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쇠고기 수입조건에 대한 재협상도, 내각의 쇄신도 모두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화물연대의 파업까지 가세한 탓에 정국은 더욱 어수선하다. '불도저'란 기대치에 걸맞지 않게 정말로 '대책 없는' 정부와 마주하고 있는 탓에 '촛불' 국면 또한 당분간 해소되지 않을 듯하다(물론 국민의 '정치의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놓은 건 이명박 정부의 최대 공로다. '경제 대통령'은 아무래도 헛말이었다). 국정을 책임질 의사나 능력이 없다면 일찌감치 '사후'를 대비해야 하지 않나 싶기까지 하다. 혹 브레히트의 시집이 그럴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씨가 어떤 시들을 읽어야 할지도 친절하게 짚어주고 있다.
한겨레21(08. 06. 12) 브레히트가 대통령에게
참여정부가 물러나고 ‘오해정부’가 들어섰다는 농담을 들었다. 영어몰입 교육도 오해, 숭례문 국민모금도 오해, 언론사 성향조사도 오해, 급기야 검역주권 포기도 오해.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김소연, <마음사전>)라는 한 시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불과 100일 만에 이 정부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이해한 셈이다. 국민이 정부와의 결별을 심각하게 고민하자 이 정부는 그제야 소통 운운하면서 반성하는 척한다. 다들 알다시피 부인에게 폭력을 일삼는 남편도 술 깨고 나면 처절하게 반성은 잘하는 법이다. 이 정부는 도대체 소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심란한 마음으로 신간 시집을 뒤적였으나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다 오랜만에 브레히트의 시집을 꺼내 읽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전문)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기 전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당신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나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이제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정신을 차리고” 산다. 행여나 빗방울에 맞아 죽을까봐 두렵다는 이 엄살은 또 얼마나 애틋한가. 정부와 국민의 소통이란 이런 것이다. 당신의 말을 듣고 당신을 위해 산다.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듣는 것이고, 당신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하고 있는 ‘소통’은 정반대에 가깝다. 일방적으로 말하려 하고 오히려 국민을 바꾸려 한다.
“6월17일 인민봉기가 일어난 뒤/ 작가연맹 서기장은 스탈린가(街)에서/ 전단을 나누어주도록 했다./ 그 전단에는, 인민들이 어리석게도/ 정부의 신뢰를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오직 2배의 노동을 통해서만/ 되찾을 수 있다고 씌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하여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해결방법’ 전문)
이미 다른 칼럼에서 한 번 인용했지만 다시 옮겼다. 1953년 6월에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동독의 노동자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동독 정부의 대답이 걸작이다. ‘정부는 인민들에게 실망했다.’ 브레히트의 냉소는 더 걸작이다. ‘차라리 인민을 다시 뽑아라.’ 이명박 정부도 2 대 8로 싸우려거든 차라리 국민을 다시 뽑는 편이 낫겠다.
이 두 편의 시는 소통의 극과 극을 보여준다. 앞의 시는 “아침저녁으로” 곱씹어야 할 진정한 소통의 방법을, 뒤의 시는 실로 간단하기 짝이 없는 “해결방법”을 알려준다. 이 시들을 대통령과 함께 읽고 싶다. 이 정부는 어떤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래도 감을 못 잡으실까봐 한 편 더 읽는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의심을 찬양함’에서)
그래도 안 된다면, 그래서 만약 쇠고기 문제 어물쩍 넘어가고 마침내 대운하까지 강행한다면, 그때는 이런 시.
“칠장이 히틀러는/ 말했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에게 일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갓 만든 회반죽을 한 통 가져와/ 독일 집을 새로 칠했다네./ (…) 이 신축가옥은 곧 완공됩니다!/ 그리고 구멍 난 곳과 갈라진 곳과 빠개진 곳들/ 모든 곳을 모조리 발라버렸다네./ 모든 똥덩이를 온통 발라버렸다네.// (…) 칠장이 히틀러는/ 색깔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배운 바 없어/ 그에게 정작 일할 기회가 주어지자/ 모든 것을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칠장이 히틀러의 노래’에서)
청년기에 화가를 지망했던 히틀러를 ‘칠장이 히틀러’라 조롱하고 있는 시다. 대운하 강행을 발표하는 순간 우리는 ‘칠장이 히틀러’를 ‘불도저 이명박’으로 바꿔 읽으려 한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20세기 최악의 정치인과 비교하는 사태가 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8. 06. 15.
P.S. 스탈린주의자로서의 브레히트의 면모에 대해서는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의 2부 3장을 참조할 수 있다...