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브레이크 시간에 잠시 읽은 기사는 패션사진작가 김용호씨의 사진전 소식이다. 'mom'(몸)이 전시회의 타이틀이라는 데서 짐작해볼 수 있지만 누드사진들이 빼곡하게 전시돼 있다고(전시회의 주제는 '리얼 누드: 새로운 몸의 발견'으로 돼 있다. http://www.daelimmuseum.org/exhibition/now_view.jsp 참조). 관련기사를 자료로 담아둔다.

매일경제(07. 11. 19) 부담스럽지 않은 누드 김용호 사진전 `mom`

"몸은 인간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리 없는 언어입니다. 소리가 없으니 부를 일도 없고, 부르지 않으니 소리도 없습니다." 차가운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17일 늦은 오후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 단풍이 길거리를 울긋불긋하게 뒤덮은 미술관 도로에는 김용호 작가(51)의 사진전을 보러오기 위한 차들로 빼곡했다.

미술관 2층과 3층에 전시된 작품들의 느낌은 `쇼킹` 그 자체였다. 사진기 렌즈를 통과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의 몸뚱이들이 적나라하게 전시돼 있었다. `은밀한 부위(?)`마저도 당당하게 내놓은 사진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관람객들의 시선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거부감 없는 누드 사진들이었다. 적나라한 맨몸 사진들이지만 포르노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에 가까웠다. 관람객들의 몸과 사진의 몸은 다를 게 하나 없는 `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패션사진작가 김용호 사진전 `몸`이 대림미술관에서 지난 17일부터 시작됐다. `몸`은 연예인, 무용가, 미술인, 음악가,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어린이 등 다양한 인물의 누드 사진 14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회. 대림미술관 2층과 3층은 김 작가가 찍은 화려한 몸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 속 주인공의 면면은 화려했다. 유나미(전 싱크로나이즈 선수), 강예나(발레리나), 김판선(안무가), 박윤정(패션디자이너), 션(가수), 오광록(배우), 이건수(월간미술 편집장), 이동은(어린이), 이범수(영화배우), 이상봉(패션디자이너), 장두이(연극연출가), 장루이(장두이의 아들), 마돈나 노현정(트랜스젠더), 홍석천(배우) 등. 다양한 인물의 순수한 몸을 작가적인 시선으로 카메라 렌즈에 담아냈다. 김 작가가 찍은 국립무용단 발레리나 김주원과 영화배우 김정은의 누드 사진은 이번 사진전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 전시는 김 작가의 실험적인 누드를 통해 인간의 `몸`을 둘러싼 다양한 면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등 성적소수자들의 몸을 통해 이들도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배우 홍석천 씨는 "몸은 `나란` 사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최상의 도구입니다. 난 내 몸을 너무 사랑하며 반대로 또 너무 혹사시키는데요…. 그런 과정을 통해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라고 나름의 몸 철학을 밝혔다. 몸짱부터 몸꽝까지 다양한 `나체 사진`이 있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임신부, 발가락이 찢어진 발레리나의 발, 중요 부위를 자신 있게 드러낸 남녀의 사진 등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한편 `몸`은 단순한 누드 사진이 아닌 인간의 몸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전시회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용호 작가는 "몸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전시회를 기획했다"며 "몸을 통해 발견하는 새로운 모습들이 `몸` 전시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내년 1월 27일까지다.(정승환기자)

07.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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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 2007-11-19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자 매경에서 이 전시회 기사를 보고, 관람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개인적으로 오광록 아저씨의 몸이 가장 궁금합니다 ㅋㅋ

로쟈 2007-11-19 23:38   좋아요 0 | URL
링크된 미술관 홈피에 이미 떠 있던데요.^^
 

계간 <창작과비평> 겨울호가 나왔다. 정기독자인지라 내주에는 책을 받아보게 되겠지만, 이번호가 조금 다른 느낌을 갖게 하는 건 '한국문학,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기획특집에 어쩌다 필진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과분한 청탁을 받고도 빈둥거리다가 지난달 마감을 지나서야 끙끙대며 몇 자 적어낸 기억이 있다(그나마 꼼꼼한 편집진의 체크 덕에 부끄러운 꼴은 면했지 싶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이란 화두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특집의 다른 꼭지들은 눈여겨볼 만하겠다. 언론의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11. 19) '한국문학의 세계화', 문제는'창조적 보편성'이다

한국문학번역원 통계에 따르면 2007년 현재 해외에 번역된 한국문학 텍스트는 27개 언어 2,340여종이다. 정부가 지원에 나서면서 해외 번역ㆍ출판이 본격화된 지 20년 남짓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성과가 결코 작지 않다. 2년 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으로 초청되고, 최근 고은, 황석영씨 등이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등의 진전이 있지만, 세계 독자들에게 한국문학의 존재감은 여전히 미미한 상황이다. 계간 <창작과비평> 겨울호는 국내 문학평론가 및 외국 작가들의 견해를 통해 한국문학의 세계문학과의 소통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특집을 마련했다.

한국문학의 경쟁력
윤지관 한국문학번역원장은 현재의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으로 인정받을 만한 성취가 있는가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개진했다. 평론가 임홍배씨와의 대담에서 윤 원장은 최근 나온 한국 역사소설들을 거론하며 “역사에 대한 사유의 깊이가 소설에 반영되지 않았다”며 “미학에서는 승리했지만 철학에서는 미흡한 경우가 많다”고 평가했다. <손님> <바리데기> 등 황석영씨의 근작에 대해선 “90년대 이후 서사가 약화된 한국문학의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다”면서도 “세계문학이라는 기준에서 볼 땐 아쉬움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 평론가 정홍수씨는 한국문학을 재단하는 ‘경쟁력’이란 잣대가 “서양 근대의 특정한 소설미학을 움직일 수 없는 전제로 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씨는 한국문학이 고유의 역사적 경험과 통찰에 기반한 ‘창조적 보편성’을 확대해야 한다면서 그 구체적 성과로서 황석영씨의 작품을 들었다.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의 3부작은 긴박한 현실의 문제를 한반도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큼직한 시야로 그 형식 속에 녹여냈다”는 것이 정씨의 주장이다.

국내 체류 중인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는 이제하, 황석영, 이승우씨의 작품을 거론하며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단합의 힘, 공유의 느낌, 바로 정(情)이란 단어로 표현되는 어떤 것이 아닌가 싶다”며 “가장 비극적 상황에서조차 정이 인간을 연결하고 응집하게 유도하며 모욕에 대해 저항할 수 있도록 하는 복합성이 한국문학의 가장 큰 힘”이라고 평가했다.

세계문학과 소통하는 길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에서 입지를 다지려면 무엇보다 번역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평론가 정여울씨는 “원로ㆍ중진 작가의 ‘살아있는 고전’에 치중돼 있는 번역작품 선정을, 현재 가장 활발히 창작하고 있는 90년대 이후 등단 작가 쪽으로 확장해 한국문학의 생생한 현장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문단이나 학계에서 경험, 연륜을 주로 따져 번역작업을 맡기는 관행을 지적하며 “어느 세대보다도 외국어에 능통한 젊은 세대 번역가들을 발탁한다면 참신하고 새로운 감수성을 지닌 번역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평론가 이현우씨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계문학은 특정 공동체가 아닌 세계공동체를 지향하는 민족문학이어야 한다”며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교통공간으로서 더 많은 번역공간이 필요하다”고 썼다.

중국문학 전문가인 이욱연 서강대 교수는 위화, 쑤퉁, 모옌 등의 작가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를 분석했다. 이 교수는 특히 위화를 예로 들며 “미국에서 <살아간다는 것> <허삼관매혈기>를 번역 출간하려 했을 때 ‘소설 속 인물을 이해할 수 없다’고 거부하는 출판사가 있었다”며 “하지만 현실의 고난조차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푸꾸이, 허삼관 같은 인물이 진정한 중국인, 위화 소설의 진정한 문학적 개성으로 인정받으면서 위화 문학은 세계문학으로 나아가게 됐다”고 썼다. 이 교수는 “지금 한국문학은 개별 작가들이 독자적 문학세계를 통해 세계와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국민문학으로서 집단적 정체성과 개성을 보여주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이훈성기자)

07.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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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 2007-11-19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창작과 비평 구독하고 있는데(잘 읽고 있진 못하지만).. 이번호는 꼼꼼하게 읽어봐야겠어요. 로쟈님의 글 기대하겠습니다^^

로쟈 2007-11-19 23:39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재생산에 대하여>(동문선, 2007)이 출간된 김에 알튀세르 읽기의 리스트도 만들어둔다. 새로 번역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대해서만큼은 조만간 다시 읽어볼 예정이다. 격세지감이 느껴지게도 대부분의 책들이 품절된 상태이다...


1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재생산에 대하여- 자크 비데 서문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10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2007년 11월 18일에 저장
절판
철학에 대하여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백승욱 옮김 / 동문선 / 1997년 5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07년 11월 18일에 저장
품절
아미엥에서의 주장
루이 알튀세르 지음 / 솔출판사 / 1991년 12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2007년 11월 18일에 저장
절판
맑스를 위하여- 백의신서 54
루이 알튀세르 지음, 이종영 옮김 / 백의 / 1997년 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07년 11월 18일에 저장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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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1-24 05:10   좋아요 0 | URL
<마키아벨리의 고독>도 예전에 새길 출판사에서 번역된 적이 있었는데요, 정말 이제 보니 품절된 책들이 정말 많군요...

로쟈 2007-11-24 10:28   좋아요 0 | URL
이미지가 뜨는 책들 위주로 골랐는데, '많은'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이 품절/절판된 상태입니다...

람혼 2007-11-24 12:17   좋아요 0 | URL
정말 로쟈님 말씀대로, 격세지감입니다...
 

며칠전 서점에서 얼핏 들춰본 책에 <대단한 책>(마음산책, 2007)이 있다. 저자가 일본 여성이라는 것과 의외로 러시아 작가들의 이름이 자주 눈에 띈다는 게 특이했는데, 오늘 몇 개의 서펑을 읽어보니 그럴 만하다. 저자가 일본에서도 아주 유명한 러시아어 통역사였던 것이다. 20년동안 하루에 7권씩 읽었다는 그녀의 다독/속독도 놀랍지만 나로선 러시아책들에 대한 독후감들을 구경해보기 위해서 책을 사들지 모르겠다(아님 도서관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거나). '대단한 책'이라기보다는 '대단한 독서광'에 관한 리뷰를 일단은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11. 17) '대단한 독서광' 그녀의 삼매경

<완전히 제압당해 재기불능으로 만들 것 같은 대단한 책>이 원제인 이 책의 저자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ㆍ1950~2006)는 20년 동안 하루 평균 7권의 책을 읽어치운 일본의 다독가이다.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잡지 <주간문춘>(週刊文春)에 연재한 ‘독서일기’와 10년간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서평을 담은 책이다. 그녀가 읽은 책 가운데 390권에 대한 서평이 실려있다.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한평생 책을 끼고 산 다독가의 삶이 흥미롭다. 요네하라 마리는 일본의 유명한 러시아어-일본어 동시통역사였다. 도쿄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따라 체코 프라하에 체류하면서 러시아어를 익혔다. 모든 수업이 러시아어로 진행되는 구소련 대사관 부속 학교에서 러시아어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책을 읽는 버릇이 생겼다. 일본어를 잊어버리기 시작하자 일본 문학작품을 읽었다.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러시아어 작품을 읽으면서 러시아어 실력을 향상시켜나갔다.

어릴 때 붙은 책 읽는 습관은 한평생 따라다녔고 책 읽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먹는 속도, 걷는 속도, 책을 읽는 속도가 다른 사람보다 빨랐는데 먹기와 걷기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라고 어머니로부터 잔소리를 들었지만 책 읽기는 아무리 빨리 해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입시에서 해방되었을 때부터 책을 읽는 속도가 매우 빨라져 몇 백쪽의 책을 20분만에 읽어치울 정도로 속독가가 됐다.

그녀가 읽어치운 책은 러시아와 일본 문학, 국제정치, 논픽션, 어학ㆍ사전류, 개ㆍ고양이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특히 국제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 일본의 역사교과서 파동, 2002년 한일 월드컵, 이라크전쟁 등에 대한 촌평을 읽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9ㆍ11테러 직후 그녀는 “고이즈미 총리의 눈매가 완전히 변했다. 일본은 미국의 속국이니 속국의 지혜인 면종복배를 관철시켜야 하나, 고이즈미 총리는 진심으로 복종한다.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적었다.

책에는 또 눈이 빡빡할 때 눈물이 나게 하는 책을 펼쳐 드는 등 군데군데서 독서광의 삶이 드러난다. 나이 들어 난소암에 걸렸을 때 암 관련 서적을 독파하면서 자신의 치료 경험에 비추어 책을 검증하는 서평을 쓰기도 했다. 그녀가 서평을 쓴 책들 가운데 국내에 번역 소개되지 않은 책들이 많지만 짤막한 소개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책은 인간의 감정을 흔들어 놓는 존재이지만, 내가 최고로 생각하는 감정은 언제나 바로 웃음이다. 웃음을 주는 저자가 가장 좋다”고 했다.(남경욱 기자)

07. 11. 18.

P.S.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의 책으론 <프라하의 소녀시대>(마음산책, 2006)를 필두로 하여 댓 권의 책이 번역/소개돼 있다. 올해만 네 권이 나온 것이니 나름대로 '붐'이라 할 만하다. 아는 사람만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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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18 17:13   좋아요 0 | URL
부럽네요- 그렇게 빨리 읽으면, 정말 따라잡을 수 없잖아요-
저는 대학시절 제일 친한 친구가 책을 엄청 많이 읽어서, 그 친구를 따라잡겠다고 좀 더 많이 읽기 시작했었는데, 이미 저랑 속도 자체가 너무 달라서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로쟈 2007-11-18 17:22   좋아요 0 | URL
한때 속독법이 유행하긴 했었는데, 모든 책을 속독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가령 시집 같은 걸 속독한다는 게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요. 물론 필요한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는 건 부러운 능력이지요...

라주미힌 2007-11-18 17:38   좋아요 0 | URL
'프라하의 소녀시대'의 그녀군요...
이 책도 흥미롭게 읽었는데, 다독가로써의 그녀도 흥미롭군요.

로쟈 2007-11-18 17:45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제쳐두었었는데, 이번에 관심을 갖게 되네요...

소경 2007-11-18 21:22   좋아요 0 | URL
그래도 기사에 나올 사진인데 머리가 헝클어진 채 찍었던 건 예외네요. 그렇게 책을 빨리 읽으면 쥐어 짜는 일도 없을 텐데.....이론 책을 시집처럼 박터지게 읽는 저로써는 샘나네요.

로쟈 2007-11-19 12:28   좋아요 0 | URL
이론서나 시집이나 원래 그렇게 읽는 거 아닌가요.^^;

바람돌이 2007-11-19 00:20   좋아요 0 | URL
프라하의 소녀시대에서 참 건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저런 능력까지... ㅎㅎ 마녀의 한다스도 볼려고 꽂아두고 앞부분 조금 읽었는데 꽤 재밌을 것 같아요.

로쟈 2007-11-19 12:28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미녀의 한다스'인 줄 알았습니다...
 

대학신문에서 '21세기의 사유들' 연재를 옮겨왔었는데, 알라딘에서 다른 분들도 옮겨놓는 터라 지난 두어 주를 생략했다. 이번주까지 하면 안토니오 네그리(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861) 비토리오 회슬레(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921) 장-뤽 낭시(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990) 등이 더 다루어졌다(기억에는 랑시에르 정도가 남아있다). 이 연재 대신에 옮겨놓는 것은 이번 가을에 출간된 두 권의 책,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과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도서출판b, 2007)에 대한 리뷰이다. '해체와 마르크스주의의 때맞지 않은 조우'라는 관점에서 이 책들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대학신문(07. 11. 19) 해체와 마르크스주의의 때맞지 않은 조우

세인들의 오해와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자크 데리다의 관계는 꽤 막역하다. 가령 루이 알튀세르는 데리다의 ‘악어(cai­ man)’였고, 데리다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악어’였다(‘악어’란 이들의 모교인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수자격시험 준비생들을 지도하는 과외교사의 별칭이었다). 그러나 세인들의 오해가 틀린 것도 아닌 것이, 마르크스‘주의’와 데리다의 관계는 겉보기에 그리 밀접하지 않았다.

물론 데리다가 1979년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렀고, 1982년에는 마이클 라이언이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라는 책을 발표해 데리다의 사유가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저서 전면에 처음 드러낸 것은 1993년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발표하면서였다.



프랑스의 역사적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데리다의 사상이 조우할 수 있는 계기는 1972~1978년과 1983~1984년에 마련됐다. 1972년 공산당은 사회당과 공동강령을 발표했고(그 결과 1978년 총선에서 공산당은 프랑스 야당의 제1좌파 자리를 사회당에게 내줘야 했다), 1976년에는 제22차 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을 포기했으며, 1983년부터는 공산당 지지자들이 대거 사회당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요컨대 이 기간 동안 공산당은 전후 이래로 프랑스 지성계에서 확고하게 누렸던 ‘어떤’ 권위를 잃었고, 그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을 옭아맸던 교조주의가 무너졌던 것이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데리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서로에게 ‘말조심’하게 만들었던 ‘봉쇄장치’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알튀세르가 데리다를 우호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두 편의 수고(手稿),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1982)과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1986)을 집필한 것도 이 무렵이다.

데리다의 이력에서 보면 더욱 더 직접적인 계기는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인 1990년에 찾아왔다. 이 해는 1985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발표했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이 동구권에서부터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으며 서서히 종말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는 점에서 진정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이었다. 이 가을의 끝자락이 겨울을 예고할 즈음인 1990년 초, 데리다는 전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혁명의 고향인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그 뒤(『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외에도) 『다른 곶』(1991), 『법의 힘』(1994), 『우정의 정치학』(1994) 등 정치적 저서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고 2007년, 이제 우리 앞에서도 데리다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조우가 ‘때맞지 않게’ 되풀이되고 있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가 각각 15년과 11년의 세월을 건너 우리 앞에 나란히 도착한 것이다(사실 『대중들의 공포』의 모태는 1994년 영어로 먼저 발표된 『대중들, 계급들, 관념들』이니 이 책 역시 약 15년의 세월을 건너왔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예전에 발표됐던 책들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이 조우가 ‘때맞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등장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준거의 토대, 즉 현실사회주의가 와해된 상황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때맞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오히려 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가 그때보다 훨씬 강고해진 바로 지금 이곳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더욱 더 때맞지 않은 것이리라. 게다가 발리바르라니, 누가 지금도 알튀세리앙들을 읽는단 말인가? 이 ‘때맞지 않음’은 단순한 ‘시대착오’가 아닐까?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데리다와 발리바르(이제부터 이 고유명사는 ‘동시대 마르크스주의’의 환유이다)의 조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발리바르 이전에 알튀세르가 주목했던 데리다의 개념들은 ‘여백(marges)’과 ‘산포(disse′mination)’였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들을 통해 일체의 목적론을 부정한 새로운 유물론, 즉 마주침의 우발성과 혁명의 필연성을 사유하는 유물론을 구축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에서 라이언이 시도하고자 했던 바도 (비록 좀더 포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데리다와 마르크스는 무엇보다도 일체의 ‘형이상학’(여기에는 실증주의, 자연주의, 객관주의 등을 비롯해 당/국가로 상징되는 중앙집권주의/중심주의, 자본주의의 신용체계 등이 모두 포함된다)에 대한 비판자라는 점에서 비교 가능하다는 것이 라이언의 전제였다.

발리바르도 형이상학의 해체라는 데리다의 테마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알튀세르나 라이언과 비슷하지만, 오히려 데리다의 방법론 자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이들과 다르다. 데리다와 발리바르가 공유하는 이 방법론, 흔히 우리가 ‘해체(deconstruction)’라고 부르는 이 방법론을 내 식으로 풀자면 ‘아포리아(aporia)의 드러냄’이다.

데리다는 ‘정치적 전환’을 감행하기 전에도 늘 아포리아에 주목해왔다. 데리다가 형이상학을 해체할 때 즐겨 쓴 방식이 바로 이것, 즉 일체의 형이상학적 담론에 내재된 논리적 궁지(또는 결정불가능성/계산불가능성)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발리바르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개념들, 요컨대 이데올로기, 계급, 당/국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이해해왔던 방식대로의 정치 개념 그 자체가 다다를 수밖에 없는 아포리아를 드러냄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내부에서부터 ‘해체’한다.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대중들의 공포』에는 데리다와 발리바르의 이런 유사점이 책 제목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령’이 아닌 유령‘들’, ‘대중’이 아닌 대중‘들’로 표기된 제목에서부터. 복수(複數)로 표기된 이 두 단어는 그 자체의 양면성/양가성을 드러낸다(이런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데리다의 개념은 오히려 ‘파르마콘’[pharmakon]이다). 가령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무력화하려는 자들에 맞서 그 유령의 유산을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우리는 유령을 지켜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를 괴롭혔던/괴롭히고 있는 유령을 넘어서야 함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우리는 유령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극복해야 한다”). 발리바르 역시 『대중들의 공포』에서 지배계급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혁명 세력으로서의’ 대중들에 주목함과 동시에(“우리는 대중들의 급진성을 믿어야 한다”) 지배계급의 권력에 공포를 느껴 수동적이 되는 ‘반동 세력으로서의’ 대중들에게도 눈길을 돌린다(“우리는 대중들의 수동성을 주시해야 한다”).

어쨌거나 데리다나 발리바르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들의 연구 대상이 불러오는 아포리아를 해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포리아를 끌어안음으로써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여는 데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때맞지 않게’ 도착한 이 두 책의 조우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데리다는 당대의 정치지형 내에서 ‘타자’로 존재하고 있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끌어안음으로써 종교적인 것과 정치의 관계라는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갔고, 발리바르는 대중들의 야누스적 얼굴을 끌어안음으로써 반폭력/시민인륜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탐구하고 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때맞지 않음’을 단순한 ‘시대착오’의 일회적 에피소드로 끝낼지, ‘새로운 가능성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으로 만들지는 이제 이 두 책을 읽을 우리의 몫이다.(이재원_전문번역가)

07. 11. 18.

Жак Деррида в МосквеThe Althusserian Legacy

P.S. 두 가지 사항, 혹은 두 가지 책에 대해 덧붙이고 싶다. 먼저,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 끝자락이 겨울을 예고할 즈음인 "1990년 초, 데리다는 전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혁명의 고향인 모스크바를 방문했고"란 대목과 연관된 책은 <모스크바의 데리다>(러시아어, 1993)이다(이 책은 어쩌면 내년에 국역본이 나올 수 있다). 이 데리다 텍스트의 영역본은 'Back from Moscow, in the USSR'이란 제목으로 마크 포스터의 책 <정치학, 이론, 그리고 현대문화>(1993)에 수록돼 있다. 데리다의 텍스트는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그리고 비틀즈의 노래 'Back in the USSR'(http://www.youtube.com/watch?v=4-2LQGigK-0)을 밑텍스트로 한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한 권은 데리다와 마르크스주의, 보다 구체적으론 데리다와 (자신이 '악어'였던) 알튀세르와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가 수록된 카플란과 스프린커 편집의 <알튀세르의 유산>(1992/1993). 데리다의 이 텍스트는 언젠가 잡지 <이론>에 윤소영 교수의 번역으로 절반만 소개되었다(내가 읽은 건 그 절반이다. 마저 번역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또한 완역으로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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