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 가운데 '학출'이란 단어를 오랜만에 접하게 되어 낚아놓는다. 오하나 지음, <학출>(이매진, 2010). 학출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을 가리키던 은어다. 목차를 보니 내가 대학에 들어올 때쯤은 '지식인 비판과 학생 출신 노동자 운동의 위축'이란 제목으로 정리돼 있는데, 내 기억에도 그렇다. 나는 '학출 이후' 세대다. 물론 지금은 학출이란 말조차 생소한 시대가 됐지만. 내겐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와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 때문에 가끔씩 떠올리게 되는 단어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던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이매진, 2006)와 함께 노동운동사의 한 페이지로 기억됨직하다.

한국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학출’이라는 은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80년대는 대학 졸업장이 미래를 보장하던 시대였지만, 수많은 대학생들은 그 안락함을 내팽개치고 은밀히 공장행을 택했다. 이 사람들이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 바로 ‘학출’이다. 그때 그 대학생들을 이끈 동력은 사회의 모순을 모른 척하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큰 ‘양심의 가책’과 시대의식, 그리고 투철한 신념과 의지였다. 그런데 그 많던 학출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런 게 저자의 문제의식인 듯싶고, 책의 의의는 이렇게 정리된다. 러시아에서 19세기 후반 인텔리겐치아의 '브나로드운동'(과 그 실패)과 견주어볼 만하다('실패'라곤 하지만 학출 가운데는 현재 국회의원이나 도지사가 된 이들도 있다).   

공장에 들어간 학출들은 신분을 숨기려고 ‘먹물’의 흔적을 없애는 데 집착한 나머지, 노조 결성 등 현장에서 하려고 한 계획들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채 한 명의 평범한 노동자가 되는 데 그치거나, 공장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금방 그만두거나 여기저기 떠도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가방끈 긴 ‘학삐리’들은 노동현장과 유리되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학출들이 노동자의 위에 서려 하거나 노동운동 경험을 정계에 진출하는 경력 삼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다. 학출이 노사 협상이나 파업을 이끄는 지도자로 나아가지 못한 채 단순히 실무자로서 자기 활동을 마무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그 결과 현재 노동운동에서는, 학출이라는 말이 저평가되어 ‘진짜 노동자’에 대비되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학출들의 생성 요인에서 그 사람들이 가진 고민들과 사후 평가까지 입체적으로 분석한 뒤 노동운동의 반지성주의 경향도 지적하고 있는 <학출 ― 80년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은, 학출과 80년대를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요즘은 대학생이 아니라 기자들이 공장에 간다. 한겨레21의 '노동OTL' 기사를 묶어낸 <4천원 인생>(한겨레출판, 2010)은 네 명의 기자가 시급 4천원 노동 현장을 한달씩 체험하고 쓴 '노동일기'이다. 작년에 나온 <일어나라! 인권OTL>(한겨레출판, 2009)의 속편격이다. 책에 추천의 글을 쓴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의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한겨레출판, 2008)와 같이 읽어봄직하다. 단행본에 덧붙여진 맺음말에는 이런 대목이 포함돼 있다.  

책 전체에서 소개되는 가슴 먹먹한 사연에, 가슴 답답한 현실에 “왜 이렇게 날 불편하게 하느냐” “그렇다면 도대체 대안이 뭐냐”라고 되묻는 독자들도 있다. 불편하고 막막하기는 저자들도 마찬가지다. 취재 이후, 임인택 기자는 말수가 줄었다. 임지선 기자는 식당 아줌마를 더 이상 재촉하지 않는다. 전종휘 기자는 엄지손가락에 못이 박히는 산재를 입고 수염이 덥수룩해져 돌아왔고, 안수찬 기자는 아직도 구운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고된 취재 끝에 얻은 작은 성과라면 이제 통계수치나 정책의 대상이 아닌 체온이 있는 ‘사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적힌 노동은 숫자가 아니다. 복잡한 정책도 아니다. 강력한 구호는 더구나 아니다. 다만 글로 옮기는 것조차 불편한 현실이다. 가난한 노동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들의 부모와 자식은 왜 가난한 노동자인가. 그들은 왜 아무 말 없이 감정과 의견도 숨기고 닫힌 세계를 인내하는가. 노동의 문제를 구조와 제도로 치환하지 않고, 정책적 대안을 공연히 병렬하지도 않고, 오직 그들의 감정과 경험과 일상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만 애를 썼다.

연재기사를 찾아 한창 읽고 있는 중이다... 

10. 0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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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4-29 12:57   좋아요 0 | URL
비슷한 범주의 책인,김원 선생님의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전희경 선생님의 <오빠는 필요없다>을 소장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두 권 다 읽으면서 불끈불끈하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이 책도 그런 느낌을 줄 것 같네요. 한윤형이나 박가분 같은 친구들이 '활동가 시대의 종언'에 대한 의견을 넌지시 내놓은 걸 봤는데, 알라디너들과 함께 고민하고 싶은 주제를 던져줄 수 있는 책인 것 같아, 조용히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로쟈 2010-04-30 00:32   좋아요 0 | URL
<오빠는 필요없다>는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2010-04-29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30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0-04-29 19:00   좋아요 0 | URL
학출... 오랜만이네요.
활동가들이라고 모두 훌륭한 인생을 산 건 아니죠.
그 당시 치열하게 살았던 과거를 이용해 한나라당에서 열라 뛰는 아그들 보면... 학출의 쪽팔림이 전해집니다. 이재오, 김문수... 그리고 박종철이 죽어가면서 지켰던 이름의 개새끼...

로쟈 2010-04-30 00:33   좋아요 0 | URL
그래서 여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죠...

루체오페르 2010-04-30 00:36   좋아요 0 | URL
왜 이렇게 나를 불편하게 하는가...그렇다면 대안은 뭔가...
정말 대안은 뭘까요. 특별히 없는것 같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못한다고 이미 개인의 의지,노력 차원은 떠난것 같거든요. 그래도 살아야지 이거인것 같습니다.

ps ; 뜬금없지만 로쟈님은 혹시 속독법 같은것 배우신적 있으신가요? 읽어내시는 책,기사 합해 텍스트의 양이 어마어마한것 같은데 그걸 다 읽고 이해해서 출력하실려며 상당히 빨라야 할것 같거든요. 요즘 글 읽는 속도와 양에 대한 생각이 좀 들어서 궁금합니다.^^;

로쟈 2010-04-30 00:40   좋아요 0 | URL
초등학교 때 조금 독학하다가 말았습니다. 속독'법'은 아니고, 피치못할 때 발췌독은 하지요. 그래도 허겁지겁 읽는 것보다는 느리게 읽는 걸 선호합니다. 그리고 서평기사를 읽는 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작성해볼 필요가 있는 '차가 현상서'(<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를 보니 '집을 임대해 들어가고 나올 때 집의 상태를 점검하는 보고서'를 뜻한다고 한다)에 또 하나 기입되어야 할 항목은 '부동산'이다. 문제의 윤곽을 그려주고 있는 칼럼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부동산 계급사회의 실상은 '손낙구의 세상공부'(http://blog.ohmynews.com/balbadak/)도 참고할 수 있다...  

경향신문(10. 04. 29) 부동산 정치와 자산 계급사회   

지방선거를 한 달 앞두고 또 ‘집’이 세간의 화제다. 집 문제는 정치적으로 복잡하다. 집값이 오르길 바라는 계층, 내리길 바라는 계층이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은 모양이다. 집값을 떨어뜨리지 않고 무주택자의 환심을 사는 것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보금자리주택으로 수도권의 무주택 중산층을 현혹하고, 다른 한편으론 다양한 거래활성화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이 정책들엔 공통분모가 있다. 부동산에 대한 욕망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동산 정치’다. 대략 2006년부터 부동산 정치는 수도권 중산층, 나아가 한국정치 전반을 보수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람들의 삶 좌우하는 ‘집’의 힘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은 주거, 자산, 자본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선 사적 자산과 자본의 성격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집’은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선 부동산 불평등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총체적인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걸까? 룩셈부르크 부(富) 연구 그룹(LWS)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가계자산 중 실물자산 비중은 이탈리아(85%), 핀란드(84%) 등이 한국(80% 내외)보다 높고 캐나다(78%)나 스웨덴(72%)도 꽤 높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금융자산 비중이 40%나 되는 나라의 사례를 일반화할 수 없다. 나아가 많은 선진국에서도 자산 불평등도는 1980년대 이래 상승 추세라서 한국보다 불평등도가 높거나 비슷한 수준의 나라도 많다. 그런데도 이 나라 사람들은 ‘집’에 웃고 울지 않는다. 왜일까? 그것은 임금소득과 사회보장, 각종 공적 인프라에 의해 인간다운 삶의 ‘기본’이 충족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럽 사회는 한국보다 소득분배가 훨씬 더 평등하다. 또한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적 사회보장 지출의 비중을 보면, 한국은 5% 수준인데 유럽연합(EU) 회원국 평균은 24%에 이른다.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 많은 나라에서 전체 주택 중 공공임대주택의 비중은 20~40%나 된다. 한국은 겨우 5% 수준이라서 사회적 낙인효과까지 있다.

고용과 소득, 사회보장이 삶의 기본을 충족시켜주는 곳에선 누가 궁전에 살든 일반인들이 마음 쓸 바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사정이 다르다. 일자리는 불안하다. 임금 격차도 벌어진다. 퇴직연령은 당겨진다. 자영업은 망하기 일쑤다. 교육비는 감당이 안 된다. 자식의 경제적 독립도 늦어진다. 고령화로 살기는 오래 산다.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공적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어디선가 ‘돈’이 나와야 한다. 어디서 나올 것인가? 자산이다. 



유럽 공공임대주택 비중 20~40%
그래서 중산층은 온 힘을 다해 집을 사고 주식·펀드로 돈을 불리려 하지만, 부채나 금융시장 리스크를 떠안고 산다. 불안이다. 자산 하위계층은 여유자금이 없고, 부채비율도 높은 데다, 공금융기관에 접근할 수도 없어 인생이 제자리걸음이다. 절망이다. 하지만 상위계층은 자본과 정보가 풍부하며, 위기를 견디고 이용할 재력을 갖고 있다. 이들에게 ‘집과 돈’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이런 자산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의미는 커지고 있다. 실로 ‘자산 계급사회’라고 부를 만하다. 자산 계급사회는 부동산 불평등, 투기적 금융시장, 고용불안과 소득격차, 열악한 사회보장, 투기적 산업구조의 문제가 얽혀 생겨난다. 사람들의 불안과 욕망을 도구화하는 부동산 정치가 아니라, 총체적 시스템을 개혁할 비전과 정치세력이 필요하다. 거기에 실패한다면, 부동산투기가 금융투기로 전이될지언정 자산에 따라 삶의 질과 노후, 자식의 계급까지 결정되는 잔혹한 현실은 개선되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신진욱 | 중앙대 교수·사회학

10. 04. 29. 

P.S. "대략 2006년부터 부동산 정치는 수도권 중산층, 나아가 한국정치 전반을 보수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진단과 "사람들의 불안과 욕망을 도구화하는 부동산 정치가 아니라, 총체적 시스템을 개혁할 비전과 정치세력이 필요하다"는 처방에 모두 공감한다. "거기에 실패한다면, 부동산투기가 금융투기로 전이될지언정 자산에 따라 삶의 질과 노후, 자식의 계급까지 결정되는 잔혹한 현실은 개선되지 않는다"라는 전망에 대해서는 선거 이후에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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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 시나리오

오늘 아침 CBS 라디오의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천안함 침몰 사고와 관련하여 美 브루킹스연구소 박선원 초빙연구원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http://www.cbs.co.kr/radio/pgm/?pgm=1378). 국방부와 합동조사단의 잠정 결론과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어서 인터뷰 내용을 스크랩해놓는다(좌초 가능성에 대한 설득력 있는 견해는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7854 참조). 의혹만 부풀려진 상태이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믿는다. 전 국민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  

노컷뉴스(10. 04. 28) 브루킹스硏 박선원 “함미익사, 함수경상? 여전히 의혹”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美 브루킹스연구소 박선원 초빙연구원 (前 청와대 안보전략비서관)

천안함 침몰 사고 원인을 군에서는 ‘버블제트에 의한 비접촉수중폭발’로 잠정 결론을 내린 상태입니다. 자연히 북한군의 연루 가능성도 높게 거론이 되고 있는데요. 그런데 미국은 여전히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한국인 연구원이 버블제트 때문이라는 조사결과에 대해서 강한 의문을 제기해서 눈길을 끄는데요. 며칠 전에 연결했던 해난구조대 출신의 장교는 “버블제트가 원인이라는 데 100% 동의한다” 이렇게 얘기했었죠. 오늘은 그 반론쯤이 될 것 같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정책연구소인 브루킹스연구소의 연구원이자, 참여정부의 안보전략 비서관 지내신 분이세요. 박선원 박사 연결해보겠습니다.

◇ 김현정 앵커> 지금 워싱턴에 계시는 거죠?

◆ 박선원> 네.

◇ 김현정 앵커> 브루킹스연구소에서도 천안함 침몰 사고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 박선원> 동북아와 한반도 문제, 남북관계에 관심 있는 학자들이 모두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해군 희생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고요. 원인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김현정 앵커> 비접촉성수중폭발, 그러니까 버블제트가 침몰원인이라는 게 민군합동조사단의 잠정결론인데, 박 박사님께서는 100% 동의하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이유일까요?

◆ 박선원> 버블제트라면 대개 기뢰에 의한 충격입니다. 만약에 수평에서 어떤 폭발을 했고 그것이 수면에 작용을 한다면 그것은 수중충격파라고 이야기하지 버블제트라고 이야기하지 않거든요. 어뢰라고 한다면 수평충격파인데, 그것만 갖고는 배가 두 동강이 나지 않죠. 역시 어뢰라고 하는 것은 화약이나 이런 폭발물질에 접촉을 해야 되는 겁니다. 기술적으로 보면 근접신관을 들고 나오고, 또 버블제트가 있고, 중국제 중어뢰, 이 세 가지를 묶어서 북한이 신무기를 들고 나온 것처럼 보도가 있지만 근접신관은 최신무기가 아니고요. 1943년부터 대다수 미국 어뢰에 적용된 오래된 기술입니다. 그러니까 근접신관의 경우에도 바닷물 팽창력 보다는 폭약에 의한 충격, 또 파편에 의한 파공, 이런 것에 주요한 파괴력입니다.

◇ 김현정 앵커> 비접촉성으로 어뢰가 폭발했다면 이렇게까지 두 동강이 날 수 없다는 말씀이세요?

◆ 박선원> 그렇죠. 어떤 형태로든지 폭약이 선체에 작용을 직접 해야 된다, 이거죠.

◇ 김현정 앵커> 일단 비접촉성이라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그런데 며칠 전에 저희 방송에 출연했던 해군 장교 얘기를 들어보면, 절단면을 보면 이게 버블제트 말고는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다고 확신을 하시던데요?

◆ 박선원> 절단면의 위, 아래 X자 모양으로 나와 있고, 그것을 버블제트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라고 한다면 옆에서 치고 있는 어뢰에 의한 측면파괴라기 보다는 기뢰에 의한 수직폭발에 가깝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하나의 가정입니다만, 천안함이 지나치게 해안 가까이 접근하는 과정에서 스크루가 그물을 감고 그 그물이 철근이 들어있는 통바를 끌어당기면서 과거 우리 측이 연화리 앞바다에 깔아놓은 기뢰를 격발시킨 게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4월 16일 인가요. 함미 스크루 사진을 보면 약 15m 정도의 그물이 딸려 올라오고 있거든요. 그것을 보면 버블제트라고 한다면 어뢰보다는 기뢰가 아니냐, 하는 거죠.

◇ 김현정 앵커> 우리가 깔아놓은 기뢰 쪽일 것이다, 이런 말씀이세요?

◆ 박선원> 네, 그런데 저는 안보태세 상으로 봐도 우리가 북한에게 당했다기보다는 우리의 사고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해요.

◇ 김현정 앵커> 우리가 깔아놓은 기뢰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어쨌든 기뢰, 어뢰로 잠정 결론이 그쪽으로 모아지고 있는 건데, 거기에는 동의를 하시는 거네요, 기뢰라는 쪽에는?

◆ 박선원> 그렇지만 사망자나 실종자 상태, 또 생존자 상태를 보면 말이죠. 과연 이게 과연 강한 폭발물에 의한 거냐, 하는 데 여전히 의구심은 남아요.

◇ 김현정 앵커> 무슨 말씀이신지?

◆ 박선원> 격실이 튼튼하다고 하지만 오히려 수병들한테는 충격이 더 강하게 전달됐을 거고요. 또 2차 세계대전 사례를 연구한 1990년대 자료가 있습니다. 미국해군대학교에서 나온 자료인데요. 그것을 보더라도 실종자, 사망자, 부상자가 동시에 다 발생을 해야 되고, 또 내장이나 장기 동공파열 등이 있어야 되고, 선체에서 튕겨져 나간 수병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천안함의 경우에 보면 함미에서는 전원 익사하고 함수에서는 대부분 경상이라 말입니다. 현장 해상에서는 사망자는 없고, 산화자로 분류된 분은 실종자에 가깝고, 이런 것을 보면 역시 폭발물 충격의 특성과는 좀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 김현정 앵커>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은 이유, 경상인 이유는 객실 안에 있어서 그렇다, 격실이 아주 튼튼하게 지어져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던데요?

◆ 박선원> 그러니까 그렇게 튼튼할수록 수병들에게 충격이 강하게 전달된다는 거죠. 해군에서 군함을 만들 때 어떻게 하면 외부 충격을 흡수할 수 있고, 이것이 수병들에게 충격을 최소화시킬 거냐 하는 것은 가장 큰 과제인 건 틀림이 없어요. 그리고 그것을 개선해 오고 있죠. 하지만 이렇게 함미에서는 전원 익사하고 함미에서는 경상이고. 이런 경우는 없다, 이거죠.

◇ 김현정 앵커> 폭발이라면 이렇게 되기는 어렵다는 말씀이세요?

◆ 박선원> 그렇죠.

◇ 김현정 앵커> 그러면 기뢰나 어뢰 중에 고르라고 하면, 기뢰지만 반드시 기뢰도 아닌 것 같다, 이런 말씀이시군요?

◆ 박선원> 그렇습니다.

◇ 김현정 앵커> 그러면 어느 쪽에 무게를 두고 계신 겁니까, 원인 중에?

◆ 박선원> 제일 중요한 건 우리가 파편을 찾는 것에 달려있죠. 파편이 어디 거냐, 기뢰냐, 어뢰냐, 이런 게 있지만 여전히 저는 배가 좌초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최초 보고가 다 좌초했다, 침수되었다, 또 침수로 인해 침몰하고 있다, 이런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쉽게 우리가 배제하지 말자는 거죠.

◇ 김현정 앵커> 좌초라면 어떤 암초에 의한 좌초를 말씀하시는, 침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박선원> 네, 그렇게 보는 거죠. 그러니까 함미 우측 스크루에 그물이 감겨 올라왔고, 또 스크루 끝이 안으로 휘어져 있지 않습니까? 진행방향 쪽으로... 그런 것은 함체 중간에 폭발이 있었다면 스크루가 밖으로 휘어지지 안으로 휘어지진 않거든요. 생존자나 희생자들의 상태, 이런 것을 보면 좌초일 가능성도 우리가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김현정 앵커> 박사님 말씀을 듣다보니까 지금의 잠정결론이라는 게 허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그렇다면 군이 굳이 이렇게 허점투성이인 결론을 내릴 이유가 있는가, 이런 생각도 듭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 박선원> 우리 군도 당혹스럽겠죠. 왜냐하면 일종의 직소퍼즐을 맞추는 것하고 똑같은데, 조각이 다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구멍이 여러 군데 생기는 거거든요. 어느 것을 갖다 대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결론이 잘 안 나옵니다. 적어도 파편이 나오지 않는 한 말이죠. 그래서 군이 일부러 왜곡시킬 것이다, 이렇게 보지는 않죠. 하지만 적어도 초동대응 과정을 보면 북한에게 우리가 당했다고 함으로써 현재 전쟁과 마찬가지인데 군 지휘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 그렇기 보다는 이 사람들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이렇게 한 것은 분명히 현재의 지휘부에게는 불리한 일은 아니죠.

◇ 김현정 앵커> 그런데 해외조사단도 지금 조사에 참여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조작한다든지 군에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간다든지, 이게 가능합니까?

◆ 박선원> 조작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미국이 계속 강조를 한 것은 우리의 조사에 기술적인 지원을 아낌없이 제공하겠다는 거기 때문에 은폐나 조작은 쉽지 않죠. 하지만 한국 정부가 일단 어떤 방향으로 죽 방향을 잡아갈 때 그때마다 미국이 ‘아, 그거 아니다, 그거 아니다’ 그렇게 말은 하진 않죠. 어쨌거나 외부충격에 의한 사고인데 북한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만 확증은 없다, 이런 식으로 한국정부와 우리 군이 입장을 정리해갈 때 굳이 그런 건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거죠.

◇ 김현정 앵커> 얼마 전에 이런 말씀하셨어요. 우리 정부가 국민에게 공개하지 않은 자료를 미국은 다 갖고 있다, 미국만 가지고 있는 비밀정보란 게 뭔가요?

◆ 박선원> 제가 말씀드린 것은 우리 국민들에게 공개를 하지 않지만 한미 양측 군당국은 서로가 갖고 있는 정보를 다 공유를 하고 있고, 그래서 한국군이 함부로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을 하기는 어렵고.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 군이 어느 정도 방향을 갖고 죽 끌고 갈 때에 너무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미국에서 의견을 제시를 할 겁니다. 지금 우리 군은 사고 지점도 계속 바꿔왔고요. 그 다음에 사고 직전에 배가 시속 몇 노트로 움직였는지도 밝히지 않고 있고, 또 8노트라고 그랬다가 6.3노트로 말을 바꾸고 있고, 군 당국 사이의 교신내역이라든지 항적이라든지 이런 걸 다 공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가장 기초적인 자료거든요.

특히 북한 어뢰에 당했다고 한다면 어느 방향에서 어느 각도로 진행하고 있었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곧 북한 잠수함의 위치를 추적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거든요. 이런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 계속 북한에 당했다고 하는 건데, 이런 것은 미국도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과도하게 상황을 은폐하거나 조작하거나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 김현정 앵커> 지금 미국은 원인이 뭔지, 적어도 북한이 개입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고 있다는 말씀이세요?

◆ 박선원> 적어도 북한이 의심스럽지만, 지금까지 개입했다는 증거를 못 찾고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죠.

◇ 김현정 앵커> 의심스럽지만 증거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굉장한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런 말씀이시군요?

◆ 박선원> 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어떤 파편이나 이런 것에서 북한의 연루가능성이 확인이 된다면 당연히 중국이나 주변국들에게 협조를 요청할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닌 한은 조금 더 신중하게 조금 더 과학적인, 깊이 있는 조사가 필요하다, 이런 입장을 보이고 있는 거죠.

◇ 김현정 앵커> 알겠습니다. 지금 민군합동조사단이 내린 결론에 대해서 의심스러운 부분이 아직 남아있다,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된다는 의견을 가지신, 미국에 있는 분이라서 제가 더 관심을 더 가지고 이야기를 좀 들어봤습니다. 박사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10. 04. 28. 

P.S. 한국일보 서화숙 편집위원의 칼럼도 같이 스크랩해놓는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정작 누가,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 짚어주고 있다.  

한국일보(10. 04. 21) 아님 말고?

북한에 자주 가는 재미목사가 말했다. 그를 안내한 북한의 고위관리는 집으로 초대하더니 북한에는 희망이 없다며 목사가 그들 가족을 도와달라고 했단다. 북한을 위해 제3국에서 싸워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달러를 좀 부쳐달라는 내용이었다. 대가로 뭘 해준다고 하더냐고 내가 물었더니 부자나라인 미국에 사는 동포니까 그냥 도와달라고 했단다.

고위관리가 나라를 개선할 방법을 찾지 않고 정보를 대가로 적대국 사람에게 돈을 요구해도 한심하겠지만 무작정 돈을 달라면 엘리트계급조차 거지근성이 몸에 뱄다는 뜻이니 더욱 암담하다. 북한을 이끌어갈 진정한 엘리트층이 없다는 것은 남북통일을 생각해도, 한국-조선 공존시대를 생각해도 비극이다.

증거는 없는 북한관련설 유포
그러나 국제기구에서 일하며 북한을 지원하는 남한의 활동가는, 북한의 엘리트 정신은 중앙정부에는 없는지 몰라도 지역의 전문가들한테는 살아 있다고 들려주었다. 북한에는 인력과 물자가 부족해서 놀고 있는 병원과 공장이 많은데도 중앙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빵공장을 하나 더 지으라고 권유하더란다. 떡고물이 좀더 떨어지는 모양이다.

반면 현지의 활동가들은 중앙 관리가 없는 틈을 타서 "밀가루 비율을 조금만 높이면 아이들한테 맛있는 빵을 먹일 수 있을 텐데"라고 물자 지원을 강조하더란다. 장비가 부족한 북한에서 의사들이 방사선에 노출된 채 엑스레이 촬영을 강행하는 희생정신은 스티브 린튼 박사의 북한방문기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자기가 관여하는 직역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복지를 누리게 만들겠다는 사명감으로 가득한 전문가들이 북한 곳곳에 아직 살아 있다.

이같은 도덕적인 전문가들을 어떻게 더 많이 키워내서 마침내는 북한 전체를 바꾸게 만들 것인가가 북한 연구의 최신 과제이다. 북한 스스로 민주화를 선택해야 통일비용도, 분단비용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북한에 '소프트파워'를 키우자는 이런 노력들이 된서리를 맞은 것은 2년이 넘은 일이니 말을 않겠다. 이제는 북한을 핑계 대고 남한 스스로 정부의 역할을 방기하는 증세까지 나타났다. 천안함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 탓을 하며 여론을 호도한다. 뭐든지 북한 탓을 하면 책임이 없어질 줄 아는 극우병이 도진 것이다. 13년 전 김영삼 정부 시절에 북한에 돈을 주고 판문점 부근에서 총격사건을 일으켰다는 의혹을 국민들이 아직도 기억한다. 더구나 개인이든 집단이든 유죄를 입증할 증거가 없으면 무죄로 추정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면서 계속 북한 관련설을 퍼뜨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사 천안함 사건을 북한이 저질렀다고 해도 일차적으로는 남한정부의 문제이다. 그토록 괴물스러운 이웃을 가까이 두고서, 그들과 선린관계를 폐지하고 긴장관계로 돌아섰다면 접경지역의 안보를 누구보다 치밀하게 지켰어야 하는 것은 남한 정부의 책임이다. 강제징집제의 국가에서 군대에 간 청년들의 귀한 목숨을 지켜주어야 하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이다.

불신 자초한 천안함 사건처리
누구 탓을 하기 전에 이 정부는 이런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정확히, 거짓없이 밝혀야 한다. 북한이 저질렀다면 왜 감지하지 못했는지, 북한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도 남김없이 밝혀야 한다. 발생단계부터 허둥대고 보고조차 제대로 못 받은 국방부는 사건 정황을 발표할 때마다 다른 내용을 발표해서 불신을 자초했다. 수색과정에서 귀한 인명을 또 열이나 잃었다. 군인과 어민들의 희생정신은 찬양 받아 마땅하지만 동시에 이 정부가 얼마나 몰지각하게 구성원들을 몰아붙이고 요령부득으로 일 처리를 하는지 그 무능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돌아봐야 한다. 정부가 불신을 자초하는 바람에 사건 조사는 외국전문가의 손을 빌리게 됐다.

천안함 사건을 놓고 울기보다 전말을 밝혀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는 것이 대통령이, 이 정부가 할 일이다. 무능한 정부 탓에 숨진 이들에게 휴식을 명령한다는 말장난이 나오는가. 사건 원인이나 제대로 밝혀내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명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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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04-28 21:56   좋아요 0 | URL
이건 그 쪽 관련 공학을 스스로 전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판단을 내리기 힘든 경우 아닌지...ㅡㅡ;;

skyrider 2010-04-28 22:17   좋아요 0 | URL
미국에서 마약하고 인터뷰했나?

도중에 스스로 앞뒤 안맞는 말을 하시네.
이런 경우 대개
정부발표 불신이라는 결론을 먼저 (심정적으로) 내려놓고
그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미미한 이성을 발동시켜 근거를 짜맞추는 식으로,
추리의 방향이 역으로 작동한다는.




노이에자이트 2010-04-29 00:12   좋아요 0 | URL
영원히 영구미제로 남으면 남한 내부에서 소모적인 논쟁만 치열해질 것 같습니다.그게 제일 불안하구요.어쨌든 원인을 규명할 수 있는 증거가 나와야 할텐데...

2010-04-29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뒷북] 책의 날 기념, 10문 10답 이벤트!

이미 지나간 '책의 날'에 무얼 했던가 돌이켜보니 영풍문고에 들렀다가 <러시아 현대비평이론>(민음사, 1999)을 구한 게 전부다. 책은 대학원 시절인 1993년에 초판 1쇄가 나왔고(그땐 좀 비싼 책이었다) 구입한 건 2쇄다. 현재 절판된 걸로 아는데, 우연히 눈에 띄기에 '10년전 가격'을 빌미로 손에 넣은 것. 그렇게 별일없이 지나간 '책의 날'이건만, 알라딘에서 뒷북 이벤트를 한다고 하니 간단히 답한다(10문은 어제 오후에 한번 훑어봤다). 기분전환이 되려나 모르겠다...  

1. 개인적으로 만나, 인생에 대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고픈 저자가 있다면?   

이미 세상을 떠난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분도출판사, 2005)과 <순교일기>(두레, 1997)의 저자다.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그가 찍은 '딥포커스' 장면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아니면 서로 입 다물고 묵상하고 있어도 좋겠다. 그의 '현전'이면 그걸로 족하다.  

  

혹은 키에슬로프스키라도 좋겠는데, 국내엔 소개된 책이 없어서 유감이다. 생존 감독 중에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한데 그가 '저자'이기도 한지는 모르겠다...  

2. 단 하루, 책 속 등장 인물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누구의 삶을 살고 싶으세요?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이반 데니소비치이지만, 따져보니 이미 경험해본 적이 있다. 대학 2학년 전방입소 교육을 받을 때 나를 '슈호프'라고 부른 친구도 있었으니까. 한데, 이건 '살고 싶은 삶'이라고 하긴 어렵겠다('체험 삶의 현장'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이왕 '체험'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센 걸 경험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 같은 벌레-되기의 체험.    

   

3. 읽기 전과 읽고 난 후가 완전히 달랐던, 이른바 ‘낚인’ 책이 있다면?  

'낚인다'는 게 별로 소득이 없었다는 뜻인가? 보통은 그럴 기미가 있으면 다 읽지 않기 때문에 '입질'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기대와 다른 책'이라고 하면, 최근에 읽은 작품으론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들 수 있다. 분명 20대에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이지만 40대에 다시 읽으니 생각만큼의 감흥이 일지 않았다. 대신에 <사양>이 오히려 더 나았다. 그러니 다시 읽으면서 <인간실격>에 '낚이고' 대신 <사양>을 '낚았다'고 해야 할까...   

4. 표지가 가장 예쁘다고, 책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책은? 

표지야 흉하지 않으면 되지 않나, 라는 식이니까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 책은 없다. 단, 지난 겨울에 체호프의 단편집 표지 얘기를 잠시 늘어놓은 적이 있는데, 아래 같은 표지라면 대만족이다.   

5. 다시 나와주길, 국내 출간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책이 있다면?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는 있지만 소장하고픈 책으론 앨프리드 크로스비의 <생태제국주의>(지식의풍경, 2007)가 있다. 이미 읽은 책이고 또 소장도 하고 있지만, 괜히 절판된 게 아쉬운 책으론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이 있고, 출판 편집자들을 만날 때마다 바람을 넣고 있는 책으론 러시아의 대표적인 인문학자 드미트리 리하초프의 자서전 <러시아 영혼에 대한 성찰>이 있다(영역본도 나와 있다).     



6. 책을 읽다 오탈자가 나오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요. 

'좋은 책'일 경우엔 '옥에 티'라고 생각하지만 '허접한 책'일 경우엔 저자나 역자를 기억해둔다. 페이퍼까지 쓰지 않는다면 오래 기억을 못하는 게 탈이군...  

7. 3번 이상 반복하여 완독한 책이 있으신가요?  

대개는 강의용 책들이다. 가장 대표적으론 <지하생활자의 수기>(혹은 <지하로부터의 수기>) 같은 걸 들 수 있을까? 매 학기마다 다시 읽거나 최소한 읽는 흉내를 낸다. 새로 나온 번역본들과 대조해서 읽는 건 올해의 과제 중 하나다... 

 

8. 어린 시절에 너무 사랑했던, 그래서 (미래의) 내 아이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책? 

책 읽는 걸 좋아하는 꼬마 소녀가 주인공인 <마틸다> 같은 책을 아이가 좋아해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혼자 생각일 듯싶다. 게다가 <마틸다>는 내가 어렸을 때 읽은 책이 아니군. '어린 시절에 너무 사랑했던'이라는 표현이 좀 간지럽긴 한데, 내겐 방정환의 <사랑의 선물> 같은 책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강감찬>이나 <을지문덕> 같은 전기들. 하지만 딸아이가 좋아하는 전기는 장군들의 전기가 아니라 이태영 변호사의 전기다. 각자가 읽는 수밖에... 

 

9.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두꺼운(길이가 긴) 책은?  

아마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이지 않을까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보다도 더 기니까. 이번 학기에 읽을 책으로는 <악령>이 가장 길다.  

 

10. 이 출판사의 책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출판사는?  

특별히 편애하는 출판사가 있는 건 아니다. 그때 그때 좋은 책, 읽고 싶은 책을 내는 출판사가 그주의 가장 좋아하는 출판사다. 신뢰는 그런 호감이 쌓여가다 보면 만들어지는 것이겠다. 이번주엔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 <멜랑콜리 미학>(문학동네, 2010), 그리고 어제 가장 탐나는 책이었던 <만주족의 청제국>(푸른역사, 2009) 등이 관심도서다. 엊그제부턴 청나라를 건국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부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는데, 관련서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런 걸 제때 내주는 출판사가 독자로선 좋은 출판사다... 

 

10.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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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8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8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ra 2010-04-28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랑콜리 미학표지 참이쁘네요 ㅎㅎ

로쟈 2010-05-01 11:15   좋아요 0 | URL
요즘 어지간한 책들은 다 표지값을 합니다.^^
 

교수신문에서 번역 문제에 대한 황현산 고려대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현 한국번역비평학회장이기도 한 황교수는 번역 행위의 다층적 의의와 번역 비평/평가의 필요성에 대해서 짚어주고 있다. 안 그래도 개인적으론 번역의 바다에 '잠수'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눈길이 가는 칼럼이다.    

교수신문(10. 04. 26) 번역과 학문적 위선  

극렬한 찬성과 극렬한 반대는 많아도 비평은 없는 것이 우리 사회라는 말이 있다. 이 비평부재의 현상은 번역이 관련될 때 더욱 두드러진다. 몇 년 전에 외국문학을 전공한 어느 교수가 한 유명 번역가의 번역문에 나타나는 허점들을 격렬한 어조로 지적해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한 적이 있다. 내 친구이기도 한 번역가는 그 지적에 수긍하면서도 자신이 소홀한 번역가를 넘어서서 ‘나쁜 놈’으로까지 매도된 데에 깊은 불만을 표시했다. 여기서도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비평의 풍토이다.  

번역자는 신문·잡지의 단평을 벗어나서 자기 번역을 평가받을 기회가 없었으며, 교수는 자신이 발견한 중요한 오류와 그 처방을 공개적으로 개진할 기회가 없었다. 말해야 하나 말하지 못한 말들은 상처가 되고, 그 상처에서 어느 날 화산이 폭발하듯 솟아나온 말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만큼의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상처는 늘 비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비평 없는 사회의 분노에서 온다. 



한국번역비평학회가 창립된 것은 4년 전이다. 그 동안 학회는 월례발표회와 춘하추동의 학술발표회를 통해 뛰어난 학문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어도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 언어로 실현된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작업인 번역은 그 텍스트에 담긴 진리성과 미적 효과를 다시 검토하는 매우 정교한 절차라는 점이 자주 논의 됐다. 인간사회에 어떤 절대적 언어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언어와 관련해 모든 언어는 하나의 방언일 터인데 한 방언의 역량을 토대 삼아 그 사용자들의 역사와 풍속과 주관성 안에서 성립된 텍스트를 다른 방언의 역량을 토대로 다른 주관성 안에서 다시 재현하는 번역 작업은 그 텍스트를 다른 문화에 비춰 객관화하는 한 방편이 된다. 이 객관화의 시련은 그 텍스트를 최초에 성립시킨 언어뿐만 아니라 그것을 번역으로 재현하는 언어에도 해당되는 것은 물론이다.

번역할 가치가 있는 텍스트라면 어떤 텍스트건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어휘적으로건 통사적으로건 논리적으로건 미학적으로건 우리말에 본래 내장된 힘을 밑바닥까지 동원해야 하며 그 텍스트를 둘러싼 문화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역사와 풍속과 주관성을 다시 성찰해야 한다. 두 언어에서 말과 사물의, 생각과 표현의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이때이다. 따라서 진지한 번역자가 자기 작업에서 현대 인문학의 크고 작은 주제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학술 테스트나 문학 텍스트의 번역은 외국어 텍스트에 대한 우리말 텍스트를 마련하는 일에서보다도 언어에 미치는 이 번역 효과에서 더 중요하다. 번역비평은 궁극적으로 이 번역효과를 토론하는 데 이르러야 한다.

번역평가의 이론과 방법은 학술 테스트나 문학 텍스트보다도 외교문서, 계약서, 제품의 매뉴얼 등을 대상으로 하는 실용번역에서 먼저 정립됐다. 이런 문서의 번역에는 한 국가나 기업의 운명, 때로는 개인의 생사가 걸려 있는 만큼, 그 평가도 오류의 지적에 치중하게 돼 있는 것이 당연하다. 문학 텍스트라 하더라도 오류의 지적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지만 현재 주로 사용하는 평가방법 곧 충실성과 가독성이라는 말로 환원되는 평가방법은 의미이해의 층위, 문체의 적합성, 낱말의 경제적 효과, 언어역량의 개발 등 숱한 문제를 섬세하게 다룰 수 없는 탓에 시비를 토론으로 발전시키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평가방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번역 이를테면 번역시학이나 비교문체론 같은 좋은 비평을 촉발시킬 수 있는 번역이 드물다는 점도 말해야 한다. 질 높은 번역은 질 높은 비평의 토대가 된다.

늘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번역과 번역가의 낮은 위상도 문제가 된다. 정신적인 가치까지도 시장이 평가하는 사회에서 전문번역가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투는 말할 것도 없고, 생활이 안정된 대학교수들에게도 모든 업적이 양으로 평가되는 평가 체제에서는 정교한 번역을 기대하기 어렵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 연구번역이 소논문 한 편의 대접을 받거나 받지 못하는 정황은 일종의 학문적 위선과 연결된다. 우리말 사전에는 번역서에만 나오거나 그 쓰임이 번역에서 특별한 어휘들이 등재돼 있지만 번역서의 문장이 용례로 소개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번역비평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은 학문의 이런 위선과도 싸운다.(황현산 고려대·불어불문학과) 

10. 0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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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4-27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과 사전편찬을 무시하는 나라는 문화대국이 될 수 없습니다.

로쟈 2010-04-28 20:23   좋아요 0 | URL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부터 둘러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04-29 00:02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4-28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 말에 공감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4-29 00: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미지 2010-04-30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국역본 읽을 만한가요?...

로쟈 2010-05-01 09:48   좋아요 0 | URL
2종의 국역본을 같이 읽으시면 될 듯합니다. 국내에선 최고 권위자들의 번역입니다...

BonBon 2010-05-10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번역을 전공하는 대학생인데요,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