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06. 07. 23)에서 학술동향 기사 하나를 옮겨온다. 타이틀은 '미국의 유교 연구현황'인데, 다소 생소한 테마인 만큼 얼마간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한 학술저널의 논문을 소개하고 있는 기사로 필자는 강성민 기자이다. '프래그머티즘과 유교의 대화'는 "프래그머티즘과 儒敎의 대화 … 토착화 멀지 않아"라는 부제에 들어 있는 것이다.

-‘동양철학연구’ 제46집에 실린 장원석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의 ‘미국학계의 유교연구 현황’은 최근 5년간 미국에서 이뤄진 유교연구를 총괄해서 검토하고 유형별로 잘 정리해서 보여줌으로써 연구자들에게 매우 유용한 정보가 될 듯하다.

-장 연구원은 최근 미국의 유교연구를 ‘고전의 번역과 재인식’, ‘세계철학으로서의 유교연구’로 특징짓고 있다. 그는 “전근대문명의 파편을 확인하는 태도로 시작된” 영미권 유학 연구가 세대교체를 이루고 나이가 젊어지면서 진지해지고 깊어졌다고 말한다. 고전 다시읽기가 일종의 붐을 이루고 있는데, ‘주역’, ‘중용’, ‘맹자’, ‘논어’에 대한 번역과 연구서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철저한 고고학적, 역사문헌적 지식을 근거로 기존 장들의 순서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 과정에서 안이한 개념번역에 대한 비평도 이뤄진다. 로저 에임즈(Roger T. Ames)는 제수이트 선교사들로부터 시작해 제임스 레그(James Legge)에 의해 일단락된 1세대의 해석학적 선입견을 들춰낸다. 天을 단수형 Heaven으로 번역할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서양인들이 그것이 조상과 문명의 축적을 의미하는 동양의 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道를 습관적으로 Way로 번역하는 건 어떤가. 도라는 개념을 명사로 이해하는 이런 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의 속성’과 ‘행위의 양식’이라는 존재구분에 근거한 것 아닌가. 사실 道는 동명사적인 ‘길 만들기’로 읽거나, 주관적 느낌의 형용사로 읽어야 할 때가 많다는 게 에임즈의 지적이다. 이런 난숙해진 연구를 바탕으로 2003년과 2005년에 1천페이지가 넘는 유교백과사전이 연달아 나오고 있다(*우리에게 이런 사전이 있는가?). 미국에서 유교의 토착화가 이제 멀지 않았다는 징후일까(*우리의 유교 연구 현황은 어떻게 되나? 재작년에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교육 연구단에서 몇 권의 연구논문집을 출간한 바는 있다).

 

 

 

 

-그 다음은 세계철학으로서의 유교의 부활이다. 이는 뚜 웨이밍 하버드대 교수가 제1의 물결(유교의 태동기), 제2의 물결(송, 원, 명, 청의 부흥기)에 이어 현대에 유교의 제3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뚜웨이밍 교수는 국내에 가장 널리 알려진/소개된 철학자/연구자이다).

 

 

 

 

-이런 흐름과 관련하여 로버트 네빌(Robert C. Neville)의 ‘Boston Confucianism; portable Tradition in the Late-Modern World’(2000)는 미국에서의 유교연구가 ‘타자’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자기’에 대한 연구로 전환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그리스인이 아니면서 플라톤주의자가 되는 것에는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인이 아니면서 儒家가 되는 것은 어떤가”라고 그는 말한다. 네빌은 20세기 초의 유교 소외현상은 유럽대학 모델을 전세계로 이식하면서 유교를 커리큘럼에서 배제시킨 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인도철학 전통이 삭제됐다가 나중에 일부만 복원된 것이 그 예다.

-그래서 네빌의 핵심적 주장 중의 하나는 유교 경전을 미국 대학교육에서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미국인들이 “인간들이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적 관습을 형성하고, 개인이 커다란 가족적·공적 네트워크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데 유가의 철학이 큰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한다.

-이런 인식 속에서 미국 학자들은 유교전통의 풍부함을 강조하는데, 주로 프래그머티즘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런 작업은 이뤄지고 있다. 미국에서 프래그머티즘을 대표하는 철학자인 존 스미스(John Smith)가 왕양명과 프래그머티즘을 비교한다든지, 프래그머티즘의 관점에서 왕양명의 인식론을 재정초하는 워렌 프리시나(Warren Frisina)의 ‘The Unity of Knowledge and Action’(2002)은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서양철학사 속에서도 비교적 새로운 흐름인 프래그머티즘이나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정도만이 유일하게 동양철학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며, 이 둘을 같이 읽을 때 서양인들의 ‘과정적 사유’가 폭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책으로는 조셉 그랜지(Joseph Grange)의 ‘John Dewey, Confucius, and Global Philosophy’(2004)가 있고, ‘창조성’(Creativity)을 중심으로 주희와 그 후계자들의 개념을 분석한 존 버쓰롱(John H. Berthrong)의 ‘Concerning Creativity’도 이런 맥락에 서 있다.

-그 외에 유교를 통해 인권을 탐구하는 흐름이 있다. 스테판 에인절과, 콩 로이 순 등이 이끄는 이런 흐름은 중국철학과 인권의 주제를 현대 중국정치와 연결하여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철학’이란 잡지의 편집자인 Cheng Chung-ying은 현대의 해석학적 전통, 하이데거, 화이트헤드를 원용하면서 주역을 중심으로 하는 존재-해석학을 창출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주역의 ‘觀’ 괘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그의 저작이 곧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모종삼의 칸트연구가 일면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칸트, 볼프, 라이프니츠의 계몽주의 철학전통이 실제적으로 주자학과 대화했고 그 영향이 어떻게 칸트 철학에 나타나고 있는지를 모종삼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화이트헤드의 주저 몇 권과 연구서를 나열해 본다).

 

 

 


 

-장 연구원은 이런 주요한 흐름들을 요령껏 요약해 보여주면서,  아시아에서 발원한 유교가 현대에 들어 서양 국가에 퍼져 나가면서 그들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며 동시에 유교가 어떻게 다양한 형태로 토착화되어 그들의 내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는가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06. 0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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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황실 지리학회 탐사대원이 쓴 대한제국  견문록 <코레야 1903년 가을>(개마고원, 2006)이 번역돼 나왔다. 개인적으론 번역자들 안면도 있고, 책의 번역/출간 소식은 간간이 접하던 터였다. 관련 리뷰 두 편을 미리 읽어본다.  

 

 

 

 

서울신문(06. 07. 22) 서양인의 눈으로 본 한국의 사회상은 우리를 ‘객관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항상 관심을 끌어왔다.1668년에 나온 <하멜 표류기>는 조선의 존재를 처음으로 유럽에 각인시켰던 책으로 지금까지도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구한말 러시아와의 관계가 매우 활발했던 시기 많은 러시아의 탐험가와 군인들이 조선을 소개하는 책자를 선보였는데, 곤차로프의 <전함 팔라다>, 가린 미하일로프스키의 <한국과 만주, 요동반도 기행> 등을 찾아볼 수 있다(*물론 이 분야의 '고전'은 이사벨라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겠다).

-당시 러시아의 속국이던 폴란드 출신의 작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1903년 조선에 체류하면서 겪은 바를 서술한 <코레야 1903년 가을>은 제국러시아의 마지막 견문록이다. 몽골 계통의 여성과의 결혼한 저자가 조선 방문을 결행하고 이를 글로써 남기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조선의 사회, 경제, 문화, 대외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세로셰프스키의 지리와 풍경에 대한 묘사는 문학가의 기질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조선의 종교인 불교, 유교, 동학 그리고 확산되고 있던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등의 위상과 각 종교의 현재성을 묘사한 부분은 저자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며 사료적으로도 가장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백성들에 대한 그의 시선은 따뜻함이 배어 있으며, 때로 그는 그들의 진취성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항상 긍정적이지만 않았다. 때문에 그는 조선의 어두운 모습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데, 이를 테면 위계화된 신분제도에 대해 실생활과 연관지어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상과 상층부의 부패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의 눈에 비친 ‘서로의 죄를 은폐해주는’ 관리들의 연대의식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가부장제하에서 조선여성들이 겪는 숙명적인 삶은 저자에게는 커다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으며, 아마도 그 연장선에서 서술된 기생들의 일상이 그려졌을 터였다. 그가 조선의 기생제도를 자유롭게 다루고 나중에 소설 ‘기생 월선이’를 출간한 것도 저자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껄끄럽게 다가설 수 있는 부분은 일본에 대한 서술이다. 세로셰프스키는 일본에 의한 철도 부설을 일본의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면서도 “일본이 진보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이 불쌍한 한국 또한 일으켜 세워주리라 기대해 본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훗날 그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조국 폴란드의 현실과 비슷하고도 동정했지만 한일합병 이전에 쓰여진 이 책은 일본에 의한 개화를 긍적적으로 묘사하였다. 대개의 견문록들이 저자들의 조국에 대한 이해관계에 충실한 데 반해 폴란드인으로서 세로셰프스키의 관점은 여기에서 벗어나 있다.

-이 책은 단순한 한 외국인의 조선 견문록을 넘어 다양한 실증자료와 통계수치를 활용한 ‘사회과학적인’ 치밀성이 담겨 있는 것은 저자가 그만큼 조선의 삶에 고민한 흔적으로 볼 수 있다. 훗날 폴란드 저자동맹 의장까지 역임한 저자의 필치는 화려함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저자의 의도를 잘 살린 번역이 깔끔해 보인다. 역사는 반복된다 했던가. 외세와 얽힌 당시의 한반도 모습과 오늘날의 현실을 비교해보는데도 충분히 도움을 주고 있다.(기광서/ 조선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국일보(06. 07. 22) 우리를 훑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할 때, 기분이 참으로 미묘해진다. 우리를 과하게 긍정하는 것도, 반대로 지나치게 깍아내리는 것도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그런데도 외부의 시선은 더 궁금해진다.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코레야 1903년 가을>이 보여주는 것은 100년 전 한국 사회다. 폴란드인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3년, 러시아 황실지리학회 탐사대의 일원으로 부산에 도착한 뒤 뱃길을 이용해 원산으로 갔다가 다시 금강산, 평강, 양담, 안양, 양주, 서울로 이어온 여행의 기록이다. 그러나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여로에서 만난고 본 많은 사람의 증언과 사회 현상, 그리고 자연 모습을 통해 당시 한국을 종합적으로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눈에 띄는 대목은 남루한 현실, 관료에 대한 원성, 사회 곳곳에 밴 일본의 영향이다. 그가 본 한국 사회는 “모든 것이 억눌려 있어 옆 나라 일본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이나 진취성을 찾아볼 수가 없”고, 그가 가본 곳은 “어디나 예의 그 황량한 폐허와 먼지, 혐오스러운 불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물에 씻겨 내려 진흙에 반쯤 파묻힌 작물과, 폭우가 휩쓸고 가 흙빛으로 변한 논도 자주 보았다. 백성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을 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생활이 어려울수록 관료에 대한 원성은 컸다. 사또나 관리, 정부의 파발꾼이 지나갈 때 사람들은 “강도 납신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저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양반과 관리들은 민중을 끝없이 핍박하고 강탈하면서 마치 온 나라가 자기들만을 위한 것 인양 행세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한달 남짓 짧은 여행기간 동안, 관료의 부패와 무능을 목격ㆍ체험하는 데 한계가 있었을 텐데도 이 같은 표현이 책에 가득한 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런 원성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영향력은 이미 사회 깊은 곳까지 스며 있었다. 금강산 석왕사의 승려들은 검은 빛의 일본식 기모노를 입고 검은 빛의 일본식 두건을 쓰고 있었다. 일본인은 서울, 부산에 자기들만의 깔끔하고 편리한 주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은 산 채로 우리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있어요…우리 모두 곧 그들의 노예가 될 겁니다. 서울 땅의 삼분의 일이 벌써 그들 소유라는 것을 아십니까?” 젊은 관료 신문균은, 현실화하는 일본의 침략상에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한국의 종교, 산, 사찰, 농업, 음식, 기후, 학교, 가축, 공동묘지와 장례의식, 여성의 지위, 상공업과 해외교역, 신분, 심지어 기생사회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역할을 나누고 깊게 쌓인 눈 더미로 녀석을 유인한 뒤 공격과 도망치기를 반복하면서 힘을 뺀 다음 제대로 걸려들면 창으로 마구 찔러내는 식의 사냥법 등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거슬리는 대목도 있다. 우리를 낮춰 보고 일본을 문명국으로 인정한 부분이 특히 그렇다. “일본인들이 유능한 민족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동양 여기저기에 자기 식의 생활방식을 주입하고 중국인과 한국인은 일본인을 형제로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꺼이 복종한다.” “일본이 진보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이 불쌍한 한국 또한 일으켜 세워주리라 기대해본다.”

-민족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한 그의 이력을 볼 때, 이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러시아 식민지인 조국 폴란드의 독립을 누구보다 갈구했을 그가, 일본의 침략 야욕을 읽지 못한 채 겉모습만 보고 한국과 일본을 대비시킨 것이 아쉽다.(박광희 기자)

06. 07. 22. 

P.S. 저자 바츨라프 레오폴도비치 세로셰프스키(1858-1945)의 모습이다. 아래는 그가 쓴 편지(1922년에 씌어질 걸로 보인다). 러시아어 글씨가 가지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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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랑스인 눈에 비친 제국의 흔적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02 11:55 
    이번주에 내가 관심도서 분류한 인문서는 대담집 두 권이나 아직 언론리뷰가 뜨지 않는다. 내주로 넘어간 모양이다. 덕분이 일이 헐거워졌는데, 가뜩이나 일이 많은 터라 다행이긴 하다. 대담집 대신에 잠시 눈길이 간 책은 프랑스인 고고학자가 쓴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글항아리, 2009). 기사에서 언급된 대로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한국 관련서가 유럽에서 다수 쏟아져나왔는데, 이 책은 내용이 충실해서 당시 베스트셀러
 
 
2010-06-25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의 두툼한 책(은 아니군!)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4)에 대한 서평을 옮겨온다. 필자는 박찬표 교수이며 타이틀은 '훼손되는 ‘다수지배의 원리’. '21세기, 고전 읽기'로 다루어져 비교적 자세하다(그러니 유익하다).  

 

경향신문(06. 07. 22) 우리에게 헌법은 무엇인가.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권력구조 개편논쟁이 한국 민주주의에서 헌법이 가지는 의미의 전부인가. 문제가 간단치 않음은 약간의 역사적 비교를 통해 확인된다.

 

미국 국회의사당에 걸려 있는 하워드 챈들러 크리스티의 1940년 작품 ‘미합중국 헌법에 서명하는 장면’

-군부세력이 헌정질서를 유린했던 시절에 헌법은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입헌주의는 민주주의의 기초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헌법의 관계는 복잡하게 변하고 있다. 예컨대 보수세력은 민주적으로 구성된 정부나 입법부가 개혁입법을 통해 헌법의 근간을 흔든다고 비판하면서 헌법재판소를 통해 이를 저지하려 한다. 행정수도 이전 위헌결정은 그 단적인 예이다.

-개혁진영에서는 ‘1987년 헌법이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인식 아래 개헌을 통한 민주화의 진전을 주장한다. 보수세력에 있어서는 민주주의가 헌법 질서를 위협한다면, 개혁세력에 있어서는 현행 헌법이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헌법을 둘러싼 이러한 상반된 인식은 장식물에 불과했던 헌법이 민주주의 작동의 실질적 변수로 등장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헌법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보다 진지한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2001년 출간된 이 책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우리 시대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미국 헌법은 얼마나 민주적인가?’라는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 관점에서 미국 헌법에 대해, 그리고 헌법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뛰어난 통찰력을 제시해준다. 로버트 달에 의하면 민주주의란 자신이 복종해야 하는 법률을 작성하거나 자신을 통치할 대표를 선출하는 데 있어 시민 대중이 발언하는 체제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다수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미국 헌법은 이 기준에서 볼 때 많은 비민주적 요소를 안고 출범했다. 나아가 달은, 헌법이 미국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다는 통념과 달리, 헌법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민주공화국으로 발전한 것은 제헌 이후의 ‘민주혁명’을 통해 새로운 민주제도와 관행을 창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미국의 헌정체제는 여전히 많은 결함을 안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상원 및 대통령선거에서 나타나는 대표성의 결함이다.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에 대해 9명의 판사들이 위헌 여부를 결정하는 사법부의 법률심사권 역시 심각한 대표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미국 헌법의 결함은, 헌법제정자들이 가졌던 다수 지배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민주주의의 기초인 정치적 평등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비판된다.

-달이 제기하는 보다 중요한 문제의식은 헌법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자는 것이다. 헌법의 정당성은 ‘헌법이 민주정부의 수단으로 유용한가’라는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하며 헌법이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단언한다. 갈등적 이해가 충돌하는 민주주의 정치과정을 초월하여 공동체의 이익을 표징하는 규범으로 헌법을 신성시하는, 헌법 신화에 대한 날카로운 공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점에서 주목할 것이 최장집 교수의 한국어판 서문이다. 최교수는 달의 문제의식을 보다 확장시켜 헌정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를 인민주권과 다수지배 및 평등한 정치참여의 원리에 기초하는 ‘민중적 민주주의’와 다수지배를 견제하려는 ‘메디슨적 민주주의’의 두 모델로 구분하고, 한국 헌법 역시 메디슨적 민주주의를 원리로 하는 것으로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본격화되면서 미국이 경험했던 모순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분할정부로 인한 정치교착과 정부마비, 사법적 정책결정 및 사법적 입법기능을 수행하는 제왕적 헌법재판소의 등장이 그것이다. 최교수는 특히 후자를 후견주의적 발상에 기초한, 다수지배의 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중대한 제약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최교수는 정치의 기능을 바로세우는 ‘민주화’의 경로와 헌법을 바로세우는 ‘헌법화’의 길 중 전자를 제시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헌법에 기대어 해결하려는 자세는 엘리트 역할의 강화를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다. 헌정주의는 민주화 초기 민주주의의 기초로 작동했지만, 시민권이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확대되고 정치적 민주화가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심화되는 시점에서 민주주의와의 갈등적 관계에 직면하게 됨을 각국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이 촉구하는 민주주의와 헌정주의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재인식은, 한국 민주주의의 현 단계에서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06. 0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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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oli 2006-07-23 01:07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읽었는데, 조금 더 급진적이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지만 우리 학계 수준에서는 이만해도 충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 흔히들 헌재가 오히려 후퇴시키고 있다는 '뉘앙스'로 말을 하는데, 과연 헌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헌재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하나,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기인 2006-07-23 01:27   좋아요 0 | URL
퍼 갑니다.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을 꽤나 재미있게 읽었는데, 미국적 '예외성'(미국 애들이 항상 강조하는)의 기원이 어떻게 변화하면서 나아가서 오늘날에 이르렀는지 참 생각할 수록 재미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평전이 출간됐다. 이 록큰롤의 황제이자 20세기 미국 대중문화의 전설에 관한 책 <엘비스, 끝나지 않는 전설>(이마고, 2006)이 그것이다. 그간에 그에 관한 책이 거의 전무했다는 사실이 놀라운데(마돈나의 경우와 비교해보라), 다행히도 이번에 그러한 놀라움을 얼마간 상쇄시켜줄 만한 책이 출간되었기에 아는 체를 해둔다. 그의 음반을 한번도 사본 적이 없으니 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끔씩 라이브 영상이나 음악을 보노라면 그가 얼마나 걸출한 '연예인'었는가는 실감할 수 있다. 중앙일보의 리뷰를 옮겨온다.  

중앙일보(06. 07. 22) 취재수첩에서 찾아낸 엘비스의 흔적

-그가 죽은 지도 벌써 30년이 다 됐다. 그래도 그의 신화는 여전한가 보다.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도 그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체면이고 뭐고 없이 미국 부시 대통령 앞에서 그토록 방정 맞게 다리를 떨었을까(*아래 사진이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지난달 30일 테네시주 멤피스에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 생가를 찾아 조지 W 부시 대통령, 엘비스의 딸과 전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엘비스의 선글라스를 낀 채 엘비스가 노래하는 모습을 흉내내고 있는 모습. 그는 엘비스의 광팬이라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록큰롤의 황제이며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다. 또한 미끈한 외모와 타이트한 옷차림으로 표현되는 섹스 심볼이자 욕망의 분출구다. 그가 여성 편력이 심하고, 약물을 즐길 것이란 짐작은 익히 했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책은 엘비스의 전기다. '용비어천가'마냥 결국엔 엘비스 찬양을 담지만, 그 과정은 세밀하고 냉철하다. 기자 출신인 저자들이 10년간에 걸쳐 모은 자료와 300명이 넘는 주변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엘비스의 인생을 새롭게 구성한다. 수시로 문서보관서를 드나들며 그의 흔적들을 되짚었고, 심지어 병원 입원 기록까지 꼼꼼히 챙겼다. 이토록 적나라한 얘기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저자들의 철저한 '취재' 덕분이다.



-책엔 엘비스의 매니저였던 게이브 터커의 이런 말이 그대로 인용된다. "엉덩이를 흔들면 좋겠는데. 그러면 여자애들이 흥분할 거야. 스트립 걸이 남자들을 흥분시키려고 보여주는 쇼에 변화를 준 거지." 기성 세대로부턴 지탄을 받았지만 자유와 젊음의 상징으로까지 부각된 그의 '허리 돌리기 춤'과 '엉덩이춤'이 알고 보면 철저한 매니지먼트사의 작업에 의했다는 것이다. 책엔 심지어 남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지 안에 묵직한 뭔가를 넣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투어를 다닐 때마다 닥치는 대로 낯선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한 그의 여성 편력도 여과 없이 드러난다. 또한 그에게서 빠질 수 없는 건 약물이다. 그런데 약물 중독의 주범 역시 바로 매니지먼트사였다. 무리한 일정을 잡아놓고 공연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약물을 흡입하게 한 뒤 각성제.진정제 등을 든 주치의와 늘 함께 하게끔 했던 것이다.



-약물에는 찌들었으면서도 술.담배는 전혀 안하고, 성적으론 문란하면서도 초현실주의와 사후 세계에 심취한 이중성. 책을 읽고 나면 엘비스로 대표되는 미국 대중 문화가 과연 무엇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겉으론 싸구려 천박함이 넘쳐나지만, '뿌리 없음'에 대한 갈증으로 무언가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절박함이 때론 면면히 흐르는 전통의 무게감보다 더 무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최민우 기자)

06. 07. 22.

P.S. 엘비스 프레슬리 하면 떠오르는 영화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결말에 'Love me tender'를 부르는 데이빗 린치의 영화 <와일드 앳 하트>(1990)이다. 노래방에서 어쩌다 간혹 듣게 되는 그 노래의 가사를 옮겨놓는다.

Love me tender,
love me sweet,
never let me go.
You have made my life complete,
and I love you so.

Love me tender,
love me true,
all my dreams fulfilled.
For my darlin' I love you,
and I always will.

Love me tender,
love me long,
take me to your heart.
For it's there that I belong,
and we'll never part.

Love me tender,
love me dear,
tell me you are mine.
I'll be yours through all the years,
till the end of time.

(When at last my dreams come true
Darling this I know
Happiness will follow you
Everywhere you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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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7-22 10:35   좋아요 0 | URL
고이즈미 바보 같지 않아요....저것도 한신의 지략인가??? 하여간 주책 맞게 추려거든 잘 추든가..저 어정띤 포즈 하고는...옆에서 다들 어이없어 하는 듯..그래도 좋단다ㅎㅎ
즐거운 주말보네세요.

로쟈 2006-07-22 10:47   좋아요 0 | URL
'바보 같은 고이즈미'가 아니라 저는 다른 정치인들도 저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은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총리가 체신머리 없는 '쇼'를 벌이지는 않겠죠. 거꾸로 쇼라면 저 정도는 해야 보는 사람도 즐겁죠). 자신의 쾌락과 타협하지 않는 것. 그게 안되면 결국 그 욕구불만이나 욕망의 좌절이 타인에게 전가되는 것이죠. 자신의 삶을 즐길 줄 모르면 타인의 삶을 덩달아 괴롭게 만드는 것 아닐까요?..

2006-07-22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7-22 17:39   좋아요 0 | URL
**님/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
 

한겨레 북리뷰에 김영민 교수의 '동무와 연인'이 새로 연재된다고 한다. 오늘 읽은 건 그 첫번째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를 다루고 있다. 타이틀은 '통속을 거부한 '커플 실험''. 이 원조 '계약 커플'이 연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건 지극히 상식적인데, 오랜만에 관련도서들에 대한 눈요기도 해볼 겸 옮겨놓도록 한다. 한동안 활동이 뜸하던 김영민 교수도 예전의 필력을 다시 찾아가는 듯하여 반갑기도 하고...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정체를 작가로 고집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와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생활이에요!”라고 말하곤 했다. (물론 이것은 ‘스타벅스’ 커피점의 2층 풍경이 아니다.) 글과 남자! 이 20세기 여성주의의 대모는 글과 남자의 사이에서 여자의 길을 선구적으로 뚫어냈다. 하지만, 정작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삶이었으며, 그 속에서 남자는 변치않는 고민거리였다.

 

 

 

 

-당대의 누구보다도 먼저 ‘동무’의 가치를 꿰뚫어본 이 비범한 여성도 사랑이 종종 삶의 더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아챈 것일까? 뚜렷한 주관을 갖고 행동함으로써 전통적 여성상에 맺힌 남성의 오해를 떨어내려던 보부아르였건만, (그녀가 비웃었던 미국여자들처럼) 사랑했던 남자를 만족시키려고 안달을 부리기도 했다.

 

 

 



-“사트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야말로 내게는 순수한 의식이며 자유 그 자체였어요!”라며 특유한 동무 관계를 자만했지만, 실상 그는 순수한 의식과 자유만이 아니라 왕성한 성욕 그 자체이기도 했다. 여성들은 그의 못난 외모와 명성 사이의 괴리에 매혹되기도 했고, 사르트르는 오직 오쟁이를 지울 목적으로 매력없는 유부녀들을 탐하기도 했다. 모국어를 사랑했던 사르트르가 건들지 않는 여성이라고는 외국여자들뿐이었는데, 아무튼 이들 동무/연인 사이의 기나긴 갈등에는 사르트르의 쉼없는 바람과 보부아르의 맞바람이 한 몫을 했다.

 

 

 

 

-사르트르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아무런 철학 없이 연애에 빠졌고, 보부아르는 나름의 연애철학(‘과거에 고착되거나 그것을 내팽개치지 말고 새 미래를 만드는 데 애쓰자’, 는 W. 제임스 식의 실용주의 준칙)을 제시하긴 했지만, 결국 그녀는 사르트르보다 적게 섹스하고 많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보부아르의 글 역시 가히 대가급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와의 관계에서만은 오히려 삶(사람)을 내세웠고, 대신 글의 세계라면 사르트르에게 조금 양보했다. 사르트르의 길은 정반대였다. 그렇기에 사르트르에게 연인관계는 늘 부차적이었지만, 보부아르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늘 일차적, 우선적인 사안도 아니라는 자가당착이 그녀의 문제였다.) 스스로 밝히곤 했듯이, 보부아르의 행복은 사르트르와의 ‘상호 이해’에 의해서 보장된 것이었다. 그리고 육체의 향락은 환영할 만했지만 세상을 향한 지식에 비해 애써 요구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최고의 소망은 “내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살고’ 싶은 것”(sola vita!)이었고, 사랑은 그 삶의 귀한 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르트르에게 글쓰기보다 더한 삶은 없었다. 그는 아버지(초자아)가 없는 시공간을 글로 채우며 스스로를 창조해 나갔다. 여행 중에도 풍경보다 수첩을 들여다 보고 있었고, 자동차 본네트를 깔고 앉아 몇 시간씩 프랑스어 문장을 만드느라 동행들을 성가시게 했다. 그는 <말>(1964)에서 고백했듯 우선적으로 책과 글 속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보부아르가 아는 여자의 생활은 ‘제2의 성’의 운명처럼 먼저 남자들의 세상 속에 내던져지고 부대끼는 게 우선이었다. (잘난 남자는 대개 추상적이지만 잘난 여자라도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것. 이 괴리 속에서 연인의 길과 동무의 길은 희비극적으로 어긋난다.)

-보부아르는 “나는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강변하곤 했다. 그러나 여자라는 사실이 속박도 알리바이도 아닌 여자는 거의 없다는 객관적 사실 속에 이미 그녀의 운명은 깊이 얽혀들어 있었다. 깬 여성들에게 남성의 언어와 그 표상이 마치 맞지 않는 신발처럼 어색하다면, 보부아르가 <제2의 성>(1949)을 쓰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익명의 개인(남성)을 주제로 그 개인의 의식과 자유를 분석하거나 계급 갈등에 개입하는 사르트르의 철학적 청사진만으로는 아직 여성의 세계를 다 그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의 계약결혼마저 전형적인 갈등의 요소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 세기의 연인/동무들에게 인간은 새로 창조되어야 할 존재이며, 그들은 함께 미래의 인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남녀를 얽어 옥죄는 낡은 타성은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과연, 사랑은 누구에게도 통속한 것일까? 그러나 이 통속을 막으려는 공동의 노력 속에 그들의 성취가 있었고, 그 성취 속에서 동무의 가능성은 빛난다.



-그 성취와 가능성은 ‘말’이었다. 마찬가지로 둘의 사귐에서 보부아르가 특별한 것은 그녀의 육체가 아니라 ‘귀’였다. 사르트르의 보부아르는 육체(연인)가 아니라 그녀의 귀(동무)였을 것이다. 물론 보부아르가 만난 사르트르도 ‘작고 못생긴데다 그나마 사팔뜨기인’ 그의 육체(연인)가 아니라 그의 입(동무)이었던 것은 재론할 것도 없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죄다 털어놓을 수 있는 지적 반려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남자인데, 관계의 요체는 바로 여기, ‘지적 반려자’에 있었다.



-보부아르가 두려워한 여자는 육체로 승부하는 바비 인형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적 반려자의 자리였고, 사르트르의 주변에 그 싹이 돋을라치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연인 넬슨 올그렌(N. Algren)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서도, “어떤 경우에도 사르트르와의 우정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어요”라고 단언했다. 사르트르처럼 편집병적이진 않았지만, 그녀의 삶에서도 말과 글은 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보부아르에게 죽음이란 (바흐친과 비슷하게)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의 죽음을 놓고 그녀가 가장 슬퍼한 것은 물론 ‘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말년의 보부아르가 그들 사이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결산하면서 요약한 부분도 ‘말’이었다. “사르트르와 나 사이에는 늘 말이 있었어요.”(*그리고 그들은 같이 묻혔다.)

06. 07. 21.

P.S. 1970년대 중반부터인가 사르트르가 거의 실명한 상태에서 보부아르는 차분하게 그의 '남편'과의 이별을 준비해나간다. 그 기록이 <작별의 예식>(두레, 1982)이다. 아주 오래전 지방도시의 시립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책인데, 요즘은 구할 수가 없다. 그/그녀의 독자들에겐 아쉬운 일이다. 작고한 평론가 김현이 이 책에서 인용한 문장은 사르트르의 장례식을 맞은 보부아르의 슬픔을 토로한 것인데, 이런 내용이다. "그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하지만 언젠가 나의 죽음이 우리를 다시 합치놓지 못할 것이다."(예전에는 불어로도 읊고 다녔는데, 요즘은 기억 감퇴다.) 영생을 믿지 않았던 커플이었던 만큼 그들의 '차가운' 해후는 무덤을 찾는 이들의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졌을 법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또한 적당히 눈물겨운, 인간의 삶이고 운명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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