의 전략에 대한 황진이의 '진심'이 발동했던 순간에는 '진심'이라는 실체/본질이 이미 실존하고 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진심에서 도망치려는 예판 주체와 '진심'의 그 실존성을 전략이라는 외관의 환타지를 통해서 몸소 보여주는 벽계수 주체가 겹쳐 보여 놀람을 자아내더군요. 그리고, 진심이 외관이라는 틀로 긍정되고 교환되어야만 한다는 명제를 보여주듯 황진이가 벽계수에게 '동'하고 있다는 것이 이후에 전개될 드라마에 궁금증을 더해주더군요. 보통 트렌드 드라마에서도 그 '진심'이라는 실체에 몸을 던지는 안티고네들이 사회적으로 긍정되었던 것을 보면, 이러한 경향성은 주목할 만해 보입니다. 이 드라마의 원저작의 작가가 김탁환이라는 사실이 더욱 흥미를 자아내는군요...

로쟈 2006-11-24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드라마를 5분도 보지 못해서 논평할 처지는 못되구요, suture님의 '황진이론'을 나중에 기다려봐야겠습니다.^^
 

책을 읽고 정리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는 이제 '향수'어린 핑계가 될 듯하다. 책에 대한 '정보'를 읽고 처리할 시간조차 부족한 요즘이기 때문이다. 독서의 대가들은 뭔가 다른 꼼수들을 갖고 있을 듯하지만, 현재 내가 취한 방식으로는 그렇다. 아침에 우편물함에 계간 <창작과비평>(겨울호)가 와 있는 걸 들고 왔는데, 생각해보면 지난 가을호에 실려있던 글꼭지들 중에서 몇 편이나 읽었는지 스스로 궁금하다. 그나마 책에 대한 궁리와 독서량이 남들 수준은 된다고 자임하는 처지에서도 그러하다. 이 '엔드게임'에 무슨 꼼수가 있는 것일까? 

 

 

 

 

여하튼 급수가 낮은 나로선 하던 방식대로 그날그날의 정보들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겠다. 최근에 나온 <근대를 다시 읽는다>(역사비평사, 2006)의 책임편집을 맡은 윤해동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는 것이 오늘의 한 가지 일과이다. 편자는 이 주제와 관련한 여러 공저들을 낸 바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식민지의 회색지대>(역사비평사, 2003) 정도이다. 책을 읽은 건 아니지만 당시에 화제가 되었던 책이었기에 여러 건의 리뷰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퍼슨웹이 기획했던 인터뷰북 <인텔리겐차>(푸른역사, 2002)에서 '윤해동 편'을 읽은 기억이 있으니까 초면은 아닌 셈이다.

여하튼 새로 나온 책은 올초에 출간되어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진보학계'의 본격적인 반론이란 성격을 갖는다고. 이미 <해방전후사의 인식>도 부랴부랴 재출간되기도 했었던 만큼 2006년 역사학계의 풍경은 이 배다른 3부작(?) 시리즈로 다 정리될 듯하다. 이 <다시 읽는다>가 <인식>과 <재인식>에 대한 변증법적 지양인지, 혹은 '제3의 길'인지 옆자리에선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페이퍼의 제목은 그냥 '근대에 대한 인식과 재인식 사이'라고만 해두었다. 거기서 어떤 게 비져나오는 건지는 다 읽어보신 분들이 정리해주면 좋겠다.    

경향신문(06. 11. 23)  낡은 근대에 대한 젊은 비판 ‘근대…’ 책임편자 윤해동교수

지난 2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을 비판하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47)는 “처음에는 ‘이제야 나와야 할 것이 나왔다’며 기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책장을 펼치는 순간 기대는 큰 실망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인식’은 암울했던 1980년대에 그 나름의 소명은 다했습니다. 다만 거기에 태반을 둔 사람들이 자기 변신을 잘못한 측면이 크죠. 그런 점에서 ‘재인식’은 중요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못했다고 봅니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며 디지털 혁명으로 사람 간 소통양식이 바뀌는 현실에서 ‘인식’류의 민족주의·민중주의는 재인식될 필요가 있지만 그 방향이 ‘대한민국 중심주의’ ‘애국주의’ 나아가 냉전논리로의 회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근대를 다시 읽는다 1·2’(역사비평사)이다. 윤교수는 이 책의 책임 편저를 맡았다.

윤교수는 “이제는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 ‘근대’라는 틀을 오히려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에서 ‘재인식’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명백히 파괴적”이라고 했다. 그러면 다시 읽어야 할 ‘근대’란 무엇인가. 윤교수는 “오늘날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새로운 시간의 지평에서 ‘민족’의 ‘역사’를 다시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민족’과 ‘국가’라는 틀에서 좀더 자유로워져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는 것이다.

근대는 해방과 억압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억압이 된다. 서양과 일본의 근대는 강한 국민국가를 만들어 냈지만 그 과정은 식민지 건설 없이는 불가능했다. 식민지는 지정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삶의 일상으로 확장된다. 이주자, 여성, 장애인, 어린이 등 다양한 소수자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근대의 표상을 이루는 과정에서 지금도 ‘우리 안의 식민지’로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편자들은 “모든 근대는 기본적으로 식민지적”이라고 말한다.

학교 조회’를 비롯한 수많은 학교 규율은 ‘교육칙어’를 낭독하던 일본 근대교육의 학교 규율을 본뜬 것이다. 이제 교육칙어는 없어졌지만 본질적으로는 별로 바뀌지 않은 학교 규율이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일까.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은 이른바 ‘전쟁 미망인’들이 만악의 근원처럼 지탄 받았던 전후 그늘은 ‘분단체제론’을 주장하는 ‘우리민족끼리’주의자들도 별로 눈여겨 봐주지 못하는 부분이다.

‘친일청산’ 문제도 짚지 않을 수 없다. 윤교수는 식민지 시대를 보는 ‘지배와 저항’이라는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 왔다. 지배와 저항 사이에 ‘협력’ ‘자치’와 같은 중간항들을 봐야 비로소 식민지 시기가 온전히 보인다는 것이다. 이번 책의 공동편자들은 ‘친일’ 대신 ‘협력’이라는 표현을 쓴다. 윤교수는 최근 펴낸 ‘지배와 자치’(역사비평)에서 식민지시대 농촌의 자치구조를 입체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협력도 사상이다’. 역사학계에서 보면 아주 파격적인 소제목이죠. 이제는 일제 협력자가 윤리적 타락분자라거나 도덕적 단죄의 대상이라기보다 제국주의 지배 하에서 잘 허용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나름대로 자치와 협력을 모색한 것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인 윤교수는 스스로를 한국사 학계의 ‘이단자’로 칭한다. “저 같은 70년대 학번들은 학계에서는 ‘이단적인’ 얘기로 비치는 포스트모던 얘기를 잘 안하는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번 편집진들 중에 제가 최연장자가 돼버렸고 좌장 비슷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윤교수가 후배 소장학자들과 함께 엮은 이 책의 편집 방식은 공교롭게도 ‘재인식’과 닮아 있다. 6명의 편자들이 90년대 이후 쓰여진 글들을 엮어 서문을 쓰는 식이었다. “‘재인식’이란 이름을 단 책이 이미 나와서 한국 사회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상황에서 더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인식’ 편저자에 한국사 전공자가 없었던 것과 달리 이번 작업에는 윤교수 외에도 황병주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 이용기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등 한국사 전공자들이 참여했다. 이외에도 다수 국문학자들과 인류학자, 사회학자들의 글이 논의를 풍성하게 했다.(손제민 기자)

06.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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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3 11:21   좋아요 0 | URL
님이 올리신 글 하루에 한 꼭지 정도 읽고 있습니다. 특히 번역 관련 글은 일반 독자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님이 올리신 자료만 인쇄해서 볼 수 있는 방법을 부탁드립니다. 그냥 인쇄를 누르니, 옆 부분이 잘리는군요.

로쟈 2006-11-23 11:35   좋아요 0 | URL
저라고 꼼수가 있는 건 아니구요, 가로인쇄를 하면 보기엔 뭐하지만 안 잘리게 인쇄할 수는 있습니다. 알라딘에서 좀더 편리한 인쇄 서비스를 제공해주면 좋겠지만...

마늘빵 2006-11-23 11:37   좋아요 0 | URL
아 이것도 관심있는 주제인데. 제가 관심 갖는 분야에 대해 로쟈님이 잘 정리해주셔서 매번 잘 보고 갑니다. 언제나 '지금의 할 일' 때문에 막연히 이런 주제들에 대해 후에 더 자세히 알아보자, 읽어보자라고 미루지만요.

기인 2006-11-23 11:46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오랜만에 윤해동 선생님 뵈니 반갑네요. ㅎ

로쟈 2006-11-23 12:20   좋아요 0 | URL
아프락사스님/ 관심사가 비슷하다면 같은 동네에 사는가 봅니다.^^
기인님/ 발도 넓으시네요.^^

드팀전 2006-11-25 08:08   좋아요 0 | URL
책이 두껍네요..요즘은 진득하게 책보기가 힘들어져서 두꺼우면 겁이나요.

로쟈 2006-11-25 13:52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먼저 축하부터 드려야겠네요! 그게 보기엔 겁나지만 꽂아두기엔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