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황진이'를 잠깐 보니 하지원이 시조 한 수를 읊조리는 게 나온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라고 시작되는 시조이다. 문득 오래전에 황진이의 시조 한 수에 대해서 주석을 덧붙인 글이 생각났다(그때는 전기소설은커녕 관련자료도 거의 없었다). '황새의 멈추어진 걸음'이라고 이름붙인 것인데(페이퍼로 올려져 있다) 다시 찾아보니 이미지들이 여기저기 깨져 있다. 황진이의 시조와 관련되는 대목만 옮겨놓고, '황진이의 유머'라고 다시 제목을 붙여둔다. 그간에 나온 황진이 소설과 관련서들을 보면 거의 '황진이 산업' 수준이 아닐까 싶은 정도이다. 주석본 <나, 황진이>(푸른역사, 2002) 정도는 언제 읽어봐야겠다.   

 

 

 

 

-어져 내 일이야... Oh, my business!..

-먼저, ‘어져’에 대해서 말하여야 한다. ‘어져’가 전제로 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라는 두 시간적 계기이다. 그런데 이 두 계기는 따로 놓여 있지 않다. 그것들은 겹쳐 놓인다. ‘어져’는 이 겹쳐 놓임의 양태에 대한 평가적 발화의 한 가지이다. 두 음절의 이 발화가 집약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어떤 사건에 대한 현재의 안타까운 회한이다. 이 회한은 세계-내-존재로서의 유한한 인간이 이 세계에 지불하고 있는 자신의 몸값이며, 자기 삶의 무게이다. 현재의 우리는 간혹 목욕탕에 가 체중계에 올라서듯이 과거의 한 시점을 불러내어 닦아세운다. 자백해라, 왜 그랬더냐?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어리석음(=무지) 때문이었다(‘그릴 줄을 모로더냐?’). 이 어리석음이 과거가 저지른 과오이다. 그리고 ‘어져’는 이렇듯 겹쳐 놓인 어리석음과 안타까움에 대한 우리의 평가적 발화이다.

-다음, ‘내 일’이란 건 ‘어져’가 포괄하고 있는 사태를 모두 뭉뚱그리는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렇게 뭉뚱그려진 사태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저질러놓고 후회하는 일은 그것이 반복되면서 비로소 제값의 ‘일’(=업)이 된다. 그것은 내가 저질러놓은 일이면서 내가 끊임없이 저지르게 될 일이다(그래서 ‘내’ 일이다). 우리의 회한은 결코 우리의 어리석음을 구제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러니 어이하랴, 결국 어리석게도 나는 또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 이것도 비즈니스라고? 빌어먹을!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더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나는 중장의 ‘제 구태여’를 ‘제 구태여 가랴마는’이 도치된 것으로 읽는다(혹자는 ‘제 구태여 보내고’로 읽는다. *원래는 고어(古語) 표기로 인용했었는데, 여기서는 현대어 표기로 바꾸었다). ‘가랴마는’ 뒤에 (구태여) 덧말로 붙여진 ‘구태여’가 정치된 ‘제 구태여 가랴마는’의 ‘구태여’보다 효과적이다. 말의 기능면에서 그렇다. 여기서 ‘구태여’의 주체는 님이다. 즉 내가 가는 걸 말렸더라면(=그냥 가게 내버려둔 나의 과오) 구태여 님이(=지가) 떠났겠는가(=그리고 뒤늦은 회한), 라는 것이 중장의 내용이다. 종장의 ‘보내고 그리는 정’은 이 과오-회한의 구도를 그대로 집약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도가 바로 서정(시)의 구도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단순한 서정이라면 흔한 서정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른바 기질지성(氣質之性)의 푸념을 조금 멋을 내어(‘나도 몰라 하노라’) 표현한 것. 나는 조금 더 복잡하게 읽고 싶다. 이른바 ‘복잡한 서정’이란 무엇인가? 다시 중장. 가는 걸 말린다고 해서 못 이기는 체 눌러앉는 작자를 님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님은 적어도 일류의 기녀(=황진이)라면 용납할 수 없을 님이다(품위가 떨어지는 님이기에 그렇다). 우리의 님은 (부여잡고) 말렸더라도 결단코/구태여 떠나갔을 것이다(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며). 그리고 우리에겐 그리움의 몫만을 남겨놓았을 것이다. 그런 님을 두고 짐짓 내가 가는 걸 말렸더라면 구태여 떠났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은 이중의 전략이며 복잡한 서정의 결과이다.



-어차피 떠나고 말 님을 이시라 하며 말리는 것은 성과가 없는 일일 뿐더러 정나미 떨어뜨리는 일이며 자존심만 구기는 일이다(이류들은 이런 일에 구애 받지 않겠지만). 그러니 그냥 가게 내버려두는 것. 이 사소한 과오 덕분에 나는 잘난 자존심과 님 그리는 정을 모두 지켜낸다. 그래도 이만한 어리석음(=과오)이라면 뒤집어쓰고 남을 만하지 않을까, 라는 계산이 바로 복잡한 서정이고 이중의 전략이다.

-나는 이걸 달리 ‘유머’라고 부른다(밀란 쿤데라는 ‘좋은 기분’이라고 부른다). 유머란 우리 내부의 모순들이 우리를 쓰라리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고양된 의식이다. 나의 자존심은 님을 떠나가게 할 수도 없고 눌러 있게 할 수도 없다. 이것은 모순이다. 이 모순을 쓰라리거나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길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어져 내 일’이다.

-이 시(조)에서 ‘내 일’은 ‘돌이킬 수도 있었던 과거’, 그래서 ‘달라질 수도 있었던 현재’라는 어떤 다른 삶의 (희박한) 가능성을 불행한 현실과 대질시킴으로써 완료된다. 이 일로 물론 구제 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루만져줄 수 있을 따름. 그럼에도 이 어루만짐(=유머)은 소중한 것이며 오직 유한한 인간, 중간쯤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특권적인 라이프 스타일이다...

06.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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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6-11-24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머라기 보다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해 통찰하는 힘이 뛰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녀의 모순된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자가 황진이 자신, 그 상황에 개입한 님, 그 상황을 지켜보는 낯선 이들 중에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통찰과 유머가 같은 길(상황의 극복이나 상처의 어루만짐, 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이해)를 지향한다고 해도 한 순간도 감정의 순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유머라 이름붙이기에는 약간 억지스러운 면이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황진이의 시조에 대한 깊은 고견은 추천 드립니다. 많은 거 배우게 되네요.

로쟈 2006-11-24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머란 우리 내부의 모순들이 우리를 쓰라리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고양된 의식이다"라는 건 헤겔의 정의인데(쿤데라의 인용을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그것이 '감정의 순화'를 상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간극, 그 모순을 그대로 보존하되 다만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죠. 지금은 느낌이 많이 사라졌지만, 한때는 '어져 내 일이야'란 시구를 떠올릴 때마다 키득거리곤 했습니다...

2006-11-24 0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24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오랜 손님이시네요.^^ 유머=몽상쯤 될까요...

sommer 2006-11-24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황진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흥미로운 점은 등장인물들의 대사 속에서 '진심'이 불가능한 그 무엇처럼 모든 담화의 비어있는 중심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에서 벽계수의 전략에 대한 황진이의 '진심'이 발동했던 순간에는 '진심'이라는 실체/본질이 이미 실존하고 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진심에서 도망치려는 예판 주체와 '진심'의 그 실존성을 전략이라는 외관의 환타지를 통해서 몸소 보여주는 벽계수 주체가 겹쳐 보여 놀람을 자아내더군요. 그리고, 진심이 외관이라는 틀로 긍정되고 교환되어야만 한다는 명제를 보여주듯 황진이가 벽계수에게 '동'하고 있다는 것이 이후에 전개될 드라마에 궁금증을 더해주더군요. 보통 트렌드 드라마에서도 그 '진심'이라는 실체에 몸을 던지는 안티고네들이 사회적으로 긍정되었던 것을 보면, 이러한 경향성은 주목할 만해 보입니다. 이 드라마의 원저작의 작가가 김탁환이라는 사실이 더욱 흥미를 자아내는군요...

로쟈 2006-11-24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드라마를 5분도 보지 못해서 논평할 처지는 못되구요, suture님의 '황진이론'을 나중에 기다려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