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좌파란 무엇인가

아침신문을 밤중에야 읽었다. 최근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글항아리, 2010)를 펴냈을 뿐만 아니라 한겨레21('노 땡큐!'란)과 교수신문의 연재(격주로 '세계사상지도'를 다룬다)를 새로 시작하는 등 문화비평가로서 '시즌2' 활동에 나선 이택광 교수의 인터뷰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사실 낮에 한겨레21에서 드라마 <추노>에 대한 칼럼도 읽었기에 이런 정도의 활동 빈도라면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경향신문(10. 04. 12) 이 시대 ‘합의된 아름다움’을 깨라 

왜 사람들은 ‘꿀벅지’와 ‘초콜릿복근’에 열광하는가. 이택광 경희대 교수(42)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합의된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교롭게도 ‘먹는 것’ 그 중에서도 ‘달콤한 것’으로 상상되는 아름다움은 특정 시기의 사회적 산물이다. 
 
 

이 교수는 최근 서울 홍대앞 한 카페에서 ‘지금 우리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연하며 “새로운 것은 합의된 아름다움과 다른 것을 상상하는 데서 나오고 그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잡지 ‘1/n’이 마련한 이 강연에서 이 교수는 이마누엘 칸트와 자크 랑시에르를 많이 언급했다.

이 교수는 칸트의 말을 빌려, 사람들이 ‘소녀시대’와 ‘짐승돌’의 몸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쾌락적 판단’에 기반한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쾌와 불쾌를 나누는 ‘판단’이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예로 들었다. 지금은 누구도 인상파 그림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19세기 파리 시민들은 그리다 만 것 같은 이 그림들을 보고 비명을 지르거나 졸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름다움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들에서 배운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몸, 그림이 되려면 “지금 이 사회에서 합의되어 있는, 욕망에 기반한 자본주의 상품화의 쾌락 원칙”에 들어맞아야 한다. 



이 교수는 합의된 쾌락 원칙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 즉 미학으로 불렀다. 그런데 합의라는 말에 바로 전환의 가능성이 들어있다. 합의는 깨면 되기 때문이다. 즉 “예술이 학습되는 것이라면 미학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가능하다”. 여기서 계급적 배경처럼 물려받은 감각에서 자유로워진 ‘무관심한 판단’이 중요해진다. 이 교수는 랑시에르가 1848년 프랑스혁명 당시 한 노동자의 일기를 살펴본 것에 주목했다.

“미장공이 갑자기 일을 멈추고 자기가 만든 방을 바라보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무심한 마음으로 그는 갑자기 그 방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요. 바깥에는 오후 햇살이 환하고 창문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 순간 미장공의 노동이 배어 있는 방은 완전히 낯선 사물로 재발견됩니다.” ‘무관심한 시선’의 발견이 랑시에르의 독창성이라고 이 교수는 말했다.

무관심한 판단이 있고서야 합의된 아름다움을 상대화시켜 보게 되고, 그것을 깨는 것도 가능하다. 이 교수는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10대 청소년들이 가장 먼저 거리로 나온 것도 그렇게 해석했다. “촛불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은 ‘10대들은 어른들과 다르다’는 공동체의 합의를 넘어서는 감각을 서로 나누고 있었던 겁니다.” 



이 교수의 생각은 최근 출간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글항아리)에서 좀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여기서 ‘인문좌파’란 합의된 공동체의 윤리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로 ‘정치적 좌파’나 ‘인문학자’와 구별된다. “진보운동이 진보정당이라는 합의제 민주주의에 갇혀 있고, 소통 담론이 진보 세력의 전략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이 교수는 “민주주의보다 정치적인 것을, 소통보다는 불통을 설파”한다. “갈등과 모순을 강조하고, 고정성보다 우발성에 주목하는 이론들을 통해 진보정당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비가시적인 정치’를 찾아내는 것이 인문좌파의 임무”라는 것이다.(손제민기자) 

10. 04. 12. 

P.S. '문화평론가'란 직함으로도 칼럼을 쓴 적이 있지만(담당기자는 내게 '백수를 고상하게 부르는 이름'이라고 정의해주었다) TV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기에 내게 '문화비평'은 다른 동네 얘기에 가까운데, 그래도 이런 정도의 얘기는 알아들을 수 있다. 이택광 교수가 이번주 한겨레21의 '추노, 근육질의 시대'란 칼럼에 적은 내용이다.   

80년대 할리우드의 람보나 코난 시리즈가 60년대 반문화 운동의 형식을 빌려와서 보수주의적 내용을 담아냈다면, <추노>는 반대의 경우다. 80년대나 통했을 보수적 형식에 이명박 시대의 '계급투쟁'이 드라마에서 주된 내용을 이루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는, 특히 대중문화는 고정적이지 않다. 언제나 경험하는 것과 재현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는 법이고, 이로 인해 동일한 형식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판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추노>의 문제성은 보수적 형식에 담긴 '계급투쟁'이란 내용에 있다는 것. 일반 대중이 그렇게 보거나 말거나와 무관하게 그것이 말하자면 그 드라마의 진리내용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비가시적인 정치'를 찾아내는 것이 그가 말하는 '인문좌파의 임무'가 아닌가라고 나대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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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3 0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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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3 00: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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