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회익 교수의 자서전 <공부도둑>(생각의나무, 2008)가 지난주에 출간됐고 북리뷰들에서도 많이 다루어졌다(인터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81347.html 참조). 개인적으론 대담집 <이분법을 넘어서>(한길사, 2007)를 읽고서야 '온생명' 등의 개념과 그의 과학사상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좀 딱딱하다고 생각했지만 은근히 유머러스한 문체를 구사한다는 것도 알게 됐고. 그 점은 <공부도둑>의 첫장만 넘겨보아도 알 수 있다. '공부(도둑)질'에 흥미가 있는 독자라면 필독서이다. 겸사겸사 독서 리스트도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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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둑- 한 공부꾼의 자기 이야기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4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8년 04월 13일에 저장
구판절판
이분법을 넘어서- 물리학자 장회익과 철학자 최종덕의 통합적 사고를 향한 대화
장회익.최종덕 지음 / 한길사 / 2007년 12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4월 13일에 저장

삶과 온생명
장회익 / 솔출판사 / 1998년 8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08년 04월 13일에 저장
절판
온생명에 대하여- 장회익의 온생명과 그 비판자들, 과학과 철학 제14집
과학사상연구회 지음 / 통나무 / 2003년 12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4월 13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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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소녀시대>(마음산책, 2006)의 저자 요네하라 마리의 소설 <올가 모리소브나의 반어법>(2003)이 근간될 예정이다. 러시아어 고유명사의 교정 일 때문에 원고를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가령 '올리가 몰리소브나'를 '올가 모리소브나'로 고치는 일이 그 '교정'이다), 부록으로 실린 대담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어서 미리 옮겨놓는다. 한번쯤 음미해볼 만하다. 대담자인 이케자와 나츠키는 <이라크의 작은 다리를 건너서>(달궁, 2003)의 저자다.   

■ 사회주의는 인간을 상품화하지 않는다

이케자와 ‘사회주의’라는 말은 이제 시들해진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역시 저는 젊었을 때 사회주의를 믿었고 이상주의의 깃발로서 사회주의는 분명이 있었어요. 이 책에서는 그것을 단점도 포함해서 자세히 쓰고 있어요. 예를 들면, 알제리에서 온 아이가 자신의 나라가 해방되어 식민지에서 벗어나게 되어 돌아가잖아요. 식민지로부터의 탈피라든가, ‘자유’와 ‘해방’이라는 말이 이렇게 빛을 내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요네하라 최근 이라크의 전쟁 상황이 좋지 않고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는 일이 많아진 미국의 백악관에서 그 옛날, 프랑스에서 상영금지가 되었던 <알제리 전투>가 상영되었다고 하는데, 그 <알제리 전투> 영화를 보면 언제나 알제리의 알렉스를 떠올립니다. 영화 마지막에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획득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때 프라하의 학교에서 기뻐했던 일이 떠올라요. 베네수엘라의 게릴라의 아들은 부모님과 귀국한 뒤 바로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소리 내어 울었어요. 소련이라는 나라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요. 하지만 지금과 같은 미국의 일원적 지배가 아니라 그것에 대항하는 존재가 있음으로써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나 지역, 운동체가 아주 활발하게 활동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이 이상한 짓을 하면 소련이 뭐라고 하고, 소련이 이상한 짓을 하면 미국이 뭐라고 하는 냉전시대는 지금과 비교하면 아주 좋은 면도 있던 것 같습니다.

이케자와 적어도 자본주의적인,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는 것을 체크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구조라는 것은 기능하고 있던 거죠. 점점 무너졌지만요.

요네하라 그리고 예를 들면, 발레같은 예술이 서방으로 가면 상품이 되어버리죠. 상품이 되어 교태를 부리며 망가져 가요. 소련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리고 재능에 대한 오해와 질투가 거의 없었어요. 세계 최고의 첼로 연주가라는 로스트로포비치의 통역을 한 적이 수차례 있는데, 그가 망명한지 16년이 되었을 때, 죽어도 좋으니까 러시아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는 콘서트가 끝난 뒤 보드카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우는 겁니다. 러시아에 있는 동안은 재능이 있다는 것만으로 모두가 좋아하고 지지해줬는데, 서방으로 온 순간, 엄청난 방해와 질투가 있고, 자신은 이러한 세상을 몰랐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재능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늘이 준 것이죠.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 들어가서 자신은 별로 연습하지 않는데도 아주 잘 켜고,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도 자신보다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거라면 그것은 자신의 것이지만 이것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기에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인 거죠.

이케자와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나요?

요네하라 모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프라하의 학창시절을 떠올렸는데, 노래나 그림이 뛰어난 아이가 있으면, 선생님들이 당신들 일인 양 호들갑스럽게 기뻐하고 학생들도 그 아이와 똑같은 교실에서 똑같은 공기로 숨을 쉬는 것만으로 아주 행복해지거든요. 열등감을 갖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의 재능을 아주 기뻐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 느낌이 일본으로 돌아온 순간 없어졌어요. 종이에 써진 시험지로 모두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잖아요. 객관식이나 ○×로, 누가 대답을 해도 똑같은 답이 되요. 자신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자각을 갖지 않도록, 절대 갖지 않도록 일본의 교육은 만들어져 있어요. 기계도 채점할 수 있는 시험을 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실은 개개인이 모두 다르니까 그것을 발견해주는 것은 선생님과 반 학생들의 역할이죠.

이케자와 하긴 그것이 이 나라의 답답한 점이죠. 경쟁사회가 지닌, 사람이 자로 측정된다는 전제의 답답함. 모두 숫자로 바뀌어 버리죠….

요네하라 사람을 상품으로 생각하지 않는 점이 사회주의의 좋은 점 같습니다.

갑자기 왜 이 대목이 생각이 났나 짚어보니 아침에 읽은 서경식 교수의 칼럼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의 눈'에 연재된 '인간의 ‘기계화’에 저항하기 위하여'(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1276.html)에서 필자는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북스, 2007)의 서문을 한번 더 떠올리고 있는데, 아래의 대목이다.

“… ‘기계화’ ‘야만화’의 추진력은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적인 경쟁원리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원리가 관철되는 사회에서는 학력이 살아남기와 사회적 상승의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경향에 작금의 신자유주의적인 조류가 박차를 가하고 있다. 모든 업적을 수치화하고 단기간에 평가하며, 그것으로 불합격 낙인이 찍힌 사람은 무자비하게 낙오당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원칙이다. 이것은 일본 사회만의 현상이 아니라 아마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 책이 한국의 독자에게 읽히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을 ‘기계화’하고 ‘야만화’하는 추세에 대한 저항을 꾀하는 것이므로. … 한국 국민은 어떨까? 한국에서는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시민혁명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일본과는 다르다고 나의 한국 지인들은 말한다. 그러기를 바라지만 과연 안심해도 괜찮을까? 한국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통한 인간의 ‘기계화’ ‘야만화’로 발밑의 대지가 급속히 무너져내리고 있는 게 아닐까.”

요네하라 여사의 발언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목은 "기계도 채점할 수 있는 시험을 보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알다시피 지난달에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전국단위 일제고사가 치러졌는데, 그 또한 기계로 채점하는 시험이었을 것이다. 이미 OMR 카드 등을 이용한 시험에 익숙해져 있어서 나부터도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못했는데, 생각해보면 그게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은 일이다! 편의상으로나 여러 가지 사정상 그게 불가피하다 치더라도 그에 대한 문제의식마저 상실한다는 것은 얼마나 '교양 없는' 일인가. 아이의 시험성적에 일희일비하는 대다수 학부모들이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무엇이 진짜 교육인가에 대해서...

08. 04. 13.

P.S. 책은 <올가의 반어법>(마음산책, 2008)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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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13 22:20   좋아요 0 | URL
서경식 씨가 얼마 전 한국은 이제 민주화 경력이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며 개탄하던데...참..착잡하더군요.요네하라 마리 여사의 '대단한 책'은 정말 대단하던데요.역시 동유럽이나 구 소련 권에 대한 책들에 대한 좋은 정보가 많아서 좋더라구요.로스트로포비치의 회고는 경청할 만하네요.대체로 망명한 공산권 예술가나 지식인... 하면 뭔가 공산권을 비난할 건수가 없나 하고 그런 식으로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데...로자 님이 요네하라 여사의 책의 교정을 보게 되었군요.그런데 이 분은 좀 일찍 저 세상에 가셨더군요.아직 한참 일할 나이인데...

로쟈 2008-04-13 22:27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좀 애석한 일입니다...

사량 2008-04-15 12:59   좋아요 0 | URL
'집값'과 '자녀의 학벌'에 미쳐 있는 이 나라 "대다수 학부모들이 한번쯤 생각해볼"지 의심스럽습니다. -_-;

로쟈 2008-04-15 21:42   좋아요 0 | URL
자녀들을 정말 사랑한다면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죠...
 

'오래된 새책'이란 카테고리는 재출간된 책들을 위한 것인데, 요즘 부쩍 이에 해당하는 책이 많아졌다. 묻혀 있던 양서들이 다시 빛을 보거나 부실한 모양새로 출간되었던 책이 새롭게 개정되어 나오는 건 언제라도 환영이다. 다만 재출간이 무슨 '원죄'라도 되는 듯이 '몰래' 출간된다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독자에게 당연히 제시되어야 할 '정보'가 누락되는 것이기에 그렇다(보통 제목은 바뀐다. 그리고 별로 오래전 책이 아니어도 값은 뛴다). 그걸 꼬집는 기사를 옮겨놓는다(물론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책들은 '재발견'의 긍정적인 사례들이다).

경향신문(08. 04. 12) [책동네 산책]재출간 떳떳이 밝히고 재평가 당당히 받아라

전화상의 그이는 자신있게 설명했다. 한 분야만을 파고든 저자의 열정을 얘기했고, 책이 다루는 주제의 참신함을 말했다.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의 흥미로움도 강조했다. 그런데 분위기 파악 못하는 기자,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 책 예전에 나왔던 거 아닌가요?” “아, 예, 사실은….”

언제부터인가 눈에 띄는 신간이 오면 책의 맨 앞장이나 뒷장, 심지어 책날개까지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출판사에서 보내온 보도자료를 훑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하기도 한다. ‘재출간’되는 책들이 많아졌지만 그같은 사실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의도’가 느껴질 만큼 ‘교묘한 곳’에 슬며시 밝히거나 아예 밝히지 않는 경우도 많다.



재출간은 출판계의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일반적인 풍토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옛날 책을 잘 찾아라”는 말은 출판계에서 오래전부터 회자돼온 기획 원칙이다. 지난 달 경향신문을 통해서도 소개된 ‘승자독식사회’(웅진지식하우스)도 1997년 ‘이기는 자가 전부 가지는 사회’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책이다.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로버트 프랭크가 ‘이코노믹 씽킹’ 등을 통해 유명세를 탄 데다, 책의 내용이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 더 맞는다는 생각에 재출간했다는 게 출판사 측의 설명이다. 이 책은 출간 한 달 만에 1만부 가까이 팔리면서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절판된 책도 잘만 고르면 웬만한 신간보다 나은 경우가 심심찮다. 해서 소규모 출판사들이 ‘틈새 전략’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구간은 저작권료가 싸다. 눈만 밝으면 좋은 책을 싼 값에 낼 수 있다는 소리다. 지난해 황소자리에서 출간한 ‘욕망하는 식물’은 2002년 ‘욕망의 식물학’으로 소개됐던 것을 새롭게 번역한 책이다. 이 출판사의 첫 책인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도 다시 낸 책이다.

재출간은 여러 이유로 아깝게 묻혔던 책을 ‘재발견’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래서 ‘리메이크’니 ‘리바이벌’이니 하면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겉만 화려하게 바꿔 내놓고 그같은 말을 쓰는 건 쑥스러운 일이다. “재출간이 콘텐츠에 공을 들이는 대신 이미 검증된 책을 시기에 맞게 적당히 포장하는 식으로만 가고 있다”는 한 출판인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책만 좋으면 됐지 그게 대수냐고 할지 모르겠다. 앞서 말한 기자의 ‘버릇’으로 돌아가보자. 그것이 ‘재출간된 책은 소개하지 않는다’라는 대단한 원칙 때문에 생긴 건 아니다. 출판사에 ‘낚였다’는 느낌도 부차적인 문제다. 적어도 책에 대한 기본 정보는 독자들에게 정확히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이중으로 책을 살 수도 있으니까.

아니, 그런 노파심까지 필요없다. 출판사가 재출간 사실을 밝히는 건 독자에 대한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키는 일이다. 출판사가 어떤 부분에 공을 들여 ‘재출간’했는지를 당당히 밝히고 ‘품질’로 승부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재출간된 책도 제대로 평가받는 풍토가 정착될 것이기에.(김진우기자)

08. 04. 12.

P.S. 독자가 '이중'으로 책을 살 우려는 '중복출판'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루소의 <에밀> 같은 고전이야 같은 출판사에서 <에밀>(한길사, 2003), <에밀 또는 교육론>(한길사, 2007)이라고 중복 출판되어도 역자가 다르고 또 '고전'이기 때문에 독자가 취향에 따라 읽을 수도 읽고 아예 비교해가면서 두 권을 같이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식투자의 심리학> 같은 책도 그러할까? "20세기 초엽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활약한 전설적인 투자분석가이자 저술가"인 조지 셀든의 이 책은 나름 '고전'이라고 하지만 '투자'를 위해서 두 번역본을 비교해가면 읽을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역본은 <주식투자의 심리학>(휴먼&북스, 2006), <주식시장의 심리학>(서울출판미디어, 2007)이라고 각기 다른 제목으로 출간된 데다가, (인터넷서점들에서) 저자가 '조지 C 셀든'과 'G. C. 셀든'이라고 돼 있어서(두 명의 저자로 처리된다!) 주의하지 않으면 두 명의 저자가 쓴 두 권의 책으로 착각하기 쉽다. 출판사들에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전략을 쓰더라도 서점에서는 해당 도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독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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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4-14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비셰프>는 참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었는데 재출간인지는 잘 몰랐네요. 당연한 말이지만, 기자의 마지막 결론에 동감을 표합니다. 그나저나 제 주요 관심 분야는 아니지만, <주식투자의 심리학> 번역과 <주식시장의 심리학> 번역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궁금해지는군요.

로쟈 2008-04-14 23:55   좋아요 0 | URL
저도 비교/검토해볼까란 생각을 잠시 가졌었지만, '2차'를 당할까봐(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그만두었습니다.^^;
 

이번주에도 주목할 만한 신간들이 여러 권 된다. 개인적으론 최소한 댓 권 정도에 눈길이 간다. 하지만 모두 구할 수도 없거니와 모두 읽는 건 (적어도 당장에는) 불가능하다. 리뷰들을 챙겨두는 건 그런 '불가능'과의 타협이다(나는 흔히 오해받는 것만큼 많이 읽지도, 빨리 읽지도 않는다. 책속에 파묻혀 지내긴 하지만 '책읽을 시간'이 없는 건 마찬가지고. 다만 내가 어떤 책들을 더 읽어야 할지를 알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블리엣의 <사육과 육식>(알마, 2008)은 문화일보의 북리뷰에서 메인으로 다루어졌는데, 읽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 소개를 보니 "전문적인 연구분야는 이슬람 사회에서 동물의 역할에 대한 역사, 사회 및 제도의 역사 그리고 기술의 역사 등"이고, "특히 그의 저서 <낙타와 바퀴The Camel and the Wheel>(1975)는 동물 가축화의 역사, 기술의 역사 그리고 중동 문제 등에 대한 그의 관심 분야를 하나로 결합한 저서이다. 2005년에 출간한 <사육과 육식Hunters, Herders, and Hamburgers>은 그가 자신의 관심 분야 가운데 하나였던 동물 가축화의 역사로 회귀, 이를 심도있게 분석한 저서이다." 새로운 분야, 새로운 저자와의 만남은 언제나 자극과 즐거움을 준다(경제적 고통과 함께!)...

문화일보(08. 04. 11) 인간은 왜 ‘육식의 낙원’에서 추방당했나

책의 원제목은 ‘사냥꾼, 목축업자, 그리고 햄버거-인간과 동물 관계의 과거와 미래’이다. 원래 중동문제 전문가며 역사학자인 저자(컬럼비아대 역사학과 교수)는 이슬람 사회에서 동물의 역할에 대한 역사 등을 연구해왔는데, 2005년에 출간한 이 책에서 동물 가축화의 역사와 그에 따른 인간의 변화를 인류학과 고고학, 동물학, 환경주의, 철학 등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그려낸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개념은 ‘사육시대’(domesticity)와 ‘후기사육시대’(postdomesticity)라는, 저자가 제안하는 시대구분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육시대는 (애완동물이 아닌) 가축과 대다수 가족 구성원이 날마다 접촉하면서 살아가는 사회적·경제적·지적 공동체를 특징”으로 한다. 이 시대는 그다지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대다수 미국인들의 지나간 한 세대 터울 정도이고, 대개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오늘날의 현실이기도 한 농경생활을 의미한다.



예컨대 우리의 경우도 40대 중반 이후 세대라면, 작은 도회에 살았더라도 동네에서 소나 돼지를 잡는 것을 본 경험들이 드물지 않다. 닭 정도는 집의 할머니나 어머니들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잡았으며, 그런 장면을 보며 특별히 ‘끔찍하다’는 느낌이 남아있기보다는 ‘도축’ 이후의 ‘고기맛’이 더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소나 돼지의 교미는 농촌에서 자란 사람이면 쫓아가서 보기도 했고, 동네 개들의 흘레야 심심찮게 등장했던 장면이었다. 즉 이같은 사육시대에는 가축의 도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축산물을 소비하는데 윤리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후기사육시대가 되면서 상황이 바뀐다고 저자는 말한다. 거리에서 동물을 마주칠 일도 없고, 동물은 인간의 삶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 시대는 두 가지 특징을 갖는데, 먼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존하고 있는 식량(고기나 우유 등), 직물, 가죽을 제공하는 동물과 물리적·심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살아가므로 그런 동물의 출산, 교미, 도살 과정을 본 경험”이 없다. 동물의 시체는 부위별로 해체돼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슈퍼에서 포장돼 상품으로 팔린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흔히 애완동물과는 가족과 같은 관계를 유지한다.

둘째로, 후기사육시대는 그 이전 시대보다 더 풍부하게 동물이 제공하는 제품을 소비하면서도, “심리적으로는 사육된 동물이 제품으로 바뀌는 산업적인 과정과 이런 산물이 시장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서 (좀처럼 생각하지는 않지만) 죄의식, 수치심, 역겨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특히 육류소비가 많은 서구인들은 고기, 동물가죽, 실험동물을 거부하지 못하면서도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예컨대 비육우로 키우기 위해 소나 돼지를 가두어 놓거나, 호르몬이나 항생제의 대량 주입, 무자비한 도살 등-과정에 대해서는 반발하는 정서적인 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동물이 사라지자 역설적으로 동물해방을 논하고, 육식에 불편함을 느끼며, 윤리적 불안을 나타낸다. 애완동물을 아끼고, 환경론 차원에서 야생동물에 대해 긍정적인 정서를 가지면서도, 가축에 대해서는 윤리적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 정서적 모순이 현대인들에게 “‘섹스’와 ‘피’에의 경도”라는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색다른 주장을 편다. 저자는 특히 거대한 포르노와 영화산업을 예로들며, “섹스와 피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미국문화에서 ‘전통적’ 가치가 부활하고 있음에도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 습관적으로 포르노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미국인의 수는 대략 2500만명 이상이며, 전 세계적으로 포르노에 소비되는 비용은 570억달러에 육박한다. 할리우드뿐 아니라 대다수 국가의 영화는 갈수록 잔인한 묘사(피)의 경쟁을 벌인다.



저자는 그 이유를 “생산적인 사육동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사라짐에 따라” 생겨난 현상으로 진단한다. 섹스와 피(사냥에의 욕망)는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였다. 사육시대에는 앞서 말한 대로 동물의 교미와 도살 과정 등을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으나, 후기사육시대로 오면서, 곧 동물과의 접촉이 사라지거나 감춰지면서 섹스와 살육은 ‘실제’에서 ‘환상’의 차원, 무의식의 차원으로 넘어가버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행동하는 대신 환상으로 대체하는 이런 현상은 유혈과 성교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을 사춘기까지 억지로 지연시키다보니 필연적으로 초래된 부분이다.”

사육동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의 사라짐은 다시 농장동물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동물들을 인간화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으로 이어졌으며, 채식주의와 동물인권보호운동 등도 이런 욕망에서 파생된 도덕적 책임감의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동물을 도구화하기 시작한 사육시대 이전, 곧 전기사육시대(predomesticity)에서 인간-동물관계의 회복의 실마리를 찾는 것 같다. 이 시대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모호했던 시기, 동물에서 신성을, 신에게서 수성(獸性)을 발견한 시기다. 인간은 사냥을 했지만 동시에 토템으로 숭배하고 동물의 정령을 믿었다. 사육시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은 동물을 철저히 대상화시켰다.

저자는 이같은 인간-동물관계의 회복을 물고기는 먹어도 육류섭취가 적은 일본의 전통적 ‘동물관’에서 찾는다. 그러면서 일본이 개고기를 먹는 한국과는 상당히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우리로선 다소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엄주엽기자)

08. 0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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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세곰 2008-04-12 22:49   좋아요 0 | URL
일본의 어류섭취만큼 우리가 개고기를 섭취하는 상황인가요? 그걸 문화적 차이를 알게 해주는 하나의 요소라 생각하다니... 그럴듯하다 싶으며 따라와 읽었는데 마지막에서 화~악 깨네요

로쟈 2008-04-12 22:57   좋아요 0 | URL
저자가 이슬람 전문가라서.^^;

노이에자이트 2008-04-12 23:48   좋아요 0 | URL
스너프 필름 사진...너무 섬뜩해요.임산부,노약자 관람금지..

로쟈 2008-04-13 00:39   좋아요 0 | URL
한데 '도살'이나 '도축'의 섬뜩함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스너프 필름을 즐긴다는 거니까 아이러니컬한 일이지요...

다락방 2008-04-18 10:20   좋아요 0 | URL
아, 저건 제가 본영화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네요. 거기서 엠마가 돼지 잡는 장면이 나오죠. 입을 맞추며 돼지를 잡고, 자신이 잡은 돼지를 먹는장면을 보고 깜짝놀랐었어요. 그래도 나름 돼지를 평안하게 죽이기는 하던데 말이지요.

그렇다가 제가 육식을 끊었다거나 하진 않습니다만. OTL

로쟈 2008-04-18 13:58   좋아요 0 | URL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돼지 잡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읽었습니다. 그런 '도살'의 경험이 없어서 섹스와 피에 경도된다고 하니 흥미로운 주장이긴 합니다...

식신 2008-04-18 17:36   좋아요 0 | URL
"'책읽을 시간'이 없는 건 마찬가지고. 다만 내가 어떤 책들을 더 읽어야 할지를 알고 있을 뿐이다." 멋진 말입니다. 종종 들러 좋은 글 읽고 갑니다.^^
 

그리스 작가 카잔차키스의 전집이 출간됐다. 이미 지난주부터 소식은 접하고 있었는데, 리뷰기사들은 이번주에 올라오고 있다. 예전에 고려원에서 한번 선집이 출간된 바 있지만(나도 두세 권 갖고 있다) 30권 규모로까지 새로 나올 줄은 몰랐다. 여하튼 그의 독자들에겐 반갑고 즐거운 일이겠다. 한 소개기사에 인용된 영국 소설가 콜린 윌슨에 따르면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다. "그의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이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당장은 그의 <러시아기행>부터 읽고 싶어진다!). 한겨레의 기사가 가장 자세하기에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4. 12)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나는 평생 위대한 영웅적 인물들의 영향을 받았다. 어쩌다가 영웅성과 성스러움을 겸비한 인물이 나타난다면, 그는 인간의 본보기였다. 영웅이나 성자가 될 능력이 없었던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내 무능함에 대한 위안을 조금이나마 얻으려고 시도했다.”

이 고백 그대로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는 영웅이 되기에는 너무 문학적이었고, 성자가 되기에는 너무 세속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글을 씀으로써 성자의 형상을 창조했고, 우리 시대의 영웅을 그려냈다. 그의 글쓰기는 말하자면, 우리를 성스러움 가까운 곳으로 이끌려는 영웅적인 투쟁이었고, 영웅을 살아 있는 존재로 빚어내려는 성스러운 분투였다.

<그리스인 조르바> <영혼의 자서전>의 작가 카잔차키스의 전집이 열린책들에서 나왔다. 대학생 시절에 쓴 소설에서부터 최후에 쓴 작품까지 소설ㆍ희곡ㆍ서사시ㆍ여행기ㆍ편지가 모두 30권으로 묶였다. 전집 가운데 상당수는 과거에 낱권으로 번역된 바 있지만, 그의 모든 작품을 번역해 모은 전집 출간은 이번이 처음이다. 20세기 세계 문학사의 거인이자 현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작가의 문학적 성취를 통째로 살필 수 있는 기회가 온 셈이다.

1883년 그리스 남부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카잔차키스는 자신이 아랍계 아버지의 ‘불’과 그리스계 어머니의 ‘흙’을 동시에 이어받았다고 만년의 자서전에 썼다. 해적의 후예였던 아버지는 남성성ㆍ투쟁성ㆍ에너지의 화신이었고, 농부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온화함ㆍ선량함ㆍ내향성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아버지의 불과 어머니의 흙은 그의 피 속에 섞여 평생을 두고 불화하고 적대했다. “나는 타협이 불가능한 요소를 타협시키는 것이 하나뿐인 내 의무라고 느꼈다. (…) 그것은 벅차고 끝없는 의무다.”

터키의 지배 아래 있던 크레타의 정치적 상황은 카잔차키스의 삶에 또 하나의 의무, 정치적 자유를 향한 투쟁의 의무를 얹어주었다. “내 영혼을 처음으로 뒤흔든 것은 자유에 대한 열망이었다.” 크레타인들의 해방 투쟁의 기억은 뒷날 소설 <미할리스 대장>으로 열매를 맺었다. 벌써 어린 나이에 자유의 소중함을 느꼈던 카잔차키스는 청소년기에 좀더 넓은 세상과 만나게 되면서 크레타의 경계를 넘어선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크레타만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영원한 특징이었다.”

카잔차키스의 자유의지가 지닌 유별난 성격은 정치적 자유와 내면적 자유가 언제나 이원적으로 공존하고 길항한다는 데 있다. ‘영혼의 작가’라는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카잔차키스는 정치적 행동주의자로서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으며, 러시아 혁명 지도자 레닌을 찬양하는 글을 썼고, 후년에는 그리스 사회당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정치 상황이 불리해지자 국외로 망명하기도 했다. 자유를 향한 그의 목마름은 끝없는 여행으로도 나타났는데, 지중해에서부터 극동의 일본까지 세계 거의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그 결과가 <스페인 기행> <러시아 기행> <영국 기행> <일본ㆍ중국 기행> 같은 여러 권의 여행기로 남았다.

동시에 그는 일찍부터 성자의 삶에 이끌려 성지를 순례하고 금욕적 고행에 몸을 내맡기기도 했다. 성자는 그에게 곧 정신의 영웅이었는데, 붓다와 예수, 그리고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이 그런 존재였다. 희곡 <붓다>와 소설 <성자 프란체스코>는 성자의 삶과 하나가 되려는 내면의 열망이 낳은 작품이다. 뒷날 그는 예수를 살과 피를 지닌 존재로 형상화한 <최후의 유혹>을 썼는데, 두 아내를 거느린, 번뇌하고 갈등하는 인간으로 그렸다는 점 때문에 교회의 격렬한 비난을 샀고 바티칸의 금서 목록에 올랐다.


요컨대, 카잔차키스는 끝없는 모험 속에 자신을 풀어놓은 사람이었다. 자유의 땅을 향한 위태로운 항해가 그의 삶이었다. 그 삶을 신화에 빗댄다면 오디세우스의 방랑이 될 터인데, 그런 삶의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서사시 <오디세이아>다. <오디세이아>는 “모두 3만3333행으로 이루어진 웅대한 대서사시이자 카잔차키스 일생에 걸친 가장 장엄한 문학적 업적”이라 할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자유의 투사가 가장 생생하고도 도전적인 문체로 그려낸 <그리스인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모순적 열정이 만개한 작품이다. 1917년 만나 한동안 같이 생활했던 실존 인물 조르바에 대해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썼다. “내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면 나는 아마 호메로스와 붓다와 니체와 베르그송과 조르바를 꼽으리라.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삶의 길잡이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주어졌다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으리라. 그 까닭은 글쓰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을 그가 갖추었으니, 화살처럼 허공에서 힘을 포착하는 원시적인 관찰력과, 아침마다 다시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과, 영혼보다 우월한 힘을 내면에 지닌 듯 자신의 영혼을 멋대로 조종하는 대담성과, 결정적 순간마다 인간의 배 속보다도 더 깊고 깊은 샘에서 쏟아져 나오는 야수적인 웃음을 그가 지녔기 때문이었다.”

조르바에 대한 서술에는 젊은 시절 그가 광포하게 빠져들었던 니체의 이미지가 어른거린다. 그는 니체를 처음 읽던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처음에 그는 나를 완전히 공포로 몰아넣었다. 나는 그의 격렬함과 자부심에 비틀거렸고, 위기에 도취했으며, 마치 굶주린 맹수와 어지러운 난초들이 가득 찬 시끄러운 밀림으로 들어가듯, 두려움과 열망을 느끼며 그의 작품에 탐닉했다.”


그는 삶의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았고, 그 심연과 싸웠다. 그 싸움을 영혼과 육체의 싸움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나의 내면에는 인간 존재 이전의 ‘악한 자’가 지닌 어두운 태곳적 힘이 존재했고, 또한 인간 존재 이전의 신이 지닌 밝은 힘도 존재했는데, 내 영혼은 이 두 군대가 만나 싸우는 격전장이었다. 고뇌는 격렬했다. 나는 내 육체를 사랑해서 그것이 사멸하지 않기를 바랐고, 영혼을 사랑해서 그것이 썩지 않기를 바랐다.” 그 힘겨운 싸움이 삶을, 문학을 살찌웠을 것이다. 그는 말한다. “영혼과 육체가 강할수록 투쟁은 그만큼 수확이 많고, 최후의 조화는 더욱 풍요롭다. 신은 나약한 영혼이나 흐물흐물한 육체를 사랑하지 않는다. 정신은 힘차고 저항력이 넘치는 육체와 씨름하기를 바란다.”

1957년 사회주의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카잔차키스는 쇠약해진 몸에 독감의 습격을 받고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생전에 써 놓은 그의 묘비명은 이랬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고명섭기자)

08. 04. 11.

P.S.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1964)에 나오는 유명한 댄스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ndPJRh_K2yc 에서 볼 수 있다. 아래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러시아어판이다.

Никос Казандзакис Грек Зорба Zorba the Gr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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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2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4-12 11:15   좋아요 0 | URL
대우가 썩 좋지는 않다고 들었는데요.^^;

stella.K 2008-04-12 11:01   좋아요 0 | URL
이 사람은 우리나라에선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의 이름에 가리워져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군요.
희랍인 조르바는 영화로 봤는데 지금 생각해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안소니 홉킨스(맞나? 갑자기 자신없어짐>.<;;)연기는 참 훌륭했죠.
하드카바 같은데 낱권이 비교적 저렴하게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8-04-12 11:16   좋아요 0 | URL
안소니 퀸이죠.^^

stella.K 2008-04-12 12:35   좋아요 0 | URL
앗, 맞다! 순간 헷갈렸다는...>.<;;

로쟈 2008-04-12 23:07   좋아요 0 | URL
안소니 퀸은 자서전도 번역돼 있습니다. <원 맨 탱고>라고...

노이에자이트 2008-04-12 22:41   좋아요 0 | URL
저는 조르바는 그다지 감명 깊지 않았고...'전쟁과 신부'가 좋더라구요.2차대전 후 좌우익이 나뉘어 내전이 치열했던 당시의 그리스. 형은 신부,동생은 좌익 빨치산으로...어쩐지 우리나라와 비슷하여 이름이나 지명만 우리나라 것으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약간 세련된 반공드라마 같은 느낌도...되게 재밌었어요.미니 시리즈로 번안해도 될 듯...

로쟈 2008-04-12 22:55   좋아요 0 | URL
강추하시는군요. 참고하겠습니다.^^

털세곰 2008-04-12 22:48   좋아요 0 | URL
<그리스인 조르바>... 고등학교때 겉멋에 쩔어 읽고 유난히 폼 쟀던 기억이^^
고등학교적 감수성을 마구 때렸던 것으로, "희고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가 일품인" 등으로 여인을 묘사하며 종종 "러시아 여인"으로 비유하곤 했는데 그것이 '러시아 기행' 덕분인지...?^^ 카잔차키스에 대한 기억의 되살림으로 러시아 기행은 읽어보고 싶네요. 지옥같은 다음 월요일의 마감만 지나가면...

로쟈 2008-04-12 22:55   좋아요 0 | URL
음, 월요일...

노이에자이트 2008-04-13 00:22   좋아요 0 | URL
실제로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은 사람보다는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읽은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요.앞의 두 작가는 이름만 유명하지 작품은 많이 안 읽히는 것 같아요.전에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우리나라에 조르바를 읽은 이들의 동호회가 꽤 크다고 하던데요.

로쟈 2008-04-13 00:32   좋아요 0 | URL
설마요.^^ 대표작이라곤 할 수 없지만 <톨스토이 단편선>까지 고려하면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들에 속할 텐데요? 한 10년쯤 전인가, 한국이 가장 많이 읽은 외국소설이 <죄와 벌>과 <부활>이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4-13 22:38   좋아요 0 | URL
그건 방송용?이고 사실은 시드니 셸던 작품이 제일 많이 읽힌다던데요.도스토에프스키나 톨스토이의 작품 특히 장편을 읽었다면 뭔가 있어보이니까 <죄와 벌>,<부활>을 거론하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중소설 순수소설 그런 거 되게 따지잖아요.시드니 셸던 좋아하면 뭔가 지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근데 30여년 전 독서신문 조사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가 한국인이 애독하는 작가 1위던데 요즘도 그러나 봐요.여하튼 저는 톨스토이면 몰라도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보단 카잔차키스의 <전쟁과 신부>가 더 문학성도 뛰어나고 재미도 있더라구요.

로쟈 2008-04-13 22:47   좋아요 0 | URL
셀던이나 베르베르가 베스트셀러 1위였던 적이 있지만 장기적인 것은 아니었고요, 출간 종수로 보더라도 단연 톨스토이가 많이 읽힌 걸로 돼 있습니다(실상 일제때부터인지라). 도스토예프스키도 스테디셀러는 되는 거지요. 카잔차키스에 대한 선호는 대단하시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4-13 23:33   좋아요 0 | URL
작가의 지명도와는 무관하게 제가 좋아하는 작품이 좋아서요.하하하...작가의 성향 따라 반혁명주의자나 반동주의자면 뭐 어쩔 수 없다고 해도...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뭔가 칙칙하고 병적인 느낌이 들어서요.저는 반혁명주의자 중에는 아르쯔이바셰프가 좋더군요.<싸닌>...뭔가 상쾌해요.근데 카잔차키스 것 중에서 <조르바>는 별로고 그냥 <전쟁과 신부>가 좋습니다.

로쟈 2008-04-14 23:56   좋아요 0 | URL
작가에 대한 선호라기보다는 작품에 대한 선호라고 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