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기사들을 잠시 둘러보다가 의외의 기사를 읽게 됐다. 기사의 내용이란 게 나의 '빈곤한' 상상력과 너무도 '평범한' 도덕의식을 비웃는 것이었는데 한달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이 온라인 게임으로 만들어졌고 그걸 아이들이 즐기고 있다는 것(나는 게임을 하지 않는지라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 게임인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의 감수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얼마나 '놀랄 만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아이들은 아마 이런 뉴스에도 더이상 놀라지 않겠지만 말이다. '새로운 세기'의 풍경을 '무서운, 멋진 신세계'라고 부른 한 문학평론가의 예감은 더이상 예감이 아니다. 이젠 실감이다!..

오마이뉴스(07. 05. 21) '버지니아텍 학살게임' 즐기는 아이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버니지아텍 총기 사건이 일어난 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버지니아텍은 평소와 다름없이 모든 학사 일정이 진행되고 있으며, 조용히 졸업식도 치러졌다. 그렇게 모두들 경건한 마음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희생자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하면서 시간이 흘러갔다.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그렇게 끔찍한 사건이 난 지 한 달, 그 일만큼이나 등이 오싹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일이 생겼다. 그것도 필자가 가르치는 학생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되서 충격은 더 컸다.

영호(가명)는 본인이 근무하고 있는 어드로이트 칼리지에서 중고등생을 위해 마련한 SAT(미국 대학 입학시험) 한국어 준비반에서 가장 어린 7학년 학생이다. 영호는 다른 날과 달리 무척 싱글거리면서 교실에 들어섰다.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묻는 필자에게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교사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로 다가왔다. 아직 수업 시작 전이고 다른 학생들이 다 오지 않은 상황이라서 영호의 행동을 그대로 바라보았다.

바쁘게 움직인 영호 손에 잡힌 마우스와 키보드에 의해서 켜진 화면에는 'V-Tech Rampage(버지니아 공대 광란)' 이라는 글자와 함께 게임을 시작하자 피가 터지는 듯한 화면으로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재현해내고 있었다. 그 게임이 유투브에 버젓이 올라가 있었다. 정말 끔찍했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그 게임을 재미있다는 듯이 하고 있는 영호의 웃는 얼굴이었다. 영호는 그 게임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옆에 있던 민수는 한 술 더 떴다.

"너무 시시하다. 이게 뭐야?"
"화면도 너무 멋이 없고, 32명만 죽이면 게임 끝이야?"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아이들은 정말 이런 게임을 만든 사람이 잘못됐고 그런 것들이 많은 희생자들의 가족들에게 어떤 또 다른 아픔을 줄지 못 느끼는 것일까? 정말 무섭기까지 했다. 게임은 범행 당시 조승희의 생각을 마치 모두 알고 있는 듯 상세히 표현하고 있다. 첫 번째 희생자 에밀리를 그녀의 남자 친구 칼이 기숙사에 데려다 주는 것부터, 이제 파티를 시작할 때라는 등의 말을 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전지적 작가시점에 의해서 그려지고 있다.

또한 조승희가 경찰에게 걸리지 않게 잘 피해 다니면서 첫 번째 기숙사에서의 살해를 감행한 뒤에 NBC에 보내는 비디오를 찍는 장면과 학생들이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총을 쏘아서 그 학생들을 죽이는 장면 등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게임 요령에 보면 총을 쏘려면 'A'를 누르라고 되어 있다. 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한테 있어서 'A'는 바로 총인 셈이다.

그렇게 'A'를 누르면 화면 속의 학생들이 죽으면서 자신의 점수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승리의 쾌재를 부르게 된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 했다. 이 아이가 총을 갖게 되고, 그 총을 쏨으로써 다른 사람이 죽으면서 자신의 점수가 올라간다고 착각할 수 있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현실과 게임 세계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실제의 사건을 재현해 게임으로 만든다면, 특히 분별력이 없고 인터넷 게임에 빠져 사는 아이들에게는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버지니아텍 사건보다 먼저 일어났던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격 사건의 경우에도 후에 게임으로 만들어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몇 년 전에 친구들과 함께 스포츠클럽에 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간단한 게임들을 즐기며 음식이나 음료도 함께 먹을 수 있었다. 거기서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게임은 스크린에 실제 사람 크기의 인물들이 영화처럼 나오고, 거기에 대고 총을 쏘면 그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죽었고, 점수가 올라갔다.

그러한 실물 크기의 화면 속의 사람에게 총을 쏘면서 실제로 그 사람을 죽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짜 총을 쥐어줘도 무서워서 쏘지 못 하는 경우가 태반이겠지만, 이렇게 게임 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에 익숙한 아이들은 자신이 갖고 놀던 게임을 위한 총과 실제 총의 차이를 느끼지 못 할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아이들일수록 사이버 세상에서 만족을 찾으려 들고, 그러한 사이버 세상과 현실 세상을 구분하지 못해서 더욱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악순환을 거듭된다고 한다. 버지니아텍 총기 사건과 관련된 게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고 있는 영호의 얼굴에서 난 섬뜩함을 느꼈다. 32명을 모두 죽이고 자신까지 자살해야 마치는 이 게임에서 32명을 다 못 죽이고 경찰에게 잡혀서 게임을 끝까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는 그 아이의 모습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게임 속에서 죄 없는 학생들을 죽여야 점수가 올라가고 그래야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세상도 다른 사람을 죽이고 이겨야 내가 살고 높은 자리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닐까? 어른들이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구은희 기자) 

07.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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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21 23:17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어찌... 이런걸 누가 만들어가지고.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5-22 00:16   좋아요 0 | URL
와...

자꾸때리다 2007-05-22 00:32   좋아요 0 | URL
전 제목만 보고 스타크래프트 2 이야긴 줄 알았는데...헐....
 

컬처뉴스에서 미셸 푸코의 신간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온다. 곧 나올 계간지들에도 서평이 실릴 듯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리뷰들 가운데서는 가장 깊이가 있다. <주체의 해석학> 국역본과 영역본을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와 함께 책상 아래에 묻어둔 지 오래됐지만 책을 읽는 건 아무래도 방학이나 되어야 할 듯한데 일단은 리뷰라도 챙겨두도록 한다. '역사학자로서의 푸코'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아이템을 잡아두고는 있지만 언제쯤 페이퍼를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나는 무슨 일로 이리 시간이 없는 것인지!). 가련한 일이지만 푸념만으로도 삶은 모자라 보인다. 

 컬처뉴스(07. 05. 20) '자신'을 알기보다 '자신'을 배려하라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도착한 것처럼 느껴지는 사상가가 있는 반면, 이미 도착한 것 같은데 사실 도착하지 않은 사상가도 있다. 그의 주저 『에크리』(1966)의 국역본 출간 예고가 10년 전부터 있었지만 아직 그 흔적조차 드러나지 않고 있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전자의 경우라면, 사후 원고인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까지 차근차근 국역되고 있는 철학자 겸 역사학자 미셸 푸코(1926~1984)는 후자의 경우이다. 푸코의 저서가 16권이나 국역됐는데 “사실 도착하지 않았다”니?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푸코는 스스로 ‘권력의 이론가’라기보다는 ‘주체의 이론가’로 불리길 좋아했다. 그러니까 그의 주된 관심사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 더 정확히 말하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서구의 근대적 주체’가 만들어진 메커니즘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말과 글에서 ‘권력 테크놀로지’(혹은 권력 장치)에 대한 날선 비판만 읽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시종일관’ 주체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국역된 푸코의 1981~82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은 그가 왜 ‘주체의 이론가’인지, 그가 말하는 ‘주체의 이론’이 무엇인지를 (아마도 그의 유고작인 『성의 역사』의 3권 ‘자기에의 배려’보다 훨씬 더) 잘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텍스트를 통해서 권력의 테크놀로지(지배)나 담론의 테크놀로지(지식)에 의해 구축된 서구의 근대적 주체보다는 규칙화된 자기 실천들을 통해 “스스로를 구축하는 주체의 또 다른 형상”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강의록의 편집자 중 하나는 푸코의 수고(手稿)에 의거해, 이 새로운 주체의 형상(혹은 새로운 형태의 주체화)이야말로 “푸코 저작의 개념적 완성과 완결 원리”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푸코가 말하는 ‘새로운 주체’란 누구인가?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그것은 일단 ‘자기 인식’(“너 자신을 알라”[gnôthi seauton])을 특권화한 데카르트적 주체와 다른 주체이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에서 이 데카르트적 주체의 대척점에서 서 있는 주체, 즉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에 전념하는 주체를 발견한다. 푸코에 따르면 사실 이 자기 배려(혹은 자기 배려에 전념하는 주체)라는 관념이야말로 기원 전 5세기에 탄생해 기원 후 4~5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모든 철학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신앙생활까지 관통”하고 있는 관념으로서, ‘주체성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핵심인 관념이다.

그런데 푸코는 고대 그리스에서 자기 인식은 자기 배려에 종속된 관념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자신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었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관계는 데카르트적 주체가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하는 ‘데카르트적 순간’(대략 16세기 말~17세기 초)에 뒤집혀졌을 뿐이다. 푸코가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의 관계가 전도된 이 데카르트적 순간을 문제삼는 이유는 바로 이 순간을 경유한 뒤에야 오늘날과 같은 서구의 근대적 주체가 완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푸코에게 있어서 주체는 권력의 테크놀로지만으로는 구축되지 않는다. 개인이 주체가 되려면 스스로 자신을 주체로 만드는 특정한 자기(자아) 테크놀로지가 결부되어야 한다. 요컨대 주체는 그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개인을 특정한 형태로 만드는 외적 방식과 개인이 자기 자신을 특정한 형태로 만드는 내적 방식이 서로 관계를 맺는 지점에서만 출현한다. 예컨대 민족국가와 결부된 주체(국민이자 시민)로서의 근대적 주체란 특정한 권력의 테크놀로지와 특정한 자아의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산물이다. 여기서의 그 ‘특정한’ 자아가 바로 데카르트적 주체인 것이다(무리하게 도식화하자면, “서구의 근대적 주체=민족국가와 결부된 주체=훈육권력+데카르트적 주체의 결합”인 셈이다).

그렇다면 푸코가 염두에 둔 ‘새로운 주체’란 궁극적으로 서구의 근대적 주체를 만든 기존 테크놀로지들과 전혀 다른 테크놀로지들이 새롭게 결합된 산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주체를 만드는 데 관여하는 권력과 자아 테크놀로지들의 개수가 무한히 존재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테크놀로지들이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자면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가 주목하는 ‘자기 배려’란 바로 그 가능한 ‘또 다른 자아 테크놀로지’ 중의 하나인 셈이다.

그런데 배려해야 할 자기는 도대체 무엇이며, 배려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푸코는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들(특히 『알키비아데스』)을 분석하며 이를 설명한다. “배려해야 할 자기는 무엇입니까?”라는 알키비아데스의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영혼이다”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게 “내 자신은 내 영혼”이기 때문이다. 푸코에 따르면 이때의 영혼(psukhê)이란 육체와 대비되는 실체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행위 주체로’서의 영혼이다. 따라서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육체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주체, 즉 자신의 육체와 적성, 능력을 사용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영혼을 배려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자신을 ‘배려’(epimeleia)한다는 것 역시 일련의 행동 양식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푸코는 지적한다. 그는 ‘배려’의 어원인 수련하기/단련하기(meletan)의 파생어들을 추적하면서 ‘배려’는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 자신을 점검하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자신을 통제하기, 자신을 주장하기, 자신을 해방하기, 자신을 존중하기, 자신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기, 자신에게서 환희를 느끼기 등을 포괄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배려란 이 모든 행동 양식들을 체화하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 전향/회귀해, 자기 자신을 변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이 모든 것을 일컬어 ‘자목적화’(auto-finalisation)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자목적화가 자기 내부로의 함몰, 즉 세계와 타자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전향/회귀-변형의 과정을 거치는 자기 배려는 우리를 정립하는 과정, 다시 말해서 세계와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비해 합리적 행동의 주체로서 행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푸코의 결론이다. “자기 배려는 행위 주체와 세계의 관계, 주체와 타자들의 관계를 조절하는 원칙이다.”

푸코는 언젠가 다른 글(「주체와 권력」)에서 이런 자기 배려의 목표를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동시에 정치적‧윤리적‧사회적‧철학적인 문제는 개인을 국가와 그 제도들로부터 해방시키려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국가와 거기에 결부된 개인화 유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문제이다.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주체화를 촉진할 필요가 있다.” 물론 푸코가 ‘자기 배려에 전념하는’ 고대 그리스의 주체를 자신이 염두에 둔 ‘새로운 형태의 주체’로 곧장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 ‘새로운 형태의 주체’를 사유하는 데 자기 배려의 관념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해 주는 바가 클 것이다.

만약 푸코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우리는 우리의 수고를 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람들이 혁명의 포기 쪽으로만 전향/회귀하는 당대의 분위기를 비판하면서, “언젠가 혁명적 주체성이라 불리는 바에 대한 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미 우리를 떠났고, 이 연구는 우리의 몫으로 남게 됐다. 어쩌면 우리는 예브게니 자먀친의 『우리들』, 미하일 불가코프의 『개의 심장』 등처럼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반영된 책들과 『주체의 해석학』을 겹쳐 읽으면서 우리에게 남겨진 몫을 수행하기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이재원_그린비 편집장)

P.S. '혁명적 주체성'을 탐문하기 위해서 혁명기 러시아 문학작품들을 겹쳐 읽을 수도 있다는 제안은 신선하다. 한데 <우리들>은 反유토피아 소설이고 <개의 심장>은 풍자소설이어서 긍정적 주체성의 구상을 얻기는 힘들 듯하고 반면교사로서는 유력하겠다. 물론 혁명적 주체성을 소비에트적 주체성과 동일시할 수 있다면, 고리키의 <어머니>나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참조해볼 수도 있겠다. 지난 80년대에 그러했듯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13 опытов о Ленине

나로선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 혹은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를 정독하는 일로부터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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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7-05-22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있는 여자 아이의 크고 또랑또랑한 눈망울과 레닌의 무엇인가를 강력하게 응시하는 눈과 안경 너머로 드리워진 푸꼬의 눈이 슬그머니 겹쳐져 묘한 풍경이 만들어지는 군요.

마늘빵 2007-05-2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 한번 마음먹고 파고싶은 학자입니다. 아직 연이 안닿아 멀리서 관심만 갖고 있지만.

수유 2007-05-2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아이는 도대체 뭐랍니까..--;;

드팀전 2007-05-22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데카르트를 좋아하신다는 아프님이 푸...코를 파시면... 코피나겠는데..와우 쌍팔년도 유머다..싸아......<감시와 처벌>과 소책자들 몇 권을 읽었는데..대충 그림만 그려지는 수준입니다...푸코는 이름도 그렇고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패셔너블해^^
 

오랜만에 좌파 운동가 김규항씨의 인터뷰를 옮겨온다(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6390). 레디앙에서 이번 대선과 민주노동당을 주제로 한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중인데, 그는 그 세번째 파트너이다. 한때 그의 칼럼들을 탐독했던지라 반가운 마음도 없지 않다. 한데, 그 반가움은 내 경우엔 1880년대(우리의 1980년대가 아니라!)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들이 전제주의와 혁명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반가움이다(더불어 착잡함이다. 그 착잡함은 물론 '8급 좌파'의 착잡함보다는 '온건한' 것이겠지만). 아래는 편집자주와 나대로 정리한 인터뷰이다.

대선과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레디앙>은 민주노동당에 비판적이든, 지지를 보내든 '무관심하지는 않은' 민주노동당 밖의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기로 했다. 다양한 시선과 입장이 이 자리를 통해 유쾌하게 소통되기를 기대해본다. 개그맨 노정렬씨와 <딴지일보> 김어준씨에 이어 'B급 좌파' 또는 '8급 좌파'로 불리고 있는 김규항씨를 만나봤다. '개량주의'라며 민주노동당을 쳐주지 않는 운동권 좌파 '노동자의 힘' 회원인 그는 예상보다는 덜 쎄게 당을 비판했다. <편집자 주>

레디앙(07. 05. 21) "좌파 10년 후 패배 준비하고 있다"

민주노동당보다 조금 더 왼쪽에 위치한 '8급' 좌파 김규항(44).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개량주의적' 성격 때문에 참여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노동자의 힘' 회원이자 '인민'이라는 단어를 즐겨 쓰는 김씨는 자신의 이름 앞에 'B급' 보다는 '8급'이 붙여지기를 더 선호한다. 이는 사람들이 그의 책 『B급 좌파』의 'B'를 '8'로 많이 읽는 것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9급인 완전 초짜에서 막 벗어났지만 아직 멀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여담이지만 내 바둑급수는 20년째 7급이다). 

지난 17일 어린이 교양잡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인 그를 만났다. 그는 인터뷰 중간 중간에 "노동자의 힘 동지들이 나를 욕 할 텐데….(웃음)"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계급적인 현실을 민족이라는 틀로 은폐하는 사람들은 진보운동 내 굉장히 위험한 사람들”이라며 "가능하면 ‘피해야 할 방법’이지만 최악의 경우 당이 쪼개진다고 해도 진보정당의 정체성과 활동 자체를 훼방하는 내부 세력을 온전시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당내 특정 정파와 좌파의 분리도 '불사'해야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김씨는 또 우파개혁 세력과의 확실한 분리도 강조했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세 후보는 우파개혁과 좌파진보의 ‘차이’를 누가 더 선명하게 보여주고 강력하게 말하는지 경쟁을 벌여야 한다"면서 범우파개혁 세력과 좌파 진보정치의 '분리'를 주문했다. 김씨는 또 진보 진영의 위기에 대해 "진보 진영이 (그들의) 자녀들을 우파진영과 똑같이 교육시키면서 자기 자식만은 노동자로 안 만들려고 발악을 한다"면서 “모두가 진보 운동의 위기를 논하지만, 사실 진보 진영은 (아이들이 성장한) 10년 후 패배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은 김규항씨와의 일문일답.



-김규항씨가 ‘B급 좌파’라면 민주노동당은 무슨 급인가.

민주노동당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한국 제도 정당 내 가장 진보적인 정당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범좌파 운동을 통틀어 제도 공간에서 활동하는 좌파들이라는 거다. 민주노동당 전체가 그렇지는 않고 당내에서 계급을 위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기는 한데, 급을 나누기에는 패러다임이 달라 좀 애매하다. 또 무엇보다도 내가 감히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나 싶다. 그런 얘기를 할 때 좌파들이 가져야 하는 태도는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좌파들은 죄가 많지 않은가?(웃음)

80년대 우리에게 공간과 기회가 주어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대의 변화를 잘 활용하지 못해 소위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에게 밀렸다. 그럴 수밖에 없던 상황을 설명하거나 이유를 말하자면 충분히 말 할 수 있지만, 그러기에 앞서 어쨌든 좌파들이 제대로 못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에게 B급 좌파라고 하는데,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일전에 『B급 좌파』라는 책이 나왔었다. 근데, 사람들이 보기에 서체가 ‘B’가 아니라 ‘8’로 보여 ‘8급 좌파’라고 하는데, 난 그 말이 더 마음에 든다.(웃음) 뭐든지 9급에서 시작하는데, 8급은 완전 초짜는 아니고 그래도 어느 정도 도장에 다니고 있는 사람으로 보면 될 것 같다.

- 글을 쓸 때 '국민', '시민' 등의 단어 대신, '인민'을 쓰는 이유는.

국민이라는 말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냥 ‘피플’이라는 말을 쓸 뿐. 국민이라는 말은 나치나 파시즘 치하에서 쓰는 말이다. 시민이라는 말도 그냥 서울시에 살면 시민이라고 얘기하지만, 사실 시민이라는 말은 계급적 함의가 들어간 말이다. 시민의 권리나 지위를 전혀 확보하지 못한 하층민에 가까운 사람들이 스스로를 시민이라고 하는 건, 그들이 농락당하는 거다. 그에 반해, 인민이라는 말은 아주 광범위한 일반적인 말이다. 예전에는 금어였지만, 이제는 ‘인민’을 쓴다고 잡아가지도 않는데, 사람들이 지레 불편해 한다. 어느 나라나 피플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곧 인민을 말한다. 그리고 국민이라는 말은 우리가 거부해야 한다. 개인이 국가의 부속물이라는 뜻을 의미하는 나쁜 말이다.

- 댓글 등 부담스러운 요소가 많은데, 인터뷰에는 왜 응했나?

그냥. 특별히 크게 안 해야 된다는 이유가 없어서.(웃음) 또 인터뷰를 한다 해도 댓글은 안 본다. 기본적으로 인터넷의 댓글을 존중하지 않는다.

-김어준씨 기사의 댓글은 봤나?

안 봤다. 나는 사람과 사람이 소통 할 때는 최소한의 도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오프라인에서 사람을 사귀고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사람이 뒤에서 뒷담화를 깐다고 하면 그 사람의 인격을 의심한다. 그런데, 인터넷 댓글은 뒷담화 형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인터넷 공간에서는 구어체처럼 쉽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파악할 수 있는 언어들과 논리들이 횡행한다. 물론 나 또한 글을 어렵게 쓰고 개념어를 쓰는 것은 싫어한다. 하지만 그것과 별도로 좌파 진영에서는 한 번 더 곰곰이 생각해보고 깨우쳐야 할 문제들이 많은데, 인터넷 공간에서는 그런 과정과 소통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한국 사회의 온라인 공간은 진보 진영에게 활용되기에 불리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흥미로운 견해이다). 인터넷 공간은 ‘조선일보=수구꼴통’이라는 단순 공식으로 모든 문제를 윤리적으로 치환해 '나쁜 놈'이라고 간단히 말하는 열린우리당 개혁파들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진보진영은 단순히 ‘나쁜 놈’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어떤 계급과 어떤 사람들 편에 서는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좀 복잡한 얘기를 하는 거다. 그런 면에서 인터넷 언어는 개혁우파 자유주의자들에게 유리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레디앙>은 보나?

어쩌다 가끔 본다. 기존의 좌파 매체와 달리 부드럽게 읽을 톤의 기사들이 있고 좀 세련된 것 같다. 그렇다고 <레디앙>이 만족스럽다거나 훌륭하다는 얘기를 하는 건 전혀 아니다. 다만, 좌파 진영의 현실에서 볼 때 그나마 대중적이고 세련된 편이라고 본다. 저도 좌파 진영 내 어려운 개념어는 사용하지 말자는 입장이지만, 가끔 운동권 사투리에 대한 비판이 구경꾼의 논평 수준으로 존재하는 것에는 거부감이 있다. 현장 사람들이 대중과 소통하고 싶지 않아 그런 언어를 쓰는 게 아니고, 그들 또한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눈물 겨울만큼 애를 쓰고 있다. 또 요즘엔 20대 활동가들이 선배 활동가들과 달리 문화적으로 풍부한 지식과 식견을 갖고 있어 좌파가 좀더 부드럽고 재미있어졌다. 나는 그런 20대 활동가들의 모습이 긍정적이라고 보는데, <레디앙>의 언어는 바로 그런 진전의 일환으로 보인다.

- 최근 '민노, 너 안찍어' 시리즈 기사는 어떻게 봤나?

재미있게 봤다.(웃음) 현재 인민들의 의식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읽어보니 사람들이 '아마추어적이다', '집권 능력이 없다', '아직도 저런 사람이 있나?'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얘기의 패러다임이 잘 못 됐다는 것을 분명히 짚어주고 싶다. 이건 아마추어냐 프로냐의 그런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동당을 기반으로 삼아야 할 서민들이 삼성의 이건희, 세계의 자본과 이익을 지지하는 정권을 향해 운동권 출신의 아마추어리즘 때문에 우리를(서민을) 힘들게 한다고 말하는 건 어이없는 일이다.

다시 한번 분명히 얘기하는데, 개혁은 진보가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확실하게 짚어줘야 한다. 기술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 정권이 누구의 편이냐?'는 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예를 들면, 일본을 위해 뛰는 일본 축구팀에게 한국 사람들이 '너네는 왜 기술이 그것 밖에 안 되냐?'고 말하며 실망하는 것과 같다. 즉, ‘번지수’가 틀린 거다.

일단은 우리를(서민) 지지하는 팀(정권)을 먼저 만들어 놓고, 그 다음 기술을 논하는 게 순서이다. 그런 면에서 노무현 정권은 정말 큰 공을 세웠다. 진보를 완전히 몽땅 다 갈아 엎어버렸다. 우리에게 노무현 정권은 치가 떨릴만큼 문제를 일으킨 정권인데, 우리가 기반으로 삼는 서민을 대변하지 않는 정권이 프로이고 집권 능력이 있으면 오히려 더 큰일날 일 아닌가? 문제는 노무현 정권 덕에 인민들이 ‘이젠 진보고 개혁이고 간에 다 필요 없다’라고 생각하는 거다. 우파 쪽에서 일부러 진보를 없애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도 노무현 정권만큼 그렇게 성공하지 못했을 거다.



-그런 면에서 열린우리당과 뚜렷한 차별을 보이지 못한 민주노동당의 책임도 거론되고 있는데.

민주노동당의 책임이 있다. 하지만 당위와 실제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르다.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채 무작정 민주노동당의 책임을 물으며 매도하는 건 안 된다. 지금까지는 완전히 노무현, 유시민 등이 지휘하는 개혁 우파의 단독 드라이브였다. 개혁 우파들이 몇십 년 동안의 민주화 성과를 몽땅 싸들고 신자유주의로 질주했다. 바로 그러한 제도 정치에 온건한 좌파들이 들어갔는데, 그 상황에서 과연 뭘 할 수 있기를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의원들 개개인이 특별히 무능하고 불성실한 모습을 보인 사람도 없다.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유시민 등의 우파 개혁주의가 준비한 무대에 대본도 없이 올라섰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왜 쇼를 성공하지 못했느냐?’며 책임을 묻고 무능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 야박하다.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무대 공간도 아니었으며, 의원들이 주류적 의견과 추세에 업혀가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또 인민들의 반공 콤플렉스를 건드리면 안 되는 등 여러 가지 각종 제약과 불편함이 가해진 그런 환경이었다.

음... 내가 이러면 우리 '노동자의 힘' 동지들이 나를 욕할 텐데(웃음). 왜 내가 민주노동당 의원들을 애써 이렇게 옹호해 주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왜 그리 그들을 인색하게 평가하는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좌파 진영이 제도권 정당에 들어가는 것이 진보운동을 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맥락이 다른 문제이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의 구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에 실패한 건 맞다. 하지만 생각 있는 사람들은 이미 이 정도 수준일거라고 예측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다만 민주노동당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파가 만들어 놓은 제도 정치권 안에 들어갔는데, 좀더 정체성을 분명히 해 불온함의 경계를 가끔은 넘어서야 했다는 아쉬움은 있다.

꼭 그래야 된다거나 전략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좌파 정치를 처음 인민들에게 각인시킬 때는 어느 정도 충격이 필연적이다. 의원들이 좌파의 언어가 아닌, 제도 정당권내에서 개혁우파의 언어를 빌려 쓰며 지나치게 인민들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니 결국 조금 윤리적인 개혁우파들과 차별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소극적으로 보인 건 아쉬운 부분이다.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나?

개인적으로 진보정당은 계급을 기반으로 둬야한다고 본다. 사회를 민족이나 국가로 나누기보다는 계급으로 나눠야 한다. 우파들은 대한민국이나 국익을 말하며, 한미 FTA도 국익 때문에 체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FTA를 해서 좋은 한국 사람도 있지만 싫은 한국 사람도 있다. 각각 상황에 따라 별 사람들이 다 있는 건데, 마치 모든 한국 사람의 국익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상이고 실제가 아니다. 이렇듯 국익이나 민족은 실제하는 계급적 현실을 은폐하기 위해 우파가 만들어 놓은 단어인데, 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분들이 진보정당 내 있다는 것은 불행하다. 그것이 바로 민주노동당의 문제이다. 물론 민족 문제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활동하시는 분들은 존중한다. 하지만 민족도 계급 문제의 체로 걸러지지 않는다면 우파적인 것으로써 결코 진보적인 것이 아니다.

- 지난 해 "주사파가 문제인 건 그들이 남한인민도 북한인민도 아닌 북한정권을 무작정 따르기 때문이다...(중략)....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가장 큰 이유도 주사파 때문이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http://gyuhang.net/archives/2006/11/#000983).

자주파 혹은 민족주의자를 모두 주사파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 구별짓지 않는다면 주파사의 맥락이나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이러한 지적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지도 아주 오래 된 문제인데, 존중 할 수 있는 민족주의자들은 스스로 주사파의 활동과 구별해냈어야 한다. 근데, 사람들이 너무 착해서 같이 운동했던 사람들에게 매몰차게 그렇게 못한다. 그러나 진보운동은 자기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편들고 지지하는 계급을 위한 운동이다. 계급적인 현실을 민족이라는 틀로 자꾸 은폐하는 사람들을 동지라고 하는 건 진보 운동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의 지도부나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는 이 문제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안 그래도 작은 세에 당을 쪼갤 수도 없고 또 인민들에게 (서로 싸우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거부감을 줄 수 있어 쉽게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당을 쪼갤 수도 있다는 얘긴가.

설사 손실이 있더라도 진보정당의 정체성과 활동 자체를 훼방하는 내부 세력을 온전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가능하면 ‘피해야 할 방법’이지만 최악의 경우 당이 쪼개진다고 해도 그 방법밖에 없다면 그래야 된다. 또 이미 이런 문제가 내부에서 봉합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게 계속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는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의 차이 같은 그런 수준이 아니다. 바로 그렇기에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독도에 무슨 군대를 파견해야 된다’는 등의 얘기를 하는 거다. 그때는 정말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 세계 진보 운동사에 아마 그런 예는 처음일거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개방형민중경선제' 를 놓고 논란이 있었는데.

상당히 기술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코멘트하기에는 주제넘은 일이다. 민주노동당이나 민주노총에서 활동을 하거나 기여한 것도 아닌데,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인민의 한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보나?

원론적인 차원에서는 당연히 여는 게 좋다. 하지만 여는 걸 주장하는 사람들과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맥락을 다 아울러 생각해 봤을 때 그렇게 단순히 말하고 책임지기엔 내 자격이 부족하다. 참 묘한 모양이다. 열자는 얘기는 너무나 옳은데, 그 뒤 맥락을 보면 쉽게 말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이는 마치 박근혜나 이명박하고 싸우는 것처럼 모양이 흉하기도 하고 좀 그렇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나?

지금은 완전히 반동의 시기이다. 노무현 정권의 '혁혁한 성공'으로 이제 인민들은 대선에서 후보나 정당을 선택 할 때 이념, 정치, 생각, 성향 등 이런 것들은 전혀 보지 않는다. 오로지 ‘지금 내가 먹고 사는 데 누가 더 도움이 되나?' 라는 식의 무이념 시기이다. 민주노동당이 이번 대선이나 총선 공간에서 약진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못 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냉정하고 정확하게 봐가면서 뭔가를 기대하고 또 실망했으면 좋겠다.

-그런 상황적 한계를 돌파할 대안은 없나?

이번 시기를 놓고 볼 때는 어렵지 않나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짜 진보와 가짜 진보에 상관없이 진보 개혁이라는 말을 듣는 것조차 싫어한다. 진보에 관심을 갖고 호기심이 있는 상태에서 진보에 대해 얘기를 해도 넘어갈까 말까하는데, 듣기 싫은 얘기를 하는 게 쉽지 않다. 게다가 앞으로 인민들의 삶이 더 고단하고 힘들어질 텐데, 그럴수록 인민들은 ‘진보, 운동권 때문’이라며 더 화를 내고 환멸을 느낄거다. 게다가 인민들은 민주노동당이 활동하고 있는 제도 정치권 내 한정된 상황에 대한 이해나 고려 없이 보수 우파의 패러다임으로 민주노동당을 무능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근데, 그런 평가를 좌파라는 놈들이 똑같이 하고 있는 걸 보면 화가 난다. 굳이 좌파가 안 해도 저쪽(우파)에서 이미 충분히 하고 있는데, 잘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안 하고 왜 그런 비판을 우파와 똑같이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다만, 개혁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하다가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자산이 될 거다.

-민주노동당 내 대선 후보 사이 첫 경선이 진행 중이다. 흥행 성공 조건은.

같은 맥락으로 크게 흥행이 될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들 서로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인민들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차별성에서도 변별력을 느끼기에 지쳐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인민들에게 이 세 후보의 현미경적 차이를 봐달라고 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 세 명이 서로를 향해 차이를 말하는 것 보다 범우파 개혁 세력인 열린우리당을 향해 그들과 좌파 진보의 차이를 강력하게 말해야 한다. 그것을 누가 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말하느냐가 경쟁이 돼야 한다고 본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를 드러내, 인민들이 진보정치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 바로 민주노동당의 비전이다. 이러한 상황을 전제하고 세 후보가 거시적 차원에서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발언을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세 후보 가운데, 누가 본선 경쟁력이 있는 것 같은가?

모르겠다.(웃음) 그건 도토리 키재기라. 글쎄, 난 오히려 심상정 후보 같다. 좀더 알맹이가 있다고 생각 한다. 알맹이가 있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 보면 좀더 선명한 진보성을 띠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더 말을 하면 마치 심상정 후보를 지지하는 홍세화 선생님처럼 될 것 같은데(웃음)..... 음.... 좀 더 선명한 진보성을 가진 것 같고 아직은 그 사람의 가치가 제일 덜 개발된 상태여서 앞으로 더 개발의 여지가 많아 보인다.

또 여성이라는 것도 강점인 것 같고. 나는 경쟁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오히려 누가 더 나은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웃음) 셋 중 진보성이나 이념적으로 선명한 게 마음에 든다. 특히, 출마 선언 발표 할 때 뒤에 걸어놓은 걸개(가난한 사람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보면 인민들이 보기에는 꺼려지는 말일 수 있다.

근데, 우리한테는 우리의 자긍심이 있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계속 인민이나 우파의 눈치를 보며 인민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언어를 사용해야 된다는 강박이 있다. 물론 그런 부분도 전술적으로 필요하지만 거기에 자꾸 매달리면 곤란하다. 그래서 제가 볼 때 그런 모습이 예뻐보였다.

-집권 정당이 되기 위한 조건이 있다면?

인민들에게 어떤 정치가나 정당이 내 편을 들어주는지 알 수 있는 의식을 먼저 생기게 만들어 줘야한다. 이는 민주노동당 뿐 아니라 전체 진보 운동의 과제이다. 또 노무현 정권이 출발할 때 저 사람들은 진보가 아니라, 그들의 ‘개혁’은 사회를 반동시키기 위한 가장 세련된 방법이라는 걸 좀더 집중적으로 공세를 펼쳤어야했다.

그런 부분은 참 아쉽다. 이제야 그런 얘기가 최근 벌어진 진보 논쟁을 통해 나오는데, 노무현 정권 초부터 그 사람들이 진보 행세를 하기 전에 먼저 ‘가짜’라고 강하게 얘기 했어야 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의 이름표와 정체성을 열린우리당 우파개혁세력이 다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파개혁과 좌파진보 정치가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면서 그들이 빼앗은 진보 명찰을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사민주이자이든, 사회주의자이든, 트로츠키주의자이든, 다함께이든 간에 이젠 그런 구분 없이 전부 결집해야 될 문제이다. 여기서 더 밀리면 정말 끝장이다.

- 대선을 준비하는 민주노동당과 후보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운동이 점점 천박화 되고 있다. 특히, 전통적 의미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운동이 천박하게 돼가는 것에 대해 좀더 냉정하고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노동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해방되기 위해하는 것인데, 최근 근래의 몇 년을 뒤돌아보면 대공장 남성 정규직 노동자들 위주로 하는 임투가 주류 운동이 된 것 같다.

일련의 임투 과정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그간 보여준 노동운동은 그 본질과 달리 똑같이 자본의 논리로 인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 '제값받기 운동' 을 하며, 자본가와 같이 자본의 맥락으로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말을 하다 보니 선거에 도움이 되는 실무적인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 사실 민주노동당이 얼마나 지지율을 얻고 표를 더 얻느냐는 진보 진영 내 위기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은 물론 좌파 진영의 사람들이 우파와 똑같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새 뼛속까지 자본에 함몰돼 버린 것 같다. 돈이 모든 가치와 이념을 대변하는 시대인데, 좌파라면 오히려 그런 현실에 더 불안해야 한다.

빨간 띠를 두르고 제 아무리 힘들게 노동 운동을 하면 뭐 하나? 자기 자식만은 노동자로 안 만들려고 발악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녀들이 성장한 10년 후 좌파 운동은 완전히 질 수 밖에 없다. 우파 자녀들과 똑같이 사교육 시장에 내몰리면서 자본의 가치관을 배우는데, 나중에 이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 과연 좌파운동을 할 수 있을까? 좌파들도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우파 진영에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거다. 모두가 진보 운동의 위기를 논하면서 사실은 10년 후 패배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것이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의 근본적인 위기이고 민주노동당이 아래로부터 대중의 힘을 공고히 받지 못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또 앞서 말한 진보정당 내 반진보주의자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당의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어 80년대에는 거대 담론에 매몰 된 진보 운동이 문제였지만, 지금은 꼭 필요한 거대 담론이 너무 결핍된 게 문제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세 후보가 지엽적이고 정치적인 기술적 문제 혹은 제 각각의 차이에 집착하기보다는, 진보운동 전반이 가진 역사적 위기와 상황을 직시하고 그에 따른 거시적 안목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그분들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특별히 그런 건 없고 다들 나름대로 고생하고 있는데, 서로 너무 쉽게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 온건한 좌파와 조금 급진적인 좌파가 서로의 차이로 반목하고 까칠하게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리 그래도 우파보다 못 할까. (김은성 기자)

07. 05. 21.

P.S. 여전히 눈에 띄는 것은 '좌파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집착이다(그에겐 '진보의 명찰'을 다시 빼앗아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이다. 우파개혁과 좌파진보가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흥미로운 건 온라인 공간은 진보 진영에게 불리하다는 그의 생각이고, 달라진 (것으로 보이는) 건 '조금 온건한 좌파'에 대해 덜 까칠해졌다는 것이며 변함없는 건 최종심급으로서의 '계급'에 대한 강조이다. 그리고 내가 동의하는 건 "좌파들도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우파 진영에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거다"라는 문제의식(그러니까 교육관에서 있어서만큼은 우파와 차별화되지 않은 좌파가 있다면 그는 '온건한 좌파'인가, 아니면 '무늬만 좌파'인가?). 한편 김규항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예전에 '희망에 대하여'란 페이퍼에 정리해놓은 적이 있다(1년전 이맘때였군)...

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CNO=0&PCID=2040596&CType=1&paperid=872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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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5-21 10:52   좋아요 0 | URL
바빠서 꼼꼼히 읽지는 못했지만..재미있습니다. ^^
좌파 선명성/대중친화성 사이에서 .....제가 살고 있는 환경은 후자를 더 요구합니다.^^ 머리와 손이 다른 일을 하듯... 복잡하고 추상적인 생각을 넣어서 단촐하고 구체적인 결과를 낳아야하는 제 생활에 비애감이 생기네요.ㅜㅜ 그러나..담론의 세계에서 사는 삶보다는 똥구더기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니 그걸 믿습니다.(자기위안) ... ... ... ... ...

마늘빵 2007-05-21 12:1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길어서 마음먹고 나중에 읽어야겠지만, 대략 저도 반갑습니다. 그런데 김어준과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요. (이젠 찾아 읽기도 귀찮아... ) 처음에 제목보고 B급을 8급으로 잘못쓴게 아닌가 했습니다.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

테스트같은거 해보면 전 좌파자유주의로 나오는데, 제가 좌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좌파'라는 명찰은 아무데나 함부로 붙여서는 안될거 같아요. 이런 생각은 김규항의 B급 좌파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편하게 전 중도라고 하렵니다. 좌파적인 생각을 하더라도. 때로는 우파인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로쟈 2007-05-21 14:25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전위주의 대 대중주의는 유구한 대립구도이기에 새삼스러울 게 없지요. 여전히 결판나지 않는 걸 보면 '해소불가능한' 대립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아프락사스님/ 좌파-우파 논쟁에서 그나마 한단계 진전한 것은 '생활우파'란 범주의 덕분이죠. '생각 따로, 생활 따로'파가 많다는 것. 20대 고학력 고소득자들이 자신을 '진보'라고 생각한다죠(어떻게 해서 '고소득'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권정생-김규항적 포지션에서 보면 고소득이면서 좌파(혹은 진보)는 넌센스죠...

마늘빵 2007-05-21 15:16   좋아요 0 | URL
다행입니다. 고소득은 아닌지라. 기업체보다 떨어지니 생활좌파는 자연스럽게 될 법도 하군요. :)

biosculp 2007-05-21 16:44   좋아요 0 | URL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벌어먹고 살다보니 이자율이 신경쓰이더군요.
진보, 좌파, 서민생활위한다는 말이 아니라 수치로 표현되는 이자율에 더 민감해집니다. 이번정권을 보는 입장도 은행창구를 다니다보니 참 헛발질잘하고 예전 정권이 암묵적으로 하던짓을 다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카드사태나 부동산을 보면서 뻘짓하면 내 삶자체를 흔들어버린다는것도요.
진보, 좌파, 이런 쪽의 분들은 당신들의 실력을 보여주실주 있을지. 말이 아니라 숫자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전자인간 2007-05-21 18:55   좋아요 0 | URL
좌파들은 스스로 '진입장벽'을 높이높이 쌓아 올려서 그들만의 '블루오션'을 즐기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간혹 합니다. '8급좌파'만 하더라도 그 진입장벽이 무시무시하게 높아 보이니 말입니다. 내로라 하는 좌파운동가가 말하는 '좌파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조건을 교집합시키다보면 결국에는 저같은 사람은 잘해도 얼치기 좌파, 심하면 파시스트가 되고 말더군요.

로쟈 2007-05-21 22:56   좋아요 0 | URL
biosculp님/ 말이 아니라 숫자로! 재밌습니다.^^;
전자인간님/ 김규항의 글을 읽다 보면 대타자의 형상이 눈길을 끕니다. 인터뷰에서도 '노동자의 힘' 동지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데요, 자신을 '8급 좌파'라고 규정하는 어떤 시점이 존재하는 것이죠. 그에겐 인민보다도 중요한 것이 그 대타자의 시선이 아닌가 싶어요...
 

뒤늦은 '어린이날 행사'를 하느라 한 극장에서 어린이 뮤지컬을 보고 덕수궁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아이는 뮤지컬보다는 덕수궁을 더 마음에 들어했다). 그렇게도 하루가 간다. 누적된 피로 탓인지 별다른 의욕 없이 오래전 파일들을 뒤적이다가 <도스토예프스키: 인간의 심연>(신구문화사, 1974)를 읽고 몇 대목 옮겨적어둔 걸 발견했다. 책은 아마도 6-7년전에 읽은 듯하다(나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지금은 모르겠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형서점들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었다).

 

 

 

 

책은 저자와 역자가 모두 눈에 띄는데, 먼저 역자는 소설가이자 국문학자였던 백사 전광용(1919-1989) 선생이다. <꺼삐딴 리>의 작가 말이다(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꺼삐딴'은 '캡틴'의 러시아어이다). 그리고 저자는 겉표지에 '마아크 스로닐'이라고 표기돼 있는데, 아무런 소개가 덧붙어 있지 않지만 짐작엔 '마르크 슬로님(1894-1976)'의 오기이며 아마도 일역본을 다시 옮기는 과정에서 착오가 빚어진 게 아닌가 싶다. 가령 영역본이라도 참조했다면 'Marc Slonim'을 '마아크 스로닐'이라고 옮기긴 어려웠을 터이다.

러시아문학자인 슬로님의 책은 20세기 러시아 문학사인 <소련의 작가와 사회, 1917-1977>(열린책들, 1986)이 번역/소개된 바 있다. 그가 러시아어로 쓴 책 중의 하나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세 여인>(1953)이며, 그 영역본이 'Three Loves of Dostoevsky'(1955)이다(나는 3년전 모스크바 체류시 러시아어본을 우연히 구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전기를 한번이라도 읽어본 독자라면 그 연인/여인을 바로 꼽아볼 수 있는데, 첫번째 아내였던 마리야 이사예바, 잠시 염문을 뿌렸던 여대생 아폴리나리야(폴리나) 수슬로바, 그리고 두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그들이다. 슬로님의 책은 주로 이 세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를 살핀다. 아래는 그 중에서 내가 옮겨적었던 대목들인데, 다시 대조해보지 않은 탓에 표기나 인용쪽수 등에서 착오가 있을 수 있다.   

 

"흥미진진한 것은 결혼 직후부터 물질적인 곤궁과 걱정으로 눈코 뜰 새 없었을 소설가가 다시 베르그노프(*베르구노프)에게 뛰어다니며 「그는 친형제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일이다. 청년 교사에 대하여 소설가는 호기심과 호의가 섞인 기묘하고 무언가 육체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여자든 남자든 자기의 배우자를 그 전에 사랑했던 사람에 대하여 자주 느끼는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은 질투심과는 상반되어 어떤 때는 질투심과 함께 실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 특별한 애욕적인 인척관계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병적인 힘을 수반하여 나타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제자인 로자노프라면 다분히 이 감정을 「만인의 친척」이라는 근친 간통에 가까운 성적 육체적인 공유의 감각으로 설명하고 한량없는 성감정을 가지는 사람들에 특유한 생각이라고 말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참말로 이러한 종류의 인간에 속하였다."(71)  

 

 

 

 

 

 

 

 

 

도스토예프스키는 첫번째 아내가 되는 이사예바와는 시베리아의 유형지에서 만나게 되며 간곡한 구애 끝에 1857년에 결혼하게 된다(사진은 1850년대말에 찍은 것으로 돼 있다). 첫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된 이사예바에게 베르구노프란 청년 교사가 새로운 등장함으로써 한동안 도스토예프스키의 애를 태우게 되는데, 그와 이 연적과의 '기묘한' 관계에 대해선 모출스키의 평전에서도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자연스런 일이지만 작가의 경험은 창작에도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모출스키는 <영원한 남편>과 <네토츠카 네즈바노바> 같은 작품을 거명한다.

 

거기에 덧붙여 <죄와 벌>에서 마르멜라도프의 아내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이사예바를 모델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카테리나와 마찬가지로 이사예바 또한 폐병을 앓았으며 그 때문에 1864년 세상을 떠난다. 참고로, <영원한 남편>에 대한 가장 뛰어난 분석은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한길사, 2001)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제자'로 언급된 로자노프는 <고독>(문학과지성사, 1999)의 저자 바실리 로자노프를 말한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숭배하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연인이었던 수슬로바와 결혼한다(물론 불행한 결혼이었다).    

 

 

폴리나와의 여행: "많은 남성들은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를 배반하고 딴 남자에게 몸을 맡기면 증오를 느끼기보다 더 그 여자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이다. 마치 타락이 그 여자에게 일종의 특별한 신비적인 부끄러운 애욕적인 매력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설가는 가장 중요한 그 일만 빼놓고는 마치 신혼부부와 같은 이 여행에서처럼 여자로서의 폴리나에게 모욕을 당한 일은 없었고, 또 이처럼 그녀를 그리워한 일도 없었다... 발에 키스하고 싶었다는 에피소드나 폴리나의 「안타까운」 발바닥의 표현은 참말 도스토예프스키답다. 확실히 그는 페티시즘(fetishism)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여성의 발이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불타는 애욕의 흥분의 대상이었다."(119)  

 

 

 

 

 

 

 

 

 


그녀는 소설가를 상대로 자기의 권력을 시험하고 자극적인 즐거움을 느끼면서 육체관계를 거부하였다. 하기는 육체관계의 거부는 특별한 노력의 소산은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녀는 바덴에 도착한 후 일기의제일 첫줄에 썼다. 또 그녀는 다음과 같은 레르몬토프의 말을 되새기고 있다. 「인생은 냉정하게 조심하여 내다보면 허무하고 어리석은 농담이다.」... 차디찬 모멸 짙은 조소로써 그녀는 자기를 소유하려고 하는 소설가의 가냘픈 행동을, 그의 정욕의 발작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를 희롱하고 또 할 수 있는 데까지 유혹하면 갑자기 즐거워져 견딜 수 없었다. 사실 거기에는 독특한 쾌락이 있었고, 그 쾌락도 소설가는 맛보았다. 그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늘 이중이었으나 이 때만은 문자 그대로 잔인성과 전제주의에 짙게 물들어 있었다.(120)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이들이 벌을 받거나 매를 맞는 모습을 몇 번이고 그렸다. 아이들의 완전한 무방비, 꼬집든가 매질하든가 폭행하든가 되는 대로 내버려두는 방심이 악의 없는 즐거움을 유박하고, 어두운 본능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저항하지 못한다. 어른들은 애들 상대로 한없는 포악의 욕망을 실현한다. 도덕적 정신적인 사디즘이 육체적인 사디즘으로 바뀐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즐긴 테마의 하나이다. 루소의 <참회록>을 비롯하여 세계문학은 체형의 에로틱한 성질이나 죄와 성적인 쾌락의 결합을 때때로 그리고 있으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테마가 그밖의 모든 그의 테마가 그러하듯이 아주 깊게 파들어가고 형이상학적으로 된다. 그는 매질이나 발길로 차는 폭행을 인간의 기초적인 잔인성, 인간의 죄 많은 저주스러운 본성에 대한 악의, 어쩔 수 없는 지배력이라고 생각하여, 아이들에 대한 고문을 아담의 원죄 탓이라고 한다.... 이 소설가 자신은 유년시절에 한번도 체형을 받은 경험이 없다. 의사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정에는 체형이란 볼 수 없었다. 그와 같이 아버지가 된 소설가도 아이들에게 손가락 하나 건드려본 일이 없다.(165)  

 


그녀(안나)는 선량하고도 그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고독에 고민하여 결혼에다 정신적인 의지를 구하였다. 그와 동시에 결혼만이 그를 육욕의 동요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그는 결혼을 교회와 신에게서 축복받은 동서(同棲)라고 믿고 종교적인 근거와 애욕의 정당성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결혼은 배신과 기만에 대한 최상의 보증이기도 했다... 현재의 그에게는 새로운 이탈이 필요하였다. 아내와 가정을 가지고 환영과 이념의 세계, 끊임없는 정열과 불타는 고뇌의 세계에서 사적이고도 가정적인 작은 세계에로의 도피가 필요하였다... 자신의 병적인 것을 버리고 천재라든가 간질병 환자라든가, 구신주의자도 유형수도 방탕자도 이상주의자도 아닌 것이 되고 싶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같이 평범하고 싶었다. 결혼은 꼭 필요하였다. 그는 그것을 자각하고 안나와 「주판 따짐」으로 결혼할 각오를 하였다. 그는 의식적인 계산과 본능적인 지향의 교착을 「주판 따짐」이라고 불렀다. 이 경우 그의 늘 있는 전격적인 사랑이란 볼 수 없었다. 소설가가 고지식하고 단정한 여비서 속에서 여자를 알아본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187)


정신분석학자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미친 듯한 도박열 속에서 그의 성적인 콤플렉스나 불만의 토출구를 무조건 발견한다. 그러나 룰렛이 그를 꼭 붙잡아매 놓은 것은 불합리 속으로의 도피였었고 우연한 세계와의 접촉을 위한 것이었다. 룰렛의 성공, 불성공은 논리의 법칙에 대한 모독이다. 그것은 도덕도 유클리드 기하학의 유한 공간도 아직 없었던 인간세계의 애매한 어두컴컴한 근원에 통하는 것이다. 도박 속에는 탄생이나 빈곤, 신분, 경우 등의 불공평을 행운의 멋진 일격, 운명에 대한 도전에 의하여 시정하는 무한의 가능성이 있다... 안나는 이러한 일을 부분적으로 막연하게 느꼈다. 그녀는 「그것」을 고질이라고 부르고, 그 병에 연관되는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억지로 남편을 완쾌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217)


도스토예프스키가 좀 침착하여 가정생활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50고개를 훨씬 넘어서였다. 그는 여전히 조용한 밤, 쌍촛불 밑에서 일을 하는 것을 즐기고 아침에는 늦잠을 잤다. 그는 신사복에 넥타이를 매고 조반상에 나타났고 줄곧 옷에 묻은 때를 걱정하였다. 그는 차를 잘 마셨으나 그 차 만드는 방법에 조건이 많았으므로 안나조차도 거절하는 정도였다. 그러면 그는 손수 주전자와 더운 물을 가져다 몹시 달고 진한 차를 두 잔 연거푸 마시고 석 잔째는 서재로 가지고 들어가서 일을 하면서 마셨다. 그의 방안은 늘 같은 상태로 있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매일 아침 안나는 가구나 책상 위의 서류, 신문, 책의 위치를 점검한다. 간밤 소님이 왔을 경우는 더 한층 심하다. 책상이나 서류의 먼지를 터는 것도 그녀만의 일이었다. 만일 무어 하나라도 모습이 다르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반드시 한참 떠들썩했다. 또 그의 책상과 나란히 연필과 수첩을 놓은 안나의 조그만 책상이 있어 여기서 그녀는 속기나 교정을 한다. 도스토에프스키는 원고를 새까맣게 가필하고, 여백에는 사람 얼굴이나 집이나 물건 모양을 그렸다. 그의 책상 서랍에는 사탕과자(과일과 설탕으로 만든과자), 건포도, 호두 같은 것이 들어 있어 애들이 어머니의 눈을 숨어가면서 서재로 뛰어들면 그것을 뿌려주었다. 4시 가까이 그는 산책을 나간다. 돌아올 때는 초콜릿, 튀김, 통조림 등을 산다. 6시에 저녁을 먹고 9시에는 온 가족이 같이 차를 마신다. 그리고서는 그는 일을 하거나 외출하거나 한다. 때로는 손님을 부른다. 손님은 거의 극친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친구들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였다.(234-5)


스트라호프는 말한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은 인간이라고도 행복한 사람이라고도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질투장이이고 방탕자이고, 일평생 자신을 비참하게 할 만한, 그가 그처럼 심통 사납고 영리하지 않았다면 우스꽝스럽게 밖에 보이지 않았을 흥분 속에서 지냈다. 그 사람은 루소처럼 자신을 가장 뛰어난 인간, 가장 행복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위스에서는 내 눈앞에서 하인을 무참하게 막 부렸다. 하인은 끝내 성을 내며 󰡔저도 인간입니다󰡕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이러한 광경은 늘상 일어났다. 그가 자신의 악의를 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236)    

 

글이 길어져서 다음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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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국외서적으로는 가장 먼저 구입한 책이 지젝의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How to Read Lacan)>(2007)이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499546&paperId=1032991). 노튼(Norton)출판사에서 나오는 'How To Read' 시리즈의 한권인데, 두어 차례 페이퍼에서 다루면서 조만간 국역본이 나올 거라는 소식도 전한 바 있다. 바로 그 책이 이번에 출간됐다.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떼로. '떼'라는 것은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을 포함하여 같은 시리즈의 책 10권이 한꺼번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전격적'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다.

나는 어제 아침에 8권의 책을 주문해서 오후에 받았다. 일단 집에 들고 온 책은 내가 원서도 갖고 있는 <라캉>과 <데리다> 두 권인데, 원서 <데리다>가 얼른 눈에 띄지 않아서 일단은 <라캉>의 서문만을 읽어보았다(사실 <라캉>의 원서도 한참만에 찾았다. 한동안 잊고 있었더니 책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우리 뇌를 씻어내자'가 지젝이 붙인 그 서문의 제목이다. 아니 국역본의 경우엔 그렇다. 원서에는 따로 제목이 붙어 있지 않고 다만 'Let's try to practice a little brain-washing on ourselves'가 에피그라프(제사)로 달려 있을 따름이다.

 

 

 

 

서문에서 지젝이 먼저 짚고 있는 것은 지난 200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출판 100주년 기념과 동시에 하편에서 대두되고 있는 새로운 조류(new wave), 곧 '정신분석학에 대한 사망선고'이다. 국내에 출간된 책으로는 아마도 스티븐 존슨의 <굿바이 프로이트>(웅진지식하우스, 2006)가 이러한 조류를 대표하는 책이겠다(비록 원제 'Mind Wide Open: Your Brain and the Neuroscience of Everyday Life'는 국역본의 제목만큼 선정적이지 않지만 말이다). 최근에 다수 출간되고 있는 뇌과학 서적들도 이러한 조류에 한몫하는 것이고.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뒤프레슨의 책명이 <프로이트 죽이기: 20세기 문화와 정신분석의 죽음>(2004)인 것은 시사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상-마르크스와 몇몇을 제외하고 - 인간 사유의 근본원리에 대해 프로이트만큼 오류를 범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등장한 책이 <공산주의의 블랙리스트>(2000)를 이어서 출간된 <정신분석학의 블랙리스트>(2005)이다(역자는 '블랙북(Black Book)을 '블랙리스트'로 옮겼다. 미주의 책제목에 'noire'라고 오타가 났다). 두 권 모두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인데, "공교롭게도 이런 부정적인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사이의 심오한 연대가 만천하에 알려진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사망선고, 혹은 장례사(funeral oratory)에 이의를 제기한다. 사실 한 세기 전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발견을 근대 유럽사에 끼워넣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세 가지 모욕'이란 생각을 발전시켰다. 다니엘 부어스틴이라면 '부정적 발견'이라고 불렀음직한 이 세 가지 모욕이란 (1)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에게서 우주의 중심이란 위치를 박탈한 것, (2)다윈이 진화론을 통해서 역시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박탈한 것, (3)프로이트가 무의식 지배적인 역할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자아(ego)가 우리의 집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 것 등이다.

그런데, 지젝이 보기에 정신분석학의 1세기가 지난 오늘날 (뇌과학을 통해서) 인간의 나르시시즘적 자기상에 보다 급진적인(파괴적인) 모욕이 출현하고 있다. 즉, "우리의 정신은 데이터 처리과정의 연산기계에 불과하며, 자유와 자율에 대한 감각도 기계 사용자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의 뇌과학과 비교한다면 정신분석학은 전복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최근의 모욕에 의해 위협받는 인간주의적 전통처럼 보인다."(7쪽)

요컨대, 현황은 이렇다: "(1)과학지식의 차원에서, 인간정신에 대한 인지심리학자들의 신경생물학적 모델은 프로이트의 모델을 대체하고 있다. (2)정신의학적 임상치료의 차원에서, 정신분석적 치료는 약물치료와 행동치료에 밀려 자신의 기반을 급격히 상실하고 있다. (3)사회적 환경의 차원에서, 개인의 성 충동을 억압하는 사회적 규범의 이미지는 오늘날 압도적인 쾌락주의적 경향과 비교하여 더이상 타당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사망선고와 추모는 성급하고 성마른 것이라 진단하다. 오히려 그의 목표는 "오늘날이야말로 정신분석학의 시대가 도래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엇을 통해서? 프로이트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론 "라캉을 통해 프로이트를 읽음으로써, 즉 라캉이 '프로이트로의 복귀'라고 부른 것을 통해서."

원문은 "[M]y aim is to demonstrate that it is only today that time of psychoanalysis has come. Seen through the eyes of Lacan, through what Lacan called htis 'returen to Freud', Freud's key insights finally emerge in their true dimension."이다. 여기서 강조한 대목은 국역본에서 누락됐다. 그렇다고 대세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약간씩의 누락은 뒤에서도 곧잘 나온다.  라캉의 프로이트 독해, 곧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통해서, 프로이트의 핵심적인 통찰이 갖는 진정한 차원이 마침내 나타나게 된다는 얘기이다.

 

 

 

 

라캉에게서 '프로이트로의 복귀'가 뜻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언어학적 재독해/재구성이다(때문에 "라캉의 핵심 개념 중 대부분이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응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놀라운 것은 이성적 자아가 그보다 훨씬 큰 영역의 맹목적이고 불합리한 본능의 영역에 종속되어 있음을 주장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무의식 자체가 오직 자신의 문법과 논리에 복종하고 있는지를 입증했기 때문이다."

라캉의 해석/재독해에 따르면, "무의식은 자아가 정복해야 할 야생적인 충동의 저장소가 아니라, 외상적인 진실이 말을 하는 장소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내가 동화시켜야 할 심오한 진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참을 수 없는 진실이다. " 

 

 

 

 

그렇다면, 라캉과 다른 정신분석학파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캉에게 정신분석학은 심리적 장애를 다루는 이론이나 기법이 아니라, 개인들을 인간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영역과 대면시키는 이론이자 실천이다.(...) 라캉에게 정신분석 치료의 목적은 환자의 복리나 성공적인 사회생활 내지 개인적인 자기 성취가 아니라, 환자로 하여금 그/그녀의 욕망의 기본 좌표와 곤경을 대면하도록 하는 것이다."

"라캉의 '프로이트의 복귀'는 임상분석에 새로운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했다. 라캉은 일생 동안 끊임없는 논쟁과 분열과 추문까지 일으켰다. 그는 1963년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 파문당했으며, 그의 논쟁적인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자에게서 페미니스트에 이르는 진보적 사상가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한데, 여기서 신경을 건드리는 건 '1953년'이 '1963년'으로 오기된 것. 국역본엔 '라캉의 생애'를 참조하라고 돼 있는데, 191쪽을 참조하면 라캉은 1953년에 국제정신분석협회의 산하기관인 파리정신분석협회 대표직을 사임하고 프랑스정신분석협회에 가입하며 이 때문에 파리정신분석협회로부터 제명(파문) 당한다. 참고로 라캉은 "그해 7월에 주디스를 낳게 될 마클레스(Sylvia Makls)와 결혼했다." '마클레스(makles)'에서 'e'가 빠졌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해 가을 라캉의 '전설적인' 세미나가 시작된다는 점.

그런 라캉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 "라캉은 탐욕스러운 독자이자 해석자였다. 그에게 정신분석은 구술(환자의 말), 혹은 기술(記述) 텍스트를 독해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라캉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독법을 실천하여 라캉으로 다른 텍스트를 읽는 것이다." '라캉으로 다른 텍스트를 읽는 것'이야말로 지젝의 주특기 아닌가(나는 개인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보보크>에 대한 독해를 먼저 읽어보게 될 듯하다)!

"라캉은 최고의 임상학자였으며, 그의 임상적 관심은 그의 실천과 저작 전체에 스며 있다."(Lacan was first of all a clinician, and clinical concerns permeate everything he wrote and did.) 'first of all'은 '최고의'란 뜻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정도이다. 라캉은 무엇보다도 임상학자(임상의)였다는 것. 한데, 그의 임상적 관심이라는 게 두루 망라하는, 편재(遍在)하는 것이었기에 지젝은 '임상'만을 따로 다루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임상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생략하고, 임상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물들이는 임상적 효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라캉의 임상적 위치에 대한 진정한 검증 방법이다."(Precisely because the clinical is everywhere, one can short-circuit the process and concentrate instead on its effects, on the way it colours everything that appears non-clinical - this is true test of its central place.)

마지막 절에서 'its central place'를 '라캉의 임상적 위치'라고 옮긴 건 부정확해 보인다. '(라캉에게서) 임상이 갖는 중심적 위치'란 뜻 아닌가? 다시 옮기면, "모든 것이 임상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 과정을 건너뛸 수 있으며 대신에 그 결과(효과)들에, 임상적인 것이 임상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물들이는 방식에 집중할 수 있다. 이것이 임상의 중심적 위치에 대한 진정한 검증방법이다."

여기까지가 라캉에 대한 설명이라면 이 서문의 마지막 문단은 <라캉을 읽는 방법(How To Read Lacan)>의 전략에 대한 설명이다. 지젝은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을 통해 라캉을 설명하는 대신에(...) 라캉을 이용하여 우리의 사회적 리비도적 곤경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 책은 중립적인 판정을 내리는 대신 당파적인 독해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모든 진실/진리는 당파적이라는 게 또한 라캉 이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엘리엇(T. S. Eliot)은 <문화의 정의에 대한 노트>에서 모든 선택은 청교도 종파주의와 무신론 사이의 선택일 뿐이라고, 종교를 생동감 있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주류 체제에 대한 종파주의적 분열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라캉은 그의 종파주의적 분리를 통해, 즉 쇠멸해가는 국제정신분석협회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프로이트의 가르침을 생동적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라캉에 대해 해야 할일 역시 이와 같다."

역자는 'sectarianism'을 '청교도 종파주의'라고 옮겼는데, 그냥 '분파주의' 정도라고 봐야겠다('종파주의'란 역어도 자주는 쓰이는 건 아니다). 그걸 굳이 한정해서 '청교도 종파주의'라고 옮긴다면 뒤에 나오는 '종교(religion)'도 '기독교'라고 옮겨야 짝이 맞는다. 여하튼 라캉을 읽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마지막 제스쳐는 '정통적인' 라캉주의적 견해로부터의 분파주의적 이탈이다, 라고 지젝은 말하는 듯하다. 이것은 하나의 내기이다.

마지막에 붙은 미주는 이 책의 소스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은 라캉의 몇몇 기본 개념에 초점을 맞춘 입문서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주제들은 지난 10여년간 내가 했던 작업의 중심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정 정도 이미 출판된 내 저서의 '해체 조립(canibalization)'이 될 수밖에 없다. 변명을 하자면 나는 내 책에서 빌려온 구절들을 새롭게 각색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185쪽)

'변명을 하자면'은 'to compensate(보상/보완하기 위해서)'를 옮긴 것이다. 책의 이러한 해체-구성적(카니발적) 성격은 역자 후기에서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지젝 자신이 고백하듯이 이 책은 지젝의 이전 저서들에서 '빌려온 구절을 해체 조립하여 새롭게 각색'한 '지젝의 책'이다."(198쪽) 이 구절을 옮겨적은 것은 예전에 역자가 제기한 지젝에 대한 비판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034520&paperId=989000 참조). '변명을 하자면'은 역자에게 더 어울릴 만한 문구이다. 그는 이렇게 적었었다.

나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을 애독하는 사람들은 신간이라고 펼쳐 보면 이전 책에서 이미 본 듯한 구절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기시감’이 아니다. 때로는 거의 한 챕터 전체, 때로는 한 단락 그대로, 때로는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때로는 약간의 변형이 가해진 채 자기-표절을 하고 있다. 이 책 <혁명이 다가온다> 역시 새로 쓴 부분보다는 이전 책에서 오려 붙인 부분이 더 많아 보인다.(...) <혁명이…>는 소장할 가치가 없는 책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 전체가 그렇다.(...) 엄밀히 말해서 ‘지젝’의 책은 없다. (...) 그는 헤겔이 생산한 변증법을, 마르크스가 생산한 유물론을, 프로이트가 생산하고 라캉이 재생산한 정신분석학을 멋지게 재가공해서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유용한 물건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쇼호스트와 같다... 

 

 

 

 

그러니까 역자의 핵심적인 주장은 '지젝은 없다' 내지는 '지젝의 책은 없다'였다. 하여 그의 주장대로 이렇듯 자기 표절로 충만한 '쇼호스트'의 책을, '소장할 가치가 없는 책'을 굳이 우리말로 옮기느라 애쓴 역자의 '계산법'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쇼호스트의 쇼호스트?). 궁금하지는 않지만 기이하다는 생각은 든다. '지젝으로의 복귀'인가, 아니면 자학에의 열정(혹은 향락)인가? 여하튼 나로선 '라캉 정신분석학의 실천적 곤경'(201쪽)을 염려하기에 앞서서 역자가 대면해야 했던 것이 '번역의 곤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혹은 역자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인지도...

07. 05.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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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7-05-19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드 씨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로워요. 아, 그런데 지젝을 읽으려면 무슨 책을 먼저 읽으면 좋은지 추천 좀 해주세요. 오역이나 필요 이상의 난해한 번역으로 지젝에게 제가 지레 질리지 않을 수 있는 책으로요. 으음ㅡ. 사실 제가 지젝의 책을 선뜻 고르지 못하는 데에는 로쟈님의 책임이 정말 크거든요. 그러니 골라 주셔야 해요. ㅡㅡ'

(그런데 이 질문을 언젠가도 한 번 드렸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지.)

로쟈 2007-05-1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어차피 라캉도 비켜갈 수 없으니까 이 책부터 읽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번역은 부분적인 착오들에도 불구하고 거침없기 때문에 가독성은 좋습니다...

Joule 2007-05-20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땡쓰투ㅡ했어요. 흐음.

(제가 요즘 마침 라캉을 읽고 있거든요. 음, 그럼 프로이드와 라캉과 지젝과의 포썸이 되는건가요. 아침 저녁으로는 프로이드를 읽고 있으니 말이에요. 이거 괜찮다.)

자꾸때리다 2007-05-20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라.... 그렇다면 지젝의 다른 책 <삐딱하게 보기>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로쟈 2007-05-20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oule님/ 아침 저녁으로 재미보고 계시는 거네요.^^ 결과를 기대해봐도 되는 거죠?..
Mravinsky님/ 영화만 다루어지는 건 아니고 다양한 텍스트를 라캉과 대면시키는 것이고, 지젝에 따르면 라캉 이해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딱히 <삐딱하게 보기>하고만 연관되는 건 아니구요...

수유 2007-05-20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5권의 책을 교보에서 사왔답니다. 셰익스피어를 안들고 온것이 조금 걸리네요. 철학책들을 왜 사냐는 동생들의 핀잔을 들으면서 말이지요...
모처럼 좀 한가한 휴일 오전의 책방이었습니다.

이매지 2007-05-21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새 간단하게 <라캉읽기>를 읽고 있는데 얇은 책인데도 영 진도가 안나가네요. 글 자체가 어렵게 써진 건 아닌데 말이죠. 쩝.

yoonta 2007-05-2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본을 보니 각 장의 제목을 원본과 다르게 표기했더군요. 가령 2장의 제목은 The Interpassive Subject 인데 번역본은 "진짜와 가짜" 이런 식...그렇게 하는게 각장의 내용이 더 잘들어올거라 판단해서 그런거 같은데 저로서는 원본에 충실하는게 더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1장 초반부에 나온 다나오이(Danaoi)가 무엇인지 원본에는 주에서 소상하게 설명이 되어있는데..왜 번역본에서는 홀랑 빼먹었는지도 이해하기 힘들고..한국의 독자들이 그리스고전에 영어권 독자들보다 더 정통하다고 생각해서 였을까요? -_-

로쟈 2007-05-22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유님/ '철학책'이라기보다는 그냥 '교양서'이죠.^^
이매지님/ 제가 읽기엔 숀 호머보다는 지젝이 훨씬 읽기 편합니다(더 재미가 있어서요)...
yoonta님/ 번역자 판단인지 편집부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좀 불만스런 대목들이 눈에 띄네요...

들국화 2009-10-24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사실 한 세기 전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발견을 근대 유럽사에 끼워넣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세 가지 모욕'이란 생각을 발전시켰다. 다니엘 부어스틴이라면 '부정적 발견'이라고 불렀음직한 이 세 가지 모욕이란(이하생략)" (로쟈님 글)

"한 세기 전 근대 유럽의 역사 속에 무의식의 발견을 끼워넣기 위해 프로이트는 그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라고 부른 세 가지 연속적인 인간 모욕의 관념을 발전 시켰다."(HOW TO READ 라캉 7쪽의 관련 부분)

'세 가지 인간 모욕의 관념 = 나르시시즘적 질병'이 아니지 않나요? 오히려 인간의 "나르시시즘적 질병"을 폭로하는 것이 "세 가지 인간 모욕의 관념"이 아닌가요? 로자님은 "다니엘 부어스틴이라면 '부정적 발견'이라고 불렀음직한 이 세 가지 모욕"이라고 쓰신 것도 이것를 인지하셨기 때문일까요?

2.그리고 제가 지금 2009년에 나온 초판 4쇄본을 읽고 있는데, 로자님이 지적하신 것 중 수정된 부분은

"라캉은 최고의 임상학자였으며" -> "무엇보다 라캉은 임상학자였으며"
1963년 -> 1953년, noire -> noir, Makls -> Makles

이군요. "청교도 종파주의"라든가, "라캉의 임상적 위치"같은 건 안 고쳤네요.
(전 로자님 해석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함)

3.
로자님 번역비평보면서 외국어 정말 열심히 배워야겠단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 ^



대각선씨 2011-02-14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안녕하세요? 우연히 라캉의 생애를 검토해보다가, 라캉이 IPA에서 제명된 시기가 1963년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렇게 댓글을 남깁니다. How to read lacan 원서에는 1953년으로 되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기된(오기가 맞다면) 번역본이 오히려 맞고, 원서가 틀린 것 같습니다. 이것은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와 lacan.com에 소개된 라캉의 생애를 참조했습니다. 국역본에서 (오기된?) 날짜가 다시 원서의 (오기된!) 날짜로 수정됐다는 위의 댓글을 읽고 이 글을 남깁니다.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시간이 되신다면, 확인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