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알리기에리의 '환상 여행기'란 게 따로 있는 건 물론 아니다. 그가 쓴 <코메디아>, 즉 <신곡>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 종의 <신곡> 번역서가 새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인데, 올여름에는 어디 여행도 못갈 형편인지라 단테가 안내하는 '환상여행'이라도 떠나고픈 마음이 굴뚝 같지만(정말 '지옥'이라도 구경하고 싶다!) 이 또한 마음대로 될 성싶진 않다(밀린 책들만으로 파묻힐 판이다).

여하튼 재작년 가을 한형곤 번역의 <신곡>이 출간되었을 때 첫대목에 대한 나대로의 읽기를 시도한 바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758708, http://blog.aladin.co.kr/mramor/759358) 이번에 진도를 좀더 나가보는 게 내가 갖는 최소한의 희망이다. 일단은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매일경제(07. 08. 09) 시인이 여행한 천국과 지옥…`신곡` 완역본 발간

단테의 '신곡(神曲)'이 없었다면 이탈리아어도 없다.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신곡'을 쓸 무렵인 13세기 이탈리아어는 통일된 언어가 아니었다. 지역마다 각기 다른 방언 형태 언어를 사용했고 지식인들은 글을 쓸 때 주로 라틴어로 썼다. 하지만 단테는 '신곡'이라는 방대한 문학작품을 고집스럽게 이탈리아어로 썼다. 피렌체어로 쓰여진 '신곡' 이후 이탈리아어는 이 위대한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하나로 통일되기 시작했다.

'신곡'은 한 나라의 언어적 정체성을 만든 텍스트이자 전 세계인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 대작이다. 오죽했으면 독일인인 괴테가 '신곡'을 두고 "인간이 손으로 만든 최고의 것"이라는 헌사를 바쳤을까.단테의 '신곡'을 제대로 완역한 책 2권이 동시에 나왔다.

국내에서도 서구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근대 초기부터 '신곡' 번역본이 무수히 쏟아졌다. 하지만 그중 상당수가 스페인어본이나 영역본을 중역한 것이었다. 이번에 발간된 2종류 '신곡'은 모두 이탈리아어 직역이다.

민음사가 펴내는 '세계문학전집' 제150권으로 출간된 '신곡-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는 박상진 부산외국어대 이탈리아어학과 교수가 움베르토 보스코와 조반니레조의 주해서 등 이탈리아어 판본과 영어판본을 참고해 펴냈다. 이 책은 일본어식 제목인 '신곡'에 원제목을 처음으로 병기해 놓았다. 일본어 중역본으로 처음 알려지면서 '신곡'이라는 제목이 익숙해졌지만 이 책 원제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다. '단테의 희극'이라는 뜻이다. 책에는 영국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 삽화 102장도 책 곳곳에 수록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신곡'은 김운찬 대구가톨릭대 이탈리아어학과 교수가 사페뇨의 주해서 등 다수 이탈리아어 원서를 바탕으로 10여 년에 걸친 번역작업 끝에 펴냈다. 김 교수는 원본 시행을 그대로 살리고 기존 번역서들이 저지른 왜곡을 꼼꼼히 바로잡았다. 또 창작 당시 시대적 상황, 중세 이탈리아어의 의미, 등장인물 성격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신곡'은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인간의 삶과 영성을 그리고 있는 중세문학의 백미다.
정치적 파동에 휘말려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 단테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과 신의 가치를 묘사한다. 동시에 '신곡'은 지옥ㆍ연옥ㆍ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을 취한 우화다.

논라운(*놀라운) 건 단테의 이 환상여행기는 역대 교황들, 플라톤, 마호메트,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토마스 아퀴나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스타티우스 등 실존했던 인물들과 아킬레우스, 제우스, 미노스 등 그리스ㆍ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은 물론 솔로몬, 유다, 다윗 등 성서 속 인물까지 등장한다. 단테의 모든 것을 통해 서양문화의 모든 특질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대서사시다.(허연 기자)

07. 08.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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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8-09 13:40   좋아요 0 | URL
가슴 설레게 하는 소식이군요. 비교 분석 들어가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8-09 14:34   좋아요 0 | URL
<신곡>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나올 번역은 다 나온 게 아닌가 합니다. 차세대 번역이 나오더라도 십수 년 이후가 아닐까 싶어요...

urblue 2007-08-09 14:52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때 시도했다 그냥 덮은 기억이... -_-; 이 참에 다시 도전해볼까요?

로쟈 2007-08-09 22:55   좋아요 0 | URL
네, 다시 시도해보시길.^^

수유 2007-08-09 23:02   좋아요 0 | URL
동생 왈 **야 책이 쌓인다 쌓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책들은 자꾸 쏟아져 나오고 나는 주체할 수가 없네요...그래도 사놓기는 하여야, 정말 지옥편이라도 끝내길 저도 바랍니다.

로쟈 2007-08-10 10:51   좋아요 0 | URL
우리는 '책의 지옥'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죠...
 

국내 최대 시인단체인 시인협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시협회장을 맡고 있는 오세영 시인 같은 분은 여러 가지로 분주하겠다. 지난달말 읽은 문화일보의 기사까지 떠올라서 한국일보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8. 09) 오세영 한국시인협회장, 11일부터 기념행사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년)를 효시로 한 한국 현대시의 역사가 햇수로 100년을 맞았다. 올해는 회원 1,000여 명의 국내 최대 시인단체인 한국시인협회(이하 시협)가 창립된 지 50주년이기도 하다. 시협은 이번 주말부터 뜻 깊은 해를 기념하는 다양한 문학 행사를 개최한다(별도 기사 참조). 작년 3월부터 2년 임기의 회장을 맡아 행사 준비에 분주한 오세영(65) 시인을 만났다.

국내 순수시단의 중견이자 이달 정년을 맞는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인 시인은 월간 <문학사상> 이달 호에 “한국 문단을 양분한 ‘문학과 지성’ 파와 ‘창작과 비평’ 파 사이에서 나는 철저하게 외면 당해 왔다”는 요지의 회고록을 실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아래 문화일보 기사 참조).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등의 주도로 창립된 시협이 50돌을 맞았다.
“자유당 시절 대표적 문화단체인 문총(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약칭)이 어용 단체 노릇을 하는데 반발해 시협이 창립됐다. 독재에 맞서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겠다는 취지였다. 신석초, 서정주, 김춘수, 조병화, 정한모, 김남조 등이 회장을 맡으며 한국 시단의 정통을 계승해왔다고 자부한다.”

-11~13일 동아시아 시인 포럼 주제가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동아시아 시의 역할’이다.
“세계화와 민족주의가 상충하는 시대다. 세계화의 실상은 미국화로, 서구적 가치와 표준이 일방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고유의 문화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세계화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동양적 가치관이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자는 취지다.”

-한국 현대시를 연구하며 19권의 학술서를 냈다. 시사(詩史) 100년을 평가한다면.
“한국 현대시 100년은 한마디로 정치사였다. 문학이 정치 권력에 기대고 시류를 쫓았다. 1920, 30년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만 존재했고, 해방 이후에도 참여, 민중이란 구획을 벗어난 시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순수시조차도 독재와 반공 이데올로기란 정치적 상황을 의식한 것이었다. 문학다운 문학, 문학으로서의 문학이란 의식을 가져보지 못했다는 점은 시단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문제다.”

-현실참여적 시풍은 시대적 요청 아니었을까.
“맞다. 나는 문학 지상주의자가 아니다. 80년대만 해도 민주화를 향한 열망에 문학이 복무한 것은 정치적으로 옳은 일이었다. 다만 정치적으로 훌륭한 시가 문학적으로도 그렇다고 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의 언어는 소설과 달리 전달적 기능이 아니라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젊은 시인들의 탈정치성은 어떻게 보나.
“크게 두 가지 경향성을 보인다. 영상 문화에 익숙한 세대답게 환상, 해체 등을 표방하는 감각적 작품과 천진난만한 감성을 앞세우는 서정적 작품.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어서 자유롭지만, 시 세계를 지탱해줄 철학이 부족해 보인다. 문태준, 김경주 등은 깊은 사유가 서정성을 뒷받침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문학사상>에 기고한 글이 화제가 됐는데.
“많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창비와 문지가 자기 경향이나 계열에 참여하지 않는 작가들을 고립시켜왔다는 점은 비판받아야 한다. 등단 작가와 발표작이 크게 늘어난 요즘엔 평론가가 옥석을 가리는 역할을 잘해내야 할텐데, 이들이 특정 문학 권력에 편입돼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작품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23년 봉직한 대학 강단을 떠나게 됐다.
“다음달 중순에 마지막 강의가 예정돼 있다. 정년에 맞춰 42년 간 써온 시집 17권을 2권으로 묶은 책을 냈다. 창작을 계속할 테니까 ‘전집’은 아니고 ‘집합본’이랄까. 이달 중순엔 동창이나 문단 지인들이 나에 대해 쓴 글을 묶은 문집이 나온다. 서울을 벗어나 꽃, 나무를 기르며 창작에 전념하고 싶다.” (이훈성기자)

문화일보(07. 07. 31) "나는 좌파 문학의 왕따, 철저하게 소외 당했다”

“나는 좌파문학권력의 ‘왕따’였다.”

곧 서울대 국문과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는 오세영(65·한국시인협회장) 시인이 문학인생을 회고하며, 자신은 ‘순수문학’을 고집한다는 이유로 ‘창작과비평파’(창비파)와 ‘문학과지성파’(문지파) 등 소위 ‘민중 문학권력’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됐고, 대학 강단에서도 좌파문학에 경도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토로해 파장이 예상된다.

서울대 국문과 출신인 오 시인은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그동안 17권, 1100여 편의 시를 쓴 순수문학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1985년 이후 22년간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올 1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한다. 이처럼 손에 꼽는 강단문인이자 순수문학 시단의 ‘원로’가 주요 문예지는 물론 각종 문화단체를 장악한 ‘문학권력’을 겨냥해 이같이 발언함에 따라 논란이 뒤따를 것 같다.

오 시인은 30일 발간된 ‘문학사상’ 8월호에 실린 “문단의 외톨이 혹은 ‘왕따’”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2005년 발간된 영문 한국시인 인명사전에 자신의 이름이 빠진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민음사가 출판하고 한국문학번역원이 발행한 이 인명사전은 당시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여했던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을 위해 만든 것. 이미 오 시인의 시집은 독일에서만 3권이 번역·출간되는 등 4개국어로 해외에 소개될 정도였으나 우리 시인의 인명사전에 정작 그의 이름은 오르지 않았다.

그에 앞선 수년전 당시 문예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 몇 개의 주요 외국어로 한국 현대 문단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발간할 때도 오 시인은 이름조차 제외됐다. 오 시인은 “프랑크푸르트 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도 그때(소책자 발간)의 위원들이 포함된 것을 보니 속칭 ‘왕따’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며 우연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이어 그는 “197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학권력을 양분했던 ‘창비파’와 ‘문지파’가 발행하는 문학지나 그들 세력이 접수한 그 어떤 문학지로부터 단 한번도 원고청탁을 받은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 그는 “그들 유파의 핵심 비평가나 시인들 역시 그 어떤 글에서도 내 이름을 올리지 않았으며, 시단의 어떤 경향을 이야기하면서 단순히 시인들의 이름을 나열할 경우에도 내 이름만큼은 생략해 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문학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핍박받은 시인이라는 점에서 나는 일종의 민중 시인”이라고 자조했다.

그는 ‘왕따’의 이유로 자신의 ‘순수문학’ 지향을 꼽았다. 우선 민중문학 계열이 ‘어용’으로 몰아붙인 박목월 시인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등단했고, 박 시인이 회장으로 있던 한국시인협회 간사를 지냈으며, 또 김수영과의 문학논쟁으로 민중문학으로부터 무차별 비판을 받은 이어령과 가깝게 지내는 등 “그(순수문학) 인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던 내가 그들에게 곱게 보일 리는 없을 터”라는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나는 문학이 원래 정치의 도구는 아니며 시대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나는 문학이란 원래 정치의 도구라고 주장하는 민중문학의 일원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오 시인은 주장한다.



그는 20여년의 서울대 봉직 시절도 “고독했다”고 되돌아 보았다. 오 시인에 따르면, ‘순수학문이 소외되고 정치 우선주의가 전횡’했던 그 시절은 ‘교수의 가르침보다 운동권 선배의 말이 더 권위가 있었으며, 운동권·좌파·주사파가 선정한 독서목록 이외에 다른 어떤 책도 읽기를 거부’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현대문학 강의 역시 그 추세를 따라 서구에서는 오래 전에 한물간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마치 아카데믹하고 절대적인 방법론인양 활개를 쳤다. 그것들을 최상의 것처럼 옹호하는 교수들이 있었으며 그래야 인기도 얻고 학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오 시인은 “그럼에도 나는 대세를 거부하며 고집스럽게 순수문학과 시의 본질을 옹호하고 신비평이나 형식주의, 구조주의를 강의했으니 학내외에서 얼마나 눈에 든 가시같이 보였으랴”라고 되물으며 “지금 생각하면 따돌림까지는 모르겠으나 어용으로 몰리지 않은 것만큼은 천만다행”이라고 회고, 그가 학생은 물론 교수진으로부터도 달갑지 않은 존재로 대접받았음을 짐작하게 했다.

오 시인은 “나는 순수문학파이다”라고 다시 분명히 밝히면서 “이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라고 강조하고 있다.(엄주엽기자)

07. 08. 09-10.

P.S. 문지와 창비쪽으로부터 왕따를 당했다고는 하지만 오 시인은 '문학사상' 같은 곳에서는 언제나 융숭한 대접을 받아왔다. 20년전 지난 1987년 문학사상사에서 제정한 소월시문학상의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된 이도 바로 오세영 시인이었다(나는 수상시집을 갖고 있다). 그때 수상작인 '그릇1'을 옮겨놓는다. 아마도 시인이 생각하는 '순수시'의 한 전형이겠다('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이란 구절이 인상적이군)...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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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9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09 22:56   좋아요 0 | URL
연유는 문학사상을 참조해시길.^^

philocinema 2007-08-09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시인의 “이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동감합니다.
모든 시인이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참여시든 순수시든 그 선택의 자유는 시인 내부로부터의 요청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사회적 상황에의해 참여시가 강요된다면 "자유"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닐까요?

로쟈 2007-08-09 23:04   좋아요 0 | URL
옳다/그르다와 무관하게 각기 다른 문학적 입장이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로선 순수문학론자들 역시 참여문학론자들 이상으로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지라(무관심은 관심을 배제하는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이니까요. '순수시단'이란 말부터도 그렇고). 오시인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순수/참여의 이분법이 서로에 대한 알리바이만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요컨대 결과적으론 둘이 공모적이라는 것이죠)...

philocinema 2007-08-10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시를 쓰는 시인 내부의 요청이 "정치적"이라는 로쟈님의 말씀이 제겐 신선하군요.
순수와 참여는 그러니까 "적대적 공범자" 관계라 볼 수 있겠군요!

로쟈 2007-08-10 10:34   좋아요 0 | URL
이 세상에 '옛애인'이란 없는 것처럼 '순수시'란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시들이 있는 것이죠...

philocinema 2007-08-10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바라보는 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로쟈 2007-08-10 14:58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기인 2007-08-10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엇; '옛애인'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요? ㅎㅎ 궁금하네요 ^^;;;

로쟈 2007-08-11 00:32   좋아요 0 | URL
따로 페이퍼를 만들었습니다.^^
 

현재로선 문단의 최연소 비평가 허윤진씨의 첫 비평집이 나왔다. 언젠가 한 모임에서 안면을 튼 적은 있지만 나는 이 작은 체구에 여려 보이는 비평가가 얼마나 큰 비평적 야심을 품고 있는지는 미처 몰랐었다. 야심? '5시 57분'이란 타이틀부터 시작해서 비평집의 목차를 그냥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독자적 존재양식으로서의 '비평'에 대한 열망을 그녀가 얼마나 강하게 품고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것이 근대적 비평의 말기증상인지 21세기 비평의 초기징후인지는 세월이 더 지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여하튼 나는 그녀를 한국 비평계의 '시한폭탄'으로 간주해도 좋으리라고 본다(째깍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그리하여 조만간 뭐라도 터질 것이다. 그녀의 비평이 폭발하든, 우리의 관행적 비평이 폭발하든 뭐라도 터질 거라는 예감... 3분 남은 건가?.. 

경향신문(07. 08. 09) 허윤진씨 첫 평론집 ‘5시57분’…21세기 문학 21세기 방식으로 읽기

‘소노그램(소리에 대한 기록) 아카이브에서 아키비스트로 일하게 된 지도 어느덧 24,327,850초가 지났다…얼마 전에 아카이브를 체크하다가 나는 흥미로운 소노그램을 들었다. 동아시아공동체 EAC에 살고 있는 모델넘버 C18662126이 익명의 다수에게 전송한 내용이었다.’

Serial Number(일련번호) 6002(2006년산)로 분류된 이 파일에서 흘러나온 내용은 한유주 소설집 ‘달로’와 김애란 소설집 ‘달려라 아비’의 인용문들이다. 문학평론가 허윤진씨(27)의 첫 평론집 ‘5시57분’(문학과지성사)은 이처럼 특이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한유주와 김애란의 소설에는 근대소설의 독법으로는 잡히지 않는 잉여가 존재하는데 눈으로 읽기보다 소리 내서 읽을 때 제대로 감상할 수 있고, 나아가 (음독하는)시와 (묵독하는)소설이라는 장르 구분은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평론집은 21세기 문학을 21세기적인 방식으로 읽어낸다. 조연호의 시를 분석한 ‘대화의 퍼즐, 흩어진’에서는 각각 번호를 단 조각글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0부터 23까지를 맞춰가며 읽어도 되지만 23, 11, 1, 3, 19의 순으로 읽어도 마지막에는 그림이 드러난다. 이는 시인 조연호의 방식이기도 하다. 사전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 전유한 이준규의 시에 대해 말하면서 한 문단을 5페이지에 걸쳐 끊지 않고 쓴 부분(사전이란 기표의 끊임없는 미끄러짐이다), 김민정·유형진·이민하의 작품집에 대한 글은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장(chapter) 대신 차원이동이 가능한 지도(map)로 구성한 것도 특이하다.

“새로운 한국 문학에 대해 선조성(linearity)이 무화됐다, 중심이 없다, 주체가 분열됐다고 말하면서도 비평의 목소리는 여전히 선조적이고 근대적인 데 대해 모순을 느꼈어요. 똑같은 길을 갈 수는 없었습니다. 또 고전에서의 시서화(詩書화)처럼 장르가 통합된 방식이나 요즘 무용·연극·음악 등이 보여주는 장르 넘나들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허씨가 생각하는 비평은 작품의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고 거기에 이르는 길로 독자를 안내하는 게 아니다. 텍스트를 인용하기는 하지만 비평 자체가 완결된 작품이다. 평론집의 한 부분에서 그는 “타자적인 요소들이 내합한 채로 발설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말을 더듬다가 결국 자기 파괴의 현장으로 가서 자기의 주검까지도 확인하고 돌아오는 과정이 비평이어야 한다”는 자의식을 드러낸다.

그가 좋아하는 작품은 아무래도 동시대 작가들의 것이다. 소설가 한유주·김애란·편혜영·김숨, 시인 황병승·이준규·조연호·김경주 등을 즐겨 다룬다. 김행숙·이장욱·김경인·김중일 등의 시인, 김미월·황정은 등의 소설가도 향후 분석하고 싶은 작가로 꼽았다. 이들과는 세대적 특성을 공유한다. ‘문자 메시지에 답을 안 해줄 때 상처 받는 세대’이자 싸울 대상은 없으나 제도적 억압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불안과 무력감에 시달리는 세대의 문학이다. 여성평론가라는 정체성 때문에 여성주의에도 관심이 많지만 굳이 여성작가의 작품보다는 황병승과 최하연의 시에서 성별을 거스르는 여성적 측면을 읽어낸다.

허씨의 글들은 감성도 번뜩이지만 문학이론, 매체이론, 영화·만화·음악 등 다른 장르에 대한 지식을 종횡무진 오간다. 그러나 비평적 권위는 사양한다. “평론가 역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 방식으로 텍스트와 대화를 나눈다”며 “세상에는 문학작품을 읽는 수천가지 방식이 존재하고 그 한 방식으로서의 내 글 역시 모호한 다양성으로 독자들의 해석에 열려있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는 자기 평론의 전범을 작고한 평론가 김현에게서 발견했고, 그의 책을 읽은 대학신입생 시절부터 평론가를 꿈꾸었다.

우리 문단의 최연소 평론가인 그는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던 2003년 초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평론부문에 당선돼 등단했다. 현재 서강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복도훈·이수형·신형철·차미령씨 등 또래 평론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평론집을 묶었다. 조만간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소속 방문연구원으로 1년간 공부하기 위해 출국한다.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 그에게 향후 계획을 물었다. “이번 첫 평론집에서도 청탁을 받은 글은 빼고 제가 쓰고 싶었던 글만 넣었습니다. 그러나 전체가 이어진 글은 아닙니다. 앞으로는 정치·경제·사회·예술적으로 중요한 주제에 대해 제가 읽었던 텍스트를 인용해 쓰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책에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달아 완결성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제목의 의미에 대해 “고통스러운 꿈보다 현실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기 직전의 시간”이라고 설명했다.(글 한윤정기자)

07. 0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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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8-09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읽기 전까진 남잔 줄 알았어요.

로쟈 2007-08-10 10:50   좋아요 0 | URL
이름이 그런가요, 아님 인상이? 혹은 문체?

심술 2007-08-10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에 나온 얼굴이 남자같았어요.
 

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 때문에 자연스레 떠올린 책은 토머스 소웰의 <비전의 충돌>(이카루스미디어, 2006)이다. 작년 3월초에 '최근에 나온 책들'의 하나로 <비전의 충돌>을 꼽으면서 내가 떠올린 책이 <본성과 양육>이었기 때문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830562). 서평거리가 될 만한 책으로 전부터 염두에 두고는 있었는데, 오늘에야 책을 손에 넣었다. 한 신간서적을 구하러 서점에 들렀다가 아직 입고가 안 되었다기에 잠시 두리번거리다 들고 나온 게 바로 소웰의 책이었던 것. 언론 리뷰들을 미리 훑어보다가 그 중 가장 긴 것을 옮겨놓는다.

프로메테우스(06. 02. 22) 인간과 세계를 보는 두 시각의 차이

최근 『비전의 충돌』이라는 새 책이 나왔다. 원제는 A Conflict of Visions고 부제는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다. Thomas Sowell이 2002년에 발표한 것으로 채계병이 번역했고 이카루스미디어에서 2월 15일 출간했다.

‘문명의 충돌’의 아류작인가, 비전이 함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하는 궁금함을 유발시키는 책 제목이었다. 저자 토머스 소웰은 현재 스탠포드 대학 교수다. “그는 고전 경제 이론에서 사법적 행동주의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광범위한 분야의 주제에 대한 많은 논문과 에세이는 물론 9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책날개에는 40여권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느 게 사실인지 모르겠다. 그는 “미국의 학자 두뇌집단의 한 명으로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3기에 걸친 미국 행정부의 자문을 맡았었다. 「포천」, 「포브스」, 「월 스트리트 저널」 등 150개 이상의 신문사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고 한다.

책 표지의 광고로 “랜덤 하우스가 조사한 미국 독자가 뽑은 논픽션 부문 20세기 명저”, “소웰은 공정하고 분명한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뉴욕타임즈)”,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한 학자가 정치투쟁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에 대한 연구에 잊혀지지 않을 기념비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토머스 소웰은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도 환영받는 저자이다(Ingram)”가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마르크스주의자가 환영했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서문’으로 넘어간다.

인간 본성에 대한 두 개의 시각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책에서의 ‘비전’은 시각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시각에 따라 각 사상가들의 주장과 정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소웰이 제시하는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은 성악설(혹은 성오설)과 성선설로 이해할 수 있다. 소웰은 서양의 대표적 사상가들을 이러한 기준에 따라 분류한다.

소웰은 서문에서 “우리 모두는 비전을 갖고 있다. 비전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소리 없이 결정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와 ‘비전’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이해관계의 갈등은 단기에만 영향을 미치지만 비전의 충돌은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제 비전이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 제1부 '비전은 어떻게 드러나는가?'로 넘어간다.

제1장 제목은 '비전은 사고방식을 결정한다'이다. 소웰은 "비전은 논리나 사실에 기초한 검증에 활용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육감이나 '본능적 느낌'과 같은 것이다. 논리가 사실에 기초한 검증은 비전이 원료를 제공한 후에나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육감과 느낌이라, 다소 실망스럽지만 더 들어보기로 한다. “특정 비전- 혹은 특정 비전의 충돌 -은 결정이 내려지는 장소의 분위기를 지배할 수 있다. 역사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권력자들에게 조언을 속삭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사고의 흐름에 기여하는 것이다”고 한다.

‘스미스’파와 ‘고드윈’파로 나누다
제2장 제목은 '아담 스미스의 제약적 비전과 윌리엄 고드윈의 무제약적 비전'이다. 2장을 읽으면서 이 책이 생각보다 흥미로운 책이라고 느끼게 됐다. 학적 깊이나 구체적인 논증은 약하지만 수많은 사상가들의 생각을 넘나들며 크게 스미스파와 고드윈파로 나누어 사상가들의 집합을 제시하는 부분들이 재밌다.

“사회에 대한 비전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기본 개념에서 차이가 난다”로 시작한다. 루소와 홉스의 인간관의 차이를 거론한다. 소웰은 “서로 다른 관점에 기초해 자신들의 분명한 철학, 정치, 혹은 사회 이론들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인간의 도덕과 정신의 본질에 대해 아주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에 지식과 제도에 대한 그들 각각의 개념 또한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자로 유명해지기 거의 20년 전인 1759년, 철학자로서 스미스는 자신의 『도덕적 감정에 대한 이론』”에서 가정이지만 중국의 모든 주민이 지진으로 사라져버린 사건과 자기의 새끼손가락을 잃었을 때를 비교한다(*<도덕감정론>으로 번역돼 있다). “스미스는 도덕철학 교수였지만 그의 사고 과정은 이미 경제학자의 것이었다”고 한다. 소웰은 에드먼드 버크에 이어 알렉산더 해밀턴도 스미스와 같은 ‘제약적 비전’ 입장이라고 소개한다. 제도의 결점은 그 제도를 만든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도덕’적 문제로 해결하기보다 “일련의 ‘균형’적인 도덕적 인센티브 체계”를 중시한다. 그런 관점은 『국부론』으로 이어진다.

반면 ‘무제약적 비전’으로 윌리엄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에 관한 고찰』을 거론한다. “아담 스미스의 인간관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 책이다. “아담 스미스가 인센티브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사회·도덕적으로 유익한 행동을 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윌리엄 고드윈은 인간의 오성과 기질로 인간은 의도적으로 사회에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인간의 이기심은 ‘본성’인가, ‘조장’된 것인가?
“인간의 이기심을 주어진 것으로 보는 스미스와 달리 고드윈은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되는 바로 그 보상 시스템에 의해 인간의 이기심이 조장되는 것으로 보았다”며 심리적 혹은 경제적 보상 때문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드윈의 비전은 “보상에 대한 기대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정신을 개선시키는 데 해가 된다”는 것이다. 당근과 채찍으로 통제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마르키 드 콩도르세도 무제약적 비전파다. 수학자로서 콩도르세는 “완벽해질 수 있는 능력을 수학적 극한에 대한 무한히 점근선적인 접근으로 인식했다.” 고드윈은 의도적으로 유익하게 하는 것을 ‘미덕’, 의도적으로 해를 입히는 것을 ‘악’, 우연히 해를 입히는 것을 ‘태만’으로 불렀는데 우연하게 유익하게 하는 경우를 뺐다. “아담 스미스의 비전 전체에서 중심적인 것이 고드윈에게 빠져 있는 항목이다.”

스미스는 자본가들이 사회에 대해 산출하는 경제적 이익은 “자본가의 의도는 아니다”며 스미스는 자본가의 의도를 “비열한 탐욕”으로 특징지었다. 자본가들은 “즐거움이나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서조차 함께 만나는 일이 거의 없지만” 그들의 “대화는 사회에 대한 음모나 가격을 올리기 위한 어떤 계략으로 끝을 맺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자본가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던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의 수호성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밀의 절충, 마르크스의 복합, 제퍼슨의 전향
루소는 인간의 본성이 사회 제도 때문에 편협해지고 부패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현재의 비열한 교육과 비참한 사회 제도들이” 사람들이 일반적 행복을 누리는 데 “유일하게 진정한 방해물”이라고 한다. 소웰은 밀을 절충주의라고 보지만 이 부분만큼은 무제약적 비전이라고 한다. 그와 반대로 맬서스는 인간의 고통이 “인간 본성의 고유한 법칙 때문이며 인간이 만든 모든 규칙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소웰은 “제약적 비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들 중의 하나”로 맬서스를 꼽는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과거의 상당 부분에 대해 제약적인 비전을 적용하고 미래의 상당 부분에 대해 무제약적인 비전을 적용하고 있는 독특한 복합적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소웰의 책에서 이 사상가들은 마치 한 자리에 모여 토론하듯이 상반되는 주장들을 마구 쏟아낸다. 어수선하지만 싸움 구경은 재밌다.

“제약적 비전을 가진 사람들과 무제약적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의 큰 악- 예를 들면 전쟁, 가난 그리고 범죄 -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며 무제약적 비전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들의 특별한 원인을 찾고 제약적 비전을 믿는 사람들은 평화, 부 혹은 법을 준수하는 사회의 특별한 원인들을 찾는다. 아담 스미스는 “사회의 평화와 질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한다.

18세기에 두 차례의 대혁명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일어났는데 전자는 무제약적이고 후자는 제약적인 다른 비전을 적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로베스피에르는 해결을 추구했고 해밀턴은 균형을 추구했다. 그런데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으나 희생이 늘어나자 반대하게 된다. 소웰이 밀과 마르크스를 복합파로 분류했는데 제퍼슨은 전향파다.

이백 년간 계속된 이데올로기 갈등
“어떤 사람들은 제약적 비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또 다른 사람들은 무제약적 비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 본성과 사회 인과율에 대한 어떤 분명한 핵심 가정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으로 모든 사회 이론가들을 구분할 수 없지만 이 같은 분류를 통해 중요한 많은 인물들과 지난 이백 년간 계속되어 온 이데올로기 갈등의 논점을 분명하게 부각시킬 수는 있다.”

무제약적 비전파는 18세기의 고드윈, 루소, 볼테르, 콩도르세, 토머스 페인, 홀바흐 그리고 19세기의 생 시몽, 로버트 오웬, 조지 버나드 쇼 이어 “20세기엔 정치학자인 해롤드 라스키, 경제학에서 솔스타인 베블렌과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그리고 법학에서 이론에선 로널드 드워킨, 실천에선 어를 워런으로 대표되는 사법적 행동주의 옹호자들과 같은 전 학파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약적 비전파는 “세계의 악을 개선하고 진보를 조장하기 위해 도덕적 전통, 시장 혹은 가족들과 같은 어떤 사회 과정의 시스템 특성들에 의존”한다. 제약적 비전파는 토머스 홉스, 스미스와 “에드먼드 버크와 『연방주의자의 보고서』 저자들, 법학의 올리버 웬델 홈즈, 경제학의 밀턴 프리드만, 그리고 일반 사회 이론에서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등이다.

존 스튜어트 밀과 칼 마르크스는 어느 한쪽으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중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전향하기도 한다. 5장에서 ‘복합적 비전들’로 마르크스주의와 공리주의를 설명한다. 소웰은 그들이 어떤 “말을 했는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바로 특정 이론의 구조와 작용에 제약들이 내재되어 있는가 혹은 어느 정도나 내재되어 있는가 여부”가 기준이라고 한다.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이라는 이분법은 인간의 고유한 한계가 비전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다루어지고 있느냐 여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현실이다. “비전의 차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들이 충돌하게 된다.”(오창엽 기자) 

07.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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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marx 2007-08-14 02:24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니 몹시 민망하군요. 당시 인터넷신문 기자로서 매일 기사를 작성하는데, 신문사로 책들이 왔습니다. 영어공부법과 처세술 등의 책들이 많지만 가끔 신간인문서적이 출간 한달쯤 전에 오곤 했습니다. [비전의 충돌]은 개인적으로는 그리 호감가는 책이 아니었으나 그 주제, 저자의 주장 또 그 안에 언급되는 무수한 인물들에 대한 논평과 정보를 볼 때 좀더 폭넓은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읽힐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압축하는 서평이 아니라 먼저 읽은 독자로서 그 내용을 음미했던 것이지요. 제 생각은 최소한으로만 포함해서요.
많은 언론사의 책담당기자들이 출판사의 보도자료를 요약해서 기사를 씁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기자가 보도자료 압축한 걸 베끼기도 합니다. 사실 다 읽고 쓰나 홍보글을 표절하나 비슷하지요. 반면 인터넷신문의 경우 분량을 길게 할 수 있으니 전문서평기자나 객원기자가 있다면 보다 성실한 책소개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출판사 쪽 분이 그러더군요. 책을 읽고 기사를 써서 고맙다고. 해당 책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든 안 하든 기사를 쓰려면 책을 읽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현실이 부박하니 당연한 게 특이한 게 되버리는 거겠지요.
훗날 이렇게 갈무리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잠을 줄여서라도 더 공을 들였어야 하는데 말이죠.

로쟈 2007-08-14 09:00   좋아요 0 | URL
찾아본 서평들 중에는 가장 길고, 그래서 가장 유익한 서평이었습니다. 민망해하진 마시길.^^

푸하 2007-08-14 02:46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읽고 이를 음미하고 또 음미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중요한 거 같아요.

로쟈 2007-08-14 09:00   좋아요 0 | URL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여건도요.^^
 

한 일간지에 도킨스 인터뷰기사가 떴길래 읽어보다가 아예 '도킨스'를 다시 검색해보았다. 그 중 눈에 띄는 기사 둘을 옮겨놓는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란 칼럼은 같은 제목을 가진 러셀의 책을 바로 떠올리게 하는데 나는 아마도 대학 1-2학년때쯤 읽지 않았나 싶다(책은 다른 제목으로 출간됐었다). 나는 종교가 가진 '위안'의 기능은 무시할 수 없다고 믿는 편이지만(알다시피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연약하고 나약하다) '설명'의 기능은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한다(그것이 신화처럼 '이야기'로서의 가치를 갖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 

칼럼에서 내가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대목: "그러면 기독교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교회가 없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믿는 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럴 때 교회는 긴장감을 회복해 성찰하게 될 것이고, 사회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그 고민은 너무 늦지 않게 시작되었으면 한다.  

 

경향신문(07. 08. 02)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내가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나는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가. 세상 만물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사슬을 따라가면 최초의 원인, 하나님이 있다고 한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하고, 어떤 것이 원인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세상도 하나님처럼 원인없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하므로 하나님 제1원인론은 아무런 타당성이 없다. 이 논리는, 세계는 코끼리 등에 얹혀있고 그 코끼리는 거북이 등에 얹혀있다는 힌두교도의 관점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일정한 목적에 맞게 설계했다는 목적론을 살펴보자. 이것은 토끼의 꼬리가 흰 것은 총쏘기에 좋도록 하기 위해서라든가, 코는 안경쓰기에 알맞게 만들어졌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둘째, 나는 예수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도덕적 선을 행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왜 최선의 인간·최고의 현자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예수는 매우 중대한 도덕적 결함을 갖고 있다. 예수는 자기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에게 보복하고 분노한다. 소크라테스에게서는 그런 태도를 찾아볼 수 없는데 그쪽이 훨신 더 성자답다.

예수는 무화과가 열리는 철도 아닌데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고 무화과를 저주해 시들어버리게 한다. 나는 예수가 지혜로 보나 도덕성으로 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다른 사람만큼 높은 위치에 있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기독교에 매달리지 않으면 사람이 사악해진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기독교에 매달려온 사람 대부분이 극악했다. 어떤 시대든 종교가 극렬할수록, 독단적인 믿음이 깊을수록 잔인성도 더 커졌고 사태도 더 악화되었다. 형법의 개선, 전쟁 감소, 유색인종에 대한 처우 개선, 노예제도 완화를 포함해 이 세계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도덕적 발전이 이루어질 때마다 세계적 조직인 교회세력의 끈질긴 반대에 부딪히지 않은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교회로 조직된 기독교는 이 세계의 도덕적 발전에 가장 큰 적이 되어 왔다.



-종교 극렬할수록 잔인성 커져-
이상은 버트런드 러셀이 1927년 3월6일 영국 베터시읍 공회당에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내용이다. 이 강연이 80년 지난 낡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최근 발간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어 보아도 좋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러셀이나 도킨스가 없다. 이유가 있다. 한국 기독교는 국회를 움직여 사학법을 다시 개정하게 만드는 막강한 학원재벌이며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무자르듯 잘라내는 무자비한 대자본이자, 정권교체를 추구하는 강력한 정당이고, 신을 팔아 거부가 되는 방법을 아는 탁월한 상인이며, 그 부가 혈맥 속에서 자자손손 흘러가게 할 수 있는 욕심 많은 봉건적인 세습권력이다. 누가 이 세속의 지배자에게 도전할 것인가.



물론 기독교 비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비리는 일부의 일탈로 규정된다. 그리고 그런 비판을 허용받는 대가로 한국 기독교 전체를 옹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극소수만 문제일 뿐 한국 기독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정말 쓸모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비판은 그만큼 기독교가 건강하다는 증거로 이용됨으로써 기독교 전체를 살찌우는 영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21일 부산 서면 지하상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노숙자를 위한 무료 식당인 민들레 국수집을 운영하는 두타 스님은 이날도 식당운영비 마련을 위해 탁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예수천국’이라고 쓰인 조끼를 입고 거리 전도를 하던 남자가 한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이 스님의 머리를 흔들며 회개하라고 ‘가르침’을 주었다. 그런데 이 스님은 너그럽게도 극소수 기독교인의 행위라며 넘어갔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의 본질이다. 독선과 배타성, 다른 문화에 대한 무례, 가히 폭력 수준인 선교방식과 호전성은 바로 한국 기독교의 특질이다.

-사회·교회 관계 진지한 고민을-
그러면 기독교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교회가 없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믿는 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럴 때 교회는 긴장감을 회복해 성찰하게 될 것이고, 사회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두려움을 잊을 만큼 크지 않고, 세속의 권력을 쥐고 흔들 만큼 오만하지 않으며, 남의 생각을 쉽게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절제를 모르는 한국 기독교는 너무 크고 너무 강하고, 너무 많이 가졌다.(이대근/정치·국제에디터)

조선일보(07. 07. 28) 당신이 믿는 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신(神)’이 컴백했다. 20세기 들어 최소한 유럽과 미국에서 신의 존재는 당대의 가장 화끈한 논쟁거리들 목록에 끼지 못했다. 그게 변했다. 2007년 7월 현재, 신은 초미의 관심사다. 저명한 과학자와 스타 논객들이 과감하고 대담하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책을 속속 출간해 논쟁에 불을 붙이고 있다. 변화의 배후에 9·11 테러가 있다. 2001년 9월 11일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를 몰고 돌진한 뒤 지식사회의 판도가 변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66) 영국 옥스포드 대학 교수가 대표 선수다. 당신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면, 막 한국판이 나온 도킨스의 신간 ‘만들어진 신(원제 The God Delusion·김영사)’을 펼쳐 들기 전에 심호흡부터 할 일이다.



도킨스는 서문에서부터 다짜고짜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권한다. 도킨스에게 ‘종교 없는 세상’은 “자살 폭파범도, ‘9·11’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보스니아 대량 학살도, 명예 살인도,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 입고 TV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 전도사도 없는 세상”이다.

그동안 도킨스는 “모든 동물과 식물은 유전자가 자기를 복제해 후대에 퍼뜨리기 위해 일시적으로 이용하고 버리는 ‘탈 것(vehicle)’에 불과하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자신이 “최선의 사례는 무시하고 최악의 사례만 뽑아 종교를 난타했다”는 비판에 이렇게 응수한다.

“세심하고 미묘한 종교가 주류라면 세계는 확실히 더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고 나는 다른 책을 썼을 것이다. 우울한 사실은 이런 유형의 절제되고 온건하고 개혁적인 종교가 소수파라는 것이다. 전세계 신자들의 대다수는 제리 팔웰 목사, 오사마 빈 라덴, 아야톨라 호메이니 같은 지도자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것과 너무나도 유사한 종교를 믿는다.”(580쪽)



도킨스 뿐 아니다. 도킨스가 작년 9월 런던에서 ‘만들어진 신’을 출간한 데 이어, 지난 2월 미국의 대표적인 과학 철학자인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65) 터프츠 대학 교수가 ‘마법 깨뜨리기(원제 Breaking the Spell·동녁 사이언스 근간 예정)’를 냈다. 5월에는 영국과 미국을 넘나들며 활동해온 논객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58)가 ‘신은 위대하지 않다(원제 God Is Not Great·국내 출판 일정 미정)’를 들고 나왔다.



이들의 주장에 ‘찬동했느냐, 분개했느냐’는 별개로 치고, 대중의 반응은 일단 격렬했다. 도킨스와 히친스의 책은 단숨에 미국 뉴욕타임스지(紙)와 영국 더타임스지(紙)가 집계한 베스트셀러 목록 10권에 들었다. 종교학과 신경학을 전공한 미국 저술가 샘 해리스(Sam Harris·40)가 지난 2004년에 낸 스테디 셀러 ‘종교의 종말(원제 The End of Faith·한언)’도 이 두 권과 함께 장기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종교는 사악하다”고 선명하고 맹렬하게 외친다는 점에서, 이들은 신을 개인적 선택의 영역에 묶어뒀던 전(前) 세대 지식인들과 크게 다르다. 가령 도킨스에게 신은 절대자가 아니라 “존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가설’에 불과”하다. 그는 또 알 카에다나 탈레반 같은 극단적인 원리주의자들뿐 아니라, “신앙 그 자체를 반대해야 한다”고 외친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모두 “아이들에게 의문을 품지 않는 믿음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며, “온건한 종교의 가르침은 비록 그 자체로는 극단적이지 않아도 극단주의로 이어지는 공개 초청장이 된다”고 주장한다(467~468쪽).

데닛, 히친스, 해리스도 도킨스 못지 않게 공격적이다. 데닛에게 종교는 신성한 숭앙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한 문화적 장치에 불과하다. 히친스는 자기 책에 ‘종교가 어떻게 모든 것에 해를 끼치는가(How Religion Poisons Everything)’라는 부제를 달았다. 히친스는 나치의 만행을 묵인하고 방조한 로마 교황청 등을 예로 들며, “종교가 없어야 세상이 좋아진다”고 주장한다. 해리스는 “‘야훼’나 ‘알라’ 같은 말이 ‘아폴로’가 간 길을 걷지 않으면 이 세계는 파멸을 맞게 된다”고 주장한다.

유럽과 미국의 일급 지식인들이 이처럼 공격적인 무신론을 외치게 된 배경에는 무엇보다 9·11 테러가 있다. 해리스는 ‘종교의 종말’에서 “전쟁 기술의 진보로 우리의 종교적 믿음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게 됐다”고 썼다(17쪽). “우리 이웃들은 지금 생화학 무기와 핵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서구에서 종교는 넥타이 색깔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경험과 소신과 안목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혹은 배척할 수 있는 선택 사항이었다. 타인의 종교에 대한 관용은 역설적으로 종교에 대한 논쟁 자체를 금기로 만들었다고 해리스는 주장한다. 해리스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은 신의 가르침을 ‘곡해’했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분석을 공격한다. 그가 보기에 알 카에다와 탈레반의 문제점은 신의 가르침을 경전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불거진 것이다. 해리스의 책이 나왔을 때, 도킨스는 영국 가디언지(紙)에 쓴 서평을, “해리스의 책을 읽고 잠에서 깨라(Read Harris and wake up)”는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신이 논쟁의 복판으로 컴백한 또 다른 배경은 90년대 이후 미국에서 기독교가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전미 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는 2005년 현재 미국 기독교 신자가 1억6587만8323명이라고 집계했다. 2004년보다 240만 명 늘어난 숫자다. 교세 확장을 주도한 것은 텍사스주(州)를 중심으로 한 미국 남부 침례교회들이다. 다른 종교에 개방적이고 교리 해석에 유연한 주류 기독교는 점점 신도 숫자가 줄어든 반면, 전통적으로 성경 해석에 보수적인 남부 교회들은 빠르게 덩치가 불었다.



종교적 보수주의로의 회귀는 전통적인 창조론에 과학 연구 성과를 접목한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에 힘을 실어줬다. 생화학자 마이클 베히(Michael J. Behe)가 쓴 ‘다윈의 블랙박스(원제 Darwin’s Blackbox·풀빛)’가 대표적이다. 다윈이 주장한 자연선택과 점진적인 진화에 의해서는 도저히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형태의 생명이 출현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로써 한때 다윈주의자들의 승리로 굳어지는 듯 했던 ‘창조론’과 ‘진화론’의 오랜 싸움에 다시 한번 불이 붙었다.(김수혜 기자)

07. 08. 07.

P.S. 기사 덕분에 '김수혜'란 이름의 기자를 기억하게 됐다. <만들어진 신> 때문에 논쟁의 중심에 선 리처드 도킨스와의 인터뷰(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6/2007080601354.html)까지 성사시킨 걸 보면 기자로서의 '근성'을 높이 살 만하다. 비록 "이로써 한때 다윈주의자들의 승리로 굳어지는 듯 했던 ‘창조론’과 ‘진화론’의 오랜 싸움에 다시 한번 불이 붙었다."란 마지막 멘트는 넌센스라고 생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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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7-08-07 13:56   좋아요 0 | URL
너무 재미있는 글이네요. 러셀의 글은 학창시절 영어 독해 공부할 때 -_- 읽었던 기억도 나고;;; 무엇보다 '타인의 종교에 대한 관용은 역설적으로 종교에 대한 논쟁 자체를 금기로 만들었다' 완전 동감합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주변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려면 정치, 종교 얘기는 절대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하죠.

로쟈 2007-08-07 16:36   좋아요 0 | URL
제 주변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지만(하기야 인구의 1/3이라니) 여전히 (거짓)진화론 vs (참된)창조론을 반복하는 목사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걸 보면 '부조리'란 말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부조리'란 적어도 합리적인 세계에서나 의미를 갖는 말이기에...

심술 2007-08-07 17:56   좋아요 0 | URL
이대근, 김수혜. 이번 글 쓴 두 분들 이름은 영화배우 이름이랑 똑같거나 닮았군요.

로쟈 2007-08-07 18:38   좋아요 0 | URL
네, 덕분에 잊어먹기 힘든 이름들입니다...

퍼그 2007-08-07 20:40   좋아요 0 | URL
'설명'이 아니라 '신화/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하면 '위안'의 기능이 약해지지 않을까요? 주변 사람들을 보면 이 둘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종종 느끼게 됩니다...

로쟈 2007-08-07 22:52   좋아요 0 | URL
도킨스가 열거하고 있는 건 설명, 훈계, 위로, 영감, 네 가집니다. 거기서 설명과 위로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설명이 논리와 관련된 것이라면 위로는 정서와 연결되는 것이죠. 가령, 내가 호감을 갖는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호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치한 비약이자 폭력이죠. 어떤 시구절이 내게 위안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처럼 어떤 성경구절도 그럴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치니 2007-08-10 11:00   좋아요 0 | URL
찜 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나중에도 다시 읽고 싶어서. ^-^

어부 2007-08-10 17:32   좋아요 0 | URL
저도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 방식이 도킨스식이라면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도킨스야말로 과학주의라는 종교의 또다른 광신도로 보여지는군요. 과학이 다른 모든 언어들을 규정하는 메타언어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그런 메타언어의 발화자의 위치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도착적 태도야 말로 얼마나 광신도의 그것과 같은지.. 지젝 아저씨 말처럼 기독교가 가지는 '상징적 실천의 사회적 공간을 지배하는 논리'에 대한 성찰 없이 종교의 오류성을 침튀기며 설파하는 태도는 또다른 환상매달리기처럼 보이네요

어부 2007-08-10 17:40   좋아요 0 | URL
신이 없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신을 믿는 자들에게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신은 의미가 없는 것이겠죠. 그것은 부재하는 효과로서 우리에게 반드시 귀환할 테니. 신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에 나는 속지 않는 자이다. 라고 말하는 도킨스보다 '속지 않는 자는 방황한다.' 고 말하는 라캉에게 더 큰 지혜를 배운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저는.

로쟈 2007-08-10 18:04   좋아요 0 | URL
"신이 없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라면 도킨스의 목표는 초과달성인데요(더불어 그의 책은 잉여적이고요)! '누구나'에 포함되지 않는 다수의 신자들만 처리하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