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프렌치 프랑스>란 책이 출간된 김에 '프랑스 읽기'의 자료가 될 만한 책들을 꼽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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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프랑스- 하버드의 석학이 분석한 프랑스인들의 삶
로렌스 와일리 지음, 손주경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년 9월
18,000원 → 18,000원(0%할인) / 마일리지 54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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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강대국의 조건 - 프랑스- 대국굴기
CCTV 다큐멘터리 대국굴기 제작진 엮음 / 안그라픽스 / 2007년 8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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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존의 기술-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이기라.양창렬 외 지음 / 그린비 / 2007년 7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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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지음 / 강 / 2004년 4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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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우리시대의 명저50'에서 조혜정(조한혜정) 교수의 <한국의 여성과 남성> 꼭지를 옮겨놓는다. 아주 오래전에 들춰봤던 듯한데 그다지 강한 인상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나로선 저자의 최근의 인터뷰나 기고기사에 더 눈길이 간다. 남녀간의 성차보다는 계급차나 세대차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탓이겠다. 그럼에도 사회과학서가 거의 20년 동안 절판되지 않고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명저50' 가운데 '현역'으로 남아있는 책들이 몇 권이나 되는지 의심스럽기에 더욱 그렇다). 관련기사와 인터뷰, 그리고 최근 기고기사를 함께 모아놓는다.

한국일보(07. 09. 20) 억압과 착취 구조의 뒤틀린 유산을 일갈하다

가부장제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가장 교묘하게 인간성을 억압해온 제도이며, 여성 억압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착취와 맥락을 같이 한다.” 조혜정 교수가 1988년 발표한 <한국의 여성과 남성>(문학과지성사 발행)이 당시 지식사회에 던진 충격파는 컸다. 6ㆍ29선언으로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서울올림픽이 열리면서 세계화가 화두로 떠올랐지만 가부장제를 가족관계의 본질로 여기는 통념은 여전히 유효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책은 가부장제는 가족관계의 본질이 아니라 조선시대 사대부의 권력 확장을 위해 고안된 역사적 구성물이며 이를 통한 여성의 억압은 곧 남성도 ‘남성다움’의 굴레에 갇히게 만드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고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모성(母性)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가히 선동적이었다.

김영옥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는 “가부장제나 모성의 신화, 억압과 착취에 기반한 남녀관계의 기원 등을 역사적인 맥락 아래 검증한 최초의 저작”이라며 “출간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성을 잃지 않는 저자의 혜안과 선 굵은 문제의식이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여성학의 고전이 된 책이지만 편협한 여성주의에 머물지 않고 여성과 남성이 다 함께 행복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하고 구체적인 성찰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큰 미덕”이라고 덧붙였다.

저자는 한국의 남성과 여성이 이뤄온 생활세계를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여성해방 이론가이자 운동가로서 구상하고 실천해온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분석적 토대를 이 책에 담고 있다. 저자가 처음 시선을 둔 것은 ‘여성 차별과 비하의 근원인 가부장제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활세계를 지배하게 됐나’ 하는 문제다.

조선 초기에는 재산 분배나 제사 상속도 받을 만큼 비교적 평등한 지위를 누렸던 여성들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계 순수혈통의 원리가 절대화되면서 ‘2등 백성’으로 전락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왕권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양반관료층들이 유교 이념을 교조화하면서 남존여비 이데올로기를 심화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가부장적 지배는 빈곤과 혼란기를 거치면서 불변적 남성우월주의로 고착됐고, 발전 이데올로기가 주도한 근대 공업화 시대와 산업자본주의 사회를 거치며 ‘국가와 일터를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남성의 공적 영역과 그를 위한 ‘휴식처’로 전락한 가정의 관장자로서 여성의 사적 영역을 명확히 가르는 데 이용된다. 공ㆍ사의 명확한 구분과 고정된 성 역할 관념은 제도의 차원이 아닌 일상의 문화로 강력한 의미를 지닌 채 존속된다. 가부장제 아래 여성들은 인격이 아닌 어머니로서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발적으로 체제의 협력자가 되면서 스스로의 역할과 공간을 제한했다. 이른바 ‘도구적 모성’의 탄생이다.

저자는 부부 역시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파악한다. 특히 경제적 능력 여부에 따라 지배와 복종이 정확히 갈리고, 경제력이 없는 여성들은 자녀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대리만족하면서 가족 내 존재감을 획득한다. 저자는 “가정에서 소외된 남편, 과도한 교육열 등은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에 안주하는 여성들의 계산된 헌신의 산물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면서 “부부관계가 애정과 신뢰를 잃을 경우 자녀의 도구화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고 경고한다.

가정에 안주하지 않은 여성들은 그럼 행복할까. 저자는 “전통사회에서 여성이 배제되었다면 현대에 들어서서는 배제의 정도가 줄어든 대신 보이지 않는 통제는 더욱 체계화되어 여성의 삶은 더욱 교묘하게 왜곡되고 있다”고 갈파한다. 소위 ‘성공적인’ 전문직 취업여성일지라도 남성중심적인 조직문화의 이방인으로 전문직의 역할 수행 이외에 여성에게 기대되는 성역할을 수행하느라 기진맥진하게 된다. 결혼을 했을 경우는 가정과 일터 모두에서 늘 ‘약간씩 모자란 느낌’을 갖고 자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저자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고도의 산업화가 진행중인 사회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결혼과 가족에 대한 인식이 중요해진다”며 “특히 결혼과 자녀 출산 시기 및 자녀의 수를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 무리함이 없도록 조정하는 것, 경우에 따라서는 자녀를 낳지 않는 것도 하나의 정상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여성과 남성>은 씌어진 지 30년이 됐지만 불평등한 남녀관계가 잉태하는 가족해체, 저출산, 고령화사회 등 우리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들을 정확히 꼬집어내고 있다.

저자는 여성과 남성이 다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성간의 유대를 강화할 것, 여성을 남성과 똑같이 사랑 존경 즐거움 성취 권력에의 욕구를 가진 인간으로 대할 것, 남성은 가부장적 부권을 포기하고 가족구성원으로서 소통과 보살핌의 노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한다. 가족간의 소통과 감정교환이야말로 행복한 삶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학계의 성과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책은 인문ㆍ사회과학 전문서로는 드물게 현재까지 14쇄를 찍었고, 2002년에는 일본 법정대 출판부가 <한국사회와 젠더 연구>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를 출판하기도 했다.(이성희기자)

"신정아 사건은 일터에서의 남녀관계가 동료라기보다는 여전히 연애의 대상으로 환원되고, 성취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 조직문화도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거죠."

연세대 교정에서 만난 조혜정 교수는 "<한국의 여성과 남성>을 쓸 때만 해도 남녀 모두 행복한 세상이 곧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는 국내 사회학이 꽃핀 시기였고, 여성해방주의자들 사이에서 남녀가 모두 주인공인 일상의 문화를 새롭게 짜보자는 움직임이 활발했어요. 83년에 여성학자 조형, 조옥라, 고(故) 고정희 시인 등과 함께 대안문화운동단체인 '또하나의 문화'를 결성하면서 이들과 토론하고 싸우며 얻은 성찰들이 책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조 교수는 그러나 "지금은 사회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접었다"고 말했다. 여성운동이 성숙하면 남녀평등사회가 구현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알파걸, 킹콩걸, 골드미스 등 여성파워를 상징하는 용어들은 쏟아지되 남녀간의 적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해졌기 때문이다. "여성은 '피해 볼 일은 절대 안 하겠다'는 의식으로 무장하고, 남성은 기득권을 빼앗긴 박탈감에 시달리면서 '사이버 마초' 같은 감정적 대응을 일삼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사회구조에 있는데 서로 감정싸움만 되풀이해요. 남녀 문제만 나오면 너무나 단세포적인 반응을 쏟아내는 사회가 된 것이죠."

조 교수는 '누구도 승자가 되기 어려운' 초경쟁 시장경제와 그로 인한 인간의 개체화를 이렇게 분열된 사회의 주범으로 꼽는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주체적인 각성을 바탕으로 대안문화나 대안학교 운동 등을 유연하게 받아들였던 사람들도 IMF사태 이후 개별적 생존경쟁에 내몰리면서 지금은 오로지 일류대학을 목표로 한 무한질주에 동승한다. 동료든 친구든 가족이든, 기본적으로 경쟁자일 수 밖에 없다.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은 24시간 그야말로 '빡센' 노동에 시달립니다. 잡지 않으면 잡히는 사냥꾼의 시대에 들어선 거죠. 이렇게 경제논리가 압도하는, 극도로 도구화ㆍ개체화한 사회에서 자란 세대는 과연 행복할까요?" 조 교수는 시장경제체제의 제도는 숨가쁘게 변화하지만, 의식의 변화는 여전히 지체상태라면서 '지속 가능한' 사회에 대한 모색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가깝게는 호주제 폐지 이후의 삶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의 공유가 필요합니다. 호주제 폐지 이후 가족의 정의는 어떻게 내려야 할지, 누구랑 살지 하는 문제 말이죠. 그리고 양극화사회에서의 육아의 사회화 만큼이나, 군 복무도 사회적 책임을 함께 지는 차원에서 여성이 공유하는 문제 등을 심도 있게 검토해야 해요. 소통과 상호 돌봄을 통해 남녀가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만이 지속가능성을 갖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지요."

 

경향신문(07. 08. 29) IMF 목격한 불행한 청년들 ‘88만원 세대’ 우리가 껴안자

“부유한 50대여, 파이팅!”이라는 주간지 표지 글이 눈길을 끈다. 내용은 청년기에 통기타와 청바지, 팝송을 들으며 성장한 50대가 이제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기고 패션을 주도하는 신소비군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제목을 본 청년이 “다 가지셨으니 어련히 잘 하겠수~”라고 툭 한마디를 던진다. 그의 말대로 지금 50대는 많은 돈과 시간과 건강을 가진 세대이다. 반면 그 자녀 세대는 시간에 쫓기고 늘 불안하다. 안정된 직장을 얻기 힘들고 직장이 있더라도 독립할 집을 마련하기 어렵다. 어릴 적에 갖게 된 소비수준을 유지하려면 부모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고, 이런 경제적 의존성은 젊은이들을 나약한 기회주의자로 만들고 있다.



최근 한 경제학자와 신문기자는 현 시대의 20대들은 월 88만원으로 일상을 꾸려가야 하는 세대라면서 그들의 곤궁한 삶에 대한 논의의 불을 지폈다. ‘너희는 고생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이들 ‘88만원 세대’는 어린 나이에 IMF 금융위기 급보를 접하고 일찍이 암울한 미래가 온다는 것을 감지한 ‘불안 세대’다.

이들은 1990년대에 대중문화와 인터넷의 주역으로 잠시 부상하였지만, 그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서 가장 배려받지 못한 계층이었다. “너희는 왜 패기가 없느냐?”라는 핀잔을 듣지만 불안정한 고용상황과 끊이지 않는 재난과 소통불능 상황에서 패기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연봉 억대를 버는 변호사나 대기업 사원들은 행복한가? 타고난 낙관주의자거나 그 세대에는 드물게 헝그리 정신을 가진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 ‘잘나가는’ 청년들 역시 위장장애와 조울증으로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좋은 미래가 올 거라는 믿음이 가지 않는 시대에, 생각할 틈도 없이 일해야 하는 자신이 마치 ‘소모성 건전지’ 같다는 것이다.

‘잘 팔리는’ 인재건, 하루 종일 방안에서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면식수행’하면서 지내는 백수건, 공무원 시험 자료집과 법전암송 오디오북, 다이어트 비디오를 공짜로 다운로드해 보면서 취업준비를 하는 반백수건, ‘88만원 세대’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들에게 미래라는 단어는 거북스럽다. 청년들은 부모나 어른 세대의 말을 들어야 돈이 나오는 세상에서 그들의 말에 순종하거나 숨어드는 생활 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긴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것이 적응력 있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방콕 생활’은 불화와 불균형이 만들어낸 구조적 산물이며, 애초부터 위장장애와 공황장애를 앓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를 방치할 때 국가는 거대한 ‘기생 국민’을 떠안는 부담을 안게 된다.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은 이들 ‘청년존재’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제기하면서, “20대를 위해서 뭔가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에서는 클린턴 정권 때 노동정책을 담당했던 로버트 라이시 장관이 청년기금을 마련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그는 ‘고용 없는 성장’ 정책을 고수할 경우에 초래될 사회적 파탄에 대해 경고하면서 하나의 해결책으로 모든 젊은이가 18세가 될 때 일정한 금융자본금을 주어서 계속 공부를 하건, 벤처를 시작하건, 시민단체에서 일을 하건, 증권이나 채권을 사건 각자의 생각대로 재투자를 하게 하자는 제안을 했다. 국가의 미래를 청년들과 함께 만들어가자는 초대장인 셈이다.

‘경제 대통령’ 논의가 분분해지고 있다. 개발 독재시대의 패러다임을 넘어서자는 주장은 지루하고 경제성장을 해놓고 보자는 논의는 무지하다. 전문가들은 돌봄과 창의적인 노동이 후기 근대 경제의 핵심 노동이라고 말한다.

그간 한국의 많은 청년들은 인디와 언더 문화, 인터넷과 대안교육 영역에서 기존 경제학에서는 노동으로 계산되지 않는 돌봄과 소통과 나눔이 가능한 창의적인 노동을 하면서 사회 이곳저곳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뿌려왔다. 대통령은 바로 이들의 ‘비물질 노동’의 잠재력을 인지하고 이를 체제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바뀐다고 세상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사자 젊은이들이 더 깊은 늪에 빠져들기 전에 스스로를 돌보기 시작하면 좋겠다.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건, 선후배간 자원을 공유하며 대학 동아리를 부활시키건, 동네에 카페를 차리건, 바리케이드를 치건 조상이 물려준 물적, 비물적 공공재를 챙겨내기 위해 이제 슬슬 방에서 나와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불안은, 정말이지, 영혼을 잠식한다.(조한혜정/ 연세대교수· 문화인류학)

07. 09. 26.

P.S. 기사를 읽으면 혼자 음미하고 말 일이지 이렇게 옮겨오는 것도 '습관'이다. 끽연자들이 하루 한 개비씩 담배를 줄이는 것처럼 앞으론 줄여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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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26 22:23   좋아요 0 | URL
^^ 기사를 소개해주시면 쉽게 접할 수 없는 좋은 글을 볼 수 있어 좋아요. 한국일보는 제가 구독하고 있어 거의 보는 편이지만.

로쟈 2007-09-26 23:49   좋아요 0 | URL
저로선 기회비용의 문제라서요.^^;

심술 2007-09-27 19:25   좋아요 0 | URL
정말 고생 많으십니다.^^

로쟈 2007-09-27 22:38   좋아요 0 | URL
제가 푸념한 셈이 됐나요?^^;
 

울적할 때 볼 만한 영화 가운데 <글루미 선데이>(1999)가 있다(주제가 뮤비는 http://www.youtube.com/watch?v=N2fGWQKbX68). 오늘 같은 날 보거나 듣기 좋은 헝가리 영화이고 주제가이다. 한데, '글루미'라는 게 영화 제목 이상의 '유행어'라는 건 오늘 알았다. 우연히 담비에서 읽은 기사가 '글루미 제너레이션'을 다루고 있었던 것(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5894). 알고 보니 지난 봄에 TV에서 이 '우울한 세대'를 기획특집으로 다루기도 했었다(알라딘만 드나들다 보니, 세상 물정에 까막눈이 될 때가 있다!). 이 대학원신문의 기사와 함께 (언제나 앞서가는!) 마케팅 기사를 같이 옮겨놓는다.  

동국대 대학원신문(143호) '글루미 제너레이션'이 뜬다

「어느 여자가 인사동의 골목들을 지난다. 그녀의 왼손에는 따뜻한 커피가 들려 있고 오른손엔 가벼우면서도 조그만 디지털 카메라, 귀에는 목소리 굵직한 래퍼의 웅얼거림을 전해주는 이어폰이 꽂혀 있다.」 ‘그녀’에겐 가까운 사람의 체온, 시선, 목소리를 대신할만한 것들이 모두 갖춰져 있다. ‘그녀’는 ‘우리’보다 ‘혼자임’을 사랑하고, ‘우리의 관계’보다 ‘나’에 집중한다. 유행처럼 ‘그녀’를 닮은 ‘그들’이 늘어나고 세상은 그들을 글루미족(Gloomy 族)이라고 부른다.



글루미 제너레이션(Gloomy Generation), 이 새로운 세대는 이름 그대로 우울하기보다 ‘우울함을 즐기는 세대’이다. 이들을 가리켜 글루미족(Gloomy 族) 혹은 나홀로족(族)이라 한다. - 결혼이라는 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이상과 일, 능력을 더욱 중요시 여기는 싱글족(Single 族)과는 분명 구분되어야하는 개념이다. 싱글족(Single 族)은 결혼이라는 체제에 묶여 자신을 가두기보다 독신을 고집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반면 글루미족(Gloomy 族)은 외로움과 고독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즐기는 것으로 여기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 한 방송사의 아침 프로그램이 대인관계연구소와 함께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 484명 중 60%를 차지하는 291명이 자신이 글루미 제너레이션(Gloomy Generation)이라고 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함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Internet)의 사용이 증가하고 DMB 단말기, MP3등의 기기들이 등장하면서 혼자만의 시간도 무료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거기다 개인주의가 발전하면서 현대인들에게 외로움과 우울함은 일상이 되었고 이제 사람들은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고독에 괴로워하기보다 오히려 즐기기로 했다. 글루미족을 위한 마케팅이 블루 오션으로 환영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우울함을 즐기기

장기화된 경기 침체, 실업률의 증가 등으로 사회 전반에 우울함이 형성됐다면 우울함은 자신감 저하, 의욕 상실, 대인기피증을 가져왔다. 어떤 의사는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했다. 현대인의 다수에서 흔히 발견되는 증세라고 보는 것이다. 감기를 방치하면 폐렴으로 발전되어 생명을 위협하듯 우울증도 가볍게 여기고 그냥 지나치면 누구에게든 치명적일 수 있다. 게다가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니 이는 더욱 심각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인구 10만명당 26.1명, 교통사고 사망률 1위를 달리는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 사망자의 1.5배에 달한다. 그야말로 우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세상을 살고 있는 셈이다.

멀지 않은 과거엔 우울증에 걸려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손가락을 빙빙 돌려가며 수군거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울함을 숨기고 나아가 우울증에 걸린 자신을 자학하기도 했다. 2005년 직장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조사에서 설문에 응한 2475명의 59.8%가 우울증을 경험하거나 치료했다고 대답했다. 현대인에게 우울증은 아프면 약을 먹고 치료해야 하는 일반적인 질병이 된 것이다. 소수에게 국한되었던 외로움과 고독이 보편적으로 확대된 이런 현상은 글루미 제너레이션(Gloomy Generation)의 등장을 보다 의미있게 한다. 글루미족은 우울함을 내면에서 끄집어내어 삶의 한 면으로 인정하고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인정한다. 숨기기보다 우울함 자체를 즐기는 고독으로 대체함으로써 우울증을 이겨내는 것이다. 혼자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나만의 감정과 느낌에 집중하고 내 외로움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법도 배운다. 이렇게 보낸 시간이 다음의 일상을 준비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글루미족은 우울함에 도전장을 던진다. 고독한 시간에 쓸모없는 ‘나’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온전히 ‘나’를 위해 준비된 시간에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찾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글루미족의 우울함 극복기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가 될 것이다.

진화된 개인주의

「점심 메뉴를 고르면서 상대방의 취향이나 입맛을 배려해가며 식사를 하는 것보다 혼자 먹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다. 전시회 관람을 좋아하는 친구와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골목길 산책을 좋아하는 내 취향을 버릴 바엔 과감하게 혼자 여행을 떠난다.」

글루미족이 추구하는 건 절대 자유이다. 어느 누구의 침해도 용인할 수 없는 나만의 절대적인 자유를 위해 그들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포기한다. 직장 상사가 오전에 부부싸움을 하고 한나절을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어도 내가 뭘 잘못했을까하며 자존감에 상처를 내는 일은 글루미족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조율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거부한 그들은 이미 타인과의 소통 역시 차단한 것이다.

타인과의 소통은 단순히 타협과 통제, 절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또한 완전한 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음성을 통해 표현된 생각을 한 번에 정확하게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은 좀처럼 힘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울림을 통해서 그 사람과의 벽을 허물고 거리를 좁힌다. 글루미족에겐 이 어울림이 껄끄럽고 부담스럽다. 혼자가 편안하고 익숙한 이들은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일이 어색하기만 하다.

예전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애(自己愛)를 구현했다면-자기 가치의 고양(高揚)을 위해 타인의 확인과 인정,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함-현대의 글루미족은 자신만의 세계에 구축된 자기애(自己愛)에 치중한다. 거울 속에 비치는 아름다운 나의 모습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 거울을 훔쳐보며 혀를 차건 말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마음상함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절대 자유를 얻기 위해 당당하게 자신을 지키고 형성해나갈 수 있다는 것은 저주라기보다는 축복이다.

하지만 사회가 존재하기에 인정받는 개인이라면 타인과의 소통이 없는 삶을 과연 뭐라고 해야 할까? 당당하다 못해 도도해 보이기까지 한 이 완벽한 개인주의를 변화된 사회의 치부(恥部)로 인정하고 묵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회 안에서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아예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개인주의가 도시의 세련됨과 맞물려 그럴듯하게 포장되었다고 해서 매력적인 부메랑을 얻은 것을 기뻐해야만 할까?(박수령 동국대학원신문 편집위원)

한겨레(06. 12. 10) 마케팅, 우울한 현대인을 겨냥하다

지난 7월 서울시광역정신보건센터가 1,49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충격적이다. 이 조사에 의하면 서울 시민 10명 중 4명이 우울하다고 답변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우울한 현대를 살고 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은 최근 개봉된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정신적으로’ 우울한 현대인을 코믹하게 그려냈다.

또 최근 서울 명동에선 ‘프리 허그(Free Hug)’라 불리는 자유롭게 껴안아주는 캠페인이 펼쳐졌다. 그러나 이는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이 운동은 이미 2년 전 호주에서 처음 시작했다. 해외에선 이미 우울한 현대인을 위한 다양한 상품이 속속 등장하는 추세다.

영국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에서 열린 ‘침묵 디스코’ 라는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한 사람들은 헤드세트를 끼고 음악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페스티벌에 참여했지만 음악은 혼자서 조용히 심취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영국 런던에 위치한 클럽바 ‘필링 글루미(Feeling Gloomy)’는 우울하고 멜랑꼬리한 음악을 즐기는 클럽으로 오는 12월 31일에는 ‘우울한 새해’를 기획하고 있다. 우울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과 가는 해를 더 우울하게 보낼 사람들을 위한 파티인 셈이다.

또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한 건강 포럼에서는 계절성 감성 치료나 만성 피로, 각종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첨단 기술을 활용한 안경이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루미넷 안경(Luminet glasses)이라 이름 붙여진 이 안경은 빛을 망막에 집중시키고, 이 빛이 곧 뇌에 인식되어 우울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멜라토닌 호르몬 분비를 억제시킨다.



우울함을 즐기는 사람들

트렌드 컨설팅 업체인 아이에프네트워크(대표 김해련)는 ‘0708 FW 트렌드 워치(Trend Watch)’ 설명회에서 앞으로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현대의 우울한 소비자들 즉 ‘글루미 컨슈머(Gloomy Consumer)’의 감성을 공략하는 것이 소비 트렌드에서 앞서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른바 우울한 현대인, 글루미 제너레이션(Gloomy Generation은 코쿤족, 싱글족 등의 나홀로족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점이다. 결혼 여부에 따라 구분되던 싱글족과는 달리 결혼을 했건 하지 않았건 현대 사회의 고독한 개개인, 글루미 제너레이션들은 곳곳에 널려 있다.

글루미 제너레이션을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이유는 이들이 외로운 현실을 피하지 않고 즐겨야 할 부분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이들은 고독이나 우울증을 숨기지 않고 건강하게 밖으로 끄집어낸다. 이런 특성은 이들이 향후 다양하게 출시되는 우울상품을 소비하는데 주축이 될 개연성이 높다. 많은 트렌드 워처들은 향후 등장할 우울 모드(Melancholy Mood)를 이용한 기발한 상품들이 새로운 소비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최근 눈길을 끌고 있는 외톨족을 위한 여행 상품이나 나홀로족을 위한 놀이동산의 프로그램, 테이블마다 칸막이가 있어 옆자리 눈치를 볼 필요 없는 식당의 1인 공간 등은 더 이상 화젯거리가 아니다. ‘디스턴스 프레즌(Distance Presence)’은 글루미 제너레이션을 겨냥한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존재감을 느끼는 공간이라는 의미의 디스턴스 프레즌은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는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을 제공하는 이불이다.

이불 원단에 열을 감지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 이불 한쪽에 손을 대면 그 정보가 이불의 반대쪽에 전달되고 그에 따라 반대쪽에 따뜻한 열기와 함께 서서히 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LED를 이용하여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디자인을 많이 한 스웨덴 디자이너 칼 헤이걸링(Carl Hagerling) 디자인 그룹이 만들었다.

미국의 마이클 커쉬(Michael Kersch)가 디자인한 ‘리아이우스(Lyaeus)’는 사용자에게 편안한 3차원 공간을 제공하는 릴렉세이션 체어(Relaxation Chair)다. 휴식, 독서, 경치 즐기기 등 목적에 맞춰 리아이우스를 놓아두는 곳에 따라 사용자가 원하는 휴식을 즐길 수 있다. 야외에서 사용 시 발생하는 자외선을 막기 위해 햇빛 가리개도 있다.



4등분 되는 4인용 식탁도 있어

주변의 환경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데 도움을 주며, 이로 인해 눈과 마음을 편하게 쉴 수 있게 하며 동시에 사생활을 보호 해주는 장점이 있다. 스프링 스틸 디자인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일본 출신 네덜란드의 활동 작가인 쿠니코 마에다(Kuniko Maeda)가 디자인한 ‘4등분 되는 4인용 식탁’은 현대인의 식문화를 반영한 디자인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현대의 가정에 놓인 식탁은 4인용 이상인데 비해, 네 식구가 얼굴을 맞대고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 쿠니코 마에다는 혼자 외로이 끼니를 때우는 이를 위해 이케아(IKEA)의 4인용 식탁을 친절히 4등분했다. 외톨족은 식탁의 한 조각만 TV앞으로 가지고 나가 식사를 할 수 있다.

최근 화제가 된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안나 마리아 코넬리아의 ‘라이프 드레스(Life Dress)’도 우울한 현대인들을 겨냥한 상품이다. 이 드레스’는 한마디로 변신 스커트다. 항상 혼자만의 공간으로 숨고 싶은 욕망을 채워 줄 신개념의 옷이다.

비상 상태가 발생했을 때, 즉 주위가 견딜 수 없이 혼잡하거나 시끄러우면 스커트로 머리를 감싼 후 지퍼를 잠그면 자신만의 개인 도피처가 마련된다. ‘라이프 드레스’는 ‘살인적인’ 소음과 스트레스를 견디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위한 특별한 프로젝트 작품인 셈이다.(류근원 기자)

우울한 어린이를 위한 상품

다양한 글루미 제너레이션들을 공략하기 위한 상품은 어린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외로운 외동 자녀를 위한 상품을 공략하는 것도 시장 트렌드를 앞서가는 한 방법이 된다. 일본 니프로사의 코코로 스트레스 미터(Cocoro Stress Meter)는 자신의 감정표현이 구체적이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스트레스 측정기'이다. ‘코코로 스트레스 미터’를 입속에 넣었다가 빼면 침을 분석해 스트레스의 정도를 측정해준다고 한다.

일본 토미사의 유아용 프로젝터 드림 에너지(Dream Energy)는 부모와 아이의 다정한 시간을 연출하는 디즈니의 신 플랫폼 ‘Disney 캐릭터 이야기 극장 판타지움’을 발매했다. 이 제품은 콤팩트 사이즈의 유아용 프로젝터로 전용 소프트를 본체에 세팅 하면, 디즈니 캐릭터 관련 슬라이드가 투영된다. 화면에 표시되는 자막(스토리)을 그림책이나 그림 연극을 읽듯이 엄마나 아빠가 읽어주면서 함께 하는 엔터테인먼트 기기이다. 곧 있으면 엄마나 아빠의 목소리로 녹음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된다.

핀란드의 론리 자켓(Lonely Jacket)은 옷에 벨크로(Velcro), 일명 찍찍이가 붙어 있어 다른 사람과 접촉만 하면 쉽게 붙어 있을 수 있다. 핵가족화 되어 사람들과 접촉이 많지 않은 요즘 가정에서 부모와 아이들이 이런 옷을 입고 있으면 재미있는 놀이도구로서의 기능도 가능하다.

07. 0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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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도서반납을 위해 동네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갔다가 몇 권의 책을 훑어보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남경태의 <개념어 사전>(들녘, 2006). 작년 늦가을에 나온 이 책은 '종횡무진' 역사 시리즈와 번역자로 잘 알려진 저자의 '내공'을 보여주는 책으로 호평을 받았더랬다. 인문서로서는, 그리고 '개념어'란 타이틀을 갖고 있는 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상당한 부수가 판매된 것으로 안다. 출간 당시 이 책에 별로 주목하지 않은 나로서는 저자의 고정 독자층이 형성돼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별로 주목하지 않은 까닭? 그건 '한권짜리' 사전이 갖는 불가피한 용적상의 한계를 먼저 떠올렸기 때문이다. 주제별 사전이 아니라면 적어도 '한 가지 개념에 책 한 권' 정도가 내가 흥미를 갖는 분량이다. 아무튼 서문에 따르면 책은 '개념어의 이미지를 내 멋대로 그리다' 정신에 충실하며 저자가 밝힌 책의 원제목은 '내 멋대로 순전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쓴 개념어 사전'이라고 하니까 그냥 그 정도 수준에서 흥미롭게 읽어봄 직하다. 그래야 "고삐 풀린 망아지가 종횡무진 초원을 누비듯이 한 개인이 지적 세계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겪고 부딪힌 개념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준다"는 책의 특장과 미덕이 도드라진다. 뒤늦게 관련기사를 다시 읽어보면서 옥에 티라 할 만한 것도 지적해둔다.

한국일보(06. 11. 18) "인문학 개념, 사전부터 찾지 말고 그림을 그려보세요"

우리가 많이 보는 대형 국어사전은 인터넷을 ‘전 세계의 컴퓨터가 서로 연결되어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 통신망’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개념어 사전>(들녘 발행ㆍ452쪽ㆍ1만3,000원)은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시선을 빌어 인터넷을 설명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토지에서 해방돼 법적, 정치적 자유를 얻는 동시에 새로이 자본에 경제적으로 예속된다는 점에서 이중적이고 분열적이다. 인터넷은 그 같은 이중적, 분열적인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인터넷은 본질적으로 자체의 내용을 가지지 않은 매체-비유하자면 인터넷은 자동차가 아니라 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도로일 뿐이다-이지만, 광범위한 정보를 매개하고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므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는 분열증, 이중성과 닮은 꼴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처럼 <개념어 사전>은 각 개념에 대한 설명을, 그 개념의 탄생 배경 및 역사적 사회적 맥락 등과 연결해 파악한다.

저자인 남경태(45)씨는 <문학과 예술의 문화사> <세상을 바꾼 문자, 알파벳> 등 70여권을 번역한 1급 번역자이자 <종횡무진 한국사> <한눈에 읽는 현대철학> 등 대여섯 권의 저자이기도 하다.  "자연과학과 달리 인문학의 개념은 단일한 의미보다 복합적인 뜻을 지니고, 하나의 개념도 인접 개념과 연관되고 중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개념을 이해할 때는 사전적 정의보다 그 개념에 관한 전반적인 이미지를 얻는 것이 올바른 이해의 방법입니다.”

그가 말하는 ‘개념에 대한 이미지’는 하나의 개념을 전체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너, 잘났다’라고 말하는데 이를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잘 났다’라는 뜻이지만, 앞 뒤 흐름을 헤아린다면 ‘너, 잘난 척 하지 마라’라는, 정반대의 뜻이 됩니다. 인문학에서 말하는 각종 개념은 이렇게 해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책은 권력에 대한 설명에서도, 지식이 곧 권력이라는 철학자 미셸 푸코의 주장을 차용한다. 이성이 지배하던 시대에 인간을 몽매한 상태에서 해방시킨 지식이 이제는 권력과 하나가 돼 도리어 억압과 질곡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사례를 말해주는 퀴즈를 덧붙인다. 의사가 라틴어로 처방전을 쓰고 약사가 약을 잘게 갈아주는 이유는? 답은 환자가 자신의 증상이 가벼운 감기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고, 환자가 받은 약이 실은 아스피린이라는 것을 모르게 하기 위해서란다.

책에는 가상현실, 담론, 디아스포라, 마녀사냥, 모더니즘, 신자유주의, 엄숙주의, 유물론, 자본주의, 제3의 물결, 창조론, 카오스, 파시즘, 패러디, 하이브리드 등 150여 개의 개념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 대부분 우리가 오래 전부터 사용했거나 익숙한 것들로 저자가 책을 쓰면서 메모해놓은 철학 역사 심리학 예술 등 인문학 전반의 개념들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용어 사전이 아니라 인문학의 지적 탐색이다. 각 개념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이 그 자체로 책 한 권씩을 압축한 것 같아 인문학적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은근한 재미를 준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처럼, 인문학의 개념들은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 그는 무엇보다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눈으로만 읽지 말고 그 의미를 되씹어 보자고 한다. “책에서 뭔가를 뽑아내려고만 하지 말고, 책을 나의 사고 작용을 촉발하는 수단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한 가지 개념의 사전적 정의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이 말하는, 혹은 그것이 형성된 역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박광희 기자)

07. 09. 26.

 

 

 

 

P.S. '개인적인 사전'이란 의미에서 <개념어 사전>이 내게 제일 먼저 떠올려준 책은 다른 사전들이 아니라 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96)이다. 이 역시 '사랑의 말들'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단상과 정의들의 성찬인 책이었다. 시간상 <개념어사전>을 다 훑어보지 못하고 저자가 참고한 문헌들의 목록을 유심히 훑어보았는데, 몇몇 책들에 대한 촌평이 눈길을 끌었다.

가령 렘프레히트의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 2001)에 대해서 "국내에 소개된 철학사는 몇 가지 종류가 있지만 읽을 만한 게 별로 없다. 그중 나은 게 이 책인데, 이것도 서술이 지루한 데다가 미국 철학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 엄정하지는 못하다."라고 평한다(이 책은 최근에 '떨이 판매'를 하길래 주문해놓았다. 종이값 정도의 가격이어서). 거기에 알라딘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지만 러셀의 <서양철학사>(대한교과서, 1989)의 경우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번역이 엉망이니 주의하도록!"이라는 조언도 들을 만하다(하지만 잉여적인 조언이기도 한데, 시중에 나와 있는 건 주로 집문당판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참고문헌을 읽어내려 가다가 두 가지 사항이 다소 놀라웠다. 하나는 참고문헌이 소략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배열 순서가 엉터리라는 것. 때로 간략한 필수문헌만을 제시하기도 하므로 소략한 참고문헌 자체가 흠이 될 수는 없겠다(국외서도 일부러 배제한 듯하다). 하지만 참고문헌의 '개념 없는' 차례는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책의 마무리가 옥에 티인 셈(이 차례는 편집부에서 만든 것일까?).

일반적으로 성을 먼저 적는 관행과는 달리 이 책의 참고문헌에서는 이름이 성보다 먼저 제시된다. 가령, <고독한 군중>의 저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리즈먼, 데이비드'라고 표기되는 대신에 '데이비드 리스먼'으로 표기되고 있는 것. 하지만, 문제는 이 '부자연스런' 원칙마저도 언제나 지켜지지는 않는다는 점. 코믹하게도 <정신분석 입문>의 저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여서 'ㅈ'란에 가 있고, <꿈의 해석>의 저자는 '프로이트'여서 'ㅍ'란에 가 있는 식이다. 간혹 '이름' 대신에 성만이 제시된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처럼 'ㄹ'란에 가 있는데, 자체 원칙을 따르자면 'ㅋ'란에 가 있어야 했다('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이니까). 사정이 그러하니 'E. H. 카'가 어찌된 영문인지 <성경전서> 다음에 위치하게 된 것도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잘 씌어진 책에 '코 빠뜨리는' 참고문헌이다.  

끝으로 한 가지, 현대언어학의 시조인 소쉬르에 대해서 저자는 '프랑스 언어학자 소쉬르'라고 부르는데, 그의 <일반언어학강의>가 불어로 돼 있기는 하나 소쉬르는 '프랑스' 언어학자가 아니라 '스위스' 언어학자이다. '내 멋대로 쓴 개념어 사전'이라도 사전은 사전이므로 디테일에 좀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좋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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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6 17: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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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6 17: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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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눈뜨다'는 발터 벤야민(1892-1940)의 <베를린의 어린시절>(새물결, 2007)의 한 꼭지이다. 예전 번역본인 <베를린의 유년시절>(솔, 1992; 1998)에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돼 있는데, 유대인들의 '설날'을 배경으로 한 짤막한 글이다. 각각 새물결판 195-196쪽과 솔판 58-59쪽의 글을 읽어본다(둘다 독어본을 옮긴 것으로 돼 있다). 곁다리로 참고한 책은 영어판 <베를린의 어린시절>(하버드대출판부, 2006)이다(판본들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469383 참조). 영어본의 제목은 'Sexual  Awakening'이고 123-124쪽에 수록돼 있다.

시작은 이렇다: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중 나중에 밤에 배회하게 되는 거리들 중의 하나에서, 그럴 나이가 되기도 했지만 나는 (아주) 기묘한 상황에서 불시에 성충동에 눈뜨게 되었다."(새물결); "나중에 끝없이 방랑하며 밤길을 돌아다니던 바로 그 거리에서 나는 어떤 특별한 계기에 의해서 처음으로 성적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솔)

이 첫대목은 두 번역본이 기묘하게 엇갈리는데,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시점과 "끝없이 방랑하며 밤길을 돌아다니던" 시점이 언제인 것인지? 새물결판에 따르면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건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점인 어린시절이고, "배회하게 되는" 건 그보다 나중이다(그러니까 싸돌아다니던 것과 배회하던 것 사이에 시차가 있다). 그리고 솔판에 따르면 '방랑'하던 시점과 '밤길을 돌아다니던' 시점은 동일하며 둘은 같은 의미연관의 행위이다.   

아주 사소하지만 이 첫대목의 차이가 흥미를 끌어서 영어본과 대조해보았다: "On one of those streets I later roamed at night, in wanderings that knew no end, I was taken unawares by the awakening of the sex drive (whose time had come), and under rather strange circumstances."

벤야민이 회고하고 있는 어린시절이 1900년경(영어로는 'around 1900')이니까 그의 나이 8-9살 때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그는 낯선 거리에서 헤맨다) 그가 처음 '성적 충동'을 느낀 그 거리는 그가 나중에(머리가 커서)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게 될 거리이다. 해서 영역본에 따르면 "one of those streets I later roamed at night, in wanderings that knew no end"이 문법적으로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중 나중에 밤에 배회하게 되는 거리들"(새물결)이란 표현을 지지할 수 있더라도 번역은 교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중에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며 배회하게 되는 거리들"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라면 "나중에 끝없이 방랑하며 밤길을 돌아다니던"(솔)은 "나중에 끝없이 방랑하며 밤길을 돌아다니게 되는"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겠고.

"그날은 유대력으로 새해 첫날로, 부모님은 내가 예배식에 참석하기 위해 필요한 채비를 다 해놓으신 상태였다."(새물결); "그때는 유대인의 설날이었다. 부모님들이 어느 예배식에 참석하여 나에게 막 자리를 찾아주려던 참이었다."(솔); "It was the Jewish New Year, and my parents had arranged for me to be present at a ceremony of public worship."

솔판의 번역은 역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의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새물결판과 영역본을 고려하면 "예배식에 참석하여 나에게 막 자리를 찾아주려던 참"이었다는 건 오버이다. 왜냐하면 '꼬마' 벤야민이 친척 한 사람을 데리고/모시고 와야 한다는 '미션'을 수행하게 되는데, 교회에 이미 도착한 이후에 이 아이가 다시 친척을 데리러 나간다는 건 넌센스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냥 꼬마 벤야민은 이날 교회 예배에 참석하기도 예정돼 있었고, 다만 중간에 한 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했을 따름이겠다. 그 '과제'란 무엇인가? 

"이 축제날 나를 돌보는 일은 다소 먼 친척 손에 맡겨졌는데, 내가 그를 중간에 모시러 가게 되어 있었다."(새물결); "사람들은 내가 이 예배식에 누군가 친척 한 명을 데리고 와야 한다고 권한 바 있었다."(솔); "For this holiday, I had been given into the custody of a distant relative, whom I was to fetch on the way."

두 국역본은 같은 독어본 문장을 옮긴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차이를 보인다(새물결판은 영역본과 일치한다). 유대 관습과 관련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날 어린 벤야민은 자신의 후견인 노릇을 할 먼 친척을 교회에 가는 길에 모시러 가야 했다. 문제는 그가 길을 헤매개 됐다는 것. 어린 나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런데 주소를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주변 길을 잘 몰랐는지 - 아무튼 시간은 점점 늦어지게 되었으며, 게다가 나는 계속해서 길을 헤매고 있을 뿐 제대로 도착할 기미는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되었다."(새물결); "이 지역을 아직 잘 모르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의 주소를 잊어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시간이 자꾸 흐를수록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솔); "But for whatever reason - whether because I had forgotten his address, or because I could not get my bearings in the neighborhood - the hour was growing later and later, and my wandering more hopeless."  

이 대목은 대동소이하다. 어린 벤야민은 교회(회당)에 혼자 간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는데, 일단은 보호자(후견인)가 입장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종교 의식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것이 글의 후반부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어떤 불안감("너무 늦었어. 결코 회당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없어.")이 뜨거운 파도처럼 엄습해왔다. 하지만 그와 거의 같은 순간, 아니 아직 앞의 물결이 밀려가기도 전에 두번째 물결이, 전혀 정직하지 못한 생각이 밀려들었다("될 대로 되라지 뭐. 나하고는 상관없어.").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이 두 개의 물결이 억누르기 힘들게 처음으로 눈뜬 커다른 쾌감 속에서 하나로 합쳐졌는데, 그러한 쾌감 속에서 축제일에 대한 모독은 거리의 뚜쟁이 같은 짓거리와 뒤섞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막 깨어난 충동을 위해 거리가 마련해줄 수 있는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새물결)

맨마지막 문장은 솔판과 영역본에서 이렇게 돼 있다: "이러한 내 마음속의 두 가지 물결이 처음으로 끓어오르는 성적인 거대한 욕망과 합쳐지고 있었다. 축제일에 대한 모독감은 거리의 뚜쟁이와 같은 짓거리와 뒤섞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나는 깨어난 성적인 충동에 대하여 어떻게 다스려 나가야 하는가를 처음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And the two waves converged irresistibly in a dawning sensation of pleasure, wherein the profanation of the holy day combined with the pandering of the street, which here, for the first time, gave me an inkling of the services it was prepared to render to awakened instincts." 

솔판의 번역에서는 마지막 '추측'의 근거가 무엇인지 불명료하다. 새물결판과 영역본에 따를 때 그것은 '거리'이다. 그 거리에서 종교 의식에 참석해야 하는 의무를 방기하는 데 따른 어떤 불안감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벤야민은 최초의 성적 충동, 혹은 커다란 쾌감과 결합돼 있었다고 기억한다. 어렴풋하게만 기술돼 있지만, 조금 더 확정적으로 말하면, 기본적으로 그의 배회는 '위반'의 체험이고 이 위반은 종교의식과 성적 욕망에 밀접하게 기대고 있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바타이유적 체험' 아닌가? 사실 '성에 눈뜨다'란 주제 자체가 바타이유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때문에 벤야민이 나중에 파리를 탈출하면서 파리 국립도서관의 사서였던 바타이유(1897-1962)에게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포함된 마지막 유고를 맡긴 것은 '기묘한' 우연의 일치로 보인다(이 유고는 조르주 아감벤에 의해 1981년에서야 발견된다). 벤야민과 바타이유에 관한 글들을 찾아봐야겠다...

07. 0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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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0-05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타이유와 벤야민의 관계는 저 또한 오랜 시간 동안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주제인데, 이렇게 로쟈 님 글에서 만나니 또한 반갑군요.^^ 둘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헌으로는 일단 Michel Surya가 쓴 바타이유 전기가 있고ㅡ이 전기는 정말 얼마 없는 바타이유 전기들 중에서 백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ㅡ또한 로쟈 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Susan Buck-Morss의 책이 있지요. 특히나 저로서는 바타이유와 벤야민이 모두 멤버로 있었던 프랑스-독일 지식인들의 비밀 결사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얼마 전 김남시 님 서재에서 벤야민-바타이유-아감벤의 연결고리를 읽고 오호라~ 싶었는데, 어서 그와 관련된 이탈리아어 자료들을 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예전에 김남시 님께 서지사항을 문의드렸었는데, 아직 대답이 없으시네요^^;).

로쟈 2007-10-05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ichel Surya의 전기는 처음 듣는다 싶었더니 불어로 된 책이군요.^^; 저로선 그냥 에로티즘의 문제와 관련해서(벤야민에게는 은닉 혹은 억압돼 있는 게 아닌가 싶고요) 두 사람의 커넥션을 건드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고, 혹 좋은 참고문헌을 발견하시면 귀뜀해주시길(불어나 이태리어가 아니라면요^^)...

람혼 2007-10-07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ichel Surya의 바타이유 전기 "Georges Bataille, la mort à l'œuvre"는, Verso 출판사에서 "Georges Bataille: an Intellectual Biography"(ISBN 1-85984-822-2)라는 제목으로 영역되어 나온 바 있습니다.^^

로쟈 2007-10-07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도서관에 불역본만 있길래 아직 영역되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하긴 너무 방대한 분량이어서 읽을 만한 엄두는 잘 나지 않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