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방문자 수가 많다. 요즘 뜸하게 페이퍼를 올리는데도 '눈팅' 내방객들이 많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그녀의 책은 거기에 없었다' 같은 제목이 선정적이어서일까?(고로 대개는 '헛걸음'을 한 게 아닐까?) '저널리스트 마르크스'란 타이틀도 자칫 선정적인 것으로 읽힐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무얼 꾸며대는 건 결코 아니며 마르크스가 저널리스트로 쓴 기사모음집이 최근에 펭귄복으로 출간됐고 그 편집자인 레드베터가 한 잡지에 그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옮겨올 따름이다. 개인적으론 마감을 제때 지키지 못했다는 마르크스의 에피소드에서 매번 마감이 지나서야 가슴을 졸여가며 가까스로 원고를 마무리짓고 있는 나의 처지가 오버랩되어서이다. 그게 말하자면 나와 마르크스의 드문 공통점이겠다. 차이점? "누군가 마감 독촉을 할 때 가장 좋은 글을 썼다"는 마르크스와 달리 나는 매번 '가장 좋은 글을 쓸 뻔 했는데!'라며 한탄한다... 

한겨레(07. 10. 23) "기자 카를 마르크스는 마감 안 지켜’

그는 열정적인 언론인이었다. 굶어죽는 사람들의 고통을 황색지 기자 못지않게 선정적으로 묘사했고, 급진주의적 성향으로 편집자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하지만 마감 독촉에 시달린 뒤에야 좋은 글을 썼다는 점에서, 그는 천생 언론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름아닌 칼 마르크스의 이야기다.

마르크스의 언론인 생활에 대한 책을 집필한 미국 언론인 제임스 레드베터는 미국의 진보적 주간지 <더네이션> 최근호에 기고한 글에서 “1852~1862년 <뉴욕트리뷴> 런던 통신원 생활이 마르크스의 사상적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며,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철학자나 경제학자뿐만 아니라 기자로서도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PENGUIN CLASSICS DISPATCHES FOR THE NEW YORK TRIBUNE

당시 진보지 <뉴욕트리뷴>은 발행부수 20여만부의 세계 최대 신문이었다. 신문에는 10여년간 마르크스가 쓴 글 500여개(4분의1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대필)가 실렸다. 이는 오늘날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의 7분의1을 차지할 정도의 분량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신문사의 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떤 편집자는 그의 글 앞에 “마르크스는 매우 강한 입장을 갖고 있고, 그중 일부는 우리와 매우 다름”이라는 ‘편집자 주’를 붙이기도 했다. 마르크스 역시 엥겔스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신문사에서 자본주의적 착취를 당하고 있다며, “이따위 신문사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구역질이 난다”고 불평한 적도 있다.

당시 여행 제한으로 영국에 발이 묶여있던 마르크스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대영도서관에서 유럽 각국의 신문을 섭렵하며 미국 독자들이 접할 수 없었던 유럽의 최신 소식을 전달했다. 여기에 그의 역사에 대한 조예와 엥겔스의 특기인 군사적 지식이 버무려져, 마르크스의 칼럼은 ‘유럽 정치의 주요 사안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주는 글’이라는 평가까지 들었다. 1857년 마르크스는 영국 중앙은행이 활동을 중단할 것이라는 ‘특종’ 기사를 썼다. 아편무역과 노예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렬한 비판은 그의 글 중에서도 가장 ‘마르크스적’인 것으로 꼽힌다.

레드베터는 마르크스가 언론인 생활을 하며 얻은 사실(팩트)이 그의 사상 발전의 거름이 됐다고 지적했다. 레드베터는 또 “마르크스는 누군가 마감 독촉을 할 때 가장 좋은 글을 썼다”며 “공산주의자동맹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1848년 2월1일까지 <공산당선언>을 쓰라는 강력한 독촉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영원히 그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서수민 기자)

07. 10. 23.

P.S. 기사의 타이틀에선 '카를 마르크스'라고 해놓고 본문에선 '칼 마르크스'라고 쓴다('카를'은 물론 'Karl'을 독어식으로 읽어준 것이다). 아마도 기자와 데스크간에 의견 조율이 되지 않은 듯한데, '카를'이라고 티낼 것 없이 그냥 통용되고 있는 '칼'로 충분하지 않은가, 라는 게 내 생각이다(찾아보니 프란시스 윈의 평전이 품절됐다. 마르크스에 관한 전기로는 가장 평이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한나 아렌트'를 굳이 '해나 아렌트'라고 적어놓아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건 '원칙의 실천'이 아니라 '고집의 과시'로 여겨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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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0-23 19:34   좋아요 0 | URL
그냥 하나로 통일했음 좋겠어요. 카를(칼), 휴움(흄), 해나(한나), 롤스(롤즈) 등등

로쟈 2007-10-23 20:11   좋아요 0 | URL
'휴움'도 있나요? 흠...

마늘빵 2007-10-23 23:50   좋아요 0 | URL
오늘 읽은 어떤 책에는 그렇게 되어있더라고요. -_- 좀 옛날 분이 쓰신거긴 합니다.

로쟈 2007-10-24 07:05   좋아요 0 | URL
'휴움'의 경우엔 사정이 다른 것 같습니다.^^ 현재 혼용되는 표기는 아니니까요.

푸하 2007-10-23 21:24   좋아요 0 | URL
"매번 '가장 좋은 글을 쓸 뻔 했는데!'라며 한탄"-- 매번 가장 좋은 글 근처까지 가보신다는 말씀이신거죠? 마감의 압박은 좋은 글을 낳게하는 원천으로 볼 수도 있겠어요.^^;

로쟈 2007-10-23 22:24   좋아요 0 | URL
피가 마른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적어도 침은 마릅니다.--;

릴케 현상 2007-10-23 22:04   좋아요 0 | URL
벤담은 벤섬이라고 하던데요~

로쟈 2007-10-23 22:27   좋아요 0 | URL
그런 사례는 많지요. 짐멜->지멜, 임마누엘->이마누엘, 베르그송->베르그손, 로랜스->로런스 등등. 대체로 저는 관행을 존중하면서 일관성을 유지하자는 쪽인데, '원칙'을 강조하는 표기들이 너무 '소모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virtuepeak 2007-10-24 00:57   좋아요 0 | URL
월러스틴 같은 경우에는 이매뉴얼이라고 적더군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니 이게 자연스러울까요?

로쟈 2007-10-24 06:53   좋아요 0 | URL
처음부터 그렇게 소개된 경우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유명사 표기란 게 '차이'를 드러내주는 걸로 족하니까요. 프랑스 작가 '발자크'를 '발작'으로 표기하는 게 비효율적인 것은 그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임마누엘 칸트'를 '이마누엘 칸트'라고 표기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인지 저는 의문입니다...

자꾸때리다 2007-10-25 20:36   좋아요 0 | URL
하이덱거 같은 경우는 어떨까요? 나이 드신 분들은 하이덱거라고 쓰시던데.

로쟈 2007-10-26 20:58   좋아요 0 | URL
현재 '하이데거'로 통용되므로 별 문제는 아닌 거 같습니다.^^

lastmarx 2007-11-04 09:36   좋아요 0 | URL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은 재밌는 전기인데, 에드먼드 윌슨의 [To the Finland Station] 가운데 맑스 부분에서 가져온 게 많습니다.
예전에 정치부 기자일 때 <맑스는 다른 정치부 기자들과 달리>라는 메모를 한 적이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lastmarx/60018927087

로쟈 2007-11-04 09:52   좋아요 0 | URL
베꼈더라도 '표절'은 아니겠지요. 유명한 저작을 베낀다는 건 '자살'행위일 테니까요. 절판된 윌슨의 책은 다시 나온다는 얘기도 있던데, 가급적이면 원제대로 재출간되면 좋겠습니다...

lastmarx 2007-11-04 11:39   좋아요 0 | URL
표절이 아니라 윌슨이 맑스에 대해 논한 것들을 윈이 가져다가 논하거나 살을 붙이거나 했다는 것이지요. 평전은 각주가 없는 책이고 '생각'의 출처를 다 명시하진 않으니까요. 평전을 먼저 읽고 참 똑똑하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윌슨의 혜안이었던 것이지요. 클린턴 부부도 청년기에 읽었다던 To the Finland Station 원제로 고쳐 놓고 번역문장과 편집도 잘해서 고급스런 책으로 나오면 좋겠습니다.
 

일들에 치어서 마음은 바쁘고 몸은 피곤한 날들을 지나고 있다. 별로 내세울 만한 일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일들'은 항상 생색을 낸다. 해서 서재일은 잠시 자중하고 있는데(마구 올릴 때보다 글을 뜸하게 올릴 때 즐찾이 더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요즘 '오늘의 마이리스트'로 띄워놓은 '도리스 레싱 읽기'와 무관하지 않은 기사가 눈에 띄어, 그건 옮겨놓는다. 그녀의 책이 없었다는 '거기'는 아메리카이고, 그 동네에 사는 '예의없는 것들'은 노작가의 노벨상 수상에 아무런 감회도 동조도 없는 듯하다는 소식이다(알라딘 서재에서는 그녀의 소설이 오늘 드디어 '서재가 사랑한 책' 종합 1위에 등극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우리와는 '문화'가 다른 것이다. 물론 필자의 지적대로, 그보다 더 심각하고 뼈아픈 것은 "세계문학 속에 한국 문학의 독자적인 자리가 거의 없다는" 씁쓸한 현실이지만 말이다(몇 년전 모스크바통신에서도 적었듯이 러시아의 대형서점에서도 매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한국소설은 단 한권도 없었다.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싶다). 하니 없는 건 그녀의 책만이 아니다...

한겨레(07. 10. 22) 미국 서점에는 그녀의 책이 없었다

노벨문학상 발표가 나고 일주일 후에 아이오와에서 문학도서가 가장 많다는 서점에 갔다. 이맘때 한국의 경우를 떠올리며 으레 도리스 레싱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코너가 없을 뿐 아니라 그녀의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는 대답에 놀랐다. 서점 직원은 보유하고 있던 다섯 권 정도의 책은 이미 팔리고 새로 주문을 넣긴 했지만 책이 언제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서점 컴퓨터를 통해서 보니 미국 전체에서 <황금 노트북>을 주문한 총 부수는 2000부 정도였다. 본격문학 시장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미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적은 수요는 아니지만 해마다 노벨상 특수를 누리는 한국 출판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처음엔 미국이 노벨문학상 결과에 냉담할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영국 문학에 대한 묘한 열등감의 표현이거나 유력 후보였던 필립 로스가 수상하지 못한 서운함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그런데 국제창작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스태프나 세계 각국의 작가들도 대체로 노벨문학상에 별 관심이 없거나 비판적이었다. 스웨덴 한림원의 선택 기준을 신뢰할 수 없다는 사람이 많았고,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 아랍계 작가들은 가오싱젠, 존 쿳시, 오르한 파묵 등 기존 수상자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서구 중심적인 시각을 지닌 그들보다 뛰어난 작가들이 자국에는 적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노벨문학상이 절대적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노벨문학상 열풍은 다소 기이하기까지 하다. 물론 노벨상을 빌미로라도 문학이 얼마간 사회적 흥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문학에 대한 관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문학의 위기다 어쩌다 해도 실제로 한국만큼 국내 문학시장이 남아 있는 나라도 드물다. 소설이 아닌 시집이 소수이긴 하지만 일이만 부, 때로는 수십만 부씩 팔리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작가의 문제의식이나 생산력, 작품의 다양성에 있어서도 정체기에 들어선 서구 작가들보다 오히려 현재적 활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작가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내부의 관심과 활력을 어떻게 국제화하느냐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내는 요행을 바라기보다 한국문학을 국제화하기 위한 기반을 지금이라도 차분하게 만들어가야 한다. 우선 한국문학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뛰어난 번역자를 양성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외국문학을 국내에 소개할 때에도 베스트셀러 위주의 번역에서 벗어나 한국문학에 지적 자극을 줄 만한 선진적인 문학을 동시대적으로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양방향적인 교류가 없이는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몇 명의 국제적 스타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문학의 전체적인 흐름과 독자성이 무엇인가를 국제사회에 이해시키는 일이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아이오와 창작프로그램이 40주년을 맞는 해라서 세계문학을 조명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있었다. 아프리카 문학, 아랍 문학, 중국 문학, 일본 문학, 러시아 문학 등의 섹션이 마련되었지만, 한국 문학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로 이것이 세계화로 나아가려는 한국 문학의 현주소다. 국적이 다른 시인들이 모여 일본의 중세 시가양식인 ‘렌가’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응용해 영어로 공동창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문학에서 과연 세계와 공유할 만한 보편적인 양식이 무엇일까 반문해 보았다. 이제는 노벨문학상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그런 질문과 성찰을 해나가야 할 때다. 미국 서점에 노벨상 수상자의 책이 없었던 것보다 내가 이곳에 와서 더 뼈아프게 확인한 것은 세계문학 속에 한국 문학의 독자적인 자리가 거의 없다는 현실이었다.(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07.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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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10-22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이렇게라도 읽으면 좋은건가 싶다가도, 외려 사람들을 책에서 더 멀어지게 하는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오르한 파묵의 책 번역된건 다 있지만, 지난번 노벨상 발표후 나온 <새로운 인생>은 근 여섯달째 읽고 있어요. 도리스 레싱은 <황금노트북>과 같은 장편은 못 읽어 보고, 단편들만 접해봤지만, 역시 녹녹하고 기분좋게 읽히는 책은 아니죠. 찬물 한바가지 뒤집어쓴 것 같은 글들이었는데, 근데, 이렇게 마구 나오는건 팔리니깐 그런거겠죠???

로쟈 2007-10-22 19:45   좋아요 0 | URL
'더 멀어지게 하는건 아닌가'란 문제는 생각해볼 만하네요.^^ 역시 '명작'이란 건 나랑 안 맞아, 이렇게 나가떨어질 독자들도 있을 법하지만, 저는 '노벨상효과'라는 게 문학의 권위(아우라)를 유지시켜주는 데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나랑 안 맞아!'는 그래도 '이런 게 무슨 명작이야?'라는 태도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stella.K 2007-10-22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우리나라는 상에 너무 목숨거는 경향이 있어 마뜩칞아요. 이번에도 고은님 탈 줄 알고 기자들이 떼로 그의 집에 몰려갔다가 해산했다는 얘기 읽었습니다. 해프닝이라고 해야할지, 열망이라고 해야할지...>.<;;

로쟈 2007-10-23 13:17   좋아요 0 | URL
아마도 누군가 수상할 때까지 계속될 '해프닝' 같습니다...
 

자료 파일을 찾다가 문득 10년전 메모를 들추게 됐다. 딱 10년전 가을에 메모해둔 것인데, 얼마 안되지만 이런 메모는 보통 필요할 때 써먹기 위한 용도였다(두엇은 이미 써먹은 듯하다). '젊은날'의 기억이 잠시 떠오른다(따져보면 '국민의 정부'도 들어서기 전이고 IMF사태 직전이었다!). 여하튼 그런 날들이 있었다. 이런 메모에 주석을 붙이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지만 지금은 기력이 없다. 그냥 창고에 넣어둔다...

1. 인간의 모든 사유에 규범적 기능을 담당하는 이성 없는 삶, 다소간이나마 이성적이 아닌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의 삶이며, 이성적 활동, 즉 진/위, 선/악, 미/추를 가려내는 충동이 없는 인간의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즉 인간은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는 것이며, 이성이란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는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주장이나 서로 갈등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려는 다원주의는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 (박이문, <이성은 죽지 않았다>, 당대, 1996, 29쪽)

2.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조건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지구는 우주에서 유일한 인간의 거주지이다.(50쪽) 나는 한편으로, 인간조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영속적이며 인간조건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상실될 수 없는 일반적 인간능력을 분석하는 데 나의 논의를 제한하겠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역사적 분석을 하고자 한다. 이 분석의 목적은 근대의 세계소외, 즉 지구로부터 우주에로의 탈출과 세계로부터 자아 속으로의 도피라는 이중적 의미의 세계소외를 추적함으로써, 아직은 알 수 없는 새로운 시대의 출현으로 인해 거의 압도될 시점에 도달한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54쪽)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3. 여기서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라고 할 때 그 어떤 것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가령 '이탈리아에서 금년에 난 포도알의 수'는 실지로 어느 누구에 의해서 헤아려지고 말고와 관계 없이 일정한 것으로서 있는 것이요 이 수를 그대로 표현하는 명제가 진리이다... 후설의 심리학주의 비판은 이런 이념적 세계의 객관적 존립에 대한 확신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한전숙, <현상학>, 민음사, 1996, 86쪽)

4. 미학의 역사야말로 세계가 주관화되는 영역,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가 뒤로 물러나는 가장 탁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물러남이 바로 긴 진행과 정의 끝에서 볼 때 현대문화를 특징짓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뤽 페리, <미학적 인간>, 방미경 옮김, 고려원, 1994, 29쪽)



5. 토드 솔론즈(<인형의 집으로 오세오>): “이 영화는 코미디로 만들어졌다. 코미디는 격렬한 고통을 다루는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다. 모욕을 견디려는 안간힘 속에서 나는 우습고도 통렬한 무엇을 발견한다.”(<씨네21>, 97. 10. 7,  57쪽)



6. 미셀 세르: “철학이 세상을 폐기 처리해 버린 지 몇십 년 되었습니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을 예로 들어봅시다... '지각'이라는 개념은 우선 '지각'이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한다는 지적으로 이 책은 시작됩니다. 단지 단어들이 문제되고 있을 뿐입니다. 나의 접근방식은 다릅니다. 나는 우선 내가 느끼는 보르도 포도주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보르도 포도주를 마실 때, 나는 단어들을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1900년 혹은 1920년 이래로 철학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철학자들의 책임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있고, 그것이 쓰레기통이 아닌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발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대담: 지식의 항해’, <세계사상>, 97년 가을호,  324-6쪽)

翻身11

7. 유중하: “개망나니 도박꾼에서 혁혁한 홍군의 전사로의 변화를 가리키는 중국어 단어가 있으니 그것을 ‘번신’(翻身)이라 한다. 번신이라는 말을 한자 그대로 풀면 몸(身)을 뒤집는다(飜)는 뜻. 왜 뒤집는가. 갓난아이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누워 있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배로 방바닥을 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배밀이이다. 배로 방바닥을 밀자면 그보다 앞서 몸을 한바퀴 뒤집어야 하는 법. 갓난아이가 그 이름도 거룩한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려면 번신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씨네21>, 제155호, 98. 6. 9, 60쪽) 변신(變身)과의 비교.

 

07.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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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책일까? 싶은 책들에 대한 리뷰만큼 요긴한 게 없는데,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베르너 지퍼와 크리스티안 베버의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들녘, 2007)가 궁금한 책이고(긴가민가한 책이고) 아래의 리뷰가 요긴한 리뷰이다. 소개에는 "독일의 과학 저널리스트 베르너 지퍼와 크리스티안 베버가 저명한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특히 신경학자들을 방문하여 ‘나’라는 작은 우주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 책"이라고 돼 있다. 워낙 심상한/식상한 주제이기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게 되지만 이 책의 강점은 작년에 나온 책이라는 것. 그러니까 나름 '최신의' 연구성과들을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경향신문(07. 10. 20) 진정한 ‘나’란 없다

마흔살의 여성 로슬린 Z는 자신이 남자라고 믿는다. 스스로를 자기 아버지라고 믿었으나 이따금 할아버지라고 말한다. 아버지 이름으로 불러야 대답하고, 서류 서명도 아버지 이름으로 한다. 삶의 이력에 대한 질문에 아버지의 인생을 설명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로슬린은 카프그라 증후군을 앓고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다. 그것도 자기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는 극히 특수한 내적 변신 사례다.

쉰한살의 건축 노동자 토미 맥휴는 가벼운 뇌출혈을 겪고 나서 혁명에 가까운 경험을 한다. 응급수술을 받은 지 2주일 만에 갑자기 그럴 듯한 시를 쓴다. 뿐만 아니다. 솜씨를 인정받아 여러 화랑에서 작품 전시회까지 여는 미술가가 됐다. 과학적으로도 소명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여자 주인공 트리니티가 ‘경험된 가상’을 남자 주인공 네오에게 설명하면서 던지는 이런 물음과 흡사한 광경이다. “완벽하게 현실인 듯한 꿈을 꾸어 본 적이 있어? 네가 이 꿈에서 다시는 깨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게 실제이고 어느 게 꿈인지 어떻게 알지?” 로슬린 Z와 토미 맥휴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극단적인 두 사례에서 엿보이듯이 ‘진정한 나’의 정체성은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달리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독일 과학 저널리스트 베르너 지퍼와 크리스티안 베버가 함께 지은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원제 ICH, Wie wir uns selbst erfinden)는 철학이나 종교적으로만 들리는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를 과학적으로 궁구한다. 종반부를 보면 자연과학과 철학·종교의 접목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과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느닷없이 멀쩡한 ‘나’를 잃어버릴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어서다. 실제로 여러 명의 ‘나’로 인식되거나 ‘나’가 아닌 것으로 자각되는 생생한 실례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이 등장한다.

그래선지 지은이들은 들머리에 먼저 ‘부작용에 대한 경고’를 써 붙였다. 혹시 책을 읽고 미혹(迷惑)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해서일까? 아무튼 경고문의 제목이 더 겁을 주는 듯하다. ‘인간의 기억은 위대한 쇼다.’ 성자(聖者)들은 흔히 ‘진정한 나는 내 안에 있다’며, 깨달음이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이라고 안내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나’란 것은 없다고 결론짓는다. 인류가 여태껏 생각하던 ‘나’는 ‘조작된 나’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그런 점에서는 불교와 라마교에서 ‘나’가 없다는 명제와 일치하는 것 같다.

인간이 ‘나’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순전히 ‘기억’ 덕분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이 기억은 거의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고 지은이들은 최근 연구결과를 토대로 입증한다. 결국 기억이라는 게 ‘나’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매듭짓는다. 기억은 한정된 뇌 영역에 저장됐다가 ‘자서전적인 나’를 구성하는데, 이런 나에게서 기억을 뺀다면 더 이상 ‘나’가 아닌 것이다.

이 책은 인류가 수백만년 동안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숙제인 ‘참 나’에 관한 탐구를 오싹한 연역법으로 전개해 나간다. 그것도 시종 기존 관념을 무너뜨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몇 가지만 들어보자. 마음과 몸을 이원적으로 생각하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은 틀렸다. 마음은 백지장 같고 경험에 의해 모든 지식이 쌓인다는 경험론도 허구다. 나 안에는 고정된 성격이란 없다. 통일된 사령부가 없는 것은 물론 ‘왕이 없는 제국’이다.

새로운 견해와 학설도 적잖게 소개된다. 인간은 자유,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기존의 견해는 일종의 ‘망상’이다. 어린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을 안다. 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성격이 혼재할 수 있다. 사람의 성격은 쉰살이 넘어도 변한다. 성역처럼 여겨지던 프로이트식 무의식이 어린 시절에 결정된다는 이론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물론 저자들이 새로 발견하거나 창조한 내용은 아니다. 다양한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면서 축적한 지식의 집합체다. 구슬을 꿰어 보배를 만든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민족학자, 문화학자, 철학자, 종교학자, 신경학자들의 노력이 망라됐다. 그 가운데서도 신경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와 사례가 풍성하게 인용된다. 책에는 전문가들만이 쉽게 알 수 있는 생경한 전문용어들이 많이 나타나지만 보통 독자들의 눈높이를 감안한 언론인들의 글솜씨인지라 능히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해’ 하고 자아찾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게다. 그런데 ‘나’가 없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저자들은 이렇게 충고한다. “여러분의 ‘내’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 것. 하지만 여러분의 인생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 그리고 나서 저자들은 자연과학도답지 않게 사회과학적인 마무리 말을 던진다. “‘나’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나’라고만 말하는 것은 타락이며, 스스로를 해체하는 행위다. ‘나’는 ‘우리’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저자들의 마지막 메시지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인 셈이다. ‘소우주’인 ‘나’에 대한 긴 탐험의 맺음말로는 좀 엉뚱한가?(김학순 선임기자)

07. 10. 19. 

P.S. 리뷰를 읽고 떠올린 책은 두 권이다. "사회과학에서 개념화, 이론화해 온 ‘자아’에 대한 현대의 논쟁을 명료하게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책"이라고 소개된 <자아란 무엇인가>(삼인, 2007). 원제 자체가 'Concepts of The Self'(2001)인데, 자연과학쪽 얘기가 많이 들어간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와 보완적으로 읽을 수 있겠다. 하지만 분량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게 약점. 260쪽 정도의 분량이면 이 주제에 관하여 그냥 '맛보기'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또 한권은 다니엘 데닛(데넷)과 더글라스 호프스태터가 같이 엮은 <이런, 이게 바로 나야!>(사이언스북스, 2001). 원저는 'The Mind's I: Fantasies and reflections on self and soul'(1981)이고 짐작에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보다 더 술술 읽히는 책이다. 다만 1981년에 나온 것이라 자연과학의 연구성과를 반영하는 책으로선 좀 오래된 감이 있다. 어떤 경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원서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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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0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심술 2007-10-20 16:27   좋아요 0 | URL
흥미 땅기는 책이네요.

로쟈 2007-10-21 00:30   좋아요 0 | URL
의외로 관심들을 가지시는군요.^^

이리스 2007-10-20 16:42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굉장히... 에잇, 구입하겠어요!

로쟈 2007-10-21 00:29   좋아요 0 | URL
^^
 

'로쟈의 페이퍼'로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예의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소개이다. 정작 내가 아직 손에 들지 않은 책들도 많은데, 특히 마지막에 거론한 <백낙청 회화집>이나 한창기 선생 문집 등은 나의 재력으론 감당할 수 없고 도서관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려야겠다. 그런 식으로 또 한 계절이 지나가누나... 

깊어가는 가을 독서의 여정은 ‘무시무시한 책’부터 시작해보자. 노엄 촘스키가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생생하고, 풍부하며, 명료하다.”며 격찬한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2007)이 바로 이 ‘무시무시한 책’이다(실상 무시무시한 건 책이 아니라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사다리 걷어차기>(부키, 2004) 이후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치명적인 덫에 대해서 신랄하게 폭로해왔다. 하여 ‘우리시대의 경제학 멘토’에게서, 덩달아 ‘무시무시한 인간’이 되지 않고도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지식을 얻어 보도록 하자.

 

 

 

 

그리고 여차하면 아이비리그의 경제학 멘토 로버트 프랭크의 <이코노믹 씽킹>(웅진지식하우스, 2007)의 도움도 빌리자.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걸핏하면 ‘경제’를 말하는 이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부수적으론 “인문학 교수들은 왜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할까?” 간파하기 위해서도(사실 어려운 질문은 아닌데, 박식함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이 권위자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경제문제가 ‘해결’이 되면, 보다 근원적이거나 거시적인 관심을 가져보자. 프랑스의 인문학자 질베르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문학동네, 2007)은 아마도 최근에 나온 가장 방대한 이론서일 텐데, 부피에 걸맞게 문학, 인류학, 사회이론, 심리학, 종교사를 모두 아우르는 상상력 연구의 고전이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626055). 곧바로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진형준 교수의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문학과지성사, 1992)이나 송태현 교수의 <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살림, 2005)을 미리 참조하는 게 좋겠다. 전자는 뒤랑의 신화방법론을 다루고 있는 연구서이고, 후자는 뒤랑의 상상력 이론을 융, 바슐라르의 이론과 함께 개관하고 있는 책이다.

 

 

 

 

거시적인 것으로 치자면 문명론을 빼놓을 수 없겠다. 임철규 교수의 <그리스 비극>(한길사, 2007)은 서양문명과 정신사의 한 기원이라 할 '그리스 비극' 전체를 깊이 조명하고 있는 연구서로서 이 분야의 국내서로는 가장 두툼하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617149). 천병희 교수의 <그리스 비극의 이해>(문예출판사, 2002)나 김상봉 교수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한길사, 2003)를 읽고서 매혹과 함께 갈증을 느낀 독자라면 이 계절에 도전해볼 만한 책이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그리스문명학의 권위자 장 피에르 베르낭의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주저의 하나인 <그리스인의 신화와 사유>(아카넷, 2005) 외에도 <그리스 사유의 기원>(길, 2006), <베르낭의 그리스 신화>(성우, 2004) 등이 소개돼 있다. 이 경우에도 김재홍 교수의 <그리스 사유의 기원>(살림, 2003)을 길잡이삼아 먼저 읽어볼 수 있겠다.

 

 

 

 

 

 

 



 

기원으로서 그리스 문명론과 함께 읽어봄 직한 책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1875)과 그에 대한 자세한 읽기이다. 지난봄 마루야마 마사오의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문학동네, 2007)에 이어서 고야스 노부쿠니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역사비평사, 2007)가 김석근 교수의 노고로 최근에 한국어본을 얻었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111057). 후쿠자와의 책은 일본 근대사뿐만 아니라 우리 근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독해둘 만한 책이니 두 권의 ‘참고서’는 아주 요긴하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정작 <문명론의 개략>(홍성사, 1986)이 절판된 지 오래되었다는 점(그의 자서전도 소개된 마당인지라 이런 ‘공백’은 기이하게 느껴진다).

 

 

 

 

상상력과 문명에 대한 풍족한 독서의 여정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다시 우리가 내딛고 있는 현실적 지반이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책들도 그런 의미에서 챙겨둘 만하다. 한국 현대 지성사의 산 증인이자 사상계의 거목 백낙청 교수의 <회화록>(전5권, 창비사, 2007)은 말 그대로 ‘우리시대 지성사 40년의 집대성’이다. 더불어, 월간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의 발행인이자 편집이었던 고(故) 한창기 선생의 문집 <배움 나무의 생각>(휴머니스트, 2007) 외 두 권도 지난 시대의 소중한 발자취로 기억해둠 직하다.

 

 

 

 

그럼, 이제 챙길 건 다 챙기고 기억할 건 다 기억한 것인가? 앗, 유령들을 빼놓았다! 새 번역본이 나온 ‘무시무시한 책’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은 각자가 상대하시길!..

 

 

07. 10. 19.

 

 

 

 

 

 

 

 

 

 

P.S. 분량상 다루지 못한 책들 가운데 가장 흥미를 끄는 책은 타니아 모들스키의 <너무 많이 알았던 히치콕>(여이연, 2007)이다. 원제는 'Hitchcock & Feminist Theory'(히치콕과 페미니즘 이론)라고 뜨는데, 찾아보면 '너무 많이 알았던 여자들'이 타이틀이고 그건 부제로 돼 있다. 여하튼 페미니즘 이론으로 히치콕의 영화들을 독해하는 책인 듯하다.

 

 

문득 모스크바에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을 자세히 읽던 기억이 난다. 좀 으스스한 그의 영화세계로 떠나가보는 것도 계절을 나는 한 가지 방법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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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0-19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이 아니라 이미 겨울입니다.. 가을 자켙은 하루이틀 걸치는 것으로 제 임무를 다하는군요. 가을이 가도 저 무시무시한 책들은 독서리스트에 올립니다. <그리스 비극>과 <나쁜 사마리아인>. 그리고 저 지젝도 최근에 다시 읽고 있어요.
건물의 창들이 좀 비현실적으로 보여요. 그 안에 것이 궁금해지지 않을 정도로^^

로쟈 2007-10-19 20:09   좋아요 0 | URL
그래도 아직 한달이 남았는데요.^^; 건물 사진은 아마 영화 스틸사진일 겁니다(자연스레 '비현실적'인)...

2007-10-20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20 12:21   좋아요 0 | URL
'참으로 열심히' 읽지는 마시길. 저도 가끔 사기를 당하니까요.^^;

Kitty 2007-10-20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페이퍼에서 무려 지금 읽는 책을 발견하다니 감동(?) ㅠㅠ
Economic naturalist(이코노믹 씽킹?;;) 읽고 있는데 재미있네요.
소개해주신 책들 언제나 감사히 잘 참고하고 있습니다 ^^

로쟈 2007-10-20 12:22   좋아요 0 | URL
사실 경제학 책 두 권은 따로 소개가 필요없는 책들이죠.^^ 이미 베스트셀러들이니까요...

lastmarx 2007-11-0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앙대 대학원신문을 보니 4면에 실렸더군요. 인터넷 서평꾼이라는 겸손한 소개와 함께. 로쟈님을 종이로 접하니 색다른 반가움이 또르륵.

로쟈 2007-11-04 09:52   좋아요 0 | URL
편집자가 제목을 더 그럴 듯하게 붙였더군요.^^;

lastmarx 2007-11-04 11:42   좋아요 0 | URL
6면의 제 글은 '가라타니'를 '가라타니 고진'으로 고쳤으니 고쳤다고 할 수도 없는데, '무시무시한 책과 가을나기'는 로쟈님이 붙인 게 아니었군요. 일교차도 심한데.

로쟈 2007-11-04 11:59   좋아요 0 | URL
대부분의 타이틀은 그냥 편집자가 알아서 붙입니다. 저도 쓰신 글은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