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 새 번역본들이 나온 김에 <신곡> 번역비평에 관한 예전의 기사를 다시 읽어보았다. 교수신문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1, 2권에는 아직 실리지 않았다(올 4월에 나온 2권에는 왜 빠졌을까?). 번역 비평의 필자가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번역본을 낸 김운찬 교수이다. 적어도 지적된 내용들은 교정돼 있겠다. 그러니까 아래 기사는 이번에 나온 김운찬본과 박상진본에 대한 평가는 다루고 있지 않다(그건 당분간은 독자의 몫인 듯싶다).

교수신문(06. 12. 26) 고전번역 비평_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57) 단테의 『신곡』 

아마 ‘신곡’ 처럼 번역자를 시험하고 힘들게 하는 작품은 드물 것이다. 가장 큰 이유로 상당한 분량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신곡’ 은 중세 유럽의 지식을 총체적으로 집약하고 있다. 수백 명에 달하는 등장인물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에피소드들, 전설, 고전 신화, 중세의 철학과 신학, 천문학과 지리 등에 대한 이해 없이 단테의 저승 여행을 뒤따라가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원본이든 번역본이든 대부분의 판본에는 많은 역주와 해설들이 덧붙여져 있다.

또한 ‘신곡’ 은 다양한 알레고리와 은유, 다의적인 표현들을 특징으로 한다. 거기에다 3행 연구(聯句), 각운, 11음절 시행(詩行) 등의 운문 형식과 음악성, 리듬까지 작품의 일부를 이룬다. 훌륭한 번역은 당연히 그 모든 것을 고려하고 최대한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쉽게도 우리 나라에는 그런 번역본이 아직 나와 있지 않다.

단테는 개화기에 이미 소개되기 시작하였으나 ‘신곡’의 완전한 번역본이 나온 것은 1950년대 후반으로 최민순 신부가 옮긴 판본(경향잡지사, 1957-59년)이다. 그 이전에 혹시 부분적이거나 전체적인 번역본이 나왔는지 필자로서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최민순의 번역본에서 저본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탈리아어 원본이 아니라 영어나 스페인어 번역본에서 중역하였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 후 1970년에 들어와서야 임명방의 번역본이 나왔고, 뒤이어 여러 가지 번역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거의 모든 세계문학 전집에 빠지지 않고 포함되었다. 대략 열거하더라도 유영(1972), 하병호(1974), 허인(1975), 이영숙(1976), 한형곤(1978), 강인웅(1977), 정인섭(1982), 문병선(1983), 최현(1988), 구자운(1991), 김의경(1991), 정노영(1993), 김문해(1997), 최현(1997), 유한준(1998) 등의 번역이 있는데, 출판 연도는 판본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때로는 한 번역자의 작업이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부분 번역의 저본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단테의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옮긴 것은 임명방, 허인, 한형곤의 번역뿐이다(*그러고 보니 나는 이 번역본들을 모두 갖고 있다). 유영이 10여 종의 영어 번역본과 이탈리아어 원본을 참조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나 여전히 모호하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일부 번역본들은 서로 비슷하거나 때로는 완전히 똑같은 경우도 있다. 가령 강인웅과 정인섭의 번역본은 분명히 번역자가 서로 다른데도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그 외에 번안 작품들도 많다. 유한준(1998), 김혜니(1999), 정미옥(2005)은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해 축약하여 번안하였다. 최요한(1994)은 아예 제목을 ‘소설 신곡’이라 붙였으며, 최근의 번안 작품으로 박상진(2005), 최승(2005)을 들 수 있다. 번역과 번안을 구별하는 잣대는 원본에 대한 충실함일 것이다. 번안은 원본을 임의적으로 줄이거나 덧붙임으로써 기본 골격만 유지하고 나머지 부분을 자의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물론 ‘신곡’ 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번역과 번안을 뚜렷하게 구별하기 어렵지만 간단한 기준이 하나 있다. 번안은 바로 원본의 시행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행의 숫자를 아예 표시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기본적인 요건을 무시하는 상당수의 번역본들은 번안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옮겼다고 해서 언제나 중역보다 뛰어난 것은 아니다. 최민순의 경우처럼 중역본이 오히려 원본에 충실한 경우도 있다. 거의 모든 번역본이 드러내는 문제점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우선 단테의 텍스트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하다. 번역에 앞서 해석의 단계에서 이미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신곡’ 을 읽고 어렵다고 말하는데, 원본이 어려운 탓도 있지만 대부분 번역자의 이해 부족이나 미숙함이  원인이다. 그 결과 두 번째 문제점으로 우리말의 가독성이 떨어진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이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최민순과 한형곤의 번역본이 무난한 편에 속한다. 최민순 역은 멋들어진 우리말 용어들과 함께 시인으로서 번역자의 모습을 보여주듯이 시적인 표현들이 돋보인다. 한형곤 역은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옮겼을 뿐만 아니라, 자세하고 풍부한 해설과 역주를 자랑하며 단테의 저승 구조를 보여주는 도해와 그림들까지 제공한다. 둘 다 비교적 원본에 충실한 번역이지만 이따금 가독성이 떨어지는 표현들이 눈에 띄는 것이 흠이다. 원본의 자구에 너무 충실하다 보니 우리말 표현이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번역본들의 경우 판본마다 차이가 있지만 번역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여러 번역본에서 공통적인 실수나 오류가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전의 번역본이 이후의 번역본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신곡’ 의 경우 그런 경향이 너무나도 뚜렷하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지적하자면 ‘지옥’ 21-22곡의 에피소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뜨겁게 끓어오르는 역청(瀝靑) 속에서 삶아지는 탐관오리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강둑에 있는 악마들이 고통을 가한다. 그런 악마들의 형벌 도구 또는 무기를 단테는 raffio, uncino, runciglio 등 세 가지 단어로 표현하는데, 모두 ‘갈고리’ 또는 ‘갈고랑쇠’를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본들은 거의 대부분 ‘(쇠)갈퀴’나 ‘작살’로 번역하고 있다.

최민순의 번역본은 ‘쇠갈퀴’, ‘작살’, ‘갈쿠리’로 옮기고 있는데, 여기에서 갈쿠리는 갈고리의 사투리 표현일 것이다. 어쨌든 이 세 용어는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킨다. 한형곤은 주로 ‘쇠갈퀴’와 ‘작살’로 옮겼지만 뒤에 23곡 140행에서 ‘갈고리’로 표현하고 있다. 임명방은 ‘갈퀴’로 옮겼으며, 허인은 앞의 해설에서 ‘갈고리’로 설명한 다음 정작 본문에서는 ‘갈퀴’로 옮기고 있다. 유영은 ‘갈고리’로 번역하고 있지만, ‘쇠스랑’도 함께 사용한다. 또한 강인웅과 정인섭의 동일 판본이 ‘갈고리’로 옮기고 있지만, 지나친 생략과 축약으로 번역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그 외에는 거의 모두 ‘(쇠)갈퀴’ 또는 ‘작살’로 되어 있다. ‘갈고리’와 ‘갈퀴’, ‘작살’의 차이는 사소한 것이며 전체적인 흐름에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원본에서 벗어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때로는 사소한 차이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영어 번역본들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인 영어 번역본들은 여러 가지 용어로 옮기고 있는데, 롱펠로Longfellow는 rake, hook, grapnel, grappling-iron으로, 세이어즈Sayers는 prong, hook, grappling-iron으로 번역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 번역한 맨덜봄Mandelbaum은 prong과 hook으로, 코터Cotter는 여기에다 grappling-hook, fork, pitchfork 등을 덧붙여 옮겼다. 이탈리아어 원본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단어의 사용을 피하기 위하여 다양한 표현을 찾았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갈고리’보다 ‘갈퀴’에 가까운 rake와 prong을 사용하였다. 참고로 ‘신곡’ 의 탁월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꼽히는 구스타브 도레의 판화에서는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삼지창 모양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21곡 100-101행에서 악마들 중의 하나가 두려움에 떠는 단테를 가리키며 자기 동료에게 “Vuo' che 'l tocchi in sul groppone(내가 저 녀석의 어깻죽지를 건드려 볼까)?” 하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에서 groppone는 ‘어깨’를 가리키는데, 우리말 번역본들은 하나같이 ‘궁둥이’나 ‘엉덩이’로 옮기고 있다. ‘어깨’로 번역한 판본은 하나도 없다. 악마들의 천박하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는 그런 저속한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분명히 원본에서 멀리 벗어난다. 이것도 분명히 영어 번역본들의 영향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이 ‘엉덩이’로 옮기고 있다는 점이다. 롱펠로, 세이어즈, 맨덜봄, 코터의 번역본도 하나같이 rump 또는 bottom으로 옮기고 있다.

출처가 불분명한 번역도 있다. 21곡의 137-138행에서 악마들이 자신들의 두목을 향하여 신호를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드러낸 이빨 사이로 혓바닥을 내밀어 보이는 천박한 몸짓이다. 이상하게도 허인을 비롯하여 여러 번역본들에서 “신호로 눈까풀을 까뒤집어 보였다”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 연원과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번역본들 사이의 상호 영향이나 모방 때문일 것이다. 이런 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번역본에서 오역과 비틀린 문장들이 넘친다. 특히 ‘신곡’ 의 경우 기존 번역본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좀더 원본에 충실하고, 아울러 우리말 표현에 보다 잘 어울리는 새로운 번역본이 절실히 요구된다.(김운찬/ 대구가톨릭대· 기호학)

07. 08. 12.

P.S. 겸사겸사 동아일보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중 <신곡>에 대한 해제도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5. 06. 15)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62>신곡-단테

2004년 11월 4일은 유럽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모인 유럽연합(EU) 가입 28개국 국가원수들은 이날 대통령궁에서 EU헌법 초안에 서명했다. 이 헌법은 각국 국회나 국민투표를 거쳐 2006년 11월 1일에 발효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 화려한 행사가 교황청에는 참으로 씁쓸한 날이기도 하였으니, 유럽이 그리스도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문구가 헌법 서문에 들어가야 한다는 교황의 끈질긴 주장을 유럽 정상들이 묵살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헌법 서문에 “유럽의 문화적 종교적 인문적 유산”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쳤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의 패권 다툼이 유럽 전체를 황폐하게 하던 중세에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정립한 인물이 다름 아닌 시인 단테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더불어 시성()이라는 월계관을 쓴 이탈리아 시인 알리기에리 단테는 겔프당과 기벨린당의 정쟁으로 내란이 끊이지 않던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권위를 확립함으로써 유럽에 궁극적 평화의 기틀을 마련하려던 정치적 노력이 실패하자 역사의 지평을 넘어 세계사 전체를 종교철학의 시각으로 재정리하여 3부 100곡으로 이루어진 ‘신곡()’을 남겼다.

신곡은 단테라는 한 영웅이 육신을 입은 채로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종교적 서사시이다. 그가 탐험하는 명계의 처음 두 곳은 이성()의 상징인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고 세 번째는 신앙()의 상징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는다. 단테가 아홉 살에 처음 보았고 18세에 다시 해후하였으나 딴 남자에게 시집가 불과 24세의 나이로 죽은 한 여인이 구원의 여성이 되어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

서사시는 “여기 한숨과 눈물과 드높은 통곡이 별 없는 하늘에 메아리치는” 지옥에서 시작하여 “나는 보았노라. 조각조각 우주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 한 권에 엮여 있는 것을. 그리고 만사를 한결같이 움직이는 바퀴와 같이 해와 별을 움직이시는 사랑이 돌리고 있더니라”는 천국으로 끝난다. 인류사가 인간의 의지와 신의 사랑이 엮어내는 승리의 기쁨 속에 완성된다는 낙관적 역사관을 보여준다. 전의 중세인이 대자연()과 성서()라는 두 편의 책에서 인생과 신을 읽었다면 단테는 신과 인간이 함께 엮는 역사()라는 책으로 인생을 읽었다.

그래서 지옥의 멸망된 족속으로 드는 길은 인생과 자기 사회에 대한 역사적 태만과 해악이며, 실상 지옥은 인간 자유의지의 개별적 집단적 행사를 신이 영원히 존중함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정의는 내 지존하신 창조주를 움직이어 그 극한 지혜와 본연의 사랑이 나를 만들었으며 나는 영겁까지 남아 있으리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 온갖 희망을 버릴진저.” 그리고 “세계에서 세계로 이렇듯 내 길잡이의 자취를 따라 두루 찾게 해 주신 그 평화의 이름으로 나는 일을 하리라”는 시인의 동경대로 한반도에 평화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그의 시집을 펴든다.(성염 주교황청 대사·전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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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pus 2007-08-12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십니까. 한 가지 의문이 들어서 여쭙습니다.
로쟈님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실어주신 서평 내용 가운데 궁금한 것이 있어서요.
김운찬씨가 최민순 신부 번역본을 중역이라고 단정하는 근거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최민순본을 가지고 있지 않아 당장 확인을 할 수가 없어서 좀이 쑤시네요.
고 최민순 신부는 라틴어부터 로망스어 전반을 다 섭렵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중역을 해야 할 필요가 과연 있었을까 싶네요.
김운찬씨가 단순히 '짐작'으로 중역이라고 단정한다면 고인과 독자들에게 굉장히 큰 실례가 아닐까 합니다. 어찌됐든 최민순본 이후로 그 판을 뛰어넘을 만한 번역은 (제 생각엔) 나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참고로 최민순 신부의 다른 번역본들 <고백록> <시편과 아가> 등은 판본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두서없이 죄송합니다. 건필하시길 빕니다.

로쟈 2007-08-12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민순본을 안 갖고 있어서(갖고 있더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사정은 모르겠구요, 김운찬 교수도 '짐작'을 적은 것이니 좀더 확인이 필요했을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쿠자누스 2007-08-15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을유문화사에서 1987년 9월 10일 초판 인쇄한 최민순 본 <하>권에 한 형곤 교수의 해설이 붙어 있는데, "이탈리어를 모르던 때 단테의 문학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최 신부의 번역서 덕분"이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2005년 한형곤 본은 " 1978년 처음으로 출판되어 1990년까지 널리 읽혀왔으나, 중간에 출판이 중단되어 독자들은 『신곡』을 이탈리아어판 완역본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고 "그 오랜 세월 동안 이 번역판 외에는 이탈리아어판을 번역한 다른 책이 나타나지 않[았다]"( http://www.libro.co.kr/Product/BookDetail.libro?goods_id=0100006070202 )고 합니다. 최 신부가 중역을 한 것이 아니라면 이런 글은 이해할 수 없네요. 을유문화사 최민순 본은 원본을 밝히지 않았씁니다.

로쟈 2007-08-14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을유문화사본의 해설이라면 평자도 참조했을 텐데, 중역 얘기가 나오는 건 의문이군요...

쿠자누스 2007-08-15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책이 '중역'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신부님의 다른책에는 판본이 밝혀져 있는데 그 책에만 없으니까요. 중역이 아니라면 한형곤 본을 첫 번째 원전 번역이라고 소개한 글이 문제가 되겠고요.

로쟈 2007-08-15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핏 스페인어본 얘기들이 나온 듯도 합니다...
 

한 댓글에서 '이 세상에 옛애인은 없어요'란 시구를 인용한 김에 출처도 밝혀놓는다.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1933- )의 시집 <이 세상에 옛애인은 없어요>(열린책들, 1989)를 염두에 둔 것이다(소장시집이지만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는 알지 못하며 아래 인용은 인터넷에서 찾은 것이다). 보즈네센스키는 옙투센코와 함께 1960년대 가장 인기있었던 대중 시인의 한 사람이었다. 생각난 김에 박정대 시인의 패러디시("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도 같이 옮겨놓는다. 한 영화에 삽입된 시낭송("옛애인에게 돌아가지 마세요")은 http://www.youtube.com/watch?v=WhaW4MRwrwg 참조.

이 세상에 옛애인은 없어요

옛 애인에게 돌아가지 마세요.
이 세상에 옛애인은 없어요.
그들이 수년 동안 살아온
잘 정돈된 작은 집처럼,
사본이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짖어대는 하얀개를 만나고
언덕위에 늘어 선
양쪽의 숲은 - 왼쪽, 오른쪽에-
어둠속에서 서로를 향해 짖어댄다.

숲속의 두 메아리는 따로 살아간다.
마치 두개의 스테레오 스피커처럼,
당신이 해온 내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그들은 큰소리로 세상에 퍼뜨린다.

집안에서 메아리가 찻잔을 떨어뜨리고,
거짓 메아리가 차를 권하고,
울어야만 할 밤을 위해,
거짓 메아리는 당신을 남겨둔다:

<사랑하는 사람아, 나에게 돌아오지 마오.
이세상에 옛 애인은 없어요.
두개의 멋진 건포도는
당신 생각에 부풀어 오르네...>

내일 저녁, 떠나가는 기차를 따라가며,
당신은 개울가에 열쇠를 던질거요.
오른쪽 숲과 왼쪽의 숲.
당신의 목소리로 외칠거요:

<당신의 애인을 떠나지 마세요.
이세상에 옛 애인은 없어요.....>

그러나 당신은 충고를 듣지 않을 것이오.

Не возвращайтесь к былым возлюбленным,
былых возлюбленных на свете нет.
Есть дубликаты —
                как домик убранный,
где они жили немного лет.

Вас лаем встретит собачка белая,
и расположенные на холме
две рощи — правая, а позже левая —
повторят лай про себя, во мгле.

Два эха в рощах живут раздельные,
как будто в стереоколонках двух,
все, что ты сделала и что я сделаю,
они разносят по свету вслух.

А в доме эхо уронит чашку,
ложное эхо предложит чай,
ложное эхо оставит на ночь,
когда ей надо бы закричать:

«Не возвращайся ко мне, возлюбленный,
былых возлюбленных на свете нет,
две изумительные изюминки,
хоть и расправятся тебе в ответ...»

А завтра вечером, на поезд следуя,
вы в речку выбросите ключи,
и роща правая, и роща левая
вам вашим голосом прокричит:

«Не покидайте своих возлюбленных.
Былых возлюбленных на свете нет...»

Но вы не выслушаете совет.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박정대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07. 08. 11.

P.S. 보즈네센스키의 이미지를 찾다보니 레이건 대통령과의 면담 사진까지 뜬다. 그의 활발한 대외 할동을 짐작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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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죽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6-04 01:22 
    몇 시간 전 일이지만 어제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의 현대철학강의 종강일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과 비평에 관해 다루고 강의 뒤에는 몇 분과 간단한 뒷풀이를 가졌다. 어제 아침에서야 서울에서 선거 '패배' 소식을 접하고 수도권의 경우 고작 0:3(예상)에서 1:2(결과)란 말인가 싶었지만, 밤에 귀가하면서 한겨레를 보다가 2% 부족한 승리를 '관대한 승리'로 간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비로그인 2007-08-1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로쟈님 로맨티스트(싱긋) ^^

좋은 페이퍼예요 :)

로쟈 2007-08-12 01:11   좋아요 0 | URL
'로맨티스트'란 말은 한 십 몇 년 전에 들어본 것 같네요.--;

philocinema 2007-08-11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글에 대한 댓글의 출처를 이리 따로 페이퍼로 정리해 주시는 로쟈님의 센스! 감사합니다. 댓글 보면서 의미가 궁금했었는데... 이리 따로 출처를 밝혀주셔서 감상하게 되는군요! 제 기억의 사본으로 고이 간직된 첫사랑의 이미지가 떠오르며 조금은 감상적 낭만에 빠졌다가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며(!) 얼른 정신 차리고(ㅎㅎㅎ) 이렇게 감사의 글 남깁니다.

로쟈 2007-08-12 01:11   좋아요 0 | URL
센스라기보다는 그냥 '의무'죠.^^; 말을 꺼냈으니까요...

수유 2007-08-12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라공의 시에 프라소아즈 아르디 언니의 노래, 아주 좋죠. 물론 제 블록에 있지요마는...
시들은 그러하고^^ 노래들은 좋습니다..

로쟈 2007-08-12 14:12   좋아요 0 | URL
아르디 언니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요.^^

2007-08-12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2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12 22:44   좋아요 0 | URL
아, 오종의 영화를 보지 못해서 귀에 덜 익을 수도 있겠네요...

필라멘트 2007-08-1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회되시면 <티무르 키비로프>의 시도 한번 소개해주시죠. <시인세계>에 로쟈님이 번역하신 그의 시들이 다 마음에 들더군요.^^

로쟈 2007-08-12 22:44   좋아요 0 | URL
제가 얼떨결에 맡은 글이고 키비로프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짐작엔 2년쯤 뒤에 번역본이 나올 거 같습니다...
 

한겨레21에 '로쟈의 인문학 서재'라는 코너를 (3주에 한번씩) 연재하게 됐다. 이번주에 첫 꼭지가 나갔는데(잡지는 나도 아직 못 받았다) 제목은 '천한 것과 돼먹잖은 놈의 진화'(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7/08/021162000200708090672010.html)라고 붙어 있다. 나는 '다윈주의 좌파' 정도의 제목을 적어 보냈는데 편집진에서 보다 '자극적인' 제목을 붙인 모양이다. 눈에는 더 잘 띄지만 칼럼의 내용은 그냥 '다윈주의 좌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단 옮겨놓고 분량 때문에 못 적은 말들을 '뒷담화'로 덧붙여놓는다.

한겨레21(07. 08. 09) 천한 것과 돼먹잖은 놈의 진화

다윈주의 좌파? 그렇다, 우파가 아니라 좌파다. 세계적인 윤리학자이자 동물해방론자인 피터 싱어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원제는 <다윈주의 좌파>)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다윈주의 좌파’의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은 두 가지 남용과 오류에 대한 교정에서 성립한다. 남용은 ‘사회적 다윈주의’란 이름으로 불린 다윈주의 우파의 것이고 오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전통적인 좌파’의 것이다.

각기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다윈주의 우파와 전통적인 좌파는 다윈주의에 대한 이미지를 공유한다. ‘경쟁에 기초한 적자생존’이라는 이미지다. 인간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란 관점이 공통적인 전제이다. 다만 다윈주의 우파가 보기에 그 이기성은 변하지 않는 본성으로서 구제불능이며, 전통적인 좌파가 보기에 그 이기성은 본성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다(이 경우 그 사회적 관계들을 변혁한다면 본성이란 것은 얼마든지 변화 가능하며 심지어 개조해낼 수 있다). 즉 인간 본성은 변화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믿음을 기준으로 좌·우의 스펙트럼은 나뉘어왔다.

그러한 분류에서 고려되지 않은 것은 진화생물학이 발전해감에 따라 확인된 새로운 ‘사실들’이다. 다윈주의에서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이 이타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자연의 도태 압력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의 본성에는 경쟁 성향뿐만 아니라 협동하려는 성향 또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미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개정판) 등에서도 자세히 설명된 것이지만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식의 극단적인 이기주의 전략은 “너도 살고 나도 살자”라는 협력적 전략에 비해 덜 효과적이다(“나 죽고 너 살자”라는 이타주의는 진화되기 어려운 성향이다). 극단적인 상황에서가 아니라면 생존에 불리하다는 것이다. ‘협동의 진화론’을 주장한 로버트 액설로드 등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게 가장 효과적인 생존전략이라는 사실이다.

 

가령 휴가철을 맞이해서 피서지 바가지요금을 생각해보자. 피서지별로 ‘바가지요금 근절’을 내세우지만 피서객들을 ‘등쳐먹는’ 바가지 상술이 올해도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숙박업소 상인들은 ‘한철 장사’라는 생각에 화장실도 없는 방을 15만원이라고 내놓고 숙소를 구하지 못한 일부 피서객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런 바가지요금을 감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피서객은 봉인가? 적어도 한 해만을 놓고 보자면 그렇다. 하지만 장사 한두 해 하는 것 아니다. 그리고 휴가철은 해마다 찾아온다(우리의 진화적 본성은 장구한 시간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다). “차비나 숙박비 생각하면 차라리 비슷한 금액이니까 동남아시아나 해외로 가죠”란 관광객들의 푸념을 볼멘소리로만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윈주의 좌파는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그래서 다윈주의다). 그렇지만 그러한 바탕에서도 상호 협력을 촉진하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경쟁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를 향해 작동할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약자, 빈자,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설 수 있다고 믿는다(그래서 좌파다).

흔히 말하기에, 우파는 교양을 따지고 좌파는 품성을 논한다. 우파는 좌파가 무식하다고 욕하고(“천한 것들!”), 좌파는 우파가 돼먹지 않았다고 비난한다(“돼먹잖은 놈들!”). 하지만 그 둘 사이에 적대적인 관계만 설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유식하고 돼먹은 인간’으로 진화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우파적 교양을 기본으로 갖추고 거기서 좀더 나가서 골고루 먹고사는 문제, 그러니까 평등의 문제를 고민하면 좌파인 거다”(강유원)란 정의를 이어받자면 “다윈주의라는 교양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거기서 좀더 나가서 상호 협력의 문제를 고민하면 다윈주의 좌파가 된다”.

07. 08. 10.



 

 

 

P.S. 시간관계상 '뒷담화'도 간추려놓는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다윈의 대답1>의 번역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윈주의 좌파의 숙제'에 관한 것이다. 이 숙제가 제기되는 것은 싱어의 책이 '다윈주의 좌파'와 관련한 여러 문제들을 '풀스케일'로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최소한 300쪽은 써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문제의 윤곽 정도만을 그려놓고 있기에 나머지는 독자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이 문제는 다소 견적이 나올 듯해서 나중으로 미루어놓고 번역 문제만을 언급해둔다.

 

이미 이덕하님도 지적한 바 있지만(http://blog.aladin.co.kr/718825194/1482017), 국역본은 이런저런 오역/오류들 때문에 무성의하다는 인상을 준다. 바쿠닌의 책 <국가주의와 무정부성>(1873)을 마르크스가 이듬해인 1874년에 읽고서 코멘트를 붙인 대목들을 싱어는 서두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국역본에서는 바쿠닌의 첫문장부터가 잘못 번역됐다.

"국가 지도자들과 대표들이 주장하는 전체 인민에 의한 보통선거권.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 진영과 민주주의적 진영에서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슬로건이다."(11-12쪽) 원문은 "Universal suffrage by the whole people of representatives and rulers of the state this is the last word of the Marxists as well as of the democratic school."(3쪽)

문제가 되는 건 'last word'의 번역이다. 이덕하님의 지적대로,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엉터리 번역이다. last word최종 발언, 유언, 결정적 발언을 뜻한다. 바쿠닌은 결국 마르크스가 내세울 것이 보통 선거권밖에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나대로 다시 옮기면, "전체 인민의 보통선거를 통한 국가 대표자와 통치자의 선출 - 이것이 민주주의 진영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끝마다 내놓는 구실이다."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이 주장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나 민주주의자나 '국가주의'라는 틀안에서는 똑같이 '대의제'를 명분으로 독재를 한다는 것이고(가령 북한의 정식명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그들은 그걸 '보통선거'에 의해서 정당화한다는 것이다('대중독재'란 말이 이 경우엔 적절하겠다. 우리가 왜 독재냐? 대중이 우리를 뽑아줬는데?). 이런 식의 정당화에 대한 바쿠닌의 비판은 이렇다: "이 슬로건은 소수 지배자들의 전제정치를 교모히 은폐시키는 거짓말이며, 자신들의 지배를 소위 전체 인민의 의지의 표현인 것처럼 가장한다는 점에서 아주 위험한 거짓말이다."

계속 이어지는 그의 신랄하고 예리한 비판: "일단 국가라는 저 높은 곳에 안착하게 되면 그들은 노동자들이 사는 속세를 경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인민을 대변하지 않을 것이고,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대변할 것이다. 그들은 인민들을 지배, 통치하려고만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12-13쪽)

이러한 바쿠닌의 우려에 대해 마르크스가 붙인 코멘트: "바쿠닌 선생이 노동자 협동조합에서 관리자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가 어떤 건지를 조금만 이해했더라도, 권력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과 악몽은 갖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저자 싱어가 바쿠닌이나 마르크스에게는 미래의 세기였지만 이젠 과거가 돼버린 지난 20세기를 돌이켜보며 내린 결론: "지난 한 세기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했던 정부들이 위의 논쟁에서 마르크스가 한 말이 틀렸고, 바쿠닌이 가졌던 '권력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과 악몽'이 섬뜩할 정도로 예언적이었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13쪽) 당신 또한 이러한 판단에 동의한다면 <다윈주의 좌파>는 일독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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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쟈님? 저기 "한겨레21" 에...
    from 당신과 나의 침실 2007-08-12 17:39 
    어... 제가 이번 호 <한겨레 21>을 읽다보니 로쟈님 칼럼이 있어서요 ^^; 저만 모르고 있었나??? 축하드립니다. ^-^)/ 저는 언제쯤 <오마이섹스> 같은 칼럼 좀 연재하는 영광을 누려볼 수 있을까요? :)     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7/08/021162000200708090672010.html 로쟈님의 칼럼입니다. 저처럼 궁금
  2. [펌]다윈주의 좌파?
    from 영혼의 아까징끼 2007-08-13 14:17 
    '로쟈'라는 아이디는 눈에 익다. 예전에 그가 쓴 서평을 몇번 읽어본 적이 있었고 날카로운 시각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알라딘에서 꽤 유명한 소위 '스타급' 서평자라는데, 공부하는 분인 듯(러시아문학 같다) 하다. 얼마 전부터는 『한겨레21』에 칼럼도 쓰나 보다. 아래의 글은 그가 『88만원 세대』에 대해 포스팅한 글인데, "저자들의 입장이 다윈주의 좌파의 전형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어 흥미롭다"고 말한다. 그가  다윈주의 좌파에 대해...
 
 
2007-08-11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11 09:14   좋아요 0 | URL
숨은 공로자가 따로 있었군요.^^

2007-08-12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7-08-1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 21 정기구독 신청해야 되는건가요? 축하드립니다..^^

수유 2007-08-11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모로 좋은 일입니다^^ 축하해요~~~

nada 2007-08-11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한겨레21 구독 안 해도 로쟈 님이 페이퍼 써 주실 거죠?
근데 3주에 한 번이라니.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잖아요.
좀 더 부지런해지세요. 딱! (채찍질! -_-)

philocinema 2007-08-1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구독해오던 한겨레21을 지난주를 끝으로 구독중지 했는데, 로쟈님이 혹시 그 사실을 아셨던가요? 절묘한 타이밍에 첫글이 실리셨군요! 우선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고민이네요. 구독연장과 중지지속 사이에서...

허리우스 2007-08-11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카드립니다. 로쟈님 때문에 한겨레21을 다시 사보아야겠군요. ...ㅠㅠ 요즘 긴축경제인데 기대만땅입니다.

로쟈 2007-08-1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공연히 '부담'을 드린 건가요?^^;

비로그인 2007-08-12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나 뒷북이네 -_-;;;

로쟈 2007-08-12 17:50   좋아요 0 | URL
지대로 뒷북이십니다.^^

마늘빵 2007-08-14 22:07   좋아요 0 | URL
난 더 뒷북. -_-

다락방 2007-08-1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어쩐지 저도 정기구독을 해야할것 같은 느낌이 ^^
축하드려요 :)

로쟈 2007-08-12 23: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정기구독까지야.^^;
 

이번주에 출간된 신간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책은 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산눈, 2007)이다. 저자도 출판사도 모두 생소한데, 눈길을 끈 것은 저자의 프로필. "1965년 출생. 현재 오사카여대 인문사회학부 강사. 저서로 <자유>, 역서는 <부정적인 것과의 체류(슬라보예 지젝)>, <제국>(네그리) 등이 있다."로 돼 있다. 즉, 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와 <제국>(이학사, 2001)의 일역판 역자인 것이다(저자의 '반폭력론'에서 지젝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나라마다 사정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 인문서의 역자는 그 나름의 식견과 인문학적 파워를 갖춘 경우가 많다(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영어로 옮긴 가야트리 스피박이 가장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250쪽이 안되니까 비교적 얇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신간에 눈길이 가는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는 물론 '폭력'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책들이 최근 유행을 타고 있기 때문. 조르주 소렐의 <폭력에 대한 성찰>(나남출판, 2007)이 가장 최근의 예일 텐데, 이 주제에 관한 책들만 모아놓고 읽어도 한 계절은 족히 잡아먹겠다. 그 경우에도 사카이의 책은 유익한 가이드북이 돼주지 않을까 기대된다. 신간을 비교적 크게 다룬 리뷰를 하나 챙겨둔다.

한국일보(07. 08. 11) 정당한 분노의 표출, 그 폭력이 악인가?

“폭력에 대한 폭력을 억누른다고 하는 것은 폭력의 공범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인 우리에게 폭력은 숙명이다.”

프랑스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테러>(*<휴머니즘과 폭력>) 속 한 구절을 인용하며 끝을 맺는 이 책은 ‘불온하게’ 묻는다. 폭력은 모두 악인가? 모든 폭력은 그저 야만일 뿐인가? 그렇다고 굳게 믿는 평화 지상주의자라면 이 책을 읽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폭력에도 ‘급(級)’이 있고, 그러므로 구분짓기가 필요하다는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호해야 할 어떤 폭력’이 있음을 인정하라고 집요하게 독자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오사카시립대 사회학부 준교수인 저자는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 반드시 폭력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폭력은 안 된다’는 막연히 ‘올바른’ 도덕이야말로 도리어 폭력에 가해지는 더 큰 폭력을 용인하며, 폭력의 다양한 층위에 대한 무감각을 비대화시키는 동력이라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에서 시작해 마틴 루터 킹, 맬컴 엑스, 프란츠 파농, 한나 아렌트, 위르겐 하버마스, 프리드리히 니체, 미셸 푸코에 이르는 다양한 폭력의 담론들을 비교, 분석하는 이 책은 하나의 개념으로 포괄될 수 없는 폭력 내부에 철학적 구분선을 긋기 위해 ‘반폭력’(anti-violence)이라는 개념을 주창한다.

일체의 폭력을 거부하는 비폭력(non-violence)은 물론 ‘폭력에는 폭력을’을 구호로 내세우는 대항폭력(counter-violence)과도 구별되는 반폭력은 폭력을 구조화하는 제도 차제를 해체하려는 폭력이다. 여기서 반폭력을 다른 폭력들과 구분하는 기준은 적대성과 주권. 적대성이란 자기자신이나 타자를 향해 분출되는 증오와는 다른, 구조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뜻하며, 주권은 폭력 수단을 독점하고 그 폭력을 누구에게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리를 일컫는다. 저자는 폭력이 반폭력이 되기 위해선 올바른 적대성을 갖되, 주권의 쟁취를 목적으로 하지 않아야만 한다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반폭력의 구체적인 예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저자는 북미자유협정에 저항해 무장봉기한 멕시코 게릴라 집단,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첫 손에 추켜세운다. 그들이야말로 총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총을 든 자들이기 때문이다. 적대성에 기반한 폭력은 억압받는 자를 자기혐오로부터 구원한다. 폭력은 행위뿐 아니라 언어와 이미지의 영역에서도 작동하기 때문에 폭력의 전개는 자기치유의 과정과 고스란히 겹치기도 한다.

프란츠 파농의 말처럼 “구체적인 폭력행사 전에 적을 확인하고 어디에 균열이 생겼는지 정확하게 인식하여 전투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비로소 뿌리 깊은 의존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시 한번 묻는다. “이래도 당신은 폭력은 모조리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박선영 기자)

07. 08. 10.

P.S. 조금 다른 방향에서 맥을 짚은 기사도 옮겨놓는다. 나로선 더 수긍이 가는 리뷰이다.

중앙일보(07. 08. 11) 폭력의 밑바탕엔 항상 공포가 있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인 우리에게 폭력은 숙명”이라고 말했다. 숙명. 그래서인지 폭력은 참 다양한 형태로 우리 옆에 있다. 전쟁과 테러, 조직폭력배들의 패싸움, 집단 따돌림, 그리고 자살과 사형….

이 책은 이런 다양한 양상의 폭력을 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일본의 소장파 사회학자인 저자는 “‘폭력은 안 된다’는 구호가 옳은가”를 화두로 던지며, 폭력의 속성을 파헤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무책임하고 공허한 주장이다. ‘폭력은 안 된다→그러니까 폭력을 증오한다→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증오한다→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폭력을’이란 역설을 잉태하고 있어서다.

역사적으로 폭력이 정치적 의미를 띤 경우가 많았다. 민족분쟁이나 종교전쟁이 그랬다. 하지만 최근의 폭력 양상은 점차 정치성이 없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1970년 대까지만 해도 브라질에서 유괴는 정치적인 목표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돈이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정치성을 초월한, ‘의미 과다’의 폭력도 늘었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한 테러리즘이 그 예다.

저자는 폭력의 밑바탕에 ‘공포’가 있다고 분석한다. 92년 LA폭동의 도화선이 됐던 ‘로드니 킹 사건’을 보자. 25세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이 LA 근교를 드라이브하던 중 경찰의 검문을 받고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했다. 킹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경찰에 둘러싸여 주먹과 발, 경찰봉으로 맞았고 두 차례의 전기충격 공격까지 받았다. 볼과 발목뼈가 으스러지고 두개골이 아홉 군데나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이 폭행에 가담한 네 명의 경찰이 무죄로 풀려났다. (판결이 난 날이 바로 LA폭동이 일어난 날이다.) 어째서 ‘무죄’인가.

“로드니 킹을 공격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경찰에게 달려들어 폭력을 행사할 무시무시한 육체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는 경찰 측 변호인단의 주장이 먹혀들어 간 것이다. 저자는 이를 ‘전도(inversion)’현상으로 해석했다. ‘강자’에 속하는 측이 ‘약자’에 속하는 쪽을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는 현상이다. 우리 주변에선 ‘노숙자에게 공포를 느끼는 일반 시민의 심리’가 그 예가 된다. 이런 ‘전도’는 사람들을 쉽게 폭력적으로 만드는 장치다. 국가에 의한 폭력이 ‘예방을 위한 대항폭력’으로 정당화되고, 침략적 성격의 전쟁이 ‘자위’를 구실로 이뤄지는 과정에서도 전도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테러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다. 저자는 테러리즘의 특징으로 ‘쇼’라는 점을 들었다. 국지적인 피해로 한정된 공격이 미디어를 통해 증폭돼 세계를 뒤흔드는 효과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쇼’라는 측면에서 테러리즘과 비폭력 행동-간디의 소금행진 같은-은 통한다. 저자는 어느 특정한 폭력을 비난하거나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옹호 받아야 하는 폭력으로 ‘적대성을 갖되 주권의 쟁취를 목표로 하지 않는 폭력’을 들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적대성’이란 옳지 않은 제도나 폭력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의미하며, ‘주권’은 폭력 수단을 독점하고 그 폭력을 누구에게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폭력의 예는 뭘까. 우리 역사상 80년 광주항쟁이 아닐지. 쉽지 않은 결론이다.(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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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10 20:02   좋아요 0 | URL
벌써 토요일이군요. 참 빠릅니다. -_- 어휴. 벌써 둘째주 다 갔네요. 토요일자 신간서적 나들이 글이 올라오면 아 토요일이구나, 합니다. :)

로쟈 2007-08-10 20:05   좋아요 0 | URL
이러다 곧 늙겠습니다.--;

philocinema 2007-08-11 16:39   좋아요 0 | URL
불로초라도 한뿌리 선물해 드릴까요? ㅎㅎ

로쟈 2007-08-23 01:30   좋아요 0 | URL
반뿌리라도.^^;
 

'상반기 베스트'로 미리 올려놓았지만 오늘까지도 손에 들고 있지 못한 책이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이다. '꼭두각시와 난쟁이'란 원제가 국역본의 제목으로 탈바꿈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최근 출간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과도 얼추 운이 맞는다. 해서 이 또한 겸사겸사 같이 읽으면 좋겠다(물론 지젝이 아무리 대중적인 철학자라 하더라도 도킨스와 나란한 가독성을 기대해서는 곤란하겠지만).

내용을 더 잘 드러내주는 부제는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이다. 영어본(The Puppet and the Dwarf)을 옮겼을 텐데, 알라딘에 떠 있는 원서는 독어본(Die Puppe und der Zwerg)이다(책을 아직 펴들지 않아 모르겠지만 독어본 판권을 구해서 영어본을 옮긴 것인가?). 아무려나 지난봄 김용옥의 문제제기로 화제가 되었던 기독교/종교 문제가 도킨스/지젝을 연결고리 삼아 자연스레 가을까지 이어질 모양이다. 이 참에 '나의 종교'는 안녕하신가, 한번쯤 돌이켜봄 직하다. 서두에서 밝힌 사정상 신간에 대해서 내가 덧붙일 말은 없고 가장 먼저 뜬 언론 리뷰를 하나 대신 옮겨놓는다. 그다지 친절한 리뷰는 아니군(*해서 한겨레의 리뷰도 추가해놓는다)...

경향신문(07. 08. 11) 神과 인간, 유물론적 접근

오늘날 믿음은 “부인되거나 치환된 형태로만 존재한다.” 부인이 갖는 거리가 종교를 문화로 치환하지만 문제는 냉소적 거리가 늘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에 대한 아이러니한 거리가 은밀한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이율배반과 마주하여 슬라보이 지젝은 다시 칸트의 질문을 반복한다. ‘믿음이란 가능한가?’ “우리가 정말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실천하는 모든 것”이 문화라면, 그러나 이 문화가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에 자신의 믿음을 전가하고 있다면 믿음은 문화의 가능조건인 동시에 불가능조건이 아닐까?

지젝에게 믿음은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경험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핍 없는 초월적 실체로서의 신이 아닌 십자가 위의 예수,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는 “믿지 않는다고 가정된 주체”인 그리스도의 회의와 불신에 동참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결핍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이 불가능한 경험이 오직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바로 ‘죽은 신을 위하여’이다.

‘꼭두각시와 난쟁이’란 원제에서 보듯 지젝은 여기서 발터 벤야민(‘역사철학테제’)을 반복하고 있는데, 두 번 읽기로서의 반복은 정신분석학적 읽기의 주요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반복적 읽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대립구조 속에서 포착될 수 없는 ‘사이공간’이다. 유물론과 신학, 인간과 신의 사이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유물론도 신학도 아닌 “생성 중인 종교”, 인간도 신도 아닌 괴물로서의 예수이다. 자신의 고통이 의미없음을 고집하는 욥.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욥의 결핍이 아닌 신의 결핍이다. 초월적이고 예외적인 공간에 거주하던 실체로서의 신이 역사 속으로 타락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주체가 될 때 사랑이 시작된다. 타락이 구원과 같아질 때, 결코 다가설 수 없던 신이 이미 우리의 이웃일 때 유물론적 신학이 발생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생성 중인 기독교’는 사도 바울의 마치-아닌-듯한 태도(as if-not)로 반복된다. ‘마치 법을 지키지 않는 듯이 법을 지키라’는 바울의 명령은 법과 초자아의 악순환을 벗어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위반에의 욕망을 부추기는 초자아는 죄의식을 통해 주체를 지배하는 권력 기제이기 때문이다. 위반하기 위해 금기를 필요로 하는, 구원을 위해 타락을 필요로 하는 법의 도착적 구조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지젝에게 유물론적 신학은 곧 정신분석학이 된다. 정신분석학 역시 타자의 내부적 결핍을 지시하는 주체의 가능성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욥의 의미없는 고통처럼 의미로 구성된 우주 속에서 주체는 자신의 고유한 장소를 갖지 못한다. 기표 속에 있지만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는 빈 공간으로서의 주체는 그러나 기표 체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칸트의 추상적 보편성과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을 구분해주는 것은 바로 이 기표화할 수 없는 기원적 빈 공간의 포함 여부이다. 보편/특수의 대립구조로 설명할 수 없는 사이공간을 지젝은 특이성(singularity)이라 부르는데, 특이성을 포함한 보편성이 바로 구체적 보편성이다. 그러나 특이성의 포함은 보편성의 내재적 분열을 초래한다. 이제 보편성은 특수성 속으로 하강하여 특수한 요소들 속의 간극, 특수성도 보편성도 아닌 특이성이 된다.

기독교는 특이성으로서의 주체의 공간을 포함할 때 유대교의 추상적 보편성을 넘어선다. 타자의 결핍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감추고 있는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는 인간도 신도 아닌 예수라는 특이성의 주체를 드러낸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배설물과도 같은 주체로서 예수는 신의 결핍, 체스터톤의 말대로 “스스로에게 버림받은 신”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신교는 특수하고도 다양한 요소들을 폭력적으로 통합하는 일의성이 아니라 니체의 정오처럼 자신의 내재적 결핍을 보여주는 둘로서의 하나, 하나로서의 둘이다. 다신교는 내재적 분열을 외재적 차이로 환원시킴으로써, 다시 말해 불가능성을 다양성으로 치환함으로써 의미의 불가능성을 피해가는 방어기제이다.

일신교의 혁명은 다양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불가능성을 말하는 유대교에서 시작된다. ‘뿌리없음’, 상징질서로부터의 절대적 분리를 보여주는 유대교는 그러나 메시아를 여전히 ‘미래에 오는 자’로 상정하여 그와의 만남을 끊임없이 연기한다. 기독교는 ‘이미 항상 와있는’ 메시아를 이야기함으로써 신을 상징질서 속으로 끌어내린다. ‘아직 오지 않음’과 ‘이미 항상 와있음’의 간극 속에서 사랑의 윤리학, 곧 정신분석학이 시작된다.(민승기|경희대 겸임교수·영문학)

» 한스 홀바인 작 <죽은 그리스도>(1521)

한겨레(07. 08. 11) '신이 죽어버린 기독교’ 외설스러운 재해석

슬라보예 지젝은 옛 유고연방 출신의 철학자다. 슬로베니아 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최신 사상의 중심이자 태두가 지젝이다. 20세기 사상의 거목들이 쓰러진 자리에서 그의 사상적 지위는 거의 독보적으로 빛난다. 국내에서도 그는 소수이지만 맹렬한 지적 사도들을 거느리고 있다. 지난 10여 년 사이 그의 거의 모든 주요 저작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그에게 쏠리는 관심의 강도를 보여준다.

지젝의 사상은 옛 유고연방이라는 지역적 특수성 속에서 영근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이 발칸의 다민족국가는 소련의 헤게모니가 무너지면서 급속한 ‘자유화’ 과정을 겪다가 민족주의의 광기 어린 폭발로 만신창이의 상처를 입었다. 한때 ‘서구식 민주화’에 기대를 걸었던 지젝은 그 민주화의 결과가 아무런 해방의 전망도 제시하지 못한 채 파멸적 재앙으로 귀결하는 것을 보면서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애초에도 삐딱하고 반주류적이었던 그의 사상은 더욱 발본적이고 급진적이고 과격한 국면으로 나아갔다. 특이한 것은 20세기 후반의 체제 반란적 사상운동을 이끌었던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에 대립하는 지점에 그가 서 있다는 사실이다. 지젝은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 정통 관념론을 이어받고 자크 라캉의 ‘정통적’ 정신분석학을 그 흐름에 접목해 매우 정통적인 방식으로 반역적 사상을 펼치고 있다. 이번에 번역된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도 그는 헤겔과 라캉을 위시한 유럽 정통 사상을 입론의 주춧돌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정통의 세례를 받은 그의 사상은 거의 외설스러울 정도로 반정통적이다.

<죽은 신을 위하여>는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라는 부제가 얼핏 보여주는 대로 기독교에 대한 오래된 해석체계를 전복하는 작업이다. 요약하자면, 기독교를 유물론적으로, 다시 말해 신이 없는 종교, 신이 죽어버린 종교로 재해석하자는 것이다. 더욱 불온한 것은 그리스도를 20세기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연결지어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 요컨대, 예수를 종교상의 레닌으로, 유물론적 혁명가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젝의 기독교 해석의 관점을 지젝 자신의 목소리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나의 주장은, 내가 뼛속까지 유물론자라거나,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유물론적 방법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장은 훨씬 더 강도 높은 것이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오로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역으로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지젝은 이 논의를 펼치기에 앞서 오늘날 서구에서 기독교의 대안으로 자주 거론되는 불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먼저 풀어놓는다. 그가 불교를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의 폭력적·독재적 전횡을 중화시키거나 치유할 방법이 불교에 있다는 생각이 널러 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서구에 이식돼 유통되는 ‘서양 불교’를 단호하게 부정한다. “서양 불교는 광란의 시장 경쟁 속도에 대하여 내적 거리를 두고 무관심할 것을 설교하는 대중문화의 한 현상이다. 이는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 자본주의 역학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완벽하게 참여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는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 이데올로기다.”

‘서양 불교’의 원형인 ‘동양 불교’도 그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일본의 사례가 결정적 근거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와 선을 결합했던 일본 선사 스즈키 다이세쓰의 선사상을 사례로 끌어들인다. “군국주의적 선지도자들은 선의 기본적 메시지를 순진한 군사적 충성, 곧 명령에 즉각 복종하고 자아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임무를 다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한다.” 문제는 무념무상이라는 불교의 내적 평화의 원리에 있다. ‘분별적 사고를 중지하고 무의 상태로 돌입하는 것’이 윤리적 판단 자체를 거부하게 만든다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그런 무차별의 종교에서는 진정한 혁명도 사랑도 불가능하다고 지젝은 판단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즉각 기독교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목표는 ‘유신론적 기독교’를 해체하고 전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통 기독교의 원리를 뿌리부터 잘라 버리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는 신의 죽음 위에 성립된 종교다. <신약성서>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최후에 외치는 말,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구절이 결정적이다. 지젝은 이 말로써 그리스도 자신이 기독교가 범할 수 잇는 궁극의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바로 믿음을 부인하는 죄다. “그리스도가 죽을 때, 그와 함께 죽은 것은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소망이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이렇게 ‘신이 없다’는 확인에서 출발한 종교다.

이런 역설 혹은 도착은 예수의 행적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다의 배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수가 유다의 배반을 사전에 몰랐을까? 몰랐을 리 없다. 지젝은 여기서 유다의 배반이 기독교의 성립에 필수적임을 지적한다. 유다의 배반을 통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진정한 구원자로 등극한다. 유다는 배반 행위를 통해 예수의 혁명사업을 적극적으로 실행한 일종의 영웅이다. 왜 영웅인가. 유다는 영원히 예수의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것을 알면서도 예수를 위해 배반을 저지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배신하는 것이다.

지젝은 예수가 유다에게 이렇게 은밀히 명령했다고 추정한다. “내가 너의 전부임을 보여라. 그러려면 우리 둘 다를 위한 혁명 과업을 위해 나를 배반하라.” 그런 사랑의 배반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가 성립했다. 그 그리스도는 지젝이 보기에 혁명가다. ‘사랑의 과업’을 실현하려고 목숨을 던진 혁명가다. 그 혁명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초인이다. 그 초인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면 신이라는 관념에 입각해 구축된 기독교 제도를 버려야 한다. 그렇게 지젝은 말한다.(고명섭 기자)

07. 08. 10.

P.S. '유물론적 신학'은 기억에 지젝의 타르코프스키론에서도 키워드였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http://blog.aladin.co.kr/mramor/714863, http://blog.aladin.co.kr/mramor/715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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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8-10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8일, 매장에 아직 깔리지 않은 책을 직원을 통해 꺼내오도록 해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머릿말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그리고 역시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만, <만들어진 신>과 같이 읽으면 재밌겠다 싶어요. 제목들이 좀 그렇네요..만들어진 신도 그렇고.
이 글과 아랫글을 옮겨갑니다.

로쟈 2007-08-10 20:26   좋아요 0 | URL
빠르삼.^^

philocinema 2007-08-1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들어진 신"에 "죽은 신을 위하여"까지 책상에 책은 쌓여 가는데,
시간이 허락될지가 걱정입니다. 그래도 목차는 훑어봐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로쟈 2007-08-12 01:16   좋아요 0 | URL
그 정도는 하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책사랑 2007-08-12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만든 출판사입니다. 책제목을 어떻게 결정할까로 고민을 많이 했으며, "만들어진 신"이 출간되기 이전에 이미 번역자 선생님과 "죽은 신을 위하여"로 하기로 했었습니다. 저희는 뭐 그리 책을 잘 팔지 못하는 출판사라서 어떤 시류에 잘 따라가지 못한 답니다. 저작권은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가 갖고 있어서 그쪽과 계약을 했고, 번역은 영어본으로 했습니다. 워낙 지젝이 독일어본과 영어본으로 자신의 책을 출간해서 큰 문제는 없습니다. 영어본에 보면 역자 이름이 없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독일어본 역시 역자명이 없습니다.

로쟈 2007-08-12 10: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궁금증을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젝의 경우 독어, 영어, 불어는 따로 역자가 필요할 거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목 때문에 지젝의 책이 더 팔리거나 덜 팔리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소경 2007-09-0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삽입된 그림 중 <백치>에서 바보공작이 거론한 문제의 한스홀바인 그림을 이제 보는 군요...

로쟈 2007-09-01 20:2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경악을 했던 그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