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 시간에 기분을 낸답시고 서가에 있는 책을 임의로 꺼내 읽는 수가 있다. 수전 손택의 <강조해야 할 것>(시울, 2006)은 그렇게 꺼내든 것이고 예전에 조금 읽은 '시인이 쓴 산문'을 마저 읽었다(예전의 읽기는 http://blog.aladin.co.kr/mramor/867577 참조). 본래 원저의 첫장에 배치돼 있는 이 글은 러시아의 여성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1892-1941)의 산문집 서문격으로 씌어진 것이기도 하다.

시와 산문의 관계에 대한(보다 구체적으론 산문에 대한 시의 우위성에 대한) 일반론에 이어서 손택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20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한다면 특이한 종류의 산문이 발전했다는 것이다."(199쪽) 이때의 산문은 "주로 1인칭의 문장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성급하고 격정적이고 전후문맥이 생략된, 종종 일관성이 없고 문법에 어긋나는 산문을 말한다. 이런 산문은 주로 시인들이 쓴 것이다. 혹은 시적 창작 기준을 가진 작가들이 쓴 것이다."(200쪽)

어떤 시인들에게 있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을 하는 것이고 전혀 다른 목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엘리엇과 오든, 파즈 등의 비평과 저널적인 문화론 등은 아무리 뛰어난 글들이라 하더라도 '시인의 산문'(시인이 쓴 산문)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손택을 말한다. 하지만 이와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만델슈탐(1891-1938)과 츠베타예바의 산문이라고 그녀는 본다. 그들의 글이야말로 전형적인 '시인의 산문'이라는 것이다(두 시인의 시집들만이 예전에 번역/소개된 바 있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20세기 러시아시의 거장들이면서 또한 산문의 대가들이다. 스탈린시기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도 공통적이다). '시인의 산문'은 뭐가 특별한가?

"시인이 쓴 산문에는 특유의 열정과 농밀함, 시적 정신이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해 시인의 산문에서만 볼 수 있는 주제도 있다. 그것은 바로 시인으로서의 사명감이다." 때문에 "시인의 산문은 전형적으로 두 가지 형태의 서사 구조를 취한다. 하나는 회고록의 형태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이다."

(1)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 "자신이 모델로 삼는 사람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그들과의 결정적 만남의 순간(실생활에서든 문학작품 속에서든)을 환기하는 과정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자아를 판단하는 기준을 마련"한다.

(2)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산문은 주로 시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서전에서 묘사하고 있는 자아는 바로 시인의 자아이며, 일상의 자아는 가차 없이 희생된다. 시인의 자아야말로 진정한 자아이며, 다른 자아는 시인의 자아를 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시인의 자아가 죽으면 그 시인도 죽는다."

아직 그녀의 산문이 한권도 소개되지 않은 상태라 자세히 늘어놓기는 멋쩍은데 아무튼 1939년 망명에서 돌아온 그녀가 1941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 정도는 명기해둔다. 손택은 이렇게 적었다: "하지만 이런 애수어린 어조는 단지 추방이라는 츠베타예바의 개인적인 비극 때문만은 아니다. 1939년 소련으로 돌아오기까지(그후 1941년 8월, 그녀는 영원한 내면적 추방이라 할 수 있는 자살을 한다)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지독한 궁핍과 고독 때문만도 아니었다. 시인은 산문을 통해 늘 자신의 잃어버린 낙원에 대해 애도한다. 추억이 스스로 말하게 하거나 아니면 흐느껴 우는 것이다."(202쪽)

그러니까 손택이 보기에 츠베타예바의 산문에 나타나는 비가(엘레지)적 정조는 그녀의 개인사와 무관하게 '시인의 산문'이 갖는 본질적인 속성이다. 다소 유감스러운 것은 이런 내용을 따라가는 데 부정확한 번역이 눈에 거슬린다는 점. 인용문에서 괄호안에 들어간 문장은 "where, now an internal exile, she committed suicide in August 1941"을 옮긴 것인데, 역자가 '자살'의 등가어로 읽은 '영원한 내면적 추방'은 츠베타예바에 대한 규정이다. 물론 'an internal exile'은 '영원한 내면적 추방'이 아니라 '내적 망명자'를 뜻한다(파스테르나크 또한 그런 '내적 망명자'였다). 다시 옮기면, "소련에서 이젠 '내적 망명자'가 된 그녀는 1941년 8월에 자살했다." 아래는 1939년의 츠베타예바.  

 

츠베타예바에게 "시인이 된다는 것은 고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츠베타예바는 '가장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녀의 산문에서는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정적으로 고양된 분위기를 창아볼 수 있다. 어떤 현대 작가도 그녀처럼 자신의 감정을 숭고에 가깝게 경험한 사람은 없다."(203쪽) 마지막 문장은 "no modern writer takes one as close to an experience of sublimity."를 옮긴 것인데, 어디에서 "그녀처럼 자신의 감정을 숭고에 가깝게 경험한 사람"이란 번역이 나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따라서 마지막 인용에 대한 결정적인 오역은 이미 예비된 것이기도 하다.

"츠베타예바는 이렇게 지적한다. '누구도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그지는 못한다. 하지만 같은 책에 발을 두 번 담근 사람은 있지 않은가?'"

풀어서 얘기하면,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그지는 못하지만 책에는 발을 두 번 담근 사람이 있다? 이 '어이없는' 오역 때문에 여기저기 검색을 하느라 손품을 팔았다. 원문은 "As Tsvetaeva points out, 'No one has stepped twice into the same river. But did anyone ever step twice into the same book?'"이고, 원문에는 출처가 따로 밝혀져 있지 않지만 '푸슈킨과 푸가초프'라는 유명한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시인이 어릴 때 푸슈킨의 <대위의 딸>을 읽던 기억을 떠올리며 쓴 글이다. 푸슈킨은 대개의 러시아 시인들에게처럼 츠베타예바에게도 우상이었다). '푸슈킨과 푸가초프'는 츠베타예바의 산문집 <나의 푸슈킨>에 수록돼 있다.  

Марина Цветаева Мой Пушкин 

오역한 문장의 문맥은 이렇다: "There are books so alive that you’re always afraid that while you weren’t reading, the book has gone and changed, has shifted like a river; while you went on living, it went on living too, and like a river moved on and moved away. No one has stepped twice into the same river. But did anyone ever step twice into the same book?"

츠베타예바의 경구로 자주 인용되기도 하는 단락인데 러시아어 원문도 참작하여 우리말로 옮겨보면, "모든 책은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책을 읽지 않는 동안 책이 마치 강물처럼 사라지거나 달라지지 않을까 혹은 흘러가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책 또한 살아가며, 강물처럼 흐르고 또 흘러간다. 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하지만 같은 책에 두 번 발을 담근 사람은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요는 책 또한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우리는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같은 책'이란 없어요...

07.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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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23 03:52   좋아요 0 | URL
번역에 대한 명쾌한 지적 잘 읽었습니다. 이래서 더욱 번역본 사기가 저어된다는...ㅠㅠ
츠베타예바의 산문집 영역본은 일전에 올려주신 "A Captive Spirit"이 괜찮은가요? 한 번 읽어보고 싶어서 여쭤봅니다.^^
(왜 아직까지 러시아어를 배우지 못했던가, 이럴 때 가끔씩 후회가 됩니다...)

로쟈 2007-12-23 11:01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 없는 책이이서 'A Captive Spirit'은 아직 못 구했습니다. 영역본이야 제가 판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죠(대개 저보다는 러시아어를 월등히 잘하는 양반들이 번역을 하니까). 러시아어까지 하시면 음악은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