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최근 출간된 이광래 교수의 <해제주의와 그 이후>(열린책들, 2007)에 대한 촌평을 적은 바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1573384), 다소 부정적인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한때 "프랑스 철학의 대변인 같았고 전도사와도 같았던" 저자의 근황과 식견이 궁금하여 책을 구입했다. 니체와 데리다 관련 대목만 약간 훑어보다가 한 문장이 목구멍에 걸렸다. '데리다의 해체실험들'을 다룬 장에 나오는 한 문단의 일부이다:  

"파리 고등사범학교 시절 심리학과 정신 질환 등 무의식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푸코와는 달리 데리다는 주로 의식철학, 그것도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가 학위논문을 후설과 현상학적 미학에 관해 쓰려고 했던 것만 보아도 그러한 그의 관심사를 쉽게 알 수 있다. 사실상 최초로 그의 이름이 실려 출간된 책도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 전통과 도입L'Origine de la geometrie. Tradition et introduction>(1962)이라는 번역서였다. 이 책은 후설의 본문보다 데리다의 서론이 다섯 배 정도나 많았으므로 번역서라기보다는 데리다의 후설 연구서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이 책으로 '카바이예 철학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후설이나 현상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이외에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119쪽)

'데리다의 기원'이라고도 부름직한,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대한 데리다의 번역과 해제는 내가 오래전에 영역본으로 읽어보려고 시도했던 책이고 또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본도 '비싸게' 구입한지라 나름대로 '관심도서'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이 책에 대한 저자의 소개는 눈을 의심하게 한다. 책 전체에 걸쳐서 저자와 도서명에 원어가 병기돼 있는 건, 다소 번거롭고 독서를 방해한다 하더라도 출처를 명확하게 밝히겠다는 학술적 고려의 소산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단, 그것이 정확한 정보일 경우이다.

저자는 엉뚱하게도 'L'Origine de la Geometrie. Traduction et introduction'이란 원서명에서('Traduction et introduction à l'origine de la géométrie d'Edmund Husserl '이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Traduction'(번역)이란 말을 'Tradition'(전통)이란 말로 오기했다(introduction은 왜 '도입'이 된 것인지?). 그리고는 '전통'이라고 옮겼다! 저자가 책을 읽지 않고(심지어 안 갖고 있을 듯하다) 2차문헌에만 기대어 적어놓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  

데리다가 후설 사후에 출간된 비교적 짧은 텍스트를 처음 번역 소개하면서 우리식의 '해제'를 붙였는데, 그 분량이 상식을 좀 넘어선다. 언급된 대로 '다섯 배 정도'나 많기 때문이다(러시아어본을 기준으로 하면 데리다의 서론은 거의 200쪽 가까운 분량이고 후설의 텍스트는 36쪽 가량이다). 하지만 덕분에 데리다는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우수한 인식론 저작에 주어지는 '장 카바이예상'까지 수상함으로써 전도유망한 철학자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어쨌든 이런 식의 내용이야 '전통과 도입'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냥 접수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의 독서경험상 이런 사소한 꼬투리들이 많은 걸 암시해주며 또 많은 의혹을 낳는다(그러니 '침식주의'라 부를 만하다). 해서 앞뒤로 몇 페이지를 둘러보는데 116쪽의 데리다 인용문에서는 음소(Phoneme)와 문자소(Grapheme)은 번역 없이, 'Phonene나 Graphene'이라고 오기했다. 오타라 하더라도 너무 눈에 띄는 오타이다. 112쪽에서는 데리다와 카트린 클레망의 인터뷰를 싣고 있는 잡지 <아르크(L'arc>)를 '아르크Arch'라고 오기했다.

Жак Деррида Диссеминация La Dissemination

조금 뒤로 가보니 168쪽의 미주에서 저자가 <파종>이라고 옮기고 있는(보통은 <산종>이라고 옮긴다) 데리다의 'La dissémination'(1972)이 'La deissémination'이라고 오기됐다(이 경우엔 탈자가 생긴 게 아니라 특이하게도 첨자가 생겼다). 지나가는 김에 말하자면, <산종>은 올해 러시아어본이 출간됐다(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도 올해 러시아어본이 나왔다). 

거기에 본문에서 저자가 "편집증세가 심한 네오-프래그머티스트'로 폄하하고 있는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Richard Rotty'로 오기됐다. 찾아보기에서까지 'Richard Rotty'라고 표기된 걸로 보아 저자는 Rorty가 아니라 Rotty를 읽은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끝이 없겠다. 내가 다 읽어보지 않았기에 저자가 이런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책을 썼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취향'은 이미 책을 진지하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데리다에 대한 저자의 판단처럼.

"데리다는 왜 실없는 말을 하려는 것이었을까? 그의 농담은 진담에 대한 진저리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진담을 구토한다. 그는 늘 진담들을 해체하려 한다. 철학은 너무 오랫동안 '진담하기'에 주눅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그 주눅을 벗어던지려 했을까? 그는 철학의 진담들을 모두 단두대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외친다. 해체란 단두(斷頭)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그가 믿기 때문이다."(110-111쪽)

침식주의 또한 진담에 대한 진저리인 것이다...

07. 0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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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7-09-21 17:41   좋아요 0 | URL
서양철학을 열심히 공부한 이들 중 일부는 서양의 전통에 대한 외상으로 인한 반작용으로 동양의--그리고 한민족 고유의--전통에 대한 집착으로 빠지곤 하는 모습을 봅니다. 영국으로 유학갔던, 서양의 전통과 학문에 대한 위압감으로 정신병까지 얻었던 것과 같은, 소세키의 고민이 그대로 백년후의 한국에서 반복되는 것같은 기시감이 듭니다. 일본어로 일본의 근대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시대가 지나--중역의 시대였던-- 한국어로 학문을 해야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나서야 시작되는 근자의 '번역론'에 대한 무성한--하지만 별무실한-- 논의처럼 말이죠.

이광래씨도 그런 고민을 꽤 했던 듯합니다.
그가 습합習合 운운하며 한국의 서양철학 수용사나 일본 학문에 대해 연구한 것 역시 잃어버린 전통에 대한 집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서양 철학에 대한 공부를 이렇게 강박적으로 부인하는 것을 보니 더더욱.
이교수의 공부가 잃어버린(만들어진) 전통에 대한 집착이나 도취가 아니라, 동서양의 이분법을 떠나 보다 급진적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동서양의 이분법에 잘못 빠지면, 김두규씨처럼 전통풍수 운운하는 삼천포로 빠지지요.

강원대와 약간 관련된 지인의 말에 의하면, 이광래교수는 불어보다는 일어에 능하다고 하더군요.초창기 저작들도 일본어 저작들에 많이 의존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일본의 근대학문과 그 수용으로서의 한국의 근대 학문에 대한 연구가 나온다면 한국 학계의 많은 미스테리들이 풀리지않을까하는 의문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로쟈 2007-09-21 17:47   좋아요 0 | URL
저로선 그런 집착이나 유혹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 편이지만(가령 박동환 교수의 '3표 철학'을 '숭배'하는 후학들의 모습이 저로선 퇴행 이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라도 학문적인 정확성/엄격성은 지켜져야 한다고 봅니다. 대충대충이 '동양적'이라고 강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책의 266쪽에서는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를 '찰스 앤더슨 퍼스'라고 표기하고 'Charles Sander Peirce'라고 병기해놓았네요(탈자가 있습니다). 이런 책을 진지하게 읽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자꾸때리다 2007-09-21 21:38   좋아요 0 | URL
저도 공부는 많이 해보지 않았지만 열매님의 의견에 많이 동감이 되네요. 동양/한국 철학에 대한 너무 과한 강박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상당수 되는 듯해요. 서양 철학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이나 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동양철학에 대한 강박증에서 모두 자유로워질 수 있는 때가 왔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