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온라인에서의 블로거 활동에 관해 한 주간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요즘 '1인 3역'을 계속해나가는 게 불가능하지 않나란 자기반성도 하던 차였는데(이러다간 조만간 침몰하지 않을까 싶다), 내친 김에 '로쟈'가 언론에 처음 노출된 게 언제였던가 찾아봤다. 온라인에서의 활동은 1999년부터였지만, 언론에 처음 이름이 오른 건 2003년 가을 지젝의 방한을 다룬 오마이뉴스 기사를 통해서였다('지젝'도 2001년 6월 한국경제의 한 칼럼에서 처음 이름이 비친다. 네이버 검색으로는 그렇다). 마침 지젝의 번역서 몇 권에 대한 서평을 올려놓던 시절이다. 그렇게 처음 기사화된 이름을 보고 좀 재미있으면서도 낯설게 느꼈던 듯싶다. 하지만 일회적이었고, 2007년 1월초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인터넷 서평꾼'을 다룬 한겨레 기사에서 언급된 이후에야 비로소 '로쟈'란 이름은 주목을 받는다. 한겨레21에 '로쟈의 인문학 서재' 칼럼을 연재하는 건 그해 8월부터다. '로쟈'란 이름을 언제까지 끌고 나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우려되기도 한다. 오래전 오마이뉴스 기사를 '아카이브' 자료로 챙겨놓는다.  

 

오마이뉴스(03. 10. 09) 어려운 지젝, 사람들 왜 모이나

지젝이 왔다. 그런데 과연 온 것인가. 자연적 실체로서 그는 비행기를 타고 입국하여 몇몇 강연을 진행 중에 있다. 오긴 온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니 오래 전에 도착하였으나 그 학문적 실체가 제대로 구성되거나 조명되지 않았다. 상상적 실재로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을 뿐, 지젝은 늘 오고 있는 중이다.

몇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사상계의 거목에 대한 탐사가 손쉬운 접근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가 단순히 '철학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최신의 서구 철학계(이 용어에 대하여 지젝은 거부하겠지만)가 모든 종류의 정보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어마어마한 질량을 압착한 한 권의 사유물을 토해내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지적 바탕이 없고서는 그의 저작, 심지어는 목차조차 도대체 어떤 사유의 그물로 짠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플라톤에서 코소보 사태까지, 구조주의에서 공포소설까지, 그저 두루두루 아울러서 지식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거의 한 문장 속에 동시에 출현시켜 그 자체로 세계의 복합성을 문자로 드러내버리는 지젝의 사유는 전공자는 물론이거니와 '국영수 중심'으로 성장해온 우리의 인문 환경에서는 도무지 해독 불가능한 암호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젝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적도 있는 박학다식한 동구권 학자'에 머무르고있다.

방한한 지젝, 하지만 그의 학문은 여전히 오고 있는 중
두번째 이유로는 성실하지만 부주의한 번역물과 불성실하고 빈약한 오역물이 지젝에 대한 관심을 차단시킨다. 문학과 영화에 대한 약간의 관심만으로도 충분히 그 착오를 가려낼 수 있을 <환상의 돌림병>(인간사랑)이나 <향락의 전이>(인간사랑)의 오역은, 저작권법에 따라 다른 이가 좀더 섬세하게 번역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했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지젝의 저작에 대한 리뷰를 쓴 '로쟈'씨가 작년 12월 말에 쓴 내용에 따르면 <향락의 전이>(인간사랑)의 경우 "일반 독자가 이 교양서를 읽어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 또한 "지젝의 작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 역서는 짜증만을 불러일으키며,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독자들에겐 고역만을 선사한다"고 쓰고 있다.

이 책은 원래 초역판이 2001년 7월에 출간되었다가 번역 과정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2002년 9월에 '개역판'으로 내면서 책값을 무려 9000원이나 인상하여 하드커버로 출간하였는데, 의미있는 교정과 보완은 전무하다는 것이 로쟈씨의 의견이다.

세번째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복합적인 이 세계의 불가해한 속성 때문이다. 그의 저작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 것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전체를 조망하기 위한 다양한 접근의 실례이다. 현대사회의 본질은 (그것이 미국이든, 이라크든, 슬로베니아든, 한국이든) 기본적으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적인 억압적 융합과 긴장과 대립에 따라 매우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현상 속에 감춰져 있으므로 그 실체에 대한 접근은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이론적 바탕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의 말대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의 억압은 사라지거나 축소되지 않고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든다. 그리고 '귀환'한다. 다양한 시선이 필요한 이유가 된다. 



지젝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세 권의 책
지젝과 더불어 사색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괴롭다. 누구보다 소통을 열망하는 학자지만 우리의 허약한 지적 기반은 의미있는 최소한의 소통, 곧 '독서'조차 불편하게 만든다. 지젝은 말한다. 현대는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아편을 대신한 마리화나, 사이버 섹스 등 실체가 없는 가상현실에 대해 열망'한다고.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현대는 혁명, 테러리즘, 파시즘, 스탈린주의 등 '실재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따른 근본주의적 충동'에 사로잡힌다고 지젝은 말한다. 따라서 그 사이 제3의 길, 곧 자유·다양성·인권·관용 등의 민주적 가치를 모색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만 따로 추스르고, 그 정치적 발언록의 즙만 짜낼수록 지젝은 우리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므로 세 권만 따로 추려 읽도록 하자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김소연 옮김). 홀로코스트, 후천성 면역결핍증, 체르노빌,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를 성찰하는 지젝의 진지하면서도 날렵한 시선이 충만한 저작이다. 라깡식 판독법으로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을 경쾌하게 드러내준다.

<항상 라깡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김소연 옮김). 지젝이 영화학자들과 더불어 라깡의 정신분석학 방법론으로 히치콕의 영화를 분석한 책이다.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 골고루 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히치콕 영화의 분석을 통해 현대 사회의 주체 형성을 다루고 있다.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주은우 역). 할리우드로 집약되는 현대 대중문화의 풍부한 사례를 통해 라깡을 재구성한다. 라깡을 사이에 두고 푸코, 하버마스, 롤스 등이 얽힌다.(정윤수/박형숙 기자) 

10. 04. 15. 

P.S. 본기사에 딸린 박스기사에는 이런 지적도 들어 있다. "한편 지젝 학문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라깡 등에 대한 출판 인프라가 빈약한 우리네 인문학 풍토에서, 그들을 '뛰어넘는' 지젝에 대한 과도한 열광은 또 다른 '지적 패션'이라는 지적도 들린다." 그간에 '빈약한 출판 인프라'가 괄목할 만큼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지젝의 책은 이후에도 매년 3-4권씩 출간됐고, 올해도 예외는 아닐 듯하다. 지젝의 이미지를 아바타로 내걸고 '로쟈'는 그 '지적 패션'을 '지적 일상'으로 바꾸려고 나름 애써왔지만(1만명의 독자층을 만드는 것이 잠정적인 목표치가 될 수 있다), 낙관적으로 말해서 전망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10년, 혹은 20년이 걸리면 가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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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4-1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를 첫머리에 쓰면 안보이나요? <하우 투 리드 라캉>을 엊그제 배달받고 들여다봤는데 제게는 읽는 것이 괴롭지만 흥미롭습니다. 라캉의 다음을 읽는데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10-04-16 01:11   좋아요 0 | URL
어느 책인지는 모르겠지만(네 < >로 묶으면 안보이게 되더군요) 흥미로움이 괴로움보다 점점 커지기를 바라겠습니다.^^

푸른바다 2010-04-1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3년 서울대에서 지젝이 강연할 때 가보셨는지요?^^

로쟈 2010-04-16 22:22   좋아요 0 | URL
물론이지요.^^
 

이번주에 나를 가장 놀라게 한 저자는 미국의 시사평론가이자 금융 전문 저술가, '비즈니스 역사가'로도 불리는 론 처노다. <금융제국 J.P. 모건>(플래닛, 2007)의 저자. 놀라운 건 '자본주의자의 원형'으로도 일컬어지는 록펠러의 두 얼굴을 다룬 책 <부의 제국 록펠러>(21세기북스, 2010)도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그냥 혼자서 뒤늦게 알고는 놀랐다는 얘기다). 두 책 모두 높은 평판을 얻은 대작이다. 국내에서도 기업가 평전이나 논픽션들이 가끔씩 나오고 있으니 전범으로 삼을 만하다. 하지만 여건상 이런 수준의 책이 나오기는 어려운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2010)의 저자 야마모토 요시타카와 함께 뒤늦게 감탄하게 되는 저자다. <부의 제국 록펠러>에 대한 소개기사도 늦게나마 스크랩해놓는다.  


한국경제(10. 03. 06) 교활한 석유재벌 vs 고결한 기부왕…'록펠러의 두 얼굴' 

존이 어렸을 때,빌은 그에게 자신이 받아줄 테니 높은 의자에서 뛰어내리라고 부추기곤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받아 안아줄 듯이 팔을 내밀고 있다가 내려버렸고,존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빌은 아들에게 다시 한번 가르침을 상기시켰다. "기억하라고 했지.어느 누구도 완전히 믿어선 안 돼.이 아빠마저도 말이야." 얼마 뒤에는 클리블랜드 시내를 지나가면서 빌은 같이 가던 아들들에게 사격이나 가장행렬을 구경하려고 허둥지둥 몰려가는 군중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일렀다.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마라.되도록 사람이 몰려 있는 곳에 가지도 말고.자기 일에만 집중하는 거야."

최고의 부자이자 최고의 자선사업가인 존 D 록펠러(1839~1937)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그는 경쟁자들을 고사시키는 '냉혈 비즈니스'로 당대 제일의 갑부가 됐고 이로 인해 부도덕한 기업인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열정적이고 통 큰 자선사업과 기부,굳건한 신앙심으로 '고결한 귀족'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보여준 인물이다.  

유명한 비즈니스 전기 작가 론 처노는 《부의 제국 록펠러 1,2》에서 상반된 그의 면면을 객관적이고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의 내면에 두 명의 분신이 있다는 것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지독한 스크루지와 너그러운 산타클로스.허풍쟁이 약장수인 아버지와 신실하고 엄격한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그의 심리적 양면성은 '냉혹한 석유재벌'과 '신앙심 깊은 자선왕'의 이미지를 동시에 빚어냈다.  



그는 맨손으로 사업을 일궜고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조직해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90% 이상을 정유하고 판매했다. 그가 사업에서 물러났을 때 미국인들의 평균 수입은 주당 10달러였다. 1893~1901년 그의 회사 배당금은 2억5000만달러에 달했고 그 가운데 4분의 1이 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최대한 벌고 최대한 아껴 최대한 베푸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며 평생 5억3000만달러를 기부했다. 한편으로는 학문에 관심을 보이고 대학과 의료연구 기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개인적으로도 절제와 검소를 실천했다. '스탠더드 오일 제국'과 '자선 제국'을 함께 세운 셈이다.  



저자는 '죄악과 고결함이 한데 섞인' 록펠러의 이 같은 모습을 중심으로 남북전쟁 후 도금시대로 불릴 만큼 물질주의에 휩싸인 1870년대 미국의 역사까지 종횡으로 엮어낸다. 조지프 퓰리처와 앤드루 카네기,마크 트웨인 등 굵직한 인물들과의 사연도 드라마틱하게 비춘다. 미국비평가협회상 수상과 타임 선정 '올해 최고의 책' 등 잇달아 찬사를 받은 책.(고두현 기자) 

10. 04. 14. 

 

P.S. 한번 더 적자면, 국내에 소개된 론 처노의 책은 <금융 권력의 이동>(플래닛, 2008)까지 포함해서 3종 다섯 권이다. 소개되지 않은 후속작으론 <알렉산더 해밀턴>(2004)과 <워싱턴>(201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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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5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5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쿼크 2010-04-15 01:27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읽었던 '니콜라 테슬라'의 책에서도 JP모건이나 록펠러가 언급되어있어서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에디슨이 주장했던 직류 발전기와 테슬라가 주장한 교류 발전기 싸움에서 테슬라가 이겨 현대의 가정에 교류 전류가 들어오긴 했지만 JP모건과의 싸움에 져 무선 송전기의 야망을 접어야 했지요. 만약 그때 JP모건이 눈감고 테슬라를 도와줬다면 아마 지금쯤이면 무선으로 전기를 공급받고 있는 세상에 살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에서야 이런 기술이 나오고 있죠. 무선으로 배터리 충전시키는 방식으로요...정확히 기억 나진 않지만, JP모건쪽에서 전선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테슬라는 모건이 준 연구비로 몰래 무선 송전 타워를 만들어 그쪽 분야를 연구하려 했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전기자동차도 모건과 록펠러 그리고 헨리 포드 때문에 결국 접어야 했다는 기록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휘발유 자동차 시대를 맞이했지요... 저도 올해 안에 나름 읽을 책으로 JP모건1,2를 꼽았는데 두께가 만만치않아 읽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습니다. 여담이지만 테슬라가 죽고 난 뒤에 FBI가 테슬라 모든 자료를 가져갔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래서 미국이 기술 강국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DKshield 2010-04-15 15:45   좋아요 0 | URL
그부분은 사실 인터넷에서 오버되었습니다.^^;;;

핵무기를 만들어낸지 50년이 지난 지금과 테슬라가 그걸 연구하던 시기는 아직 핵무기의 핵자도 모르던 시기라는 큰 차이가 있으니 말입니다. ^^;;

테슬라는 이론적으로만 가능했던것을 실행해보겠다고 노력한 것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당대의 과학능력으로는 불가능 했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어려운 기술을 당대에 가능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죠^^:;;

루체오페르 2010-04-15 01:34   좋아요 0 | URL
록펠러에 대한 여러 일화가 있던데 사실인진 모르겠으나...
한창 전성기때 암진단을 받고 충격을 받아 이제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다 결심하고 기부왕으로 살다보니 몇년남았다던 삶에서 몇십년을 더 살아 90여세에 운명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아마 이 책에서 진실여부가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썼다 의 표본일지도..라는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10-04-15 18:44   좋아요 0 | URL
베버의 말대로 '자본가의 원형'이지요...

푸른바다 2010-04-15 04:11   좋아요 0 | URL
록펠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야말로 '시차적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로쟈 2010-04-15 18:43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 자체가 그렇지요...

2010-04-18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8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9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동향기사를 옮겨놓는다. 슬라보예 지젝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처음엔 사양했지만 결국은 쓰게 됐다. 대신에 마감에 쫓기느라 <시차적 관점>을 다룬 대목은 예전에 쓴 글을 약간 편집해서 옮겨놓았다. 대표작에 대한 소개도 포함해달라는 주문이 있어서다. 기사의 첫문단은 편집자의 멘트이다. 덧붙여, 현재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품절상태인데, 만약 절판된 거라면 조만간 새 번역본이 출간되면 좋겠다...  

교수신문(10. 40. 12) [흐름] 국내 학술출판계의 아이콘 ‘지젝’  

국내 학술번역서 리스트 맨 앞에 놓인 이름은 누구의 것일까. 슬라보예 지젝이다. 지젝 열풍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번역계에는 확실히 그가 ‘잘 팔리는’ 아이콘이다. 문제적인 철학자이자,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평가받는 지젝, 과연 그가 지식사회에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젝을 읽는 데는 이런 문제의식이 놓여 있다.   



하나의 유령이 우리의 인문학 동네를 떠돌고 있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무관심에서부터 이웃집 닭한테 잡아먹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조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절대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그 유령의 이름이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 ‘괴물’ 철학자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통해서 영어권 지식사회에 등장했을 때, 그가 우리 시대의 가장 문제적인 철학자이자 ‘가장 위험한 철학자’가 되리라고 점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일원으로 지젝을 처음 소개하면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조차도 “포스트 마르크시즘적 시대에 사회 민주주의적 정치 프로젝트를 구축하는 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필독서가 되리라고 데뷔작의 의의를 한정했었다. 하지만 지젝은 이듬해 슬로베니아 대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후에 더 본격적으로, 그리고 전방위적으로 열정적인 ‘이론투쟁’을 개시한다. 그 결과 영어로는 이미 60권에 육박하는 단행본을 출간했고, 국내에 번역·소개된 것만 해도 30종이 넘는다. 가히 ‘지젝 현상’이라고도 할 만한 이러한 현황의 이면에는 그의 부지런한 다산성 못지않게 그의 이론적 사유에 대한 지식사회의 수요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MTV 철학자’라는 일부의 비아냥거림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이론-실천 잇는 지적 다산성과 사유의 매력
그렇다면 무엇이 그에 대한 이러한 열광을 낳는 것일까. 개인적으론 그를 통해서 비로소 헤겔의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에 대해 진지한 흥미를 갖게 됐다는 걸로 이유를 대신할 수 있지만, 애초에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지젝이 목표로 한 바이기도 하다. 그는 이데올로기 이론에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 외에 라캉 정신분석의 기본개념에 대한 개설을 제공하는 것과 ‘헤겔로의 회귀’를 목표로 내세웠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서로 연계돼 있다는 점이다. 그는 ‘헤겔을 구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라캉을 경유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이러한 라캉적 독법과 헤겔의 유산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판단한다. 비록 “민주주의는 모든 가능한 체제들 중에서 최악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것도 그보다 낫진 않다는 것이다”라는 처칠의 주장을 반복하던 초기의 입장은 곧 철회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색은 그가 줄곧 견지하고 있는 과제다.   

흔히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지젝의 사유에는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은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작업에 대해서 그의 담론이 세련된 라캉적 분석과 덜 해체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분열돼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그의 철학 ‘퍼포먼스’가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도 가해진다.

하지만 라캉을 따라서 ‘메타언어’는 없다고 주장하며 고상한 담론과 범속한 담론의 이분법을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지젝은 그러한 비판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의 헤겔 독법에 유보할 지점이 많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헤겔에 대한 새로운 독해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라고 응수한다. 굳이 그러한 철학적 기여가 아니더라도 지난 20년간 현 세계의 다양한 정치경제적 이슈에 대해 지속적인 철학적 성찰과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제시하고 있는 철학자가 지젝 말고 더 있는지 궁금하다. 분명 손에 꼽을 정도이지 않을까. 게다가 그는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가 아닌가!  



대체 지젝은 어떤 사유와 이론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인가. 철학적 이슈와 정치적 쟁점을 종횡무진하는 지젝의 행보와 재담을 모두 따라가는 건 지젝의 애독자라도 어려운 일이지만 다행히도 그는 자신의 주저를 몇 권 꼽아놓은 적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외에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그리고 『시차적 관점』까지 네 권의 책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차적 관점』은 “철학이란 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란 그의 주장에 충실한 책으로 지젝의 이론적 사유를 따라가거나 그와 대결하기 위해서라면 필독해야 할 책이다.

지젝이 말하는 ‘시차’란 과학용어로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가장 단순하게는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각각 한쪽씩 가리고 보았을 때 나타나는 약간의 차이가 시차다. 서로 다른 시각(관점)이 만들어내는 차이를 시차라고 하면, 이것은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난다. 양자물리학에서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신경생물학에서 의식현상과 회백질 더미, 철학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 정신분석학에서 욕망과 충동 사이의 간극, 그리고 성적 삽입의 대상이면서 출산의 기관이기도 한 질(바기나)의 시차 등등. 지젝은 이러한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기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시차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철학과 과학,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양식에 나타는 시차적 간극에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시차적 관점’이라는 아이디어는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서 얻어오는데, 이미 『이라크』(2004)에서도 ‘시차’란 개념을 사용해 이라크전쟁의 ‘진리’를 설명한 바 있다. 곧 “민주주의는 인류에 대한 신의 선물”이라는 부시의 말이 집약해주고 있는 대로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이 이 전쟁의 첫 번째 이유이고(상상계),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주장하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라면(상징계),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세 번째 이유(실재계)라는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어느 하나가 나머지의 ‘진리’라는 게 아니라, ‘진리’란 관점의 이동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시차적 관점에서의 진리다.

이러한 시차적 관점의 도입을 통해서 지젝은 궁극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하고자 한다. 그가 보기에 시차란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이 열쇠는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가령 ‘저항’의 교착상태에 대해 생각해보자. 지젝은 알랭 바디우를 따라서 시스템이 더욱 부드럽게 작동하게끔 만들어주는 국지적 행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진정한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유사-행동이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이 되려는 이 충동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視差’ 개념 통해 변증법적 유물론 재건 시도
예컨대, 사람들은 언제나 개입해 ‘뭔가’를 하고, 학자들은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가령 자유주의적 좌파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도 혁명을 말하지만, 그들은 혁명을 위해 치러야 할 실제적 대가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자신의 학술적 특권이 전혀 위협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거나 급진적인 담론을 쏟아내는 데 열중하는 ‘강단좌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발언을 뒷받침하고 있는 발언 위치, 곧 물적 토대와 시스템 자체는 결코 건드리지 않으며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이러한 유사-행동에 대해 지젝은 비판적인 참여와 행동을 통해서 권력을 쥔 자들과 ‘대화’에 나서기보다는 ‘불길한 수동성’으로 퇴각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 어려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달리 제국주의, 식민주의, 세계대전이라는 1914년의 파국적 조건 속에서 혁명의 기획을 재창조하려고 했던 레닌의 제스처를 오늘날 반복해야 한다는 그의 요구와도 맞닿아 있다.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전례 없는 패배의 국면이었던 1914년에 레닌은 좌절하지도, 그렇다고 즉각적인 정치적 해답을 내놓지도 않았다. 대신에 스위스 베른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이듬해 5월까지 헤겔의 『논리학』 연구에 매진했다. 알다시피, 그가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키게 되는 것은 불과 그 2년 뒤의 일이다. 

10.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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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4-16 10:23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숭고한 대상 — 로쟈
 
 
poptrash 2010-04-14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데올로기라는... 은 출판사에 전화한 결과, 절판이고 다시 낼 계획도 없다고 해요. 이유가 뭘까요. 수요가 없는 책도 아니고, 인간사랑 출판사 중에서는 잘 나가는 축에 드는 책이었을텐데... 계약 만료라면 다른 곳에서 계약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언제 나올런지.

로쟈 2010-04-14 00:18   좋아요 0 | URL
짐작엔 계약기간이 만료된 거 같아요. 출판사만 바뀔지, 역자도 바뀔지는 두고봐야겠네요. 몇몇 대목을 교정하면 예전 번역도 나쁘진 않았는데요...

구보 2010-04-14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를 이제 막 읽었습니다.
앞으로 가서 다시 읽기를 반복하며 진도 나갔는데 로쟈님 글로는 왠지 정리가 잘 되네요.
몇몇 문장은 요령부득이라 과외라도 받고 싶습니다^^

로쟈 2010-04-14 23:33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 뒷부분은 남겨놓고 있는데요.^^;

빵가게재습격 2010-04-14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대중적인'이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고 좋아할 수 있는'은 아니죠?!^^;;; 뒤적거려보다가 혼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레닌의 제스처'가 좀 선정적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체제가 생각만큼 견고한 게 아니다. 체제를 넘어서는 질적변화는 단번에 포착될 수 있다. 란 암시를 주고 싶었던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굳이 레닌이라는 거인까지 나와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분명 제가 이해 못해서 그런 것이겠지만요.^^;;) 페이퍼 잘 읽고 가면서 몇 마디 끄적이고 싶어 댓글 남겼습니다. 아 그리고 외람되지만, 로쟈님 서재에 '책을 너무 읽어야 해서 자살'해야 하는 즐거운 비명이 가득 차기를 기원합니다. 그 비명 들으러 자주 들를께요. 건강하세요.^^

로쟈 2010-04-14 23:34   좋아요 0 | URL
네, 비명은 아니더라도 신음은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흠...

푸른바다 2010-04-14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 책방에 널려있을 때는 왠지 하나의 유행서에 불과한 것 같아서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데 로쟈님 덕분에 관심을 갖게되어 막상 읽어보려고 하니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이 되어 버렸더군요. 이 책은 헌책방에서도 매우 드문데, 저는 운좋게 헌책을 구해서 작년 중하순 쯤에 완독을 했습니다^^

로쟈 2010-04-14 23:35   좋아요 0 | URL
지젝의 남은 책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푸른바다 2010-04-15 09:51   좋아요 0 | URL
위에 이미지를 로드하신 지젝의 책들 중에 두권 빼고 모두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미지를 로드하지 않으신 책들도 몇 권 더 가지고 있지요. 그 책들을 모두 읽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10-04-15 18:42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그게 몇 권만 완독하셔도 되긴 합니다.^^

허스키 2011-11-07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색하다보니 김서영씨께서 번역하신 <시차적 관점>의 번역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들이 몇몇 보이던데 로쟈님께서 보시기엔 어떤가요? (워낙 오래된 포스팅에 붙이는 질문이라 보시게 될지 모르겠네요)
 
인문좌파란 무엇인가

아침신문을 밤중에야 읽었다. 최근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글항아리, 2010)를 펴냈을 뿐만 아니라 한겨레21('노 땡큐!'란)과 교수신문의 연재(격주로 '세계사상지도'를 다룬다)를 새로 시작하는 등 문화비평가로서 '시즌2' 활동에 나선 이택광 교수의 인터뷰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사실 낮에 한겨레21에서 드라마 <추노>에 대한 칼럼도 읽었기에 이런 정도의 활동 빈도라면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경향신문(10. 04. 12) 이 시대 ‘합의된 아름다움’을 깨라 

왜 사람들은 ‘꿀벅지’와 ‘초콜릿복근’에 열광하는가. 이택광 경희대 교수(42)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합의된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교롭게도 ‘먹는 것’ 그 중에서도 ‘달콤한 것’으로 상상되는 아름다움은 특정 시기의 사회적 산물이다. 
 
 

이 교수는 최근 서울 홍대앞 한 카페에서 ‘지금 우리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연하며 “새로운 것은 합의된 아름다움과 다른 것을 상상하는 데서 나오고 그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잡지 ‘1/n’이 마련한 이 강연에서 이 교수는 이마누엘 칸트와 자크 랑시에르를 많이 언급했다.

이 교수는 칸트의 말을 빌려, 사람들이 ‘소녀시대’와 ‘짐승돌’의 몸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쾌락적 판단’에 기반한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쾌와 불쾌를 나누는 ‘판단’이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예로 들었다. 지금은 누구도 인상파 그림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19세기 파리 시민들은 그리다 만 것 같은 이 그림들을 보고 비명을 지르거나 졸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름다움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들에서 배운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몸, 그림이 되려면 “지금 이 사회에서 합의되어 있는, 욕망에 기반한 자본주의 상품화의 쾌락 원칙”에 들어맞아야 한다. 



이 교수는 합의된 쾌락 원칙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 즉 미학으로 불렀다. 그런데 합의라는 말에 바로 전환의 가능성이 들어있다. 합의는 깨면 되기 때문이다. 즉 “예술이 학습되는 것이라면 미학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가능하다”. 여기서 계급적 배경처럼 물려받은 감각에서 자유로워진 ‘무관심한 판단’이 중요해진다. 이 교수는 랑시에르가 1848년 프랑스혁명 당시 한 노동자의 일기를 살펴본 것에 주목했다.

“미장공이 갑자기 일을 멈추고 자기가 만든 방을 바라보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무심한 마음으로 그는 갑자기 그 방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요. 바깥에는 오후 햇살이 환하고 창문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 순간 미장공의 노동이 배어 있는 방은 완전히 낯선 사물로 재발견됩니다.” ‘무관심한 시선’의 발견이 랑시에르의 독창성이라고 이 교수는 말했다.

무관심한 판단이 있고서야 합의된 아름다움을 상대화시켜 보게 되고, 그것을 깨는 것도 가능하다. 이 교수는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10대 청소년들이 가장 먼저 거리로 나온 것도 그렇게 해석했다. “촛불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은 ‘10대들은 어른들과 다르다’는 공동체의 합의를 넘어서는 감각을 서로 나누고 있었던 겁니다.” 



이 교수의 생각은 최근 출간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글항아리)에서 좀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여기서 ‘인문좌파’란 합의된 공동체의 윤리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로 ‘정치적 좌파’나 ‘인문학자’와 구별된다. “진보운동이 진보정당이라는 합의제 민주주의에 갇혀 있고, 소통 담론이 진보 세력의 전략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이 교수는 “민주주의보다 정치적인 것을, 소통보다는 불통을 설파”한다. “갈등과 모순을 강조하고, 고정성보다 우발성에 주목하는 이론들을 통해 진보정당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비가시적인 정치’를 찾아내는 것이 인문좌파의 임무”라는 것이다.(손제민기자) 

10. 04. 12. 

P.S. '문화평론가'란 직함으로도 칼럼을 쓴 적이 있지만(담당기자는 내게 '백수를 고상하게 부르는 이름'이라고 정의해주었다) TV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기에 내게 '문화비평'은 다른 동네 얘기에 가까운데, 그래도 이런 정도의 얘기는 알아들을 수 있다. 이택광 교수가 이번주 한겨레21의 '추노, 근육질의 시대'란 칼럼에 적은 내용이다.   

80년대 할리우드의 람보나 코난 시리즈가 60년대 반문화 운동의 형식을 빌려와서 보수주의적 내용을 담아냈다면, <추노>는 반대의 경우다. 80년대나 통했을 보수적 형식에 이명박 시대의 '계급투쟁'이 드라마에서 주된 내용을 이루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는, 특히 대중문화는 고정적이지 않다. 언제나 경험하는 것과 재현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는 법이고, 이로 인해 동일한 형식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판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추노>의 문제성은 보수적 형식에 담긴 '계급투쟁'이란 내용에 있다는 것. 일반 대중이 그렇게 보거나 말거나와 무관하게 그것이 말하자면 그 드라마의 진리내용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비가시적인 정치'를 찾아내는 것이 그가 말하는 '인문좌파의 임무'가 아닌가라고 나대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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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3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3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민주주의론

격주간 기획회의(269호)에 실은 인문분야 전문가 리뷰를 옮겨놓는다.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집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b, 2010)를 다루고 있다.  

기획회의(10. 04. 05) 가라타니 고진 다시 읽기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을 소개하는 문구이다. <정치를 말하다>는 이 걸출한 비평가이자 사상가의 궤적을 한 눈에 일별하도록 해주는 대담집이다. 대담이라는 형식의 성격상 ‘대중적’이지만 그렇다고 얄팍하지는 않다. 가라타니를 전문적으로 소개해온 역자에 따르면, 고등학생까지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쓰인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의 자매편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나는 가라타니 고진 ‘다시 읽기’의 매뉴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 1997)이 얼마전 개정 정본판의 새 번역으로 다시 출간됐기에 ‘다시 읽기’의 명분은 충분하다. 가라타니 고진 수용에도 하나의 ‘사이클’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가라타니를 다시 읽기 위한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이 아니라 <탐구>(새물결, 1998) 연작을 통해서 가라타니 고진에 ‘입문’했다. 1980년대 중반의 저작이며 대략 그 이후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에 이르는 ‘중년 가라타니’의 행적과 이론적 모색에 대해서는 어림하는 편이다. 그래서 <정치를 말하다>를 읽으면서 나의 관심은 우선 ‘청년 가라타니’를 향했다. 이 대담은 ‘청년 가라타니’에게서 핵심적인 사항이 ‘1960년과 1968년의 차이’라고 말해준다. 이것이 첫 번째 포인트다

196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가라타니는 자신을 ‘안보세대’라고 부른다. 안보투쟁 세대라는 뜻인데, 안보투쟁은 1960년 일본이 미국주도의 냉전에 가담하는 미일상호방위조약 개정을 강행하자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대학생․시민주도의 대규모 평화운동을 가리킨다. 일본에서는 1968년에도 전공투(전학공통회의) 중심의 대규모 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주도한 세대는 ‘전공투세대’라고 한다. 넓게 보아 두 세대를 모두 ‘1960년대인’이라고 지칭할 수 있겠지만, 가라타니 자신은 ‘전공투세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왜 그런가? 두 세대 간에는 차이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라타니의 분석에 따르면, 유럽, 특히 프랑스의 ‘68혁명’에서 학생운동은 노동조합이나 공산당과 대등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경우에 68년 시점에서 이미 공산당은 권위가 없었고 노동운동, 농민운동은 쇠퇴해 있었다. 가라타니도 참여한 1960년 안보투쟁에는 모든 계층과 세대가 참가했지만, 1968년의 전공투는 학생 중심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의 ‘68년’과 닮은 것은 오히려 일본의 ‘60년’이라는 것이다. 물론 제도권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신좌익운동이 등장하는 것은 전세계적 추세였지만, 일본의 경우엔 일본 공산당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유럽보다도 일찍 그런 일이 벌어졌다.  

흥미로운 건 1960년에 한국에서는 4.19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4.19는 신좌익운동과는 무관하게 한국사적 맥락에 기초한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당시 한국의 학생운동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1960년은 말하자면 서양과 한국의 중간에 있습니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분석이다. 그가 보기에, 구미 선진국의 첨단적 문제와 함께 후진국이나 아시아가 갖고 있던 고유한 문제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 1960년의 일본이었다. 가라타니는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60년’에서 생각하는 쪽이 ‘68년’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좀더 글로벌한 문제를 사고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세대론과 국지적 관점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보편적 관점을 지향해온 그의 사상 편력 자체가 바로 ‘60년’ 시점의 강점을 입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가라타니가 강조하는 것은 세대론이 아니라 인식론이며, 역설적이지만 그 인식론의 배경에는 그가 ‘60년’의 인간이라는 사실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 점이 그가 특권적인 입각점에서 사고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1968년에서 70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전공투세대 사람들에게는 처음 겪는 것이었지만, 1960-61년에 그러한 일을 이미 겪은 가라타니에겐 두 번째 경험이었고 그는 이후에 다른 경로를 선택한다. 경제학을 전공하던 그가 문학으로 관심을 옮기고, 동시에 마르크스가 ‘엉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업신여기게 된 시점에서 진지하게 마르크스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마르크스를 읽는 것, 그것도 <자본론>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문학비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비평관이 오늘날의 가라타니를 만든 독자적인 관점이다.    

가라타니를 읽기 위한 두 번째 포인트는 그의 도미(渡美) 체험이다. 1975년에 그는 미국 예일대학의 객원교수로서 일본근대문학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쓰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이기도 하지만, 그가 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벨기에 출신의 저명한 문학비평가로서 예일대학 비교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던 폴 드 만 과의 만남이다. “드 만과 만나서 좋았던 것은 그로부터 뭔가를 배워서가 아닙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과 처음으로 만났던 것입니다.”라고 가라타니는 고백한다. 가라타니의 <자본론> 독해인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 대해 칭찬하고 격려해준 인물이 바로 드 만이었다. 이를 계기로 가라타니는 화폐 및 자본의 문제를 언어학이론과 수학기초론을 도입하여 사고하고자 시도하며 이러한 작업을 그는 “드 만에게 보이기 위해” 썼다. 일본의 한 ‘문예비평가’가 ‘이론가’로서 재탄생하게 된 시점이 그래서 1975년이다.     

그리고 세 번째 포인트는 이론적 교착상태에 있던 가라타니가 마침내 ‘돌파’를 이루게 되는 1998년이다. 칸트에 대한 다시 읽기를 통해서 ‘구성적 이념’과 ‘규제적 이념’의 차이를 도입한 그는 코뮤니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이 유행이 된 시기에 코뮤니즘의 형이상학을 재건하고자 시도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문제를 재구성하며 ‘자본=네이션=국가’라는 관점을 획득하게 된다. 국가나 네이션을 상품교환과는 다른 교환양식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는 것이 요점이다. 마르크스가 생산양식의 관점에서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사고했다면, 가라타니는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을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재고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노동자가 가장 약한 입장인 생산지점만이 아니라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소비자 운동과 협동조합, 지역통화 운동 등이 가라타니만의 고유한 착상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자부대로 거기에 이론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가라타니의 독창적인 기여다. 그러한 맥락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를 말하다>는 가라타니 고진 입문서로 최적이다.  

10. 0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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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4-12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라타니 고진의 책만 봤지 정작 고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는데...
고맙습니다.

로쟈 2010-04-12 21:38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평이한 책이어서 고진의 독자라면 챙겨둘 만합니다...

yoonta 2010-04-13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고진입문서로는 최적"이더군요. 그의 사상의 대략에 대해서 이보다 더 잘 "일별"해 주는 책도 없다 싶은 책입니다. 저도 "탐구"를 통해서 고진에 입문?했다고 할수있는데 로쟈님과 공동점하나를 발견했군요. ㅎㅎ

책에 나와있는 고진의 행보에서 한가지 아쉽다고 해야 할까했던 부분이 자신이 수학기초론과 관련해서 자본론을 독해하려고 했던 시도의 실패입니다. 물론 나중에 칸트와 교환양식을 통한 '시차적 관점'의 발견도 충분히 독창적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좀더 개진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해버린 수학기초론으로 보는 자본론도 매우 흥미로왔을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지요. <은유로서의 건축>이라는 책을 보면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유의 단초를 제시하려다가 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결국은 그의 "이론적 교착상태"때문이었다라는걸 이책을 보고 알게 되었네요.

로쟈 2010-04-14 00:19   좋아요 0 | URL
여전히 수학쪽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바디우도 읽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