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문학판>이 5주년 기념호를 냈다(어느덧 '중견' 잡지의 대열에 들어서는 듯하다). 2006년 겨울호가 그것이다(계간지 겨울호들이 계절을 더욱 재촉하는 듯하다). 자체 소개에 따르면, "전위적이며 독창적인 작업을 실험하는 작가들의 활동을 지지해온 계간 <문학 판>의 창간 5주년을 맞이했다. 2001년 겨울, 편집인 이인성은 '문학의 상업화에 맞선다는 기본 취지 아래 대중적 감각과 지성적 이해를 결합'시키며, '평단에서 소외된 신인작가의 전위적 작업을 부각'시키겠다는 포부로 창간 의의를 밝힌 바 있다."

"이번 호 특집은 새로운 문학 세대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자리로 꾸몄다. 김진수, 손정수 두 평론가가 각각 시와 소설 분야의 새로운 세대의 문학에 대해 논했다. 시인 김민정, 진은영, 황병승, 김태형, 소설가 구경미, 편혜영, 김중혁, 김애란, 평론가 허윤진, 신형철 등 각 장르의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열 명의 작가들이 각자의 글쓰기의 근거에 대해 발언했다."고 돼 있다. 이에 대한 최재봉 기자의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6. 11. 24) 문단 막내들에게 듣는 ‘문학이란?’

“말하자면 어떤 그리움이나 상실감이 없는 채로, 부정해야 할 대상도 없고 증언하고 싶은 시절도 없이, 고백해야 할 내면이나 문학적 책임의식도 없는 20세기 막바지 세대가 21세기에 문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소설가 편혜영(34)씨가 <문학/판> 겨울호에 쓴 ‘교본의 시간’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전통적으로 문학 창작의 동기로 꼽히는 요소들을 두루 나열하면서 그 어느 것 하나도 제 몫이 아닌 채로 문학을 해야 하는 세대로서의 자괴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 글은 <문학/판>이 창간 5주년을 맞아 기획한 특집 ‘21세기 문학세대’에 포함되었다.

이 기획에는 시인 진은영 김태형 김민정 황병승씨와 소설가 구경미 편혜영 김중혁 김애란씨, 그리고 평론가 허윤진 신형철씨 등 10명이 참여했다. ‘우리는 문학으로 무엇을 하는가’라는 편집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의 이 특집에 참여한 이들은 1980년생인 김애란 허윤진씨를 제하고는 모두 1970년대생이다. 문단의 막내들이라 할 만하다.

대부분이 도시 태생인 이들에게는 “오히려 알 수 없는 전원과 자연의 풍경을 보면 두려움이 느껴”지며 “회색 콘크리트가 기왓장이나 대청마루처럼, 전봇대가 마을 앞의 수령 깊은 나무처럼 느껴진다.”(편혜영) ‘전통 서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이 젊은 시인들은 종종 ‘미래파’라는 저널리스틱한 이름으로 뭉뚱그려지기도 하는데, 그 대표자 격인 황병승씨가 “나는 미래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흥미롭다. 미래파는 그 이름을 창안한 이의 의도와는 달리 자주 비판과 공격에 노출된다. 자폐적 상상력과 폭력적인 이미지, 대중문화적 기호의 범람이 주로 빌미를 제공한다. 황병승씨 글의 마지막은 그를 의식한 것 같다: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승리가 있다/배척된 채로/배척된 채로”

비장한 결의와 뻔뻔한(?) 각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은영씨의 말을 들어보자. “우린 다소 지겹다. 지나치게 전복적인 것이 아니라 다소 빤하고 몇 가지 문학적 수사에만 능숙하다. 우린 너무 쉽다. 결코 난해하지 않다. 몇몇 인디밴드 음악이나 일본만화, 퀴어문화 등등 특정한 문화적 코드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사실은 누군가를 감염시키는 데 실패했다.(…)우리는 복화술사가 아니라 특정문화를 소비하는 부류의 또렷한 입으로 전락할 위기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른다. 무성한 소문과 달리 아직 우리는 새로운 문학으로 탄생하기 이전이다.”

아마도 21세기에 문학에 종사하는 이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주창한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일 것이다. 자기 안에 갇혀 사회 전체의 긴급한 현안에 대응하지 못하는 지금의 문학은 본래적 의미의 문학에서 멀어졌으므로 지금 문학은 없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주장이다. 이제 막 문학을 시작하는 이들을 향해 누군가는 문학이 진작 끝났노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낭패가! 신형철씨의 화려한 글 ‘몰락의 에티카­: 21세기 문학 사용법’은 가라타니의 선언을 크게 의식하고 있다.

“거인으로서의 문학이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본래 난쟁이였고, 더 작게는 ‘짱돌’이었으며, 더욱더 작게는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 가장 ‘협소한’ 영역 안에서 가장 ‘깊게’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문학이라 하면 어떨까.(…)넓은 총체성이 아니라 깊은 총체성 말이다.”

“다른 총체성이 있고 다른 윤리가 있다”고 신형철씨는 주장한다. 그 새로운 총체성의 이름은 ‘파편으로서의 총체성’이라고. “21세기라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면서 여전히 아름다움과 상상력에 대한 믿음을 피력하는 김중혁씨의 글은 평론가의 주장과 다르면서도 같다.(최재봉 기자)

06. 11. 24.

P.S. 굳이 분류하자면 '20세기 문학독자'로서 내가 동감하는 견해는 시인 진은영씨의 것이다. 일곱 가지 항목으로 규정하면, '21세기 문학'은 (1)다소 지겹다. (2)지나치게 전복적인 것이 아니라 다소 빤하고 (3)몇 가지 문학적 수사에만 능숙하다. (4)너무 쉽다. (5)결코 난해하지 않다. (6)몇몇 인디밴드 음악이나 일본만화, 퀴어문화 등등 특정한 문화적 코드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7)사실은 누군가를 감염시키는 데 실패했다.

"거인으로서의 문학이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건 '21세기 문학세대'의 활기찬(하지만 수세적인) 상상력이다. '본래'라는 어사가 굳이 동원될 필요가 있을까? 지겹고 빤하고 쉽고 그래서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 그 '바닥'에서 뭔가 기대해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몰락의 에티카'는 몰락의 승인을 전제로 작동하는 윤리학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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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24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어. 저 중 진은영 시인이 '우리'라고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닐텐데. (물론 긍정적 의미로). 진은영 시인 또한,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지양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읽히는 데요. 구해서 읽어봐야겠네요. 퍼갑니다. :)

로쟈 2006-11-2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기사상으론 '우리', 혹은 '우리세대 문학'에 대한 고백으로 읽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