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에 잠시 들렀다가 '노 땡큐' 연재를 몇 개 읽어봤다. 그러고 보니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연재가 없어지고 들어선 게 이 연재인 모양이다(그냥 내 추측이 그렇다). 김규항의 글이 격주로 연재되고 있기에 그런 인상을 갖게 하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착각이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는 씨네21의 꼭지이니). 몇 달 전 칼럼이긴 한데, '공부의 내력'(http://h21.hani.co.kr/section-021031000/2007/06/021031000200706070663010.html)을 옮겨놓는다(장정일의 <공부>도 떠올리게 해주는군).

안 그래도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에게 논술을 가르쳐야 하느냐로 잠시 옥신각신 하던 차였다. 아이까지도 '논술 강사'도 했다는 아빠가 봐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는 눈치였다. 이럴 땐 머리가 더 커야 논술도 하는 거야, 란 내 원칙이 '고집'으로 전락하고 만다(나는 그저 아이가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하지만, 같이 놀아주지도 못하면서 그러란 소리를 입밖에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래도 '어린이 교육'은 내 적성이 아닌 듯하다.

김규항의 칼럼에는 예의 김건/김단과의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말미에는 (그가 늘 자부심을 토로해온) 80년 세대의 자성을 적고 있어서 이채롭다. "지금 아이들의 부모, 즉 우리는 청년 시절에 공부란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 ‘진짜 공부’를 하기 위해 몰래 동아리를 지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책들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그 공부를 통해 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공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이란 나르시시즘은 여전하지만...  

한겨레21(07. 06. 07) 공부의 내력

밥상에서 김건이 말했다. “빨리 5학년이 되면 좋겠어.” “왜?” “역사 공부 하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 “응. 왕건이나 대조영 같은 거 너무 재미있어.” “그래, 역사는 재미있는 거야.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생각보다 재미없을 거야.” “왜?” “그건 말이야..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거든.” “역사가 아니라니?” 김건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본다. “역사가 뭐지?” “응, 옛날에 있었던 사건이나 전쟁 같은 거 아냐?” “큰 사건이나 전쟁만 역사는 아니야. 우리 집에도 역사가 있고 건이에게도 역사가 있지. 여기 부러졌던 일 기억하지?” “당연하지.”

무조건 열심히…

녀석은 세 살 때 어느 날 미끄럼틀에서 놀다 다리가 부러졌다. 아이가 자라면서 어디 한 번 부러지는 거야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 그게 사건이 된 건 그러고 울지도 않고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잠이 깨서 나오는 아이가 한쪽 다리를 짚지 못해 병원에 가보니 골절이라고 했다. 깁스를 하는 의사가 웃을 만큼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김건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작은 역사가 되었다.

“그게 몇 년 몇 월 며칠이었지?” “몰라.” “그럼 깁스한 병원은?” “몰라.” “의사 이름은?” “몰라, 아빤 기억해?” “아빠도 기억이 안 나.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날짜, 병원 이름, 의사 이름만 알아내선 그 사건에 대해 건이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한다면 어때?” “바보 같지.” “학교에선 그런 걸 역사라고 배워.” “정말?” “누나한테 물어봐.” “누나!” 김건은 제 누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나는 그의 누나가 5학년 첫 시험을 준비하면서 역사 때문에 힘들어하던 걸 떠올렸다. 부여의 첫 도읍지는 어디였는지, 두 번째 도읍지는 어디였는지 따위를 외우면서 말이다.(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동양의 전통적인 공부법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동양의 공부란 사람이 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지식과 깨우침이 담겼다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을 거듭 공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공부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동양의 공부는 지적 통찰을 체득하는 정신 수련이었다. 사방이 책으로 빼곡한 서양 학자의 서재와는 달리 동양의 학자 공부방에는 몇 권의 책만 있었다.

서양식 공부가 도입되고 아이들이 배우는 건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이 아니게 되고도 한참 동안 부모들은 동양식 공부법에 젖어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길 기대했고 요구했다. 대략 지금 아이들의 할아버지 세대까지 그랬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의 부모, 즉 우리는 청년 시절에 공부란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 ‘진짜 공부’를 하기 위해 몰래 동아리를 지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책들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그 공부를 통해 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공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우리는 어떤 공부를 강요하는가

그런 우리는 지금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하게 하는가? 우리는 오히려 공부에 대한 깨우침이 없었던 우리 부모들보다 더 한심하고 무지스럽게 아이들에게 역사 아닌 역사, 국어 아닌 국어, 수학 아닌 수학을 강요한다. 우리는 한술 더 떠 우리에게 난생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주었던 인문 사회과학 책들을 모조리 다이제스트판으로 달달 외우게 한다. ‘논술 필수 고전’이라 불리는 그 명단엔 심지어 <공산당선언>까지 들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아이들이 진짜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20여 년을 달달 볶는 동시에 그들이 입시에서 빠져나와 처음으로 지적 희열을 느끼기 위해 보존되어야 할 지적 감수성의 부위들마저 하나하나 불로 지져 영원한 지적 불감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게 이른바 부모가 된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매일같이 반복하는 교육적 실천이다. 그렇게 하루의 실천을 마친 우리는 인사동이나 신촌의 지적인 카페에 둘러앉아 지적인 얼굴로 “요즘 애들은 책을 안 읽어” “인문학의 위기는 인류의 위기야” 떠들어댄다. 아,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된 인간들인가?

07. 09. 18.

P.S. 공부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인생은 바꾼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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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18 22:42   좋아요 0 | URL
글 봐달라는 아이와 싫다는 아빠가의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얼마전 봤던 로쟈님의 사진과 아이의 사진을 떠올리며. :)

로쟈 2007-09-18 22:48   좋아요 0 | URL
글을 안 봐주는 건 아니고요.^^; 글쓰는 걸 도와주란 요구입니다...

2007-09-18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9-18 22:49   좋아요 0 | URL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고 구박을 받습니다.^^;

책읽는나무 2007-09-18 23:51   좋아요 0 | URL
아이가 정말로 공부란 것에 스스로 재미를 느껴 행했음 하는 욕구는 강하지만 그게 또 마음같이 느긋해지지가 않으니 가끔은 학습지를 풀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 정말로 정말로 미안해질때가 많습니다.더욱더 반성하게 만드는 페이퍼로군요..ㅡ.ㅡ;;

로쟈 2007-09-19 19:09   좋아요 0 | URL
원론적으론 인구 과밀 때문에 빚어지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자꾸 내모는 것이...

코스모폴리스 2007-09-19 08:44   좋아요 0 | URL
김규항의 글 가운데 동양의 공부법과 서양의 공부법에 대한 설명은 동의하기 어렵군요.

로쟈 2007-09-19 19:09   좋아요 0 | URL
단순화는 '논객'의 특징이죠...

biosculp 2007-09-19 11:32   좋아요 0 | URL
짧은 글에 대해 토다는 것은 뭐하지만 공부라는것이 주되게 책과 연관되어 있군요.
냇가에 가서 물고기 잡고, 여러 벌레들 잡고 애기하고 분류한다든지, 산에가 열매나 씨가 맺는 꽃과 나무에서 씨를 모은다든지,반쪽이 빠진. 뭔가 허전한 공부에 대한 생각이아닌가 합니다.

로쟈 2007-09-19 19:11   좋아요 0 | URL
공부의 제한된 용례는 칼럼에 국한된 건 아닌데요. 학과시간에 냇가에 가서 물고기 잡는 학교에 전국에 몇 될라구요...

2007-09-19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0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07-09-19 23:36   좋아요 0 | URL
김단양 사진 첨 보는데 딱 그 캐릭터 같습니다. 이쁘네요 ^^

로쟈 2007-09-20 01:10   좋아요 0 | URL
눈매가 닮은 거 같습니다...

lyh1999 2007-09-20 04:56   좋아요 0 | URL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는 씨네21에 들어가는 칼럼 제목인데요...^^

로쟈 2007-09-20 07:53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노자읽기 2007-09-20 12:46   좋아요 0 | URL
'지식'이란, 어쩌면 살아움직이는 사실들을 정리해 말린, 표본이나, 박제와 같다고도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면, 결국 우리도 박제가 되겠지요.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박제가 되는 일일 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7-09-20 14:21   좋아요 0 | URL
그런 문제제기도 가능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기본적인 입장은 '박제'라도 그게 어디냐는 것이죠. '살아움직이는 사실들' 곧 '생'은 그 자체로 자재하고 자족적인 것이서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